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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종말 이후

지은이 / 아서 단토 | 옮긴이 / 이성훈, 김광우

by Joong

예술의 종말 이후 (After The End Of Art)
컨템퍼러리 미술과 역사의 울타리
초판발행 · 2004년 4월 20일
초판 2쇄 · 2006년 6월 28일
지은이 · 아서 단토
옮긴이 · 이성훈 김광우
펴낸이 · 지미정
펴낸곳 · 미술문화(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355-2 전화 (02) 355-2964


- 모던 예술은, 특히 20세기에 들어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그 수효가 많았던 경쟁적인 운동들 속에서 표출되었으며, 이 운동들 각각은 자기 자신의 용어로 예술을 정의하고자 했다. 모더니즘의 주요한 생산물 중 하나는 선언문, 즉 예술적 신앙의 문서인 바, 이것은 예술이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질서 속에서 해야 할 역할을 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술이 나아갈 미래의 방향을 명령하는 어떤 미적 이데올로기를 제시하게도 했다. 어떤 점에서 예술의 종말은 운동들의 종말과 선언문들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제 예술이 취해야 할 특정한 역사적 방향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미래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방향도 나머지 다른 방향들과 동등하게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우리가 완전한 예술적 다원주의의 시대 속으로 진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10p]


- 리얼리티의 정확한 모방이 아니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인정되게 되자, 어떤 것을 예술이 되게 만드는 어떤 구속 - 그것 없이는 어떤 것이 더 이상 예술이 될 수 없는 어떤 것 - 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 이제 문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모더니즘의 역사는 빼기의 역사였다. 예컨대, 예술가들이 미를 예술의 개념에서 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술이 시각적으로 식별가능한 일체의 내용을 담지 않고 그냥 완전히 추상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마르쉘 뒤샹이었다. 뺄수 없는 어떤 것이 남아 있는가? 모든 예술작품이, 그리고 예술작품만이 소유하는 속성들이라는 게 있는가? 일체의 것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가? 이런 방식으로 물음들을 제기한다는 것은 예술의 철학사 개념사의 이전 시기들에서는 접근할 수 없었던 반성적 의식의 층위로 예술 개념을 가져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12~13p]


- 강력한 예술 정의가 되려면 그런 만큼 극단적으로 약해야 한다. 초기 예술철학 저서인 『평범한 것의 변용』에서 나는 예술을 정의하는 두 개의 조건만을 확인해낼 수 있었다. 첫 번째 조건은,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하나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 어떤 것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 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의미는 어떤 식으로든 물질적으로 작품 속에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물이 작품으로 변형되는 것은 해석을 통해서이다라는 것이다. 즉 사물에 대한 “독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서를 통해 우리는 작품이 의미하는 바를 분간해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예술비평이 행하는 일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예술비평이 있어야 한다. 물론 상이한 시대와 상이한 문화로부터 유래하는 작품들의 경우에는 해석을 발견하고 의미를 확립하는 데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기도 하다. 사실 컨템퍼러리 예술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지금 쳐다보고 있는 작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전에 상당한 정도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미술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예술이라고 주장하지만 도무지 단번에 파악되지 않는 오브제를 한두 번 대면했던 게 아니다. 이럴 때마다 나는 그런 것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을 투사해야만 한다. 당연히 나의 해석들은 잘못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올바른 해석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발견될 때까지,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다라는 주장은 유예상태에 놓이게 된다. [14~15p]


- 문제는 미래의 예술은 어떠할 것인가가 아니다. 나는 심지어 다음 계절의 예술이 어떻게 될 것인지조차 상상할 수가 없다. 뉴욕권역에만 하더라도 수천 명의 예술가들이 과거에 제작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보이고 서로 거의 닮지 않은 것들을 만들고 잇다. 2000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전시된 작품들은 모두 다 아주 독특했다. 작품마다 새로운 설명을 요구하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 창작에 있어서 가장 최근의 테크놀러지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어떤 테크놀로지든 출현하기만 하면 그것을 이용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이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내가 예술의 종말이라 특징지은 상황은 예술의 역사 내에 예술이 취할 수 있는 어떠한 역사적 방향도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 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것의 재료나 혹은 물질적 형상과는 이제 전혀 관계가 없다. 여기에 어떻게 새로운 테크놀로지도 포함되지 않겠는가? [16p]


