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초판 1쇄 발행 2000년 7월 10일
초판 122쇄 발행 2010년 3월 15일
글쓴이 조세희
펴낸이 조중협
펴낸곳 이성과 힘(서울 송파구 잠실동 44 레이크팰리스 121-701)
- 작가의 말 ‘파괴와 거짓 희망, 모멸의 시대’
작가가 되는 것을 포기할 무렵 내가 했던 생각은 ‘작가’는 아무나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작가가 아닌 삼십대 일반 직장 ‘시민’이 되어 칠십년대를 살았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에게 칠십년대는 파괴와 거짓 희망, 모멸, 폭압의 시대였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슬픈 마음으로 쓰고 있다. 천구백사십년을 전후해 태어난 우리 세대가 어느 사이에 서른을 넘어서 ‘힘없이’ 무너지는 것이 평범한 직장인이 된 나의 눈에도 보였다. 물론 이것은 우리 세대가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선배 세대들의 경우를 보아도 젊은 시절에 인간의 진짜 척추라고 믿고 애써 간직하려고 했던 귀한 가치들, 그리고 개개인의 마음속 소유인 아름다운 정신을 부양 가족 거느린 가장이 되며 밖으로 던져버리는 일은 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리 무서운 군부 독재 치하라고 해도 그때 우리 모두가 정치적 압제에 시달렸던 것은 아니다. 독재 기관의 감시를 받고, 체포되어 고문받고, 억지 재판 과정을 거쳐 감옥에 갇히는 사람은 구성원 전체를 두고 볼 때 말할 수 없이 적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과거 어느 세대보다 높은 교육을 받았다는 바로 우리 세대가 윗세대들과 ‘연대’라도 한 것처럼 잘 단결해 무서워하고 있었다. 다수가 무서워한 것은 암흑 독재 체제가 냉혈 하수 부역자들을 시켜 올바름에 맹렬한 폭력으로 가한 체포-고문-재판-투옥만이 아니었다. 물론 잡혀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포였다. 그러나 강압 통치자들이 무슨 짓을 하든 가만히만 있으면 자신과 가족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순응과 무저항을 안전한 생활 방식으로 터득한 사람들에게 고문이나 투옥은 밤잠을 빼앗아갈 정도의 공포가 이미 아니었다. 육십년대에 새파랗게 젊었던 우리 세대는 서른 몇 살이 되어 바로 윗세대들과 똑같이 ‘실패자’가 되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탄압은 정치와 경제 양면으로 가해졌다. 자세히 보면 지금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만, 그때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또 정의가 되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택의 중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어느 날 나는 경제적 핍박자들이 몰려 사는 재개발 지역 동네에 가 철거반-집이 헐리면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되는 세입자 가족들과 내가 그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담을 쳐부수며 들어왔다-과 싸우고 돌아오다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다. ‘난장이 연작’은 그 노트에 씌어지기 시작했다.[8~9p]
- 그들은 강냉이를 먹기 위해 튀기러 오는 게 아냐. 옛날 생긱아 나서 아이들을 앞세우고 올 뿐야.[28p]
- 칼 가는 사람은 좋은 칼에 놀란다. 처음부터 고운 숫돌에 조심스럽게 간다. 요즘 사람은 백 번을 죽었다 살아나도 이런 칼을 만들 수 없다고 칼 가는 사람은 말한다. 이 칼을 만들기 위해 대장장이는 수많은 담금질, 수없이 많은 망치질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장장이 아들은 풀무질을 했을 것이다. 풀무질을 했을 대장장이 아들은 아직 살아 있는지 모른다. 살아 있다고 해도 할아버지가 다 되었겠지. 그 아들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대장장이는 벌써 전에 죽었을 것이다. 대장장이가 아직 살아서 망치질을 하던 때에 이 칼을 만들게 해 써온 시어머니도 돌아갔다. 신애는 마흔여섯 살이다. 칼을 모르는 사람에게 큰 칼을 갈게 해서는 안 된다. 작은 칼이라면 괜찮다. 몇 해 전에 산 막칼이다. 이런 칼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도 별로 없다. 칼 소리를 내며 온 칼장수에게서 백팔십 원을 주고 샀다. 언제 어디서나 비슷한 값으로 살 수 있는 막칼이다. [31~32p]
