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초판 1쇄발행_2003년 8월 12일
34쇄 발행_2010년 3월 23일
지은이 박민규
펴낸이 이기섭
펴낸곳 한겨례출판(주) - 121-750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116-25 한겨례신문사 4층
- 1번 김익환! 네, 우리는 민족 중흥의…… 2번 정형기! 네, 우리는 민족 중흥의…… 3번 이상일! 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전국의 모든 아이들이 국민교육헌장을 줄줄 외우고 있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그것이 교사들의 강압과 폭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어쨋거나 어린이 전원이 저런 긴 문장을 몽땅 외우고 있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적이 없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칭기즈 칸이나 히틀러라 해도 그런 나라를 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왠지 모르게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칭기즈 칸이나 히틀러가 그런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할리도 없기 때문에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19p]
- 개인에 따라 그 차이는 있겠지만, 국민교육헌장 암기의 가장 큰 함정은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開發)’하는 것이 아니라 ‘계발(啓發)’한다는 대목이었다. 나름대로 통달을 자부하던 아이들도 애당초 ‘계발’을 ‘개발’로 잘못 외워 매를 맞기 일쑤였다. 나는 ‘계발’이 도통 무슨 뜻인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외우는 게 상책이라 특히 발음에 유의해 그 부분을 낭독하곤 했다. 아마도 내가,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타고난 나의 소질을 개발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20p]
- 그리고 그 집에는, 다른 무엇보다 마치 인어와 같은-얼굴은 도다리고 몸은 사람인 주인 아줌마가 있었다.[26p]
- 아버지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가셨다.<앞으로의 국제 정세와 한국의 앞날>은 한 번의<에 또>와 더불어<국제 사회 속에서의 인천, 과연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로 그 초점이 옮겨졌고, 다시 두 번의<에 또>와 더불어 갑자기<현 인천법원의 김판사는 어떻게 사법고시를 패스했는가?>로 이어졌다. 어떻게요?
“파를 콧구멍에 끼워서 잠을 쫓았단다.”
“파를요?”
“그래, 파를!”[27p]
- “어머, 귀여워라.” 그날 나는 가증스레 살살 웃는 마스코트 곰을 보고 OB의 팬이 되기로 결심한 여동생을 쥐어박았고, 건국대에 진학하게 된 사촌누나와의 연을 마음속으로 완전히 끊어버렸다. 알게 모르게, OB와 나의 악연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40~41p]
- 예컨대 모든 슈펀맨들의 이름이란 그런 것이다. 슈퍼맨의 경우엔 “어, 클라크? 모슨 시계의 일종인가?” 허기 쉽지만 사실은 사람의 이름이며, 007의 경우엔 “어, 본드? 접착제를 말하는 건가? 하기 쉽지만 역시 사람의 이름이며, 배트맨의 경우에도 ”어, 부르스? 그건 춤이잖아?“ 하기 쉽지만 역시 사람의 이름인 것이다. [42p]
- 졸업식장엔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삼촌, 두 명의 여동생과 세 명의 고모가 오셨다. 어린 마음에도 이러실 필요까지야,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린 내가 몰랐던 또 하나의 사실은―졸업식이란 원래 그런 것 이란 사실이었다.[42~43p]
- 사실 교복보다는 삼미의 로고가 새겨진 야구잠바가 입고 싶었지만, 가입비 5,000원을 생각하며 나는 아버지의 기분을 한껏 맞춰가고 있었다. 흰 양말에 학생화를 신고 쓰리세븐 가방을 손에 들고 나니, 역시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한술 더 떠, 난데없이 교모챙에 손을 붙이며 “경례”라고 큰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의 기쁨이 거의 2,000원 선을 넘어섰다고 생각한 나는, 숨쉴 틈을 주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리고 “어디 가니, 이제 밥 먹어야지”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문을 열며 또박또박 얘기했다. “영어가 너무 재미있어요.” 그 순간 나는 아버지의 기쁨이 곧바로 4,500원 선을 돌파하며 상한가를 치는 장관을 볼 수 있었고, 이제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민병철 생활영어」만 보면 된다는 계산을 그 순간 끝내고 있었다. 좀 비굴한 감이 있긴 하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그렇게도 크다는 머리에 의존하며 살아가던 시절이었다.[47p]
