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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시학

지은이 / 가스통 바슐라르 | 옮긴이 / 곽광수

by Joong

공간의 시학
1판 1쇄 펴냄 - 1990년 3월 15일
1판 7쇄 펴냄 - 1997년 12월 20일
지은이 - 가스통 바슐라르
옮긴이 - 곽광수
펴낸곳 - (주)믿음사 (135-120 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에서는 시적 이미지를, 의식적인 것이든 무의식적인 것이든 작가의 생애의 한 요소, 즉 그가 경험한 어떤 것에 비추어 설명하려고 한다. 즉 여기에서 설명의 원리가 되어 있는 것은 인과성이다 ― 작가의 생애의 한 요소가 원인이 되어, 그것에 대응되는 작품의 요소, 이 경우 시적 이미지가 그 결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인과적인 설명 원리야말로, 특히 전세기 말에서 금세기 초에 걸쳐 서구의 지배적인 사조였던 실증주의에 근거를 둔 전기적 비평이 스스로를 실증적인 문학연구로,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연구로 내세우는 근거였다. 그러나 실제에 우리들 독자들이 구체적으로 하나의 문학작품, 하나의 시적 이미지에서 감동을 느낀 독서 체험을 돌이켜보면, 그 감동은 정직하게 말해 작가의 생애에 관한 지식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음을 인정해야 한다. 즉 우리들은 작가의 생애를 전혀 모르고서도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13p]


- 극단적으로 그는<이미지를 가지지 않는 상상력>의 존재를 가정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상력을 경험론적인 설명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고 오직 우리들의 정신차원에서만 가능케 함으로써, 그는 상상력을<하나의 관념철학의 근본적인 원리>로 정립시키기에 이른다. [14p]


- 이 책에서 문제되어 있는 상상력의 궁극성은 요나콤플렉스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들이 어머니의 태반 속에 있을 때에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형성된 이미지로서, 우리들이 어떤 공간에 감싸이듯이 들어 있을 때에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것은 이 요나콤플렉스 때문이다. [15p]


- 그러므로 개인의 특이한 경험적인 삶에 대해 상상력이 독자적인 것은 기실, 그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즉 상상력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마다 다른 경험적 삶의 개체성에 좌우되지 않는 독자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 우리들 각자의 경험적인 삶의 집적체로서의 個我性에 대립적인 보편적인 상상력이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 존재한다. 다만 그 보편적인 상상력이 개아적인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서 더욱 깊고 본원적인 자아를 이루고 있다고 여겨질 따름이다. 원형이란 기실 이와 같은 상상력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한결 정확히 말해 상상력의 보편적인 궁극성을 표현하는 이미지이다. 즉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상상 가운데 가장 이성적인 것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그리는 것을 나타낸다. 이로써 상상력의 작용이 보편적인 가치를 창조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고, 따라서 우리들이 한 시적 이미지를, 그것이 나 아닌 시인, 즉 타자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까닭이 이해된다. [15~16p]


- 자유로운 움직임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그 움직임의 힘으로 만든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를 연료로 하여 스스로를 불태워야 한다는 것, 즉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며, 한 마디로<스스로를 정녕, 자신의 내부에서 생성과 존재를 종합하는 동체로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란 기실 자유화이며, 이것은 달리 말해, 자유란 상황에 얽어 매이지 않은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상황에 얽어 매인 상태에서 상황 자체를 변화시킴으로써 능동적으로 쟁취되는 것이라는 것이다.[21p]


- 기표는 언어의 표면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때의 이미지는 따라서 바로 그것을 표시하는 단어의 소리 phonie자체, 글자 graphie 자체가 된다. 이른바 언어의 사물화라고 하는 것이 이 경우인데, 단순히 이미지만이 아니라 시 일반을 이렇게 보려는 로만 야콥슨을 따르자면, 시는 시적 언어로 환원되고, 시적 언어는,<그 자체로서의 傳言 message>을, 언어의<촉지되는 측면>을 두드러지게 하는 언어 기능인 시적 기능 fonction poetique에 지배되는 언어라고 한다. 그런데 시에 있어서, 언어의 사물화에서 문제되고 있는 언어 자체의 환기성을 확신으로써 알아보고, 상상력에 기반을 둔 자기의 언어 철학에 그것을 통합시켰던 사람이 또한 바슐라르이다. 그러나 바슐라르의 전체 문학 사상에 있어서 이 점은 필경 삽화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어쨌든 이상의 내용을 도식적으로 표시하면, 상징->심상으로서의 이미지->사물화된 언어로서의 이미지로 내재적인 이미지관이 변화해 왔다고 하겠다.
그런데 내재적인 문학관에서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점은, 문학의 보편적인 차원, 보편적인 가치가 捨象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학 잠품, 예술 작품이 문학 작품,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보편적인 가치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이 문학, 예술을 말할 때에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널리 훌륭하다고 알려져 있는 작품들, 즉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작품들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실제에 있어서 우리들은 문학, 예술이 보편적인 가치를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문학, 예술 작품들이 연구된 결과들을 본다면, 널리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작품들, 즉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은 평균적으로 내재적으로도 잘 짜여 있다는 판단을, 즉 내재적인 가치도 있다는 판단을 받는다. 즉 널리 훌륭하다고 하는 작품들은 내재적인 가치와 보편적인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작품들인 것이다. 그러나 내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작품들이 반드시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26~27p]


- 작품들은 두고 보자면, 그 가운데는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바로 그 사실로써, 즉 스스로를 초월하여 독자들에게 전달된다는 사실로써 내재성을 벗어나 보편성을 얻게 되는 작품들이 있으며 또 상상될 수 있다. [28p]


- 미적 가치의 경우에는 정녕 보편성의 획득 없이는 개인의 독창성이란 한낱 신기에 지나지 않게 된다. 혹은 그럴 때의 독창성은 독창성이 아니라 야릇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신의가 정신병 환자일 뿐인 사람에게 그의 치료를 위해 그리게 한 그림과, 반 고호의 걸작품과의 차이가 가기에 있을 것이다. 가치 철학자들이 말하는 가치의 두 요소 ― 욕구와 판단에서, 미적 가치에 있어서처럼 후자가 요구되는 가치의 영역은 없을 것이다. 욕구는 가치를 만드는 동력이고 판단은 가치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인데, 전자는 가치의 독창성, 주관성에 대응되고, 후자는 그것의 보편성, 객관성에 대응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가치 철학자들을 따라, 선호되는 것이 가치가 되려면 선호될 만한 것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고 말해 볼 때(전후자가 각각 위의 욕구와 판단에 대응되는 것인데), 미적 가치만큼 이 표현에 적중되는 가치는 없을 것이다.[28p]


- 어떻게 때로 아주 특이한 한 이미지가 정신 전체의 응축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또한 어떻게 한 특이한 시적 이미지의 나타남이라는 그 특이하고도 순간적인 사건이 이번에는 다른 영혼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 어떤 준비과정도 없이 ―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가? 그것도 상식의 모든 장벽들을, 변화 없는 안정에 행복스러워하는 모든 분별 있는 생각들을 넘어서서? [85p]


- 반향은 세계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여러 상이한 측면으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 반향 속에서 우리들이 시를 듣는다면, 울림속에서는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시를 말한다. 그때에 시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90p]


- J-B 퐁탈리스가 미셸 레리스를 우리들에게,<말들의 회랑을 돌아다니는 고독한 답사자>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인 것이다. 퐁탈리스의 이 표현은 독서로 체험된 말들의 단순한 충동이 돌아다니는 그 섬유 같은 언어적 공간을 잘 가리켜 보이고 있다. 개념적인 언어의 原子狀 조직은 개정의 이유와, 중심적인 응축의 힘을 요구하는 법이다. 그러나 시행은 언제나 움직임을 가지며, 이미지는 시행의 선 속에 살며시 끼어들어 상상력을 이끌고 간다. 그것은 마치 상상력이 신경섬유를 만들어 늘이는 것과도 같다. 퐁탈리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표현의 현상학을 위한 아주 확실한 지표의 하나로서 기억해 둘 만한 말이다.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 전체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 전체가 하나의 시적 이미지 안에 들어가 있다고 말함도 이젠 역설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에 전적으로 스스로를 던져 넣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지의 시적 공간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주 분명히 말해, 시적 이미지는 우리들이 직접 산(體驗) 언어에 의한 가장 단순한 경험의 하나를 가져다 준다. [97~98p]


