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후지와라 신야 | 옮긴이 / 김욱
황천의 개
지은이 후지와라 신야
옮긴이 김욱
1판 1쇄 찍은날 2009년 2월 3일
1판 1쇄 펴낸날 2009년 2월 17일
펴낸이 정종호
펴낸곳 (주)청어람미디어 (121-840 서울 마포구 서교동 409-1 본주빌딩 5층)
- 텔레비전은 가끔 인위적으로 만든 프로그램 이상으로 시사적인 효능을 발휘한다. 그 처절한 화면이 맥주 광고로 바뀌는 광경은 다분히 상징적이었다. 광고는 현세에서의 세뇌를 뜻한다. 마치 아사하라 쇼코(옴진리교 교주-옮긴이)의 설교가 무한대로 반복되는 세뇌테이프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청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직후부터 수만 번 들어온 현세 신앙의 경쟁이다. 그 청년들이 전후 50년간 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된 욕망의 현세를 부정하려고 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인도와 일본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현세인지 현세 부정인지 양자택일하는 행동은 정답이 될 수 없다. [14p]
- 그날 신문을 펼쳤는데 옴진리교 기사 옆에 미나마타병에 대한 작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두 기사의 행간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화음 같은 것이 느껴졌다. 과거와 현재가 만들어낸 기묘하고 복잡한 무음의 듀오였다. [22p]
- 기독교뿐 아니라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사막에서 발생한 종교들은 대체로 규범을 상실한 자연과 그런 환경 속에서 자연을 대신해 비대해지는 인간의 자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비대해진 자아는 결과적으로 과대망상이라는 정신병리학적 행태를 나타낸다. 이들 종교는 인간의 자아를 자연과 동화시킴으로써 ‘진아(해탈)’를 희구하는 동양 종교와는 정반대되는 정신의 벡터다. 유럽을 방문하면 이런 차이가 쉽게 눈에 띈다. 유럽인들은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자연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그리고 인간의 이상이 실현된 도시들을 건설했다. 그렇게 건설된 도시에서 인간이 가축으로 선택한 개나 말은 인간과 함께 거리를 거닐고, 가지를 늘어뜨린 마로니에 가로수들은 마치 그리스 시대의 인류가 이상적인 삶의 명제로 여겼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정리되어 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서양의 미라 부르며 동경해왔다. 그러나 사물을 관찰하는 방식을 조금만 바꿔본다면 서양인들이 원하는 삶의 명제야말로 끝없이 비대해지고 있는 인간의 자아, 즉 과대망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서양 종교는 과대망상의 환자일 뿐 아니라 치료자이기도 했다. 그들의 종교는 과대망상에 시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금욕을 통해 비대해지려는 인간의 자아를 억누르는 양면성을 보여주었다. 과대망상의 종교인 동시에 자아를 다스리는 종교였던 셈이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시체에 배례拜禮하려 한 것도 단순히 기묘한 풍습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자기희생의 상징이었다. 이 상징은 과대망상과 금욕의 양면성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은유였다. 그들에게 죽음은 망상의 끝이었으며, 금욕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교본 같은 것이었다.
알라딘의 거인을 신봉하는 이슬람 신도들은 주로 법에 의해 자아의 비대를 억눌렀다. 그들에겐 라마단이라고 불리는 단식월이 있다. 이 라마단은 육체의 근원적인 욕망인 식욕을 억누른다. 그런 점에서는 요가와 매우 비슷하다. [37p]
- 무엇보다 모든 생물은 각기 다른 폐색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삶의 진실이다. [93p]
- 이곳은 시나가와 변두리의 운하와 강 둔덕을 재개발해서 만든 외딴 섬이며, 일종의 복합 도시다. 최근 들어 의식주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복합 상가가 도쿄 곳곳에 만들어지고 있다.