- 프로야구 원년. 우리의 슈퍼스타즈는 마치 지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패배의 화신과도 같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오늘도 지고, 내일도 지고, 2연전을 했으니 하루를 푹 쉬고, 그 다음 날도 지는 것이다. 또 다르게는 일관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용의주도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더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주도면밀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고, 쉽게 말하자면 거의 진다고 할 수 있겠다.[61p]
- 한 게임 한 게임 그것은 분명 평범한 패배가 아니었고, 뭔가 야구의 상식이 무너지는 느낌의 패배였고, 우주의 역행과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다는, 그런 느낌의 패배였다. 우주를 바로잡고 자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늘 생각해온 우리의 응원은, 그래서 더욱 필사적이 되어갔다. [63p]
- 부러웠고, 아니 부끄러웠고, 아니 부러움과 부끄러움은 다정한 오누이와 같다는 생각도 들고, 즉 부러운 게 있기 때문에 부끄러운 게 있는 것 같기도 했고,[66p]
- OB의 어린이 회원들이 박철순의 너클 볼을 연습하고, 신경식을 따라 다리 찢기를 연습하던 그 순간, 삼성의 어린이 회원들이 이만수를 향해 “데끼리!”를 외쳐대던 바로 그 순간, MBC의 어린이 회원들이 “게브랄 티!"를 외쳐대던 바로 그 순간, 해태의 어린이 회원들이 2루에서 3루로 도루한 김일권에게 ”홈스틸!“을 목 놓아 외치던 그 순간, 5위인 롯데의 어린이 회원들이 ”져도 좋다, 멋진 야구를!“의 플랜카드를 하늘 높이 치켜들던 바로 그 순간―우리는 세상을 원망하며 인생을 자포자기하는 법부터 배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져도 좋다, 멋진 야구를!“과 같은 말도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 배부른 말은 5위인 롯데의 팬들에게나 가능한 것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70~71p]
- OB 베어스의 전기 우승으로 OB맥주의 판매량이 크게 증가했고,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들을 통해 프로 선수들의 플레이. 프로 선수들의 훈련 모습, 프로 선수들의 습관, 프로 선수들의 취미, 프로 선수들의 옛 모습, 프로 선수들의 출신고, 프로 선수들의 주특기, 프로 선수들의 징크스, 프로 선수들의 스캔들, 프로 선수들의 음주량, 프로 선수들의 영양식, 프로 선수들의 자가용, 프로 선수들의 애완견, 프로 선수들의 좌우명, 프로 선수들의 애창곡, 프로 선수들의 나를 감동시킨 이 한 권의 책과, 그들의 연봉이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열기는 ‘프로’라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가치관에 대한 열띤 토론과 찬사를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각계각층, 남년노소, 신사숙녀, 지휘고하를 막론한 모든 이들이<어느날 아침 눈을 떠보니 프로가 되어 있더라>라는 신앙 간증을 하게끔 만드는―거대한 부흥회와 같은 성격으로 세상을 회개시키기에 이르렀다. 뭐랄까, 마치 지구를 역행시킨 슈퍼맨처럼 그것은 빠른 속도였고, 그래서 시간을 되돌린 슈퍼맨처럼 세상을 눈 깜짝할 사이에 재구성해버린 것이다.[76p]
- ➀ 이젠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당시 가장 많이 회자되던 프로복음 1호 되겠다. 프로가 안 되면 아마 죽을 거라는, 최후의 통첩이 실린 무게 있는 복음이다.
➁ 난, 프로라구요: 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앞으로는 잔업이든 휴가 반납이든-아무튼 불꽃 같은 프로의 삶을 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뚜렷이 공고한 프로복음 2호 되겠다. 한편 당돌해 뵈면서도 목숨의 부지를 위한 비장한 각오와 잔잔한 애수가 서려 있는 복음. 과거 유신복음 중에는 같은 맥락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있다.
➂ 프로의 세계는 양육강식의 세계 아닙니까?: 주로 비열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룬 자들이 내뱉던 프로복음 3호 되겠다. 「동물의 왕국」을 인간의 삶에 적용시킨 친(親)환경주의, 동물애호주의의 복음. 이 복음을 토대로 어쟀든 이기면 된다. 어쨌든 돈만 벌면 된다는 새로운 세계관이 빠르게 형성될 수 있었다.
➃ 하루빨리 프로가 되게: 주로 회사의 상사들이 신입사원들에게 쓰던 프로복음 4호 되겠다. 쉽게 말해, 할 일이 태산 같다는 말이다.
➄ 허허, 이 친구 아마추어구먼: 미전향 아마추어들에게 전도의 목적으로 쓰이던 프로복음 5호 되겠다. 가벼운 멸시와 조롱을 담아서 그들의 전향을 유도했다.