- 상상력은 그것의 생동하는 활동에 있어서 우리들을 과거와 현실에서 동시에 떼어낸다. 그것은 미래로 열려 있는 것이다. 과거가 가르쳐 주는 현실의 기능 ― 이것을 드러내는 것은 고전적 심리학인데 ― 에 우리는, 이 또한 긍정적인 비현실의 기능 ―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앞선 저서들에서 밝히려고 노력했지만 ―을 덧붙여야 한다. 비현실의 기능쪽이 온전치 못하면, 창조적인 정신활동은 얽매이게 된다. 상상함이 없이 어찌 예견할 수 있겠는가? [106p]


- 상상력에 의해 파악된 공간은 기하학자의 측정과 숙고에 내맡겨지는 무고나한 공간으로 멈루러 있을 수 없다. 그 공간을 우리들이 사(體驗)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의 실제성에서 사는 게 아니라 우리들 상상력의 모든 편파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108p]


- 인간의 영혼을 그 심층에서 연구하는 심리학자의 일이 복잡함이 어떠한가를 가늠케 하기 위해 C.-G. 융은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생각해 보기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한 건물을 찾아내고 그것의 구조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것의 위층은 19세기에 건조된 것이고 아래층은 16세기의 것이며, 그리고 건물을 더 세밀히 조사해 본 결과는 그것이 2세기에 이루어진 탑을 개축한 것임을 보여준다. 지하실 속에서 우리는 로마시대에 이루어진 기초공사를 발견하고, 지하실 밑에는 잡동사니로 가득 찬 동굴이 하나 있는데, 그 잡동사니의 상층부에는 주석으로 만든 용구들이, 그 하층부에는 빙하시대의 동물들의 잔해들이 발견된다. 우리들의 영혼의 구조는 거의 이와 비슷할 것이다. [109p]


- 우리 집 문을 누가 와서 두드릴까?
문이 열리면 들어오고
문이 닫히면 아늑한 소루
(가) 문 밖 저쪽에선 세상은 요란해도 - 피에르 알베르 비로 Pierre Albert-Birot, 『자연의 즐거움 Les Amusements naturels』, p. 217.
[113p]


- 참된 안락이란 과거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꿈을 통해 한 개인의 과거 전체가 새 집에 와서 살게 된다.<집안의 수호신을 옮겨간다>라는 옛말은 수많은 다른 표현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몽상은 깊어져서, 집의 몽상가에게는 가장 오래된 기억마저도 넘어서는 태고적 과거의 한 영역이 열려진다. 이 책의 여기저기에서 집은 불과 물과 마찬가지로 우리로 하여금 추억과, 추억을 넘어서는 태고의 종합을 밝혀보이는 어렴풋한 몽상의 빛을 환기하게 할 것이다. 그 먼 영역에서는 기억과 상상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 둘은 서로를 심화하는 데 힘을 모은다. 그 둘은 가치의 영역에서 추억과 이미지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이리하여 집은 단순히 그날그날 우리들의 역사의 흐름을 따라, 우리들의 역사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지는 것만은 아니다. 꿈을 통해,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에 들었던 여러 거소들이 상호침투하며 지난 날들의 재보들을 간직한다. 새 집에 옛 집들의 추억들이 되돌아오면, 우리들은 태고의 과거처럼 움직임이 없는 변함 없는 어린 시절의 왕국으로 되돌아간다. 우리들은 역설적이지만 정신분석식으로 말해 固着을, 행복고착을 사는(體驗) 것이다. 즉 보호받은 추억들을 되삶으로써 기운을 되찾는 것이다. 닫혀 있는 어떤 것이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 추억들에 이미지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116~117p]


- ④ 추억은 상상력의 작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추억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상상력이 추억, 즉 과거의 이미지를 그것이 지향하는 바, 즉 원형으로 변화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억과 원형은 상상력을 통해<종합>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추억이 개인의 과거에 속하는 것이라면, 원형은 인류의 과거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형은 집단무의식적 현상이고, 집단무의식은 인간이 최초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전체 인류의 삶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부분에서<추억을 넘어서는 태고>는 바로 그러한 아득한 인류의 과거를, 그리하여 원형을 암시할 것이다.[116p]


- 집은 인간의 사상과 추억과 꿈을 한데 통합하는 가장 큰 힘의 하나라는 것을 우리는 드러내어야 한다. 이 통합에 있어서 연결의 원리는 몽상이다. -중략- 집은 하늘의 電雨와 삶의 電雨들을 거치면서도 인간을 붙잡아 준다. 그것은 육체이자 영혼이며, 인간 존재의 최초의 세계이다. 인간은 성급한 형이상학들이 가르치듯<세계에 내던져>지기에 앞서, 집이라는 요람에 놓여지는 것이다. [118p]


- 따라서 장소분석이란 우리들의 내면적인 삶의 장소들에 대한 조직적인 심리적 연구라고 하겠다. 우리들의 기억력이라는 그 과거의 극장에서는 무대장치가 오히려 인물들을 그들의 주된 역할에 붙들어 두는 것이다. 우리들은 때로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알아본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것은 우리들의 존재가 안정되게 자리잡는 공간들 가운데서 일련의 정착점들을 알아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존재는 흘러나가려 하지 않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러 떠났을 때에 과거에 있어서까지도 시간의 흐름을<멈추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의 수많은 벌집 같은 구멍들 속에 공간은 시간을 압축해 간직하고 있으며, 공간은 그렇게 하는 데 소용된다. [120~121p]


- 그리하여 그러한 고독들을 앞에 두고 장소분석은 이렇게 묻는다 ― 그 방은 컸던가? 그 지붕밑방은 잡동사니로 차 있었던가? 그 구석은 따뜻했던가? 그리고 빛은 어디서 흘러들어오고 있었던가? 또 그 공간들 속에서 존재는 침묵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가? 그는 고독한 몽상이 거하던 그 여러 숙소들의, 그토록 특이한 침묵을 어떻게 음미하고 있었던가?
이 경우 공간은 전부이다. 왜냐하면 이제 와서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은 ―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 ― 구체적인 지속을, 베르그송적인 뜻으로서의 지속을 새겨놓지 못한다. 없어진 지속을 우리는 되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들은 생각할 수만, 구체성의 두터움을 모두 빼앗겨버린 추상적인 시간의 선을 따라 생각할 수만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이 오랜 머무름에 의해 구체화된, 지속의 아름다운 화석들을 발견하는 것은, 공간에 의해서, 공간 가운데서인 것이다. 무의식은 머무르고 있는 법이다. 추억은 잘 공간화되어 있으면 그만큼 더 단단히 뿌리박아, 변함없이 있게 되는 것이다. [121~122p]


- 그리고 우리들의 지난 고독들의 모든 공간들은, 우리들이 고독을 괴로워하고 고독을 즐기고 고독을 바라고 고독을 위태롭게 했던 그 공간들은, 우리들 내부에서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들의 존재가 그것들을 지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의 존재는 본능적으로, 그의 고독의 그 공간들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공간들이 현재로부터 영원히 지워져버려 이후 일체의 장래의 희망과 무관해져 버렸을 때에라도, 이젠 지붕밑방이 없을지라도, 다락방이 잃어져버렸을지라도, 그렇더라도 여전히, 우리들이 어떤 지붕밑방을 사랑했었으며 어떤 다락방에서 살았었다는 사실은 남을 것이다. 우리들은 밤의 꿈 속에서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초라한 작은 방들은 조개껍질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략- 그러나 낮동안의 몽상 가운데서도, 좁고 단순하고 죄어진 고독들의 추억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기운을 되찾아주는 공간, ― 확대 되기를 바라지 않는, 차라리 아직도 소유되고 싶어하는 공간, 그러한 공간의 체험들이다. 옛날에 우리들은 물론 그 다락방을 너무 좁다고,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몽상을 통해 되찾은 추억 속에서는, 알 수 없는 기이한 융합으로 그 다락방은 작으면서도 크고, 더우면서도 시원하고, 언제나 기운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122~123p]


- 바슐라르에게 있어서 이미지가 상징 즉, 의미를 가진 이미지가 되는 것은, 바로 이미지가 원형으로의 지향 가운데 변용적이기 때문이다. 그 변용은 달리 말해, 이미지가 원형으로의 지향 가운데, 그것이 처한 상황에 대해 나타내는 반응이라고 하겠다. 가치(원형)와 현실(상황) 사이에서의 이미지의 바로 이 노력이, 그것에 어떤 해석의 가능성,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지의 그 변용은 대개, 그 이미지가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사물)으로서 나타내는 움직임에 기탁되어 나타나기 쉽니다. 따라서 한 사물이 나타내고 있는 다양한 움직임들은 그 사물의 이미지가 가질 수 있는 그 만큼의 변용가능성, 따라서 해석가능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의 부분에서<중간물들>이 뜻하는 것은, 그러한 약간씩 다른 해석가능성을 가진, 한 사물의 여러 모습들일 것이다. [125p]