- 신문에는 부정이 드러나는 공무원은 의법 조처하겠다는 높은 사람들의 말이 자주 실렸다. 그러나 뒷집 남자는 부정이 드러나지 않았던지 까딱없었다. ‘부정이 드러나면’이라는 말에는 참으로 묘한 풍자가 들어 있다. [37p]
- 그것은 아주 복잡한 것이다. 딸애가 제일 어려워하는 연립방정식의 풀이 과정이나 화학의 원소 기호보다도 복잡하고, 또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57p]
- 앞뒷집의 텔레비전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딸애가 따라 엎드리며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신애의 귀에는 수돗물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59p]
-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80p]
- 할아버지의 아버지대에 노비제는 사라졌다. 증조분 내외분은 아무것도 몰랐다. 나중에서야 해방을 맞았다는 것을 알았으나 두 분이 한 말은 오히려 “저희들을 내쫓지 마십시오”였다. 할아버지는 달랐다. 할아버지는 유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늙은 주인은 할아버지에게 집과 땅을 주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일이었다. 모르는 면에서는 할아버지나 증조부나 같았다. 증조부대까지는 선조들이 살아온 경험이 도움이 되었으나 할아버지대에는 그것이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할아버지에게는 어떤 교육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집과 땅을 잃었다.[88p]
-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110p]
-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 언덕 위 교회의 목사는 달랐다. 그는 인간의 숭고함·고통·구원을 말했다. 나는 인간이 죽은 다음에 또 다른 생을 시작한다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는 숭고함도 없었고, 구원도 있을 리 없었다. 고통만 있었다.[115p]
- “에유, 정이란 게 뭔지!”
명희 어머니가 말했다.
“정이란 게 이렇게 더러운 게라우.”[119p]
- 우리집이, 이웃집들이, 온 동네의 집들이 보이지 않았다. 방죽도 없어지고, 벽돌 공장의 굴뚝도 없어지고, 언덕길도 없어졌다. 난장이와 난장이의 부인, 난장이의 두 아들, 그리고 난장이의 딸이 살아간 흔적은 거기에 없었다. 넓은 공터만 있었다. [141p]
-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윽고 친구가 말했다.
“모두 한편이 돼가고 있다.”
“왜?”
동생이 물었다.
“그 까닭을 알아야 돼. 한편이 돼가면서 마비 현상을 일으키고 있어.”
“그거야, 마비.”[153p]
- “난 몰랐어.”
경애가 말했다.
“그게 너의 죄야.”
윤호가 말했다.[177p]
- 나는 가계부를 덮었다. 어머니가 두 개의 어금니만 뽑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달에 삼천 원의 돈을 문화비로 지출할 뻔했다[210p]
- 그들은 낙원을 이루어간다는 착각을 가졌다. 설혹 낙원을 건설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나는 했다.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를 우리에게는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낙원 밖, 썩어가는 쓰레기더미 옆에 내동댕이쳐둘 것이다. 그들은 냉·온방기를 단 승용차에 가족을 태우고 나가다 교외로 이어진 도로 옆에서 우리를 발견할 것이다. “더럽기도 해라!” 그들의 부인이 말할 것이다. “게으른 낙오자들!” 그들이 말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일한 만큼 주지 않은 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221p]
- “종업원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올린 수치스러운 이윤을 어느 사회에 어떻게 환원합니까? [230p]
- 아버지 : 그 아이가 뭘 잘못했니?
영희 :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놀려댔어.