- 20세기에 예술의 경계선들을 통제하는 노력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관념들의 확산은 억제할 수 없는 것임이 입증되었다. 미국의 두 번째로 큰 수출품인 대중예술은 국격선을 붕괴시켰으며, 특히 음악의 경우 록음악은 지역의 관념과 태도를 어디에서나 알 수 있는 형식으로 널리 표현하는 매체가 되었다. 청년문화는 전 세계에 걸쳐 본질적으로 동질적인 것이 되었지만, 이른바 고급예술의 경우에도 사정은 거의 다르지 않다. 순회전시, 미술잡지들의 국제화, 경제가 허용하는 곳이면 어디에나 화랑이 세워지고 미술품 수집이 이루어지는 현상, 전 세계에 걸쳐 열리는 비엔날레들 등은 알로이스 리글의 표현을 조금 바꿔서 말하자면 후기 20세기의 예술산업이라 불러 봄직한 것이 전지구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7p]


- 한국의 경우는, 한국미술의 국내 전시회들이 두 부문으로, 그러니까 국제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들과 계속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들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이것은 자신의 국가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더 큰 세계의 일원이 되겠다는 한국의 이중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서양미술의 경우에는 예술적 민족주의가 그 모든 실제적 목적들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온갖 국적의 예술가들이 쾰른, 취리히, 베를린, 밀라노, 런던, 파리, 뉴욕,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중심으로, 그러나 동경과 서울과 북경과 같은 곳에도 모여들고 있다. 예전에는 예술적 안정성이 정치적 연속성을 반영하였다면, 예술동향의 국제화는 경제적 모험의 전지구화를 반영한다. 과거에는 지금처럼 많은 장소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 의해 예술이 만들어지고 감상되어본 적이 없었다. 이러한 맹렬한 활동은 내가 이해하고 있는 예술의 종말과 서로 잘 맞아떨어지는 현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예술의 시각에서 보면 세계가 이제 동질적이므로, 서양이든 동양이든 사라지고 있는 문화적 전통으로부터 어떤 심대한 변화를 기대하기란 힘들게 되었다. [18p]


- 그 후에 벨팅은 후기 로마제국시대부터 1400년 경에까지 이르는 서양 기독교의 경건한 이미지의 역사를 추적하는 놀라운 책을 한권 출판했는데, 그는 이 책에 “예술의 시대 이전의 이미지”(The Image before the Era of Art)라는 인상적인 부제를 붙였다. 이는 그 이미지들이 어떤 넓은 의미에서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생산에서 그것들이 예술이라고 하는 점이 중요한 구실을 맡지 않았다고 말하고 잇따. 왜냐하면 예술의 개념이 아직도 일반적으로 의식되지 않았을 뿐더러, 예술개념이 마침내 출현하여 미적 고찰과 같은 것이 예술작품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하게 되었을 때와 비교해 보더라도, 그러한 이미지들 - 실제로는 성상들 - 이 당시 사람들의 삶에서 예술작품과는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예술가들 - 표면에 흔적을 남기는 인간들 - 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기본적인 의미에서조차도 예술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베로니카의 손수건에 각인된 예수의 이미지처럼 단지 불가사의한 기원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예술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과 그 후의 예술적 실천들 사이에는 하나의 심대한 불연속성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예술가의 개념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던 데 반해, 르네상스에 와서는 조르조 바자리가 예술가들의 생애에 관해 묵직한 책을 써낼 정도로 예술가 개념이 핵심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예술의 시대 이전에는 기껏해야 성상 제작에 잠깐 손을 대었던 성자들의 생애만 있었을 뿐이다. [39~40p]