국민의 생활수준에 맞춰 백화점, 슈퍼마켓, 그리고 복합 상가로 유통 공간이 변화하고 있다. 이 같은 유통 공간은 미국의 전례를 좇아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이번 기회에 알아두기 바란다. 미국에서는 10년 전부터 일상적인 거리의 풍경에서 벗어난 복합 상가가 도시 인근에 조성되고 있다. 이들 거리와 처음 접했을 때 인공적인 디즈니랜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인공적인 거리, 즉 ‘거리를 모방한 거리’를 걷다 보면 가상의 거리라는 공통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디즈니랜드를 배회할 때와 비슷한 부유 감각에 휩싸인다. 이 부유 감각은 현실의 무게에서 해방된 것 같은 감각이다. 디즈니랜드를 궁극형으로 삼고 있는 가상현실 공간에서의 지향성이 미국 문화의 가장 큰 특색인데, 이는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저 근세 유럽의 인습으로 가득한 무거운 현실의 탈출구로 만들어진 가상 국가이기 때문이다. 건국 역사가 200여년에 불과한 미국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에서의 이탈이라는 역사적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지상에서는 디즈니랜드와 같은 풍요로운 낙원을 구축하고, 공중에서는 우주 공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에서 발생한 가상현실 공간이 20세기 문화의 주체로 자부하며 일본에 침투했다. 그 공간을 향수하는 어린이들의 정신과 신체가 미국화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 사이클 속에서 미국적 가상현실이 일상화되고 있으며, 이는 전후 60년을 통한 가장 큰 환경 진화(또는 퇴화)의 양식이었다. [95~96p]
- 그러나 내 경험상 이공계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에는 미학이라는 것이 없다. 옴진리교 문화를 살펴보자. 옴진리교 간부들은 화학작용이 가미된 듯한 색상의 옷차림과 오직 생존을 목표로 하는 초라한 음식, 그리고 살벌하고 무미건조한 건물 속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해왔는데, 그 원인으로 옴진리교의 주류 인맥이 이공계 출신이었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97p]
- 1980년대 중반, 취재 때문에 몇 번인가 쓰쿠바 학원도시의 쓰쿠바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다. 점심을 먹으려고 대학 식당에 들어섰을 때 이상한 광경을 목도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창가에서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어쩌다 그날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다른 날도 마찬가지였기에 어둠을 찾는 것이 그들의 고유한 행동 패턴은 아닐까,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나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대학 식당의 창가 테이블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엇이 옳고 그런가를 떠나 그런 변화를 통해 시대의 풍경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 서운했다.
그 모습들을 통해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우리와 달리 외부라든가 풍경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창밖이란 외부이며, 타자이며, 사회이며, 풍경이며, 더 나아가서는 자연이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시대의 흐름 속에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외부 세계를 단념하기 시작한 변절점이 있었다. 전자 미디어가 새로운 외부 세계로 등장하고, 어둠을 배경으로 하는 형광의 문명이 도래한 시기가 그것이다. 자신과 타자 사이의 거리를 배려로 여기는 이인離人 증후군이 세상을 뒤덮기 시작한 때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정치와 경제에 대해 말한다면 생활의 풍요가 보장된 현실 세계에서 시스템은 무의미한 억압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 같은 외부 요인들이 ‘현실’이고 ‘자연’이라면 미디어를 통해 가상 환경에 생존을 의지해온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그 시작부터 현실과 자연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부 세계는 그들에게 돌아갈 고향이 아니다. 물론 젊은 세대들도 외형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바다, 혹은 산을 찾는다. 그들은 이 같은 개념을 아웃도어라고 지칭한다. 말 그대로 자연은 문밖에 존재하는 낯선 환경이다. 삶의 터전이 아닌 일시적인 유희의 대상이다. 목적이 아닌 수단이며, 그렇기에 과거와 달리 생황을 지배하는 절대적 가치가 될 수 없다. [99~100p]
- 그곳에서 근처의 신사를 복원하는데 필요한 재료를 찾고 있는 목수 부자를 만났어. 아버지는 50세 전후였고 아들은 20대 초반이었지. 대패로 기둥을 끝손질하는 중이었는데 젊은이는 계속 야단만 맞고 있었어. 아버지가 대패질을 하면 나무 표면이 번쩍번쩍 빛이 아는 것인데 젊은이는 그렇지가 못했어. 대패를 나무에 갖다 대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그보다도 날붙이를 제대로 갈아놓지 못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간 날붙이를 살펴보고는 계속 안 된다고 말했지.