- 우리들이 태어난 집은 단순한 집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꿈들의 집적체인 것이다. 옛날 그것의 구석진 곳들은 모두 하나 하나 몽상의 장소였다. 그리고 장소는 흔히 몽상을 특수화한다. 우리들은 거기서 특수한 몽상의 습관을 익혔던 것이다. 우리들이 홀로 있었던 집, 방, 공간은 끝없는 몽상, 오직 시만이 시 작품으로써 끝내고 완성시킬 수 있을 그러한 몽상의 무대를 제공한다. [130p]


- 우리들 조상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몇몇 메달들을 제외한다면, 어린이로서의 우리들의 기억력은 낡아빠진 동전들밖에 간직하지 못한다. 어린시절이 우리들 내부에 살아 있어서 시적으로 유용하게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몽상의 차원에서인 것이다. 바로 이 영원한 어린 시절에 의해 우리들은 과거의 시를 유지하는 것이다. 몽상을 통해, 우리들이 태어난 집에서 다시 산다는 것은, 추억을 통해 그 집에 산다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그 사라진 집에서 우리들이 옛날 거기서 꿈을 꾸었듯이 산다는 것인 것이다. [131p]


- 1)집은 수직적인 존재로 상상된다. 집은 위로 솟는 것이다. 그것은 수직의 방향에서 여러 다른 모습들로 분화된다. 우리들의 의식에 호소하는 것의 하나이다.
2) 집은 또 응집된 존재로 상상된다. 집은 우리들을 중심성에 대한 의식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다.[132~133p]


- 집의 수직성은 지하실과 지붕 밑 곳간의 양극성으로 확보된다. 이 양극성의 징표들은 우리들의 너무나 깊은 내면에 전달되는 것이어서, 그것들은 말하자면, 상상력의 현상학을 위해 두 개의 아주 다른 축을 형성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거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지붕의 합리적인 성격과 지하실의 비합리적인 성격을 대립시킬 수 있다. 지붕은 지체없이 그의 존재이유를 말한다 ― 그것은 비와 햇볕을 두려워하는 인간을 덮어주는 것이다. 지리학자들은 나라마다 지붕의 물매가 그 나라 기후의 가장 확실한 표징의 하나임을 환기하기를 멈춘 적이 없다. 사람들은 지붕의 물매를<이해>하는 것이다. 몽상가마저 합리적으로 꿈꾼다 ― 그에게는 날카로운 지붕은 먹구름을 가르는 것이다. 지붕을 향해서는 모든 생각들이 명료하다. 지붕 밑 곳간에서 우리들은 건물의 강한 골격이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 있는 것을 즐겁게 바라본다. 목수가 단단하게 이루어 놓은 기하학적 구도에 우리들은 참여하는 것이다.
지하실의 경우, 아마 그것의 유용성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그것의 편리함 점들을 열거함으로써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선 집의 어두운 실체, 지하의 힘에 참여하는 실체이다. 거기서 꿈에 잠길 때, 우리들은 人間深淵의 비합리성과 화합한다. [133p]


- 지붕 밑 곳간에서는 낮의 경험이 언제나 밤의 공포를 지워버릴 수 있지만, 지하실에서는 어둠이 밤낮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손에 촛대가 들려 있는데도 지하실에서는 컴컴한 그림자가 검은 벽 위에서 춤추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135p]


- 지하실의 몽상가는, 지하실의 벽이 땅 속에 묻힌 벽, 이쪽 벽면 밖에 없는 벽, 그 뒤에는 전 지구의 땅이 가로막고 있는 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드라마는 고조되고, 공포는 과장된다. 하지만 과장되기를 멈추는 공포란 공포일 수 있겠는가?[135~136p]


- 최초의 독서는 너무 큰 수동성을 지니게 된다. 그 경우 독자는 아직도 약간은 어린 아이, 독서가 마음을 즐겁게 할 뿐인 어린 아이인 것이다. 그러나 좋은 책이란 어떤 것이나 읽혀지자마자 곧 되읽혀져야 한다. 스케치라고 할 최초의 독서 다음으로 완성된 작품이라고 할 독서가 이루어진다. 이때에 작자의 문제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번, 셋째번, ……의 독서가 우리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그 문제의 해결을 가르쳐주게 된다. 느낄 듯 말 듯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에게, 문제와 해결이 바로 우리들 자신의 것이라는 환각을 준다.<나 스스로 이 작품을 썼어야 하는 건데……>라는 심리적 뉘앙스는 우리들을 독서의 현상학자로 내세운다. 그 심리적 뉘앙스에 이르지 못하는 한, 우리들은 심리학자나 정신분석가로 밖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 [137p]


- 꽃은 언제나 씨 안에 있는 것이다. [141p]


- 만약 내가 꿈 속의 집의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면, 나는 삼층의 집을 지을까, 사층의 집을 지을까 망성일 것이다. 삼층의 집은 필수적인 높이로 본다면 가장 단순한 집인데, 지하실과 일층과 지붕 밑 곳간을 가지는 것이다. 사층의 집은 일층과 지붕 밑 곳간 사이에 이층을 하나 더 가지는 것이다. 거기에 한 층이, 즉 삼층이 더 있게 되면, 그때에는 꿈은 혼란되고 만다. 꿈 속의 집에서는 장소분석은 세 개나 네 개의 층까지밖에는 셀 줄을 모르는 법이다.
층이 하나에서 세 개, 네 개로 되려면 층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층계는 서로 다르다. 지하실로 이르는 층계는 우리들에게 언제나 내려가는 것으로 상상된다. 그 층계에서 우리들이 추억 속에 간직하는 것은 그것의 내림이고, 그것에 대한 꿈을 특징짓는 것은 오름이 아니라 내림인 것이다. 위층의 침실로 가는 층계를 우리들은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그것은 한결 평범한 길이다. 그것은 친숙한 것이기도 하다. 열두 살의 어린이는 거기에서 오름의 음계연습을 한다. 한꺼번에 몇 계단씩 뛰어오르면서 3도나 4도 음정을 내고, 5도 음정가지 내어보려고도 하는데, 특히 네 계단씩 네 계단씩 뛰어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네 계단씩 층계를 올라간다는 것은 넓적다리에 대해 얼마나 큰 행복인가!
마지막으로 지붕 및 곳간으로 이르는 층계는 한결 가파르고 한결 거친데, 우리들은 그것을 언제나 올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평정된 고독으로의 오름의 징표를 지니고 있다. 옛날에 살던 집들의 지붕 밑 곳간으로 되돌아가 꿈에 잠길 때. 나는 결코 되내려오지 않는다.[142~143p]


- 파리에는 집이 없다. 포개어져 놓인 상자들 속에서 대도시의 주민들이 살아간다. 폴 클로델 Paul Claudel은 사면 벽에 둘러사여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우리들의 파리의 방은 일종의 기하학적인 장소, 우리들의 그림, 골동품, 장롱들을 갖춰 넣은, 장록 속의 규약적인 구멍이다.>거리의 번호와 층계의 층수가 우리들을<규약적인 구멍>의 위치를 확정해 주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거소는 그 둘레에 공간도 없고 그 안에 수직성도 없다.<집들은 땅 속으로 박혀 들어가지 않기 위해 아스팔트로 지면에 붙어 있다.>집에 뿌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집의 몽상가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마천루 같은 높은 집이 지하실을 가지고 있지 않지 않는가? 포장된 지면에서 지붕까지 방들이 포개어 쌓아 올려져 있고, 지평선 없는 하늘의 천막이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도시의 건조물들은 외부적인 높이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승강기가 층계에서의 영웅적인 용기를 없애 버렸다. 사람들은 이제 하늘 가까이 산다는 것이 거의 공적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의 집이란 단순한 수평성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한 층 속에 박혀 있는, 우리들이 사는 집의 여러 방들은 하나같이, 내밀함의 가치들을 알아보고 분류하기 위한 근본적인 원리의 하나를 잃어버렸다.
대도시의 집에 있어서 수직성의 내밀한 가치가 없다는 사실에, 또 우주성이 없다는 사실을 더해야 할 것이다. 대도시에서는 집들은 이젠 자연 속에 있지 않다. 거소와 공간의 관계는 거기서는 인위적인 것이 된다. 거기서는 일체가 기계이고, 내밀한 삶은 어느 부분에서나 도망가버린다.<거리들은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는 무슨 도관 같다.>[144p]


- 궁전에는<내밀함이 들어앉을 구석이라고는 없는 것이다.>[147p]


- 그러나 대부분의 오두막집의 꿈에 있어서 우리들은 혼잡한 우리집에서, 도시의 근심거리들에서 멀리 떨어져 다른 곳에서 살기를 바란다. 우리들은 생각 속에서, 참된 피난처를 찾으러 우리집을 떠나는 것이다. [149p]