➅ 맛에도 프로가 있습니다.: 요식업계를 통해, 민간에서 처음으로 창출된 프로복음 6호 되겠다. 거창한 문구로 위장해 있으나, 그 어원은 ‘옆집보다 우리 집이 더 맛있어요’라는 소박한 것이다.
➆ 이러고도 프로라고 말할 수 있나?: 주로 실수를 범한 부하직원에게 상사가 내뱉던 프로복음 7호 되겠다. 쉽게 말해, 나가 죽으라는 말이다.
➇ 프로의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이다: 아직 멀었다. 더 높은 경지의 프로 세계가 있으니 분발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프로복음 8호 되겠다. 주로 대학교수나 무슨 연구소의 소장이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최대 급소인 무식(無識)의 혈을 찌른 고급 복음이다.
➈ 프로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 아마추어 음해와 더불어 야근의 생활화 고착을 목표로 한 프로 복음 9호 되겠다. 이후 아마추어는 책임감이 없다는 사회적 무의식과 야근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기업 풍토가 널리 확산된다.
➉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 한국 경제사에서 여성 고급 인력의 필요성이 대두될 때 나온, 그러나 여성 고급 인력의 필요성과는 아무 상관 없는 프로복음 10호 되겠다. 역시 거창한 문구로 위장해 있으나, 그 원래의 뜻은 ‘옷 사세요’라는 말이다.
⑪ 프로주부 9단 : 자칫 느슨해지기 쉬운 주부들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만든 프로복음 11호 되겠다. 주부가 앞장서서 살림도 프로로 하고, 애들도 프로로 키우라는 거시안적 포석이 깔린 복음, 승단 심사와 발표를 어디서 하는지는 알 수 없다.[77~78p]
- 대통령을 뽑거나 국회의원을 뽑을 때와는 달리, 적어도 야구에선 ‘다 똑같은 놈들이야’라거나 ‘전부 도둑놈들이야’와 같은 태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야구에 관심이 없는 이라 해도, 경기를 죽 지켜보다 보면 어쨌든 누군가를 응원하고 있거나 어떤 팀의 선전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야구란 그런 것이다.
물론 위의 표현에 대해, 만약 그대가 정치인이라면 심한 반감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그대는 말한다. “아니, 그럼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야구보다 못하다는 얘기야?” 물론이다.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과 국회의원도 야구보다 위대하지는 못했다. 아니, 애당초 더 위대할 수 없다. 정치와는 달리, 야구에는 원칙과 룰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80p]
- 거짓말처럼 흰 눈이 내렸던 그해의 크리스마스 날, 삼미는 27명의 선수 중 11명을 방출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도 미워했던 그들의 이름을 보는 순간, 나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85p]
- 잘 관찰해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본래 위치로 돌아온다. 아니, 어쩌면 세상은―결코 사라지거나, 떠나거나, 달라질 리 없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질량 보존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운명’과 같은 것에도 질량이 있으며, 그것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진정코?
진정코![104p]
- 놈은 울고 있었다. 뭔가 말을 건네려 했지만, 하염없이 뺨을 흘러 내리는 눈물을 보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결국 실컷 울도록 내버려두었고, ‘착’ 하고 얹었던 어깨 위의 손을 거둬들였고, ‘휙’하며 증발하는 놈의 눈물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날의 오후는 그 눈물과 함께 증발하고 있었다.[118p]
- 나는 아직도―괴수가 코앞에 서 있고, 본사에선 “빨리 대피하게, 빨리!”를 외치는데도 혼자 숙직실에 남아 “흑흑~ 사장님, 저는 최후의 순간까지 회사를 사수하겠습니다! 으악!” 하고 괴수에게 밟혀 죽은 공장장과, 제작비 절감을 위해―괴수의 알이 터진 장면을 실제 프라이팬 위의 계란 프라이 클로즈업으로 깔끔하게 처리해준 그 영화의 감독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영화는 그런 사람이 만들어야 한다.[120~121p]
- 그날 밤 나는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그저 평범하다고 생각해온 내 인생이 알게 모르게 삼미 슈퍼스타즈와 흡사했던 것처럼, 삼미의 야구 역시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야구였단 사실이다. 분명 연습도 할 만큼 했고, 안타도 칠 만큼 쳤다. 가끔 홈런도 치고, 삼진도 잡을 만큼 잡았던 야구였다. 즉 지지리도 못하는 야구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야구를 했다는 쪽이 확실히 더 정확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
평범한 야구를 했던 삼미 슈퍼스타즈.