왜 안 되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 나이 든 목수가, 들고 있던 대패의 날을 한 번 쓱 갈고는 손을 놓아버리는 거였어. 그러자 요술을 부린것도 아닌데 대팻날이 숫돌에 비스듬히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거야. 대팻날과 숫돌이 맞물린 사이에 빈틈이 없으면 공기가 새들어오지 못해 이렇게 붙어 있게 된다는 이야기였어. 젊은 아들은 아직 그 정도의 실력이 못 되었지. 아버지는 이 정도로 대팻날을 갈지 못하면 신사는 세울 수가 없다고 말했어. 왜 그러냐고 물으니 신사는 목재에 색을 입히지 않는다. 즉 표면 끝손질이 승부다, 하고 대답하더군. 거울처럼 다듬은 목재는 그 자체로 피막의 역할을 하고, 오랜 세월 동안 풍우를 견디게 되다는 뜻이었어. 아들이 다듬은 목재는 자기가 만든 것의 절반밖에 유지되지 못한다는 거야. 이미 8년이나 가르쳤다면서, ‘내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라고 소리치더군.
제재소를 나와 잠시 걷다가 문득 아버지의 그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어. 그렇게 수수께끼 하나가 풀려버렸지. 그 마지막 말이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줬던 거야. 센구의 20년 주기는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 거지.
이세신궁은 특수한 건물이야. 거기에 쓰이는 신구의 종류도 특수해. 그것을 만드는 기술은 세대가 바뀌기 전에 전수되어야 하지. 수백 년 동안 보존된다면 건물은 멀쩡해도 장인은 사라지게 돼 있으니까. 이건 단순히 기술을 전승하다는 의미가 아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손끝으로 하는 일엔 반드시 마음이라는 게 전해져. 장인의 기술을 계승한다는 것은 마음을 계승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이세신궁은 보존이 아니라 파괴를 통해 그 형태 속에 잠재외어 있던 일본인의 마음을 계승시켜왔던 셈이지.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구축이 곧 파괴이며, 파괴가 곧 구축이라는 거야. [107~108p]
- 빌딩이 무너지거나, 고속도로가 뭉개진 광경이 계속 나왔죠. 그 광경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어요. 그런데 텔레비전이라는 건 정말 세상을 바보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 중요한 순간에도 광고를 내보내더군요. 일본이 붕괴하고 있는 그 순간에 말이죠.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깡충거리며 뛰어가다가 물이 괸 웅덩이에 빠지는 장면이었어요. 여자애가 신고 있던 운동화에도 물방울이 튀었는데 발수성潑水性 천으로 만들었는지 물방울이 그대로 흘러내려갔죠. 그리고 여자애는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해 웃고는 사라져버렸어요. 텔레비젼에서 몇 번인가 본 광고였어요.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날은 내가 이런 세계에서 태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에 젖지 않는 운동화가 뭐 그리 대수인가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화면이 바뀌면서 불바다가 나타났죠. 저는 멍하니 보고만 있었습니다. [117~118p]
- “이런 얘기를 해봤자 자네들 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느다는 건 잘 알고 있어.”라고 말했다.
“난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자네들을 불쌍하게 여기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자라난 환경을 자랑하려는 것도 아냐.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청년은 정신을 차린 듯, 그러나 강경한 어조로 대꾸했다.
“불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일부죠. 우리들에겐 미적지근하고 그리 대수로울 것도 없는 환경입니다. 자연이라는 세계와 저는 특별한 관계가 없어요. 우리는 그렇게 자랐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보다 연장인 기성세대가 자연이 어떻고, 자연에서는 뭐든 할 수 있고 같은 말을 하면 괜히 화가 나요.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자연이 뭔지도 모르는 우리들은 생존 기반이 불분명한 해파리 같은 것들이냐고 되묻고 싶어지는 거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청년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본의 도시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해파리야. 아니, 그런 게 아냐. 자연을 경험한 세대가 자기 아이들에게서는 자연을 빼앗아버리고 해파리로 만들었어. 자연을 모르는 자네에게도 죄가 있겠지만 자네들에게서 자연을 빼앗은 우리에겐 더 큰 죄가 있어. 그런 주제에 인간은 자연을 경험해봐야 한다고 말하는 기성세대의 행동에 자네는 기만당하고 있는 것 같아 화가 나는 거야. 몇 해 전이었어. 나가노의 어느 산에 저수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 낚시를 간 적이 있지. 산을 오르던 중에 우연히 40대로 보이는 남자를 만났어. 낚시 이야기를 꺼내자 그 남자는 봇물 터진 듯이 말하기 시작했지. 요즘에 비하면 옛날이 훨씬 좋았다는 얘기였어.