- 현재의 역사적 감수성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현재가 어떤 위대한 내러티브에 더 이상 속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활력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 있는 우리의 의식 위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에 벨팅과 내가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이것이야 말로 모던 미술과 컨템퍼러리 미술 사이의 예리한 차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에 대한 인식이 197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 차이를 정의내리는 데 도움을 준다. 슬로건이나 로고도 없이, 어느 누구도 그것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제대로 자각하지도 못한 채 부지불식간에 시작하였다는 것이 컨템퍼러리-모더니티의 특징이 아니라-의 특징이다. [43p]


- 이와는 대조적으로 컨템퍼러리 미술에는 과거의 미술에 반대하는 지침 같은 것이 없으며, 과거라는 것이 그에 대항해서 해방을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없고, 심지어는 자신이 미술로서 일반적으로 모던 미술하고도 전혀 다르다는 의식도 없다. 컨템퍼러리 미술을 정의하는 부분적인 특징은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이 과거의 미술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컴템퍼러리 예술가들에게 이용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미술이 제작되었던 바로 그 정신이다. [43~44p]


- 사물이 실제로 어떠한 것이건 간에, 우리 마음의 구조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무엇인지를 사유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은 우리가 쉽게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 우리는 사물들에 관해 사유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45~46p]


- 미술상의 모더니즘은 하나의 지점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 지점 이전까지는 화가들이 인물과 풍경과 역사적 사건을 눈에 드러나는 그대로 그리고 세계를 나타나는 대로 재현하고자 했다. 모더니즘과 함께 재현의 조건들이 핵심적이게 되며,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미술이 미술 자체의 주체가 된다. 이것이 바로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1960년에 발표한 그 유명한 논문 “모더니스트 회화”(Modernist Painting)에서 이 문제를 정의내리고 있는 방식과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내가 보기에, 한 분야(discipline)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 분야 특유의 방법들을 이용한다는 데 모더니즘의 본질이 있다. 이는 그 분야를 전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능력의 영역 속에다 더 확고하게 방호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했다. 흥미롭게도, 그린버그는 철학자 칸트를 자신의 모더니즘 사유의 모델로 삼았다. “칸트야말로 비판의 수단 자체를 비판한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에, 나는 그를 최초의 진정한 모더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칸트는 철학을 우리의 지식을 추가하는 것으로 본 게 아니라 어떻게 지식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으로 보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칸트의 이러한 철학관에 상응하는 회화관은 사물의 외관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회화가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47~48p]


- 그린버그가 보기에 마네야말로 모더니즘 회화의 칸트였다. “물감이 칠해진 편평한 표면들을 솔직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네의 그림들이 최초의 모더니즘 회화가 되었다.” 그리고 모더니즘이 역사는 마네로부터, “밑그림과 유약칠을 공공연하게 포기했으며, 우리의 눈으로 하여금 그들이 사용한 색이 튜브나 단지에서 짜낸 물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가 없게 알 수 있게 한” 인상주의자들을 거쳐, “자신의 소묘와 디자인이 캔버스의 직사각형에 더 분명하게 일치되도록 하기 위해 편집성이나 정확함을 포기한” 세잔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의 내러티브를 한 걸음 한 걸음씩 구성해 내어서는 결국에는 바자리가 정의내린 전통적인 재현적 회화의 내러티브를 대체하게 되었다. 평면성, 물감과 붓질에 대한 의식, 직사각 형태 - 이 모든 것은 마이어 샤피로(Meyer Schapi개)rk 아직까지도 모방적인 요소가 잔여적으로 남아 있는 회화의 비모방적 특징들이라 말하는 것이다-등이 회화의 발전연쇄에서 한때 진보적 지점을 점하였던 원근법, 단축법, 명암법을 대체하였다. -중략- 그린버그는 이것이 회화 자체가 비구상이나 추상이 되어야 했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단지 모더니즘 이전의 미술에서는 일차적이었던 재현적 특징들이 모더니즘에서는 부차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48~49p]