- 은자의 오두막집, 이것이야말로 정녕 하나의 원초적인 판화이다! 진정한 이미지들은 판화들이다. 상상력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 그 이미지들을 새기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들이 실제로 경험한 추억들을 더욱 깊게 한다. 즉 그 이미지들은 그 경험한 추억들을 다른 데로 옮겨버리고 그 자체가 상상력의 추억들이 된다. 은자의 오두막집은 변용이 필요치 않은 테마이다. 그것은 더할 수 없이 간단하게 환기되더라도, 그러자마자<현상학적인 울림>은 보잘 것 없는 반향들을 지워버린다. 은자의 오두막집은 지나치게 화려한 장식이 해가 되는 그런 판화이다. 그것은 그것의 본질,<거주하다>의 본질의 강렬함에서 그것의 진실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곧 오두막집은 중심적인 고독이 된다.[150p]


- 우리들은 결코 당장에 이미지의 전체를 살(경험) 수 없다. 위대한 이미지는 어떤 것이나 깊이를 알 수 없는 꿈의 밑바탕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 꿈의 밑바탕 위에 우리들 각자의 개인적인 과거가 특이한 채색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삶을 아주 멀리까지 거슬러올라가서야 우리들은, 기억 속에 박혀 있는 역사 너머에서 이미지의 뿌리를 발견함으로써 그것을 참으로 찬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51p]


- 먼 집의 불빛에 의해 그 집은 보고, 자지 않고, 살피고, 기다리는 것이다. [153p]


- 인간의 집들은 지상의 星座들을 형성하는 것이다.[154p]


- 그 외로운 집과 우리들 사이의 유대는 너무나 강한 것이어서, 이윽고 우리들은 밤 가운데의 외로운 집밖에 꿈꾸지 않게 되는 것이다―[156p]


- 보들레르는 바탕이 도시인이지만, 집이 겨울의 공격을 받을 때에 내밀함의 가치가 커가는 것을 느낀 사람이다. [157p]


- 모순적인 것들이 모이면, 모두가 생동하게 되는 것이다. [159p]


- 특히 눈은 외계를 너무 힘 안들이고 무화시켜 버린다. 그것은 세계를 단 하나의 색조로 통일해 버린다. 피난처에 보호되어 있는 사람에게 세계는 한 마디 말, 눈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제거되는 것이다. [160p]


- 집 안에서는 일체가 분회되어 많은 수로 나뉜다. 겨울로부터 집은 저장된 내밀함과 정묘한 내밀함을 얻는다. 집 밖의 세계에서는 눈이 발자국들을 지우고, 길들을 흐려 놓고, 소리들을 짓눌러 버리고, 색깔들을 덮어 버린다. 통일적인 흰색에 의한 우주적인 부정이 활동함을 우리는 느낀다. -중략- 외계의 존재의 감소로 하여, 모든 내밀함의 가치들의 강도카 커감을 경험하는 것이다.[160p]


- 거주자를<감싸안>아서, 가깝게 모인 사면벽과 더불어 한 몸뚱이의 골방이 되는 이 집이야 말로 얼마나 훌륭한 존재의 응집의 이미지인가! [166p]


- 이미지가 새로우면, 세계가 새로운 것이다.[167p]


- 스피리다키의 집은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갑옷이었다가 다음에는 무한히 늘어난다. 우리들은 그 집에서, 번갈아가며 안정 속에서 또 모험 속에서 산다고나 할 만하다. 그것은 골방이기도 하고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이 경우 기하학은 초월되어 있다. [173p]


- 기이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우리들이 좋아하는 공간들이 언제나 갇혀 있기를 바라지는 않는 것이다. 그것들은 펼쳐진다. 그것들은 다른 곳으로, 다른 때로, 꿈과 추억의 여러 다른 차원으로 쉽사리 옮겨가는 것 같다. [176p]


- 어째서 우리들은 집에 사는 행복에 그토록 빨리 싫증을 냈던가? 어째서 우리들은 그 덧없는 시간들을 가능한 대로 지속시키지 않았을까? 현실보다 더한 어떤 것이 현실에 부족했던 것이다. 즉 집에서 우리들은 충분히 꿈꾸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꿈, 몽상에 의해 우리들은 그 집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기에, 따라서 예와 지금의 연결이 잘 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냥 사실들만이 우리들의 기억에 쌓여 혼잡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되풀이해 떠올려지는 기억 너머로, 지워져버린 우리들의 인상과, 우리들에게 행복을 믿게 하던 꿈을 되살고 싶어한다. -
나는 그대들을 어디서 잃어버렸던가, 내 짓밟힌 이미지들이여?[179p]


-<시초에는 이름을 알아서 부를 수도 없었던, 처음으로 보는 장소에서 이 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 없고 모르던 장소에서, 그 이름을 알게 되기까지 자라나고 돌아다녀 그 이름은 사랑으로써 부를 수 있으며 - 그 이름을 가정이라고 하고 거기에 우리들은 뿌리를 박는데 - 그곳을 스스로의 사랑의 보금자리로 할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들이 그곳에 대해 말할 때마다, 연인들이 그리하듯 향수에 찬 노래로, 바람[원망]에 넘치는 시로 말하게 된다는 것!>우연이 인간식물의 씨앗을 뿌린 땅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런데 그 無의 밑바탕에서 인간적인 가치들이 자라나는 것이다! 반대로, 만약 우리들이 추억들 너머로 꿈의 밑바탕에까지 내려가면, 그 선기의?의 영역에서는 無가 존재를 애무하고 존재에 스며들고 부드럽게 존재의 인연들을 푸는 듯하다. 우리들은 자문하게 된다 - 있었던 그 일들은 과연 있었던가? 그 일들은 우리들의 기억력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가치를 가졌던가? 멀리 되올라가는 기억력은 그 일들을, 그것들에 하나의 가치, 하나의 행복의 후광을 부여함으로써만 기억하는 법이다. 그 가치가 지워져버리면, 긍 일들도 부지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정녕 있었던 것일까? 어떤 비현실성이 추억들의 현실성 속에 베어드는데, 그래 그 기억들은 우리들의 개인적 역사와 무한한 선사의 경계에, - 바로 우리들이 태어난 집이 오히려, 우리들이 태어난 다음에 우리들 내부에서 태어나게 되는 그런 지점에 위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 이것을 고이언은 우리들에게 이해시키고 있는데 - 그 집은 전혀 익명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계 가운데 잊혀져 있던 장소였던 것이다. [181p]


- 마지막 것일 집, 그래 태어난 집에 대칭적인 것일 집은 꿈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중대한 생각, 슬픈 생각을 마련하기나 할 것이다. [185p]


- 잘 자기 위해서는 큰 방에서 자지 말아야 하고, 잘 일하기 위해서는 골방에서 일하지 말아야 한다.[190~191p]


- 하지만 살림살이에 어떻게 창조적인 활동을 부여할 것인가?
살림살이의 기계적인 몸짓에 의식의 빛을 가져오기만 하면, 낡은 가구를 닦으면서 현상학을 해보기만 하면, 곧 우리들은 집안의 다사로운 습관적인 일 밑에서 새로운 느낌이 태어남을 깨닫게 된다. 의식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습관적인 행동들에도 시발적인 가치를 준다. 그것은 기억력을 능가하는 것이다. 기계적인 행동의 주인으로 진정 다시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경탄인가! [192p]


- 그 내부의 나라에 있는 모습들이 그녀에게 친숙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녀가 가장 대수롭쟎은 일에 정성을 쏟고 있을 때였다. [193p]


- 아! 매일 아침 집안의 모든 물건들이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다시 만들어져 우리들 자신의 손에서<탄생되어 나올>수 있다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위대한 삶이 되랴![194~195p]


- 모든 것을 만들고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 각각의 대상에<보충적인 동작>을 가하고 밀랍의 거울에 반사면을 하나 더 만들어 주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상상력이 우리들에게 집의 내적 성장을 느끼게 하면서 우리들에게 끼쳐 주는 유익된 것들이다. [195p]