‘내가 어렸을 때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책가방을 팽개치고 저 앞에 있는 계곡으로 달려갔습니다. 바구니랑 막대기를 들고 말이죠. 낚싯대 같은 건 필요도 없었어요. 은어가 어찌나 많던지 막대기를 내리꽂기만 하면 됐어요. 그렇게 놀면서도 바구니에 은어를 가득 채울 수가 있었다고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요즘은 어딜 가도 은어 같은 건 구경도 못해요. 세상이 바뀐 거라고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집구석에 틀어박혀 타닥타닥 컴퓨터나 두드리는 게 전부에요. 한마디로 말세지요.‘
그 남자가 모든 걸 이야기했다고 생각해. 나는 속으로 영감탱이가 다 되었군, 하고 생각했어. 요즘 아이들은 냇가나 산에 흥미를 잃은게 아냐. 어른들이 그렇게 만든 거야. 농약을 마구 뿌려대고 개천을 메우는 공사가 한창이야. 개천이 사라지고 있는 마당에 물고기가 어디 있겠나? 콘크리트로 담을 쳐버린, 몰고기 없는 냇가에 아이들이 흥미를 갖지 않는 건 당연한 결과야. 산과 물을 빼앗긴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던져준 것도 어른들이었어. [121~123p]
- 미국 영화를 관통하는 이 같은 파괴적인 잠재의식이야말로 미국 영화가 20세기 말의 젊은 층을 열광시키는 가장 큰 요소라고 할 것이다. 그 같은 파괴적 잠재의식의 확대는 폐색으로 일관하는 현실과 점차 심화되는 관리 시스템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하는 일종의 카타스트로프 같은 소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구축과 파괴를 경쟁적으로 되풀이하는 미국 영화의 구도는 생산과 소비를 경쟁적으로 되풀이하는 미국형 자본주의를 닮았다. 그리고 이 끝없는 순환은 무간지옥을 연상시킨다. 현대인의 의식은 구축과 탕진의 무간지옥을 순례하도록 철저하게 개조되었다. 현대인의 자본주의형 신체라는 스크린위에서 지금도 이 둘의 공진共振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127p]
- 후쿠다 총리의 말은 평화 국가의 인간관이었고 지금도 인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문명이 계속되고 있어. 하지만 인간의 목숨이 지구보다 중요할 수는 없어. 목숨을 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의 목숨이 최우선이라는 과대평가 때문에 과보호와 에고이즘이 넘쳐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 지나친 에고이즘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나약하게 만든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과 시체를 금기로 여기고 철저히 은폐해왔지. 어리석은 선택이었어.[132p]
- 한 번 가라앉았다가 다시 물 위로 떠오른 시체는 방금 숨을 거둔 부처(일본에서는 죽은 자를 부처라고 부른다-옮긴이)처럼 깨끗해. 아마도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깨끗한 피부와 표정이었을 거야. 물이 그의 번뇌를 깨끗이 씻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인간은 이렇게 해서 한순간 이지만 부처가 되는 거야.
그 후로는 다시 사물이 되는 거지. 물 위로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부패가 시작돼. 악취를 풍기는 알칼리성 부패가 시작되는 거야. 온몸이 울혈이라도 앓는 것처럼 뒤룩거리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해. 부처 같았던 얼굴도 일주일이 지나면 지옥을 헤매는 아귀가 돼버리는 거야.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선과 악이 일주일 간격으로 재현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 그렇게 부처도, 아귀도 물에 녹아버리는 거야. [143p]
- 일본이라는 사회가 번뇌의 지옥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티베트 승려들에게 해탈이라든가 깨우침 같은 것을 물어봤어. 그때마다 승려들은, ‘당신들은 더 이상 그런 것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어. 당신들에겐 이미 훌륭한 만다라가 있다는 얘기였지. 그 만다라가 무엇이었을 것 같나?“
“……잘 모르겠는데요.”