- 모더니즘은 의식의 새로운 층위로의 상승이 이루어졌다는 특징을 갖는 바, 이것은 모방적 재현이 재현의 수단과 방법에 대한 성찰보다 덜 중요해졌음을 강조하는 일종의 불연속성으로서 회화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림이 서툴거나 부자연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연대기에 의하면, 최초의 모더니즘 화가는 반 고흐와 고갱이다.) 사실 모더니즘은, 사도 바울의 말을 빌려 쓰자면, 어른들이 “어린애 같은 짓을 그만 두듯이”, 이전의 미술사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다. 요컨대, “모던”은 단순히 “가장 최근”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49p]


- “모던”이 단지 이를테면 “가장 최근”을 의미하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듯이, “컨템퍼러리”(contemporary)도 지금 이 순간에 발생하고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하나의 시간적 개념이 아니다. 그리고 “모던 이전”으로부터 모던으로의 이행이, 한스 벨팅의 용어로 말하자면, 예술의 시대 이전의 이미지로부터 예술의 시대에서의 이미지로의 이행만큼이나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졌듯이, 예술가들도 하나의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이 회고적으로 명백해지기까지 자신들이 다른 유형의 어떤 일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서 모던 예술을 만들고 있었다. [52p]


- "컨템퍼러리“도 단순한 현 순간의 미술 이상의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기에 컨템퍼러리는 하나의 시대를 가리킨다기보다는 미술이 모종의 거대 내러티브 속에 위치해 있었던 시대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이후에 발생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며, 예술제작의 한 양식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양식들을 사용하는 하나의 양식을 가리킨다. [53p]


- 1960년대는 양식들의 발작기였으며, 이 시기가 진행되던 중에, 예술작품이 내가 “한갓된 실재 사물”이라 부르는 것과는 대조되게 특별나게 보여야 하는 특별한 방식은 없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신사실주의자들과 팝아트를 통해 점차적으로 분명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우선적으로 내가 “예술의 종말”을 말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다. 내가 즐겨 드는 예를 하나 들자면, 앤디 워홀의<브릴로 상자>와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 상자 사이에 외적으로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또한 개념미술은 어떤 것이 시각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시각적 대상이 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는 더 이상 실례를 들어서 예술의 의미를 가르칠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관에 관한한, 어떠한 것도 에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그것은 당신이 예술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자 한다면 감각 경험으로부터 사고(thought)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은 철학으로 향해야 한다. [58~59p]


- 나는 모더니즘의 종료가 한 순간에 너무 빨리 발생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70년대의 미술계는 미술의 한계를 밀어낸다거나 미술사를 확장하는 것보다는 이런저런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목표에 미술을 봉사시키고자 하는 의제에 열심이었던 예술가들로 넘쳐났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예술가들은 아방가르드의 역사를 포함해서 다룰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미술사의 유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모더니즘이 최대한 억압하고자 했지만 아방가르드가 힘들게 성취해낸 그 온갖 놀라운 가능성을 그들은 마음대로 요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의 견해로는, 이 10년이 보여준 주요한 예술적 공헌은 차용된 이미지 - 확립된 의미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을 넘겨받아 그것에서 새로운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 - 의 등장이다. 어떠한 이미지도 차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차용된 이미지들 사이에 지각적으로 확인 가능한 어떠한 양식적인 동질성도 존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즉각적으로 뒤따라 나온다. [62p]