이 얼마나 적확한 표현이란 말인가. 그러나 거기서 파생하는 또 하나의 의문. 확실히 평범한 야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삼미는 그토록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팀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걸까. 그것은 아마 기록과 순위의 문제 때문이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으나, 곧 평범한 야구라면 최하위를 기록할 이유가 없다는 쪽으로 다시 생각의 흐름이 바뀌어갔다. 그렇다 평범한 야구란 6개의 팀 주에서 3위나 4위를 달리는 팀의 야구를 일컫는 말일 테지. 그럼 왜?
결론은 프로였다.[125p]
-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프로야구 원년의 종합 팀 순위로 그것을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6위 삼미 슈퍼스타즈: 평범한 삶
5위 롯데 자이언츠 : 꽤 노력한 삶
4위 해태 타이거즈 : 무진장 노력한 삶
3위 MBC 청룡 :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한 삶
2위 삼성 라이온즈 : 지랄에 가까울 정도로 노력한 삶
1위 OB 베어스 :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 노력한 삶
아아, 실로 무서운 프로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고 16살의 나는 생각했다. 그런 평범한 삶보다 조금 못하거나 더 떨어지는 삶은 몇 위를 기록할 것인가? 몇 위라니? 그것은 야구로 치자면 방출이고, 삶으로 치자면 철거나 죽음이다. 그런 삶은 순위에 낄 자리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살아도 눈에 흙을 뿌려야 할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이 프로의 세계니까.[126p]
- 결국 문제는 ‘평범’의 기준에 관한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평범인가? 거기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1980년대의 세상은 3위 MBC 청룡과 4위 해태 타이거즈를 하나로 꽉 묶어주는 새로운 용어 하나를 만들어낸다.
중산층.
바로 중산층이다. 이 파워풀한 단어는, 그 후 세상을 바꿔나가는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작용한다. 이 하나의 단어로 인해, 이제 확실히 도표의 3, 4위가 새로운 평범의 기준이 된 것이다. 무진장 노력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남들 사는 만큼 사는 거죠.”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죠.”
라고 말하는 이상한 세상이 온 것이다.[127p]
- 가을이 되면서 내 이름은 학년 전체 석차의 1, 2위를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나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도, 나를 대하는 담임의, 선생들의, 학생주임의, 교무주임의, 교감의, 교장의, 매장 아저씨의, 소사의 태도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134p]
- 나는 무렵, 대학에 들어가면 저 거센 혁명의 물결 속에 반드시 뛰어들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뭔가 어색한 문장이지만, 당시의 내 머리는 혁명도 ‘대학에 들어간 후’라는 별 희한한 사고 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아니, 알게 모르게 그런 기능이 장착되어 있었던 것이다.[136~137p]
- 여당이 돼야 나라가 안정되지. 동네의 반장은 그렇게 얘기했다. 경제가 흔들려선 안 돼. 아버지는 그렇게 얘기했다. 주변의 미물들은 그렇게 말한다 쳐도, 신문은―당선을 축하하며 화합과 안정을!
혁명의 주체가 되리라 생각했던 서민층과 중산층이, 실은 그 지층이 더욱 다져지길 원했다는 사실은―18살의 나로서는 감탕키 힘든 충격이었다. [139p]
- 일류대를 졸업한 사람들의 소속감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훨씬 상회한다. 아마 마음 같아선 이마 한복판에 ‘일류대’라는 문신이라도 파고 싶을 것이다. 문신의 글씨체는 ‘신명조’ 내지는 ‘견고딕.’ 글시의 컬러는 블랙이다. 왜 그런지에 대해선 뭐라 논리적인 답변을 못하겠다. 아무튼 그런 느낌. 간혹 그런 노골적인 표현보다는 보다 완화된 ‘I대’와 같은 단어를 선택하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마인드는 같다. 물론 I대라고 한다면 ‘일’로 시작하는 타 학교들과 혼동의 소지가 있겠지만 그런 걱정은 접어두시길. 왜냐하면 자신의 학교를 제외한 타 학교들은 모두 'i대‘라고 새겨야 하기 때문이다. 농담 같겠지만 농담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을 붙잡고 물어본다면, 백이면 백 모두 농담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지금 물고문을 가하고, 인두로 지져야 겨우 실토할까 말까 한 일류대 출신의 내심(內心)을 실토하는 것이다.