“바로 텔레비전이었어. 승려들이 처음 호텔에서 묵던 날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보고 이게 뭐냐고 했지. 룸보이가 텔레비전을 켜주자 다들 꿈쩍도 하지 않고 화면만 응시했어. 특히 쉴 새 없이 광고가 이어지는 민영방송에 흥미를 보였지. 그러더니 입관 전에 시체의 머리맡에서 외우는 독경을 중얼거리기 시작했어. 일본 가정에서는 이런 텔레비전이 한 집에 한 대, 아니 방마다 한 대씩 있다고 말하자 한 승려가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하더군. 일본인들도 티베트인처럼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군요, 하고.
빈정거리는 말투가 아니었어. 그들은 진심이었지.
‘이건 만다라입니다…….’라고.
만다라는 원래 채색된 모래를 재료로 써. 몇 주일씩 기도하면서 치밀하고 장엄한 극채색의 만다라를 완성시키는 거야. 그렇게 완성된 만다라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지. 하지만 기도가 끝나면 만다라도 곧 파괴해버려. 파괴와 생성의 사이클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야. 만다라는 세상의 무상함과 생성의 유전을 노래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어. 저 고베처럼 말이야. -중략- 텔레비전 화상을 이루는 건 전자의 모래야. 하나의 화면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40만 화소라는 픽셀이 필요하지. 그것은 만다라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모래와 비슷한 숫자야. 그 수많은 전자의 모래들이 화상을 만들어내고 있어.
수십 년 동안 미세한 모래로 만다라를 그리고 무너뜨려온 승려들의 눈이라면 텔레비전 화면 역시 극채색의 모래 같은 빛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보였을 거야. 더구나 그 빛의 모래는 그들이 사용하는 진짜 모래보다 훨씬 완벽한 의미를 담고 있었어.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만다는 것은 불가능해. 모래 자체가 마야인 셈이야. 그 무수한 전자의 모래들이 때로는 빛나고, 사라지고, 색채를 변화시키고, 서로 모이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세상의 것들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거야. 그 뒤로 새로운 마야의 만다라가 탄생되고, 똑같은 생성과 소멸이 무한히 반복되는 거야. 승려들이 텔레비전에서 본 장면들은 자신들이 모래로 만들었던 만다라보다 훨씬 공허하고 무상했던 만다라였어.[158~160p]
- "티베트 승려가 말한 것처럼 이 세계엔 마야라는 사고방식이 있어. 인도의 어느 성자가 말한 세계관이지. 현세는 물론이고 내세도, 성도, 송도, 선도, 악도, 깨우침도, 미망도, 그리고 해탈에 의한 진아眞我마저도 결국엔 마야이며, 한 방울의 꿈에 불과하다고.
지구가 불타오르는 곳에서 시작되었듯이 모든 존재와 가치는 태워지고 없어진 재 위에서 피워진 수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 때문에,
세계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진 것이라고.[161p]
- 60년을 살아온 인간도 죽은 후 태워지면 고작해야 60와트짜리 전구가 3시간 정도 빛을 발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 -중략- 아마도 그 시를 읽은 사람은 인간이란 참 하찮은 존재구나, 하고 이해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배 위에서 그 불빛을 바라보는 나의 기분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 확실히 인간은 한여름의 반딧불처럼 덧없는 존재야.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 넓고 아득한, 그리고 광대한 풍경 속에서 작지만 소중한 불빛을 밝히고 있었어. 너는 지금 여기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60와트의 빛으로 3시간밖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빛을 발하고 있어. 이 정도면 인간의 존재도 꽤 쓸 만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화장터의 불빛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 [171p]
- 옷의 색상과 모양은 인간이 몸에 걸치고 있다는 점에서 제2의 피부다. 자신의 내면과 타자와의 차별을 나타내는 신분(아이덴티티)의 기능으로 의상을 달리한다는 것은 분명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그 구별이 종교적인 자신의 이념과 의사 표시를 위한 하나의 사인인 경우 그 의미는 더욱 커진다. [190p]
- 외관이 변하는 것은 탈피이며, 그 자체로 나의 아이덴티티가 변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도 곤충이나 파충류처럼 제2의 피부인 의상으로부터 주기적으로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 순간의 나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의상은 몸에 걸쳐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3p]
- 처음 인도를 찾아갔을 때만 해도 그런 경향이 거의 없었는데, 몇 년 후 다시 찾아갔을 때는 외국 여행자들 중 패션처럼 이 크르타를 입고 있는 것이 자주 눈에 띄었다. 내 경우엔 타국의 풍속에 동화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어디까지나 나였고, 그들은 여전히 그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차이를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199p]