-<어린이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그가 그의 행복을 그 속에 보호하고 싶어하는 가장 은밀한 꿈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행복한 아이라면, 문이 닫혀서 잘 보호되고 있는 집을, 공고하고 깊이 뿌리박힌 집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집은 물론 외형이 그려지지만, 그러나 거의 언제나 어떤 특징이 내밀한 힘을 가리켜 보인다. 어떤 그림들에서는 - 발리프 부인의 말에 의하면 - 명백히<집안은 따뜻하게 생각된다. 집안에는 불이 있는 것이다. 힘차게 활활 타오르는 불이기에, 그것이 굴뚝을 통해서까지 빠져 나오는 것이 보인다.>행복한 집이라면, 연기는 지붕 위로 부드럽게 너울거리며 즐긴다.
어린이가 불행할 경우에는, 집은 그의 불안의 흔적을 담고 있게 된다. 프랑솨즈 민코브스카는 특별히 감동적인, 2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 점령의 무서움을 겪었던 폴란드와 유태 어린이들의 그림들을 전시했었다. 경보가 조금이라도 있기만 하면 장농 속에 숨어 있어야 했던 어떤 여자 아이는, 그 저주받은 때가 지나간 훨씬 후에, 비좁고 싸늘한, 문을 닫아건 집들을 그려 놓았다. 프랑솨즈 민코브스카가<움직임 없는 집>. 뻣뻣함 가운데서 움직임을 잃은 집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집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움직임 없는 뻣뻣함은 창문의 커튼에서도 발견되고 연기에도 발견된다. 집 주위의 나무들은 곧추 서 있어서, 마치 집을 지키고 있는 듯이 보인다.>프랑솨즈 민코브스카는, 살아 있는 집이란 정녕<움직임 없지는>않다는 것을 알고있다. 집은 특히, 사람들이 문으로 다가가는 움직임을 품고 있는 것이다. 집으로 이르는 길은 흔히 올라가는 길로 되어 있다. 그것은 때로 올라오라고 초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쨋든 언제나 운동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있게 마련이다. [198p]


- 그러나 가치의 영역에서는 열쇠는 열기보다는 닫는 것이고, 손잡이는 닫기보다는 여는 것이다. 그리고 닫는 동작은 여는 동작보다는 언제나 더 확고하고 더 강하고 더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199p]
- 베르그송에 있어서 메타포들은 넘칠 듯이 많으나, 필경 이미지들은 아주 드물다. 그에게 있어서 상상력이란 전적으로 메타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메타포란 표현하기 어려운 인상에 구체적인 형태를 주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과는 다른 정신적 psychique 존재에 관계하는 것이다. 절대적 상상력의 소산인 이미지는 이와는 반대로 그의 전존재를 상상력으로부터 얻는다. 다음에 메타포와 이미지의 비교를 계속 밀고 나가면, 우리들은 메타포가 현상학적인 연구의 대상이 될 수는 거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럴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조작된 이미지, 깊고 참되고 실제적인 뿌리가 없는 조작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순간적인 표현, 혹은 지나가면서 한 번만 사용되고 버려짐으로써 순간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표현이다. 메타포는 너무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메타포를 읽고 사람들이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나 않을까 저어해야 한다. 그런데 베르그송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서랍의 메타포는 얼마나 큰 성공을 얻었는가![202p]


- 이리하여 개념은 죽은 사상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칙적으로 분류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203p]


- 메타포와 이미지의 구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서랍의 이미지에서, 경직되어 가는 메타포, 그 이미지적 자발성까지 잃어버리는 메타포의 예를 얻고 있다. [204p]


- 이 경우, 지능이 서랍달린 장이 아니라, 서랍달린 장이 지능이 된다. 카르 브놔의 모든 가구들은 가운데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게 단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떡갈나무로 만든 서류함이었다. 그 육중한 서류함 앞을 지나칠 때마다 그는 그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적어도 그 서류함에서만은 모든 것이 공고하고 충직스러웠다. 보는 것이 보이는 것이었고, 만지는 것이 만져지는 것이어다. 그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유용하도록 세심한 머리로 예견되고 계산되지 않은게 없었다. 참으로 감탄할 만한 도구였다. 그것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 그것은 기억력이었고 지능이었다. 그토록 잘 짜여진 그 입방체 속에는 흐릿하거나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거기에 한번 집어 넣은 것이라면, 백 번, 만 번이라도, 말하자면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찾아낼 수 있었다. 마흔여덟 개의 서랍 ! 그것은 잘 분류된 확실한 지식들로 이루어진 한 세계 전체를 담고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카르 브놔씨는 그 서랍들에 일종의 마술적인 힘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는 때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서랍이란 인간 정신의 토대란 말야.>[205p]


- 그리고 아름다운 말에는 아름다운 사물이 대응되는 법이다. [207p]


- 질서란 단순히 기하학적인 것은 아니다. 장롱 속에서 질서는 집안의 역사를 기억한다. [208p]


- 목공이 만든 복잡한 가구는 비밀에의 욕구, 숨기는 장소에 관한 慧智의 아주 뚜렷한 증거이다. 단순히, 아끼는 물건을 잘 간직한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열려고 하는 강제적인 힘에 버틸 수 있는 자물쇠란 없는 법이다. 자물쇠란 모두 도둑을 부르게 마련이다. 자물쇠는 얼마나 유혹적인 심리적 입구인가! 그것이 장식으로 덮혀 있을 때에는, 부주의로운 호기심에 대한 얼마나 큰 도전인가! 장식된 자물쇠 속에는 얼마나 많은<콤플렉스>들이 있는가! 드니즈 폴름 Denise Paulme에 의하면, 밤바라 Bambara족은 자물쇠들의 중심부분을<사람이나 악어, 도마뱀, 거북……등의 모양으로>조각해 놓는다고 한다. 열고 닫는 힘은 생명의 힘, 인간의 힘, 성스런 동물의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도공 Dogon 족의 자물쇠들은 사람 둘의 모습(조상 부부)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부주의로운 호기심에 도전하기 보다는, 그것을 힘의 표지로써 겁내주기보다는, 그것을 속여버리는 게 낫다. 그래서 겹상자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장 덜 중요한 비밀을 맨 겉상자에 넣는다. 그 비밀이 발견되면, 호기심이 만족될지도 모른다. 또한 그 호기심을 거짓 비밀로 채워 줄 수도 있다. [211~212p]


- 상자는, 특히 우리들이 한결 더 전적인 지배력으로써 다스릴 수 있는 작은 상자는, 열리는 대상이다. 상자가 닫히면, 그것은 일반적인 사물들의 공동체로 되돌려진다. 그때 그것은 외부 공간 가운데 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열리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뒤의 한 장에서 안과 밖의 변증법을 연구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상자가 열리는 순간에는 변증법이란 없다. 밖은 단 한 획으로 지워져 버리고, 일체가 새로움에, 놀라움에, 미지의 것에 지배된다. 밖은 더 이상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심지어는 ―더할 수 없는 역설이지만 ― 부피의 차원까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데, 그것은 다른 하나의 차원, 내밀성의 차원이 開顯되었기 때문이다.

상상적으로 잘 가치화시키는 사람에게는, 내밀성의 가치의 관점에 서는 사람에게는 그 차원은 무한한 것일 수 있다. [217p]


- 닫혀 있는 상자 속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상자 속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다. 사실을 확인하려고 든다면, 이미지들은 죽어 버릴 것이다. 언제나 상상함이 삶보다 더 풍요로운 법이다. [220p]


-<모든 동물들이 그들의 집을 만들 때에 나타내는 기술과 숙련은 너무나 그 일에 알맞은 것이어서, 그 이상일 수 없을 정도이다. 그래 그들은 모든 석공과 목수와 건축가들을 능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그 조그만 동물들이 그들 스스로를 위해 집을 만드는 것보다 더 알맞게, 자기와 자식들을 위한 집을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225p]


-<이웃집 가족이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다가 빈 집으로 되돌아왔을 때, 나는 즐거운 말소리와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부엌에서 나오는 연기를 본다. 문들은 크게 열려 있다. 어린 아이들이 소리치며 홀을 지나 달린다. 이와 똑같이, 청딱다구리는 촘촘히 얽힌 나뭇가지들 사이로 몸을 던져 나르며, 이를테면 이쪽에서 창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다시 거기에서 우짖으며 나오고, 또 저쪽으로 몸을 날려 가, 집안에 바람을 통하게 한다. 그리고 제 울음소리를 위에서, 아래에서 울리게 하며, 그렇게 그의 거소를 마련하고……그리하여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다.>[231~232p]


- 가장 단순한 이미지는 이중화되어, 그 자체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 아닌 것이기도 하다.[234p]


- 그리고 미슐레는 계속해 말한다 ―<새집은 바로 새 자체이다, 그의 형태이고 가장 직접적인 노력이다. 그의 고통이라고까지 말해도 좋으리라. 집이라는 결과는 새의 가슴으로 끊임없이 되풀이된 누름으로써만 얻어진 것이다. 그 풀잎 조각의 어느 하나라도 새집의 둥근 곡선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의 가슴으로, 심장으로, 틀림없이 호흡의 혼란과 아마도 심장의 빠른 박동을 일으키게 하는 가운데, 수천 번이나 짓눌리고 짓눌리지 않은 게 없으리라.>얼마나 믿을 수 없는 이미지의 전도인가! 이 경우 태반이 태아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닌가? 이 경우 일체가 내부로부터의 밀림, 물리적으로 지배적인 힘을 가진 내밀함인 것이다. 새집은 부풀어오르는 과일, 그것의 외적 한계를 밀어붙이는 과일이다. [237~238p]