좋게 말하자면 프라이드가 강하단 얘기인데 나쁘게 말하자면 겸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들은 결코 진심으로 ‘한 수 배우겠습니다’라든지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와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겉으로는 습관처럼 내뱉으며 살겠지만, 물고문을 가하고 인두로 지진다면 사실은 그게 아니었음을 분명 자백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이들은 인생에서 결코 겸손해야 할 필요가 없거나, 그럴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다. 사회적으로 보면 큰 병폐고, 한 인간으로서는 치명적인 결점이다.[141~142p]
- 시골 출신의 신입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가능한 한 자신의 촌티와 사투리를 숨기려는 스타일과, 자학을 하듯 그 오버액션을 연출하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물론 더 큰 상처를 받는 쪽은 후자지만, 클립턴 행성의 인간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행성인들은 술자리가 심심하다 싶으면 이들의 촌티와 사투리를 부추겼고, 이들은 이미 15:0이라는 심정으로 자학적인 희극과 코미디를 연출하곤 했다. ‘소속’의 슬픔이란 그런 것이다. 이른바 가장 우수하다는 평을 듣는 집단에서도 이 ‘소속’의 콤플렉스 앞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사실 그래서, 인간은 절대 평등할 수 없다.[144~145p]
- 내가 원한 것은 바로 그 ‘소속감’이 아니었던가. 학문의 성취나 이상의 실현 따위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물론 대학 생활을 마라톤에 비유한다면 자신에 대한 도전과 끝없는 성취를 목적으로―42km가 넘는 길고 긴 거리를 혼신의 힘을 다해 질주하는 인간도 있겠지만
그런 인간은 그런 인간이고
나라면 쉬엄쉬엄 걷다가 놀다가 결국엔 ‘졸업’이라는 버스를 타고 결승점의 테이프를 끊어버리겠다. 이 말씀이다.[146p]
- 확실히 이곳은 음악과 기행과, 이화에 월백하는 풍류가 이곳저곳에 넘쳐나고 있었다. 또 바라만 봐도 마음속의 우루사가 폭발하는 미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아아, 음악과 풍류와 우루사와 미인도 없이―나는 도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걸까.[155p]
- 내가 하는 일은 주인이 술을 마시는 동안 ‘혹시’ 손님이 오면 주문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주인 일행의 테이블에 술과 안주를 나르는 것이었다. 일은 대개 ‘여전히’ 쪽이었다. 물론 가게가 후미진 골목 안에 위치한 것도 이유는 이유겠지만, 더 큰 이유는 세상의 손님들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156p]
- 대부분이 연극을 하거나 화가거나 소설가거나 음악가이거나 영화배우거나 전위예술가이기보다는―그것을 지망하는 사람들이었고, 여자들은 뭘한다 해도 좋을 미인들이었다.[157p]
- 대기권과 성층권을 지나, 그녀가 결국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물질들로 이루어진 이름 모를 혜성처럼 작아졌을 때, 나는 갑자기 그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달리는 것뿐이란 생각이 들었고, 뭔가 ‘용건’이나, ‘아, 네’와는 다른 얘기를 그녀에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혜성의 길고 아름다운 꼬리를 밟으며 나는 점점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저기요!” 나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저기……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튼……
전……
바쁘지도 않고……
정말입니다……[171p]
- 나는 그녀가―나보다 2살 연상이며, 명문으로 알려진 여자대학을 ‘대충’ 다닌다는 사실과, 매일 이런 식으로 술을 마신다는 사실과, 집이 서울인데도 불구하고 오피스텔에서 혼자 지낸다는 사실과, 다른 무엇보다―변동 사항은 늘 있겠지만 그 무렵 3명의 애인과 7명의 섹스 파트너가 있다는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숫자가 아닐 수 없다고―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얘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털어놓았고,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야지’라는 표정으로 그녀의 얘기를 듣곤 했다.
애인들이 그 사실을 아나요?
몰라, 알면 또 어때. 도망밖에 더 가겠어?