아버지 ; 그 아이는 돌맹이를 던져 우리집 창문을 깨뜨리지 않았다. 그 아이에겐 잘못이 없어. 아버지는 난장이야. [232p]
- “바다에서 제일 좋은 것은 바다 위를 걷는 거래. 그 다음으로 좋은 것은 자기 배로 바다를 항해하는 거지. 그 다음은 바다를 바라보는 거야. 하나도 걱정할 게 없어. 우리는 지금 바다에서 세 번째로 좋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257p]
- 우리에겐 지켜야 할 게 많아. 지키면서, 실제로 행동이 가능한 변혁을 늘 생각해야 돼.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근거 없이 성공한 걸로 믿고 있고, 기회만 있으면 때려부수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들을 설득하든가 안 되면 반대로 밀어붙일 힘을 가져야 된다. 저희들을 위해 우리가 하는 고마운 일은 생각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274p]
- 제군, 그 동안 고생 많았다. 정말 모두 열심히들 공부해주었다. 그런데 내가 담당한 수학 성적이 예년보다 떨어져 제군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다.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예비고사에서의 수학 성적이 나빠진 책임이 수학 교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제도를 만든 당국자, 그 제도를 받아들인 교육자와 학부모, 네 개의 답안 중에서 하나를 골라잡도록 사지선다형의 문제를 만든 출제자, 문제지 인쇄업자, 불량 수성 사인펜 제조업자, 수험 감독관, 키펀처, 슈퍼바이저, 프로그래머, 컴퓨터가 있는 방의 습도 조절 책임자, 판정자 역을 맡은 컴퓨터, 물론 나의 수업을 받은 제군 자신, 그리고 제군 앞에 서서 가르쳐야 될 나에게 늘 엉뚱한 주문을 한 진학지도 주임과 그 위의 교감·교장, 또 가르침을 주고받아야 할 제군과 나의 기분에 영향을 준 학교 밖 구성원들의 계획·실천·음모·실패 등 책임소재를 정확히 밝히자면 들어야 할 것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을 나 혼자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누구입니까?
한 학생이 물었다.
누가 선생님께 지웁니까?
그들이다.
교사가 말했다.
다른 학생이 일어섰다.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이다. 누가 이 이상 정확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 자신에게는 죽을 때까지 져야 할 책임이 하나도 없다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모두 그럴듯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다. 제군이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왔고, 또 고등학교에서 갖는 마지막 시간이기 때문에 입학 시험과 상관이 없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나는 별수가 없어서 수학 과목을 내놓았다. 다음 학기부터는 윤리를 맡으라는 통보를 이미 받았다. 제군도 잘 알다시피 윤리는 실제의 도덕 규범이 되는 원리이다. 제군이 결정자라면 수학을 못가르쳤다고 책임을 물은 사람에게 윤리를 떠맡길 수 있겠는가? 아무도 모르게 무서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 시간표에서 윤리 과목을 빼버리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제군과 제군의 후배들을 인간 자본으로 개발하겠다는 음모이기도 하다. 제군과 나는 목적이 아니라 어느 틈에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 의도를 진작 알아차려야 했는데 제군은 대학에 가기 위해, 나는 제군을 시험에 붙게 하기 위해 뛰다가 노골적인 의도들도 읽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너무 바쁘기만 했다. 그동안 바빴던 것은 과연 우리의 가치를 위해서였을까? 짧은 시간이지만 생각을 해보자. 내가 편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용서하라.[304~306p]
- 나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무엇을 글로 써서 제군에게 읽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 줄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물론 나는 실망했다. 수학을 빼앗긴 것이 나에게는 너무 큰 슬픔이어서 한 문장도 바로 끝낼 수 없었다. 나는 나무에서 내려온 최초의 인류의 이야기와 식물처럼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합성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식물이나 다른 동물을 먹어 영양으로 하는 동물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제군의 창조력을 억제하거나 아예 없애버리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그들은 우리의 부분적인 실태가 폭로되는 것도, 어떤 개혁이 이뤄지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한 주전자의 커피와 한 말의 술을 마시면서 좋은 글을 못 쓰고 울기만 한 나를 이해하라. 그러나 나를 동정해서는 안 된다. 나는 제군이 아직 모르는 작은 혹성으로 우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316~31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