- 미슐레는 우리들을 숙소의 빚음으로, 처음에는 꺼칠꺼칠하고 잡다한 것들이 모여서 된 표면을 섬세한 솜씨로 매끈매끈하고 부드럽게 하는, 그러한 빚음으로 유혹하고 있다. [238p]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바로 이렇게 썼던 것이다 ―<인간은 벙어리이다. 말하는 것은 이미지인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이미지만이 자연과 보조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242p]


- 그러나 신비로운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것의 형태가 아니라 그것의 형성이다. 형태를 취하려고 함에 있어서 최초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삶 자체에 관계되는 얼마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 그 최초의 선택에는 조개껍질이 왼쪽으로 잠길 것인가, 오른쪽으로 잠길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문제가 걸려 있다. 형성을 위한 그 최초의 소용돌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지 않았던가 ! 사실 삶은 도약하면서라기보다는 돌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생의 도약이 회전한다, 얼마나 교묘한, 삶의 경이인가 ! 얼마나 미묘한, 삶의 이미지인가 ! 그리고 왼쪽으로 도는 조개껍질에 대해서, 자기 종의 회전 방식을 어기는 조개껍질에 대해서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몽상을 할 수 있으랴 ! [244~245p]


- 삶은 최초의 경이들을 재빨리 마멸시켜 버리고 만다. 게다가 하나의<살아 있는>조개에 비해 얼마나 많은 죽은 조개들이 있는가 ! 집주인이 살고[居住] 있는 하나의 조개껍질에 비해 얼마나 많은 빈 조개껍질들이 있는가 ![246p]


- 조개껍질에서 나오는 존재에 있어서 일체의 것은 변증법적이다. 그것이 한꺼번에 몽땅 빠져나오지 않기 때문에, 빠져나오는 부분과 아직 갇혀 있는 부분은 서로 相衡한다. 그 존재의 뒷부분은 단단한 기하학적인 형태 속에 갇혀 있지만, 나온 부분의 경우 삶은 밖으로 빠져나옴에 있어서 너무나 성급하여, 어린 들토끼나 낙타의 형태처럼 지정된 형태를 언제나 취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247~248p]


- 스스로를 숨기는 존재,<제 껍질 속으로 들어가는>존재는<나옴>을 마련하는 법이다. 이것은, 매장된 존재의 부활에서부터 오랫동안 침묵하던 사람의 갑작스런 발언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전 메타포들에 있어서 진실이다. 우리가 지금 고찰하고 있는 이미지의 중심에 계속 머물러 있는 채로 살펴볼 때, 제 껍질의 움직임 없는 상태에 처해 있는 가운데, 존재는 존재의 일시적인 파열을, 존재의 소용돌이를 마련하는 듯이 여겨진다. 가장 힘있는 탈출은 압축된 존재에서 시작되어 이루어지는 것이지, 다른 곳에 가서도 다시 게으름 피우기를 욕구할 수밖에 없는 게으른 존재의 맥없는 게으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기운찬 연체동물이라는 이 역설의 상상을 살아[체험] 본다면 ― 우리가 설명하고 있는 판화그림들은 이에 대한 뚜렷한 이미지들이 되고 있는데 ― 공격성들 가운데서도 가장 결정적인 공격성, 미루어진 공격성, 기다리는 공경성에 이르게 된다. 껍질 속에 갇혀 있는 이리는 돌아다니고 있는 이리보다 더 잔인한 것이다. [251~252p]


- 모든 경우에 있어서 로비네는 내부로부터 형태를 생각하고 있다. 그의 생각으로는 삶이 형태의 원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태의 원인인 삶이 살아있는 형태를 형성한다는 것은 전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시 한번, 이와 같은 몽상에서는 형태는 삶의 거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255p]


- 고대인들의 상징체계에 의하면, 조개껍질은 우리 육체의 상징이며, 그 육체의 겉껍질 안에 숨어서 우리의 전존재에 생명을 주는 영혼은 연체의 유기체 부분에 의해 표상된다. 그래 고대인들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될 때에 육체가 생기를 잃게 되는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조개껍질 역시 그것에 생명을 주는 부분으로부터 분리될 때에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257p]


- 그것은 우리들이 사물 자체로 -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 되돌아오면 바로 그 순간, 집에 살고[거주] 있는 몸이 자라는 바로 그만큼 함께 자라는 집을 우리들이 꿈꿀 수 있게 되면 바로 그 순간, 새롭게, 그 스스로 제기되는 문제이다. 석질의 벽으로 된 제 감옥 속에 갇힌 조그만 달팽이가 어떻게 자랄 수 있는가? 이것이야 말로 하나의 자연스런 의문, 하나의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의문인 것이다. [259p]


- 조개껍질 - 집이라는 이미지보다 더 낡은 이미지는 없다. 그것은 성공적으로 복잡하게 재창조될 수 있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새롭혀질 수 있기에는 너무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그것이 말해야 하는 것을 단 한마디로 말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것이 원초적 이미지임은 여전한 사실이다. 그것은 파괴되지 않는 이미지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의 고물들을 파는 없어지지 않을 바자에 속하는 것이다. [263p]


- 자연은 우리들을 경이롭게 느끼게 하는 아주 단순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 그것은 크게 하는 것이다. [264p]


-<명상실의 외면은 다듬지도, 갈지도 않은 굵은 돌덩이들을 쌓아 만들어서, 그 외면이 어떤 건물의 형태로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고 베르나르 팔리시는 쓰고 있다. 반면에 그는, 그 방의 내면은 조개껍질의 내면처럼 반들반들하기를 바란다 -<명상실이 이와 같이 이루어진 다음, 나는 그 안에 천정 끝에서부터 바닥까지 몇 겹으로 에나멜칠을 하고 싶다. 그런 다음에는 방 안에 큰 불을 피워놓아..... 그 에나멜이 쌓은 돌덩이들에 녹아 붙도록 하겠다......>그리하여 명상실은<안에서 보면 전혀 한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고,<너무나 윤이 나서, 그 안에 들어오는 도마뱀이나 새앙쥐들이 마치 거울 앞에서처럼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을 것이다.>[274~275p]


- 하나의 색깔 밑에 보호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거주의 평온함을 그 절정에까지, 부주의할 정도로까지 밀고 간 게 아니겠는가? 그림자 역시 하나의 거처인 것이다. [277p]


- 우리들이<체험한>구석은 많은 측면에 있어서 삶을 거부하고, 삶을 제한하고, 삶을 숨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구석은 세계의 부정이다. 구석에서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는다. 구석에 있었던 시간들을 기억해 보면, 침묵이, 생각에 싸인 침묵이 기억될 따름이다. [282p]


- 우선 구석은 우리들에게 존재의 최초의 가치인 하나의 부동성을 확보해 주는 은신처이다. 그것은 나의 부동성이 자리잡을 수 있는 확실한 장소, 가까운 장소이다. 구석은 일종의 半상자―반은 벽이고 반은 문인―이다. [283p]


- 거주의 기능이 가득참과 빔 사이의 관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의 산 존재가 하나의 빈 은신처를 채운다. 그리고 이미지들이 거기서 산다. 모든 구석에는 누군가 들어가 있지는 않을지라도, 이미지들이 거기서 산다. 모든 구석들에는 누구가 들어가 있지는 않을지라도, 이미지들이 유령처럼 출몰하는 것이다. [287p]


-<그 모든 것들은 멀리, 너무나 멀리 있다. 그래 더 이상 있지 않다. 아니 결코 있어 본 적이 없다. 과거는 더 이상 그것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시선을 움직여 찾아 보아라, 그리고 놀라워하고 몸을 열어라……. 네 자신이 이미 더 이상 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291p]


- 곡선의 우아함은 거주에의 초대이다. 되돌아올 희망없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다. 사랑받는 곡선은 보금자리의 견인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소유에의 유혹이다. 그것은 곡선상의 구석인 것이다. 그것은 거주되는 기하학이라고 하겠다. [295~296p]