음, 그정도의 풍족한 숫자라면 그럴 수 도 있겠군―하고 나는 생각했다.[173p]
- 내가 할 일은―그녀가 문을 걸어 잠그고 마음 놓고 울거나 마음 놓고 소변을 보거나 언제든 2번의 구토를 할 수 있는 깨끗한 화장실이 되어주는 것. 비록 변기의 디자인과 인테리어가 촌스럽다 해도 결코 칸막이로 2개의 화장실로 나눈다거나, 여러 사람이 공용으로 쓰는 것이 아닌, 넓고, 아무도 없고, 언제나 깨끗한 그녀의 화장실.[175~176p]
- “죽이지 않을 걸 감사히 생각해.”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저씨와 아줌마들은 웃고 있었고, 젊은 남자들은 ‘죽어도 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인을 데리고 다니는 일은 때로 목숨을 담보로 한다는 걸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179p]
- 어디가 잘못된 건지 탱크는 전후방·360° 좌우 작동이라는 매뉴얼과 달리, 전진만이 가능했다. -중략-
청춘은 고장난 탱크와 같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누구나 그런 모습으로
내일의 문 앞에 서 있었다.[185p]
- 5분이다.[187p]
- 그날 마지막으로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 마음은 편했고, 페니스는 불편했다. 그녀의 질이 메말라서였다. 페니스를 빼고 보니 그녀는 울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는 없고, 그저 느낄 뿐이었다. 덕분에 마음은 불편해지고 페니스는 편해졌다. 하나라도 편한 게 어디야.[199p]
- 결국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가 소속된 학교에 자식을 보내고 싶어하는―돈 많은 부모들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무작정 시작한 일이었는데, 아버지의 월급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이 정말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위도와 경도로 나뉜 이 세상에서 일류대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204p]
-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부스스. 재떨이 위로 떨어지는 재를, 나는 본다. 재는, 뭉텅이다. 작고, 빨간 용암과 같은 것이, 죽어가는 동물의 눈빛처럼, 그 속에서 깜박인다.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말을! 이봐 당신 귀먹었어?” 귀는, 잘 들린다. 그래서, 당신이 날 당신이라고 부르는 그 점이 상당히 거슬리지만, 나는 침묵한다. 마치 죽은, 동물 같다. 아니 때로는
죽은 동물보다 더, 시선을 둘 곳이 없다. 때문에 과장의 재떨이라든지, 등 너머의 달력 같은 곳을 나는 응시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매직아이라도 하듯 초점을 분산시켰다가―애써 그 상태를 유지했다가―다시 모으곤, 한다. 다른 무엇보다, 눈물을 참기, 위해서다. 그래서다. “당신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와 같은 말에는, 그렇다 도대체가 답이 없다. 누구라도 그런 말을 듣게 되면―재떨이 라든지, 달력과 같은 곳을 바라보며 수정체를 조절하기 마련이다. 그래서다. 그래서 눈을 뗄 수 없는, 5월 3일이다.[211p]
- 야구로 치자면, 1998년은 데드볼의 시기였다. 세상의 곳곳에서 데드볼을 맞는 사람들이 즐비했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 무렵―나는 이혼을 했고, 얼마 후 실직을 했다. 죽어도, 좋았고, 죽는 줄, 알았다. 그랬다. 이 글을 일고 있는 당신의 생각처럼,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가 있는 거겠지. 그렇게 말해도, 좋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이제 조금은―그때 일어난 일의 원인을 알게되었단 사실이다. 좋도록 하세요. 모쪼록. 인생은 다소, 다사다난한 것이 아니겠는가.[215~216p]
- 이 당에서, 보편적인 결혼의 대부분은 『가정을 버려야 직장에서 살아남는다』와『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의 결합이다.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그래서 누구나 사는 게 고달프다. 나 역시 그런 인간의 하나였다.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아내의 외눈이 그 사각(死角)을 봐주기를, 자신의 사각 속에서 나는 늘 갈망했었다. 물고기는 끝끝내 그 사각을 확인하지 않았다. [217p]
- 나는 비로소 친구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현실적인 것은 초·현·실·적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219p]
-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입사 시험을 치를 때 면접관이 던진 질문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라고 나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자본주의를 사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먹고 살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가진 것 없이도, 투자가 없이도 노력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누구에게나 사는 건 마찬가지다. 재미없고, 힘들다. 또 바보가 아니라면, 세상을 더 이상 재미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면서 알게 된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철부지들도, 물신 풍조를 우려하던 몽상가들도, 때가 되면 자신의 손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는―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좋은 습관, 그리고 사는 건 원래 힘들고 재미없다는 사실에 대한 빠른 인식이 필요하다. 그 세 가지만 제대로 갖춘다면 누구나 이 세계에서―먹고, 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이다.[220~221p]
- 위기가 닥치면, 인간들은 회의(會議)를 한다. 회의(懷疑)가 사라질 때까지.[222p]
- 그는 ‘평생 직장’ 철학의 신봉자로 사내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내가 연수를 받던 무렵, 그는 강사로서 ‘평생 직장’의 특강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옷을 벗었다. ‘평생 직원’은 존재해도 ‘평생 직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27개의 크고 작은 교차로와 하나의 대교가 존재한다. 나는 단 한 번도 이 길을 속 시원히 주행해본 적이 없다. 늘 막히거나, 빨간 불이었다. 꾸역꾸역 밀려 있는 차들을 보면 때로 고갱의 그림 제목이 떠오른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223p]
- 주차장을 내려오다 잠시 벽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서였다. 손바닥을 통해, 차고, 서늘하고, 완강한 콘크리트의 기운이 전해져왔다. 내가 퇴출된 회사의 구조는 놀라울 만큼 튼튼한 것이었고, 놀랍게도 나는 그 구조물의 일부가 아니었다.[224p]
- “처음 널 봤을 때……내 느낌이 어땠는지 말해쭐까?”