-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사막을 여행했다. 하루 칼로리가 어떻다느니 하는 문명국가의 음식에 관한 과학적 접근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인간은 식생활이라는 환경에 맞춰 신체를 변화시킨다. 즉, 음식에 인간이 적응하는 것이다. 사막을 여향하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병에 걸리지 않았다. [201p]
- 죽음이란 어떤 ‘이름’으로 불렸던 육체에서 의미가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생명의 열교환이 중단되고, 불에 타 소멸하고, 강가 모래밭에 재를 남기는 것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무색, 무취, 무미의 ‘재’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체의 완전한 모습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죽음이란 ‘성불’이 아닌 ‘성물’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224p]
- 1972, 3년겨잉었는데 그들은 인도 여행의 ‘두 번째 물결’로 부를 만한 군상이었다. 그들은 군상이라고 정의한 까닭은 1960년대와 달리 여행자의 수가 대량으로 늘어남과 동시에 어떤 정형화된 스타일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 스타일이란 신비 지향형, 다시 말해 현실도피형 여행이었다. [243p]
- 나는 미대에 다녔어. 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학교라는 곳이 무의미하게 생각되어 수업에는 거의 출석하지 않았어. 지금 생각하면 대학에 남긴 흔적이라곤 두 가지밖에 없는 것 같아. 그것도 시시한 얘기 뿐이지만, 처음으로 회화 수업에 출석했을 때 N이라는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왔어. 나는 그 교수를 보고 크게 실망했어. 그래서 그림물감이 가득 묻은 붓으로 교수를 가리키면서 말했지. ‘이런 곳에 올 때는 넥타이를 풀고 오셔야죠.’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고 봐. 난 처음부터 예술가는 넥타이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고흐가 넥타이를 매고 그림을 그렸다는 말을 듣지 못했거든. 동경하던 미대에 입학하고 첫 수업이었어. 그런데 교수라는 사람이 넥타이에 신사복을 입은 공무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거야. 나로서는 충격이었지. 그래서 한마디 했던 거야. [300~301p]
- 젊은이들은 간혹 이런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물질을 과신하는 것이지요. 물질은 마야일 뿐입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해요. 정신이 있기에 그 물질이 느껴지는 겁니다. 오른팔을 잃어버린 젊은 중이 아직도 자신의 오른손에 불상이 쥐어졌다고 느낀 까닭은 그의 마음에 불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과 물질을 등질성이 간혹 어긋나는 때가 있습니다. 마음속의 실재를 마야(물질)로 환원시키겠다는 생각에서 번뇌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요술처럼 손에서 물질을 만들어 내거나, 공중을 떠나니고 싶은 욕망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예부터 정신의 물질화는 비속으로 떨어지고, 권력을 가져오고, 그리고 권력에 이용되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수행승이 이 마경에 유혹되는 모습을 나는 자주 봐왔습니다. 오른팔을 잃어버린 젊은 중은 지상에서 불상을 찾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말했습니다. ‘너는 한때 네가 경험했던 육체의 느낌으로 정신과 물체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 둘 사이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이다. 그 수수께끼가 풀렸을 때, 즉 네 마음속에만 그 불상이 실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너는 남은 왼팔로 내 마음속 불상을 조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야를 감은 진리이며, 다르마(법칙)다. 그 불상이 완성되면 너는 비로소 소승의 사람에서 대승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정신의 물질화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에만 사악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물질로 인해 너의 거짓 없는 마음이 봉해진다는 게 문제다. 절대로 서둘러서는 안 된다. 물질을 과신하는 것도, 마음을 과신하는 것도, 물질을 가벼이 여기는 것도, 마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도 안 된다. 이 세계는 정신과 물질의 균형 위에서 존재한다. 인간은 그 둘 사이에서 중용을 지켜야 하고, 그 중용을 통해 각성해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 법이다.’라고.“[318~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