- 말이라는 집에서 층계를 올라간다는 것은, 단계적으로 抽象한다는 것이며, 지하실로 내려간다는 것은, 꿈꾼다는 것이고 불확실한 어원의 먼 복도들 속에서 헤멘다는 것이고 말 가운데 희귀한 보물들을 찾는다는 것이다. 말 자체 속에서 오르내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로 시인의 삶이다. 너무 높이 올라가는 것이나 너무 깊이 내려가는 것이나 시인에게는 허락되어 있는데, 그는 이리하여 대지적인 것과 공기적인 것을 잇는 것이다. 오직 철학자만이 그의 동료들에 의해, 언제나 일층에서 살도록 처단되는 것일까? [296p]


- 이와 같이, 만약 우리들이 세미화의 시인을 공감으로써 따라간다면, 그리하여 감옥에 갇힌 화가의 그 조그만 기차를 타 본다면, 기하학적인 모순은 사함을 받게 되고, 표상은 상상력에 의해 지배되게 된다. 표상이란 타인들에게 우리들 자신의 이미지들을 전달하기 위한 표현들의 모음에 지나지 않는다. 상상력을 기본적인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철학의 주된 입장에서 우리는 쇼펜하우어식으로 말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나의 상상력이다.>내가 세계를 세미화하기에 더 능숙하면 할수록, 나는 세계를 그만큼 더 잘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 세미화 속에서는 가치는 응집되고 풍요로워진다. 세미화의 역동적인 힘을 알기 위해서는 큼과 작음의 플라톤적 변증법으로는 충분치 않다. 작은 것 속에 있는 큰 것을 체험해 보기 위해서는 논리를 넘어서야 한다. [300p]


- 상상력의 측면에서는 그는<틀린>게 아니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결코 틀리는 법이 없기 때문이고, 상상력은 이미지를 객관적인 현실과 대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302~303p]


- 그런데 돋보기를 든 인간은―그냥―친숙한 세계를 지워 버린다. 그는 새로운 대상 앞에서 신선한 시선이 된다. 식물학자의 돋보기는 바로 되찾아진 어린 시절인 것이다. 그것은 식물학자에게 어린이의, 대상을 크게 하는 시선을 되준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정원에, ― 그 안에서는
어린이들이 크게 보는
정원으로 되들어간다.
이리하여 미세한 것 ― 그것은 문치고는 정녕 좁은 문인데 ― 이 하나의 세계를 열어 준다. 한 사물의 세부는 한 새로운 세계, 다른 모든 세계들과 마찬가지로 위대함의 속성들을 지니고 있는 그런 한 세계의 표징일 수 있는 것이다. [306p]


- 이 조그만 유리의 紡錘(방추)를 통해, 이 고양이의 눈동자를 통해 외계는 어떻게 되는가?<세계의 본성이 변하는가? 아니면 진짜 본성이 겉모습을 지우고 나타나는 것인가? 어쨌든, 경험적인 사실은, 풍경 속에 그 유리의 응어리를 끌어들임으로써 거기에 물렁물렁한 성격을 부여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벽, 바위, 나무 밑둥치, 금속 구조물 등이 그 동적인 유리 응어리의 구역 안에서 일체의 견고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308p]


- 제 방 안에 진치고 있는 철학자로서 우리는 중세 ― 그 위대한, 고독한 끈기의 시대 ― 의 세미화가들의 채색 작품들을 관조하는 혜택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정녕 바로 그 끈기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 끈기는 손가락들 가운데 평화를 가져다 준다. 그 끈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평화가 영혼을 사로 잡는다. 모든 작은 것들은 느림을 요구하는 것이다. 세계를 세미화로 그리기 위해서는 정녕 조용한 방 안에서 많은 餘閒(여한)을 가져야 했었다. 마치 세계의 분자들이 있기라도 하듯이 공간을 그토록 세밀하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표묘의 분자 속에 하나의 광경 전체를 가둬 넣기 위해서는, 그 공간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이 공든 작업에 있어서 언제나 크게 보는 직관과, 일필휘지적인 운필을 거부하는 작업 사이에는 얼마나 강한 변증법이 작용했을까 ! 사실, 직관은 단 한번의 시선으로 전체를 파악하는 반면, 세부의 모습들은 하나씩 둘씩 차례로, 섬세한 세미화가의, 정묘하나 여기 저기 손을 대는 식의 작업으로 끈기 있게 찾아지고 정돈되는 것이다. [310~311p]


- 성실하게 살아진(체험) 세미화는 나를 주위의 세계로부터 떼어내고, 내가 그 주위 세계의 해체작용에 저항하는 데 나를 도운다. [313p]


- 엄지동자는 귀의 공간, 소리의 그 자연적인 공동의 입구가 제 집이다. 그는 귀 속의 귀이다. 이리하여 시각적인 표상들로 나타내어진 이야기가, 아닌 게 아니라 우리들은 그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우리들의 실제 청력의 한계 아래로 내려가도록, 우리들의 상상력을 가지고서 듣도록 권유된다. 엄지동자는 말의 귀 속에 자리를 잡고서 낮게 말하는데, 즉 강하게 지휘하는데, 그 말소리는 그것을<들어야>하는 이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듣는다>라는 말은 여기서 듣는다와 복종한다라는 이중의 뜻을 가진다. 기실, 그 이중의 뜻이 가장 섬세하게 작용하는 것이 바로 낮은 음조의 말소리의 경우가, 엄지동자 전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소리의 세미화의 경우가 아니겠는가? [319p]


- 어느 수도하는 은자가 기도를 잊은 채 그의 기도용 모래시계를 바라보고 있다가, 귀를 짓찟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어디에서 읽었던가? 모래시계 속에서 그는 갑자기 시간의 붕괴를 들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는 너무나 거칠고 너무나 기계적으로 단속적이기에, 이제 우리들은 흘러가는 시간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섬세한 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320p]


- 태양은 무엇보다도 세계의 큰 등불인 것이다. 그런 다음에 수학자들이 그것을, 끄는 힘을 가진 거대한 덩어리라고 한 것이다. 빛은 하늘 위에서 중심성의 원리이다. 그것은 이미지들의 위계 가운데 그토록 큰 가치인 것이다! 세계는 상상력에게는 하나의 가치를 중심으로, 그것의 인력으로 도는 것이다.
가족 식탁 위의 저녁의 램프 역시 하나의 세계의 중심이다. 램프에 밝혀진 식탁은 그것만으로 하나의 조그만 세계이다. 몽상가 철학자는, 오늘날 우리들의 간접 조명이 우리들로 하여금 저녁 때의 방의 중심을 잃어버리게 하지 않을까 저어하지 않겠는가? [325p]


- 시인은 현미경으로 보든, 망원경으로 보든, 언제나 같은 것을 보는 것이다. [326p]


- 먼 거리는 아무것도 흩뜨리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우리들이 살고 싶은 곳을 세미화로 응축한다. 먼거리가 만드는 세미화 가운데는 뒤죽박죽인 사물들이 들어와 조화롭게<구성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그것을 창조한 먼 거리를 부인하면서 우리들의<소유>로 바쳐진다. 우리들은 멀리서―그리고 그것도 얼마나 평온하게!―소유하는 것이다. [327p]


- 일반적으로 사실은 가치를 설명하지 못한다. 시적 상상력의 작품들에 있어서 가치는 너무나 뚜렷한 새로움의 징후를 나타내기에, 그런 작품들에 관한한 과거에 속하는 일체의 것은 무기력한 것이다. 일체의 기억은 되상상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기억력 속에 미세한 필름들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들은 상상력의 강렬한 빛을 받음으로써만 판독될 수 있다. [330p]


- 꿈, 생각, 추억이 하나의 직물을 이루게 된다. 영혼은 꿈꾸고 생각하고, 그리고 상상한다. [331p]


- 나는 듣고 있었다, 내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는 소리를.
고독한 몽상가라면 누구나, 눈을 감았을 때에는 달리 듣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찰을 하려 할 때, 내면의 말소리를 들으려 할 때, 사상의<밑바탕>을 말해주는, 응축된 중심적인 문장을 쓰려 할 때, 누구인들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누르지, 세게 누르지 않는가? 그럴 때, 귀는 눈이 감겨 있다는 것을 안다, 사유하고 글을 Tm는 존재의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 긴장의 이완은 차라리 눈꺼풀을 다시 열 때에 오는 것이다.
그러나 잠긴 눈, 반쯤 감긴 눈, 또는 크게 뜨인 눈의 몽상을 누가 우리들에게 이야기해 줄 것인가? 초월로 열리기 위해서 세계에서 버리지 않고 지녀야 할 것은, 무엇인가? [338p]


- 하지만 잘 들어 봐. 내 말이 아니라, 네가 너 스스로를 듣고 있을때에 네 몸 속에서 일어나는 동요를 들으란 말야. [339p]