“어땟는데?”
“9회 말 투 아웃에서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 상황을 맞이한 타자 같았다.”
“뭐가?”
“너 4년 내내 그렇게 살았지? 내 느낌이 맞다면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리고 조금 전 들어온 공, 그 공이 스트라이크였다고 생각했겠지? 삼진이다, 끝장이다, 라고!”
“……”
“바보야, 그건 볼이었어!”
“볼?”
“투 스트라이크 포 볼! 그러니 진루해!”
“진루라니?”
“이젠 1루로 나가서 쉬란 말이야……쉬고, 자고, 뒹굴고, 놀란 말이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봐. 공을 끝까지 보란 말이야. 물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겠지. 어차피 세상은 한통속이니까 말이야. 제발 더 이상은 속지 마. 거기 놀아나지 말란 말이야. 내가 보기에 분명 그 공은―이제 부디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어.”[235p]
- 요는 말이지. 어쩌다 프로가 되었나, 라는 것이야. 생각해봐, 우리는 원래 프로가 아니었어. 그런데 갑자기 모두 프로가 된 거야. 그 과정을 생각해보란 말이야. 물론 프로야구가 세상을 바꾸었단 얘기가 아냐. 요는, 프로야구를 통해 우리가 분명 속았다는 것이지.
속아?
그럼, 전부가 속았던 거야. ‘어린이에겐 꿈을! 젊은이에겐 낭만을!’이란 구호는 사실 ‘어린이에겐 경쟁을! 젊은이에겐 더 많은 일을!’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면 돼. 우리도 마찬가지였지.-중략-
생각해봐. 유니폼을 입고 버스에 올랐던 나머지 구단들의 목표는 뭐였지?
우승.
맞았어. 그게 그들의 한결같은 목표였지. 하지만 삼미의 목표는 다른 거였어. 기억나?
글쎄.
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243~243p]
- 미국의 주력 산업이 뭔가를 생각해봐. 그럼 답은 간단하니까.
자동차, 석유……이런 건가?
틀렸어. 그런 건 모두 껍데기에 불과하다니까. 미국의 주력 산업은 자본주의의 프랜차이즈야. 프랜차이즈! 알겠어? 그 일환으로, 또 마침 82년은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해서 놀란스와 프로야구가 함께 거래된 것이었지. 물론 처음엔<섹스>와<프로>를 함께 수입하라는 조언을 들었겠지? 물론<섹스>는 양념이니까. 즉<프로>를 더 잘 배양하기 위한―유산균 발효유로 치자면 올리고당과 같은 존재였지. 그런데 문제가 생긴 거야.
무슨 문제?
당시의 한국인드을<프로>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고,<섹스>라는 말은 차마 부끄러워서 입에 올리지도 못했거든. 그래서 놀란스와 프로야구가 건너온 거야. 선발대의 역할을 한 것이지. 놀란스가 와서 「섹시 뮤직」을 부르고, 프로야구가<프로의 전파를 담당하기로! 물론 놀란스가 「섹시 뮤직」을 부르면, 모든 방송사들이 일제히 쇼 프로그램이건 아침 프로그램이건 교양 프로그램이건 가리지 않고 “저기, ‘섹시(sexy)'는 영어의 섹스(sex)에서 파생된 말인데 미국에선 이 말이 나쁜 말이 아니란 걸 아시나요?”라고 남자 진행자가 운을 띄우면 “그럼요, 미국에서 ’섹시‘는 매력적이다. 아름답다는 뜻으로 쓰이는 인사말이라면서요”라고 여자 진행자가 호들갑을 떨고, 그러면 다시 “XXX씨, 오늘 참 섹시해 보이십니다!”라고 남자 진행자가 너스레를 떨고, 닷 l여자 진행자가 “이것 참 감사합니다”로 말하게끔 각본이 짜여 있었던 거지.<프로>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었어. 그<프로화>의 진행은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결국 그래서, 우리는<섹스>와<프로>를 사용하게 된 거지.[244~245p]
- “감독님, 야구라면 자신이 있는데 프로야구는 뭡니까?”[246p]
- 즉<야구>를 하던 선수들이 어느 날 갑자기<프로야구>를 하게 된 것처럼,<인생>을 살던 모든 국민들이 어느 날 갑자기<프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시기였어. [249p]
- 그<자신의 야구>가 뭔데?
그건<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야. 그것이 바로 삼미가 완성한<자신의 야구>지. 우승을 목표로 한 다른 팀들로선 절대 완성할 수 없는―끊임없고 부단한<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야.
뭐야, 너무 쉽잖아?
틀렸어! 그건 그래서 가장 힘든<야구>야. 이<프로의 세계>에서 가장 하기 힘든<야구>인 것이지. 왜? 이 세계는 언제나 선수들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야. 어이, 잘하는데.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 누가 이번에 어떤 팀으로 옮겨갔대. 연봉이 얼마래. 열심히 해. 넌 연봉이 얼마지? 아냐, 넌 할 수 있어. 그걸 놓치다니! 방출된 사람들이 뭘 하며 사는지 아니? 넌 주무기가 뭐야? 도루해, 도루! 이봐. 팀을 위해 사생활을 포기하는 건 당연하잖아! 밤중에 연습이라, 보기 좋은데! 다음달까지 타율을 2푼만 끌어올린다. 왜, 그것도 힘들 것 같아? 좋아, 잘하고 있어. 넌 어디 출신이야? 더 열심히 해! 오늘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지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뛰어!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이봐, 뭘 생가갷?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뛰어 병신아! 훈련 시간에 늦지 마. 연봉이 아깝다. 아까워. 이봐, 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네가 그러고도 프로야? 응? 너 이세계가 얼마나 냉정한지 모르지? 너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지 모르지? 맛 좀 볼래? 한눈팔지 마! 언제 공이 올지 모르잖아! 몸을 날려! 날리란 말이야! 이봐, 기왕이면 멋지게 살아야지. 안 그래? 이 막물과 해봐. 뭐? 맘대로 해. 너 아님 뛸 선수가 없을 거 같아? 줄을 섰어! 줄을!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야. 넌 우리 팀의 대들보다. 이봐, 신문에 뭐라고 났는지 알아? 기본이 안 돼 있어. 기본이! 잘했어, 그러나 팀 기여도를 생각하면 생각처럼 좋은 성적은 아닌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힘들어? 힘들면 나가! 둘러봐, 다들 똑같은 조건에서 너보다 더 열심히, 잘하고 있잖아! 그게 힘들어? 힘든 걸 이겨내는 게 프로야! 좋아, 열심히 해.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있지. 몸이 힘들면 정신력으로 이겨내! 올해 목표도 우승이다. 다들 알지?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어이, 체인지업만으로는 이제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응? 세상 돌아가는 게 눈에 안 보여? 응?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던져! 잡아! 뛰어! 쳐! 빨리, 빨리 달려! 라고 하는데, 그 속에서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를 견지한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251~252p]
-<착취>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행해진 게 아니었어. 실제의 착취는 당당한 모습으로, 프라이드를 키워주며, 작은 성취감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며, 요란한 박수 소리 속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형이상학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거야. [253p]
- 쉬지 않는다.
쉬는 법이 없다.
쉴 줄 모른다.
그렇게 길러져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른 자식들이 역시나 그들의 뒤를 잇는다.
쉬지 않을수록
쉬는 법이 없을수록
쉴 줄 모를수록
훌륭히, 잘 컸다는 얘기를 들을 것이다.[262~263p]
- 올 여름은 왜 이렇게 긴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비로소, 시간은 원래 넘쳐흐르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 무렵의 시간은 말 그래도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어서, 나는 언제나 새 치약의 퉁퉁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나의 시간을 향유했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탕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264~265p]
- 삼천포의 아름다움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해가 지면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다. 즉 24시간 운영, 연중 무휴, 연장 근무, 불철주야, 철야 근무 같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중략-
해가 뜨면 마을 사람들은 일을 시작한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다. 뛰어다닌 것은 개들뿐이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해가 지면 잠을 잔다. 쿨쿨 잔다. -중략- 이곳은 무엇이 들어와도 국내 최후이며, 삶의 분주함으로 따지자면 국내 최저이며, 그 어귀에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동네 사우나탕 정도의 규모를 지닌 국내 최소의 해수욕장을 보유하고 있었다.[276~277p]
-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27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