- 우리들은 움직임 없이 있게 되자말자, 다른 곳에 가 있게 된다. 우리들은 무한한 세계 속에서 꿈꾼다. 무한은 움직임 없는 인간의 움직임이다. 무한은 조용한 몽상의 역동적인 성격의 하나이다. [343p]


- 『사랑 인간』에서 밀로슈는 이렇게 쓰고 있다―<나는 그 공간의, 경이들로 가득찬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 자신의 가장 깊은 곳, 가장 은밀한 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그 이전에 나 자신을 그토록 순수하고 그토록 위대하고 그토록 아름답게 꿈꾼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 속에서는 우주의 은혜로운 노래 소리가 터져나왔다. 저 모든 성좌들이 네 거야, 그것들은 네 안에 있단 말이다. 그것들은 네 사랑 밖에서는 조금도 현실성이 없어 ! 아아 ! 스스로를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세계는 얼마나 무섭게 보일 것인가 ! 네가 바다 앞에서 고독하고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 밤 가운데 그 바다의 고독이, 또 끝없는 우주 가운데 밤의 고독이 어떠했었을까를 생각해 봐!>[348p]


-<음악의 첫 박자에서부터, 성배를 기다리는 경건한 고독자의 영혼은 무한한 공간속으로 잠겨 들어 간다. 그는 한 기이한 환영이 조금씩 조금씩 모습을 이루어 몸과 얼굴을 취해 가는 것을 본다. 그 환영은 더욱 정확한 모습을 띠어 가고, 기적적인 천사들의 무리가 그들 가운데 성배를 들고 그의 앞으로 지나간다. 성스런 행렬이 다가오자, 그, 신에게 선택된 자의 마음은 조금씩 격앙되어 간다. 그의 마음은 넓어지고 팽창된다.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열망이 그 내부에서 깨어난다. 그것은 증대하는 지복감을 이기지 못한다. 빛나는 환영과의 거리가 계속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성배 자체가 그 성스런 행렬 가운데 나타났을 때, 그것은 마치 세계 전체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황홀한 열애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354p]


- 보들레르의 몽상은 관조되는 우주 앞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시인은 ―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 그의 몽상을 두 눈을 감고 펼치고 있다. 그는 추억을 살고 있는 게 아니다. 그의 시적 황홀은 조금씩 조금씩 사건 없는 삶이 되어 간 것이다. 푸른 날개를 하늘에서 펴 보이던 천사들이 우주적인 푸름 속으로 녹아든 것이다. 서서히 무한은 근원적인 가치, 근원적인 내밀한 가치로 설정되는 것이다. [356p]


-<파동 Welle이라는 낱말 안의 W는 그 낱말 안의 파동을 함께 움직이게 하고, 숨결 Hauch 이라는 낱말 안의 H는 숨결을 올라가게 하며, 단단한 fest, 굳은 hart 이라는 낱말 안의 t는 단단하고 굳게 한다.>[359p]


- 하나의 대상에 그것의 시적 공간을 준다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공간을 그것에 준다는 것이며, 아니 더 잘 말해보자면, 그것의 내밀의 공간의 팽창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364p]


- 각각의 물질마다 그것의 위치 획정이 있고, 각각의 물질 substance 마다 그것이 자리하는 공간 existance 이 있다. 각각의 물질마다 제 공간을 쟁취하고, 기하학자가 그것을 그 외면으로써 한정하려고 하면, 그 외면 너머로 팽창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365p]


- 그러한 물의 차원은 무한의 표시를 지니고 있다. 자체의 물질에 의해 그토록 잘 통일되어 있는 세계 속에서 높은 쪽, 낮은 쪽, 왼쪽, 오른쪽을 찾는다는 것, 그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이전에 지상의 삶에서 그랬듯이 생각하는 것이고, 잠수를 통해 정복한 새로운 세계에서 사는 것은 아닌 것이다. [369p]


- 우리는 여기서 아무런 할 일도 없는 시선, 더 이상 어떤 특별한 대상을 바라보지 않고 전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기능을 의식하게 된다. [373p]


- 때로, 자신의 밖에 있으면서 존재는 화곡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또한 때로 그것은 ―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 외부에 갇혀 있기도 하다. [379p]


- 무서움은 이 경우 존재 자체의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도망할 것인가, 어디로 피할 것인가? 어떤<밖>으로 도망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피난처로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공간은<지긋지긋한 안-밖>일 뿐이다. [383p]


- 너무나 넓은 공간은, 공간이 충분히 있지 않을 때보다 우리들을 훨씬 더 질식시킨다. [387p]


- 남미의 대초원에서 말로 끝없이 질주한 다음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바로 과도한 질주와 과도한 자유, 또 그럼에도 변함 없는 그 지평선 때문에, 우리들이 절망적으로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넓은 초원은 내게는, 다른 감옥들보다 크기는 해도 감옥의 모습을 띠었다.>[387p]


- 그리고 얼마나 많은 문들이 주저로움의 문들이었던가 ! [389p]


- 만약 스스로 열고 닫았던 모든 문들, 스스로 되열고 싶었던 모든 문들의 이야기를 한닥 한다면, 사람들은 스스로의 전 생애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을 여는 사람과 문을 닫는 사람은 똑같은 존재인가? [390~391p]


- 사람이 밟고 지나간 풍뎅이처럼, 너는 네 자신 밖으로 흘러 나가고, 너의 대단찮은 견고성과 탄력성은 이제 의미가 없다.
오, 사물들을 덮어 지워버린 밤. 오, 밤에 대해서 무심한 창. 오, 빈틈없이 잠궈진 문. 옛날부터 내려와 전달되고 확인되었으나 결코 완전히 이해된 적이 없는 관습. 오, 계단곬의 정적. 옆의 방들의 정적. 저 위, 천정의 정적. 오, 너머니, 내가 어린애였을 때에 그 모든 정적을 그 앞에서 막아 주시던, 단 하나뿐인 어머니.>[398p]


- 루이 랑베르Louis Lambert가 규명한 첫 원고에서, 지금 문제되어 있는 텍스트는 이렇게 되어 있다―<그가 이렇게 그의 모든 힘을 동원하는 때에는, 그는 이를테면 제 육체적 삶에 대한 의식을 잃어버리고, 그의 내장기관들의 더할 수 없이 강력한 작용에 의해서만―그 작용의 효력을 그는 한결같이 유지했는데―존재하며, 자기 자신의 찬탄할 만한 표현을 다르자면 제 앞으로 공간을 후퇴시키는 것이었다.>그런데 결정고에는 이렇게 되어 있을 뿐이다―<그는 그 자신의 표현을 따르자면, 공간을 제 뒤에 내버렸다.>이 두 표현의 움직임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첫째번 형태에서 둘째번 형태로 넘어가면서, 공간을 마주한 존재는 얼마나 큰 힘의 쇠퇴를 보이는가 ! 발작은 어떻게 그런 수정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 그는 요켠대<무관심한 공간>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존재에 대한 명상에서 사람들은 대개 공간을 괄호 속에 넣어 버린다. 달리 말하자면, 공간을<제 뒤에>내버린다. 존재의 망실적 색조에 대한 징후로서,<찬탄>이 빠트려져 버린 것을 주목하기로 하자. 둘째번 표현 방식은 작가 자신의 고백대로, 더 이상 찬탄할 만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하는 존재가 그의 사유에 있어서 자유롭기 위해 공간을 후퇴시키는, 공간을 밖으로, 일체의 공간을 밖으로 밀어내는 그 힘은, 사실 찬탄할 만했기 때문이다. [399p]


- 그것들은 고유한 의미를 함축한 재, 통상의 언어 위로 두드러져서 거기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언어의 지나침에서 오는 것도, 언어의 서툼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놀라게 하려는 의지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아무리 야릇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그것들은 원초성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단번에 태어나고, 그러자마자 완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는 그 표현들은 현상학의 경이들이다. 그것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판단하고 사랑하기 위해, 그것들을 우리들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현상학적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그 이미지들은, 그것들은 세계를 지워 버리고, 과거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어떤 앞선 경험에서도 오는 게 아니다. 우리들은 그것들이 초심리적인 것임을 정녕 확인할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들에게 고독의 가르침을 준다. 한 순간, 그것들을 제 자신만을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그것들을 그것들의 느닷없음 가운데 파악한다면, 우리들이 그것들만을 생각하며 우리들 전체가 그 표현들의 존재 속에 들어가 있음을 우리들은 깨닫게 된다. [403p]


- 다듬어진 이미지는 그 원초적인 힘을 잃는다. [405p]


- 상상을 하는 연륜에 있을 때에는, 어떻게 또 어째서 상상하는가를 말할 능력이 없다. 그런가하면, 어떻게 또 어째서 상상하는가를 말할 능력이 있을 때에는, 더 이상 상상르 하지 않는다. [40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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