- 뻔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다루고 있는 미술이 어떤 종류인가에 따라,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 아름다움인가 형식인가 아니면 내가 개입이라 부르고자 하는 것인가에 따라, 최소한 세 개의 모델이 성립하게 된다. 컨템퍼러리 미술은 단 하나의 차원을 따라 분류하기에는 그 의도와 실현방식이 너무나 다원적이며, 사실 그것의 상당 부분이 미술관의 제약조건들과 양립할 수 없기에, 완전히 다른 혈통의 큐레이터가 요구된다는 주장이 나올 만도 하다. 즉 미술관을 미의 전당이나 정신적 형식의 성소로 이용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작가들의 삶과 그들의 예술을 직접 연관시키기 위해 기존 미술관의 구조를 완전히 우회해버리는 큐레이터 말이다. 기존의 미술관이 이런 유형의 미술을 받아들이려면 아름다움과 형식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양태 속에서 그것을 규정했던 미술관 건축구조와 이론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술관 자체는 조만간에 예술의 종말과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이라고 하는 현안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미술의 하부구조의 일부일 뿐이다. 예술가, 화랑, 미술사의 실천들, 철학적 미학이라고 하는 학과 이 모두는 이런 저런 방식을 통해 사라지고 여태까지와는 다른, 아마도 매우 다른 어떤 것이 될 것이다. [65p]


- 미술시장도 수요와 공급에 의해 추동되는 시장이다. 그러나 수요는 그 자체의 인과적 결정요인들에 종속되어 있으며, 1980년대에 미술작품을 구입하고자 했던 욕구를 설명해주던 인과적 결정요인들의 복합체가 90년대에 들어와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재결합하여 나타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80년대에는 많은 개인들이 미술작품을 유의미한 라이프스타일에 속하는 어떤 것으로 소유하고자 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튤립 구근의 가격을 합리적인 기대치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데 복합적으로 작용한 요인들이 똑 같은 방식으로 또 다시 집결한 적은 없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튤립 시장은 계속해서 있었고 정원사의 입맛에 따라 튤립 구근의 가격이 오르락내리락 하였듯이, 미술에도 언제나 시장이 존재할 것이며, 그것도 취향과 패션의 역사를 공부하는 대학생이라면 잘 알고 있듯이 개인적 명성이 오르거나 내리는 그런 종류의 시장일 것이라고 가정할 만한 이유가 있다. 미술수집이 시작된 역사적 시기가 원예만큼 오래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마 원예만큼이나 인간의 심리 속에 깊이 박혀 있는 하나의 성향일 것이다 - 나는 농사일 전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형식으로서의 원예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의 미술시장은 아마도 다시 되살아나지 않을 것이고, 그 당시에 예술가들과 화랑경영주들이 품었던 기대도 다시는 합리적인 기대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결정요인들의 약간 다른 정세가 외견상으로는 비슷한 시장을 발생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요점은, 시장이라고 하는 개념에 속하는 상승과 하락의 자연적인 주기와는 달리, 그러한 발생은 엄밀하게 예측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태양계를 구성하고 있는 행성들의 질서 있는 운행에 어떤 유성이 갑작스럽게 개입할지를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68~69p]


-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종말은 1980년대의 미술시장이 그렇게 커지리라고 상상하기 훨씬 전에 도래하였다. 예술의 종말은 내가 “예술의 종말”을 발표하기 족히 20년 전에 왔다. 그것은 서양에서 공산주의의 종말을 특징짓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같은 극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그것은 서곡과 종결부를 가지는 많은 사건들이 그렇듯이 그것을 거치면서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대체적으로 눈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술의 종말”이 1964년의 『뉴욕타임즈』에 표지기사로 나간 것도 아니었고, 저녁 뉴스시간에 속보로 나갔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이 사건들 자체를 목격하였지만, 1984년까지는 이것이 예술의 종말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지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바로 역사적 지각에서 전형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72p]


- 한스 벨팅의 대작 『이미지와 제의 : 예술의 시대 이전의 이미지』에 붙은 부제를 상기해보자. 벨팅의 견해에 따르면, “예술의 시대”는 기원후 1400년경에 시작하며, 그 이전에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이제는 “예술” 아지만 그때는 그러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그것들이 생겨나는 데 예술의 개념이 어떠한 구실도 맡지 않았다. 벨팅은 1400년경까지는 이미지가 존경을 받긴 했으되 미적 찬탄의 대상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분명히 미학을 예술의 역사적 의미 속에 끼워넣는다. 나는 다음 장에서 18세기에 절정에 도달한 미학적 고찰이 내가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 즉 1960년대 후반 이후에 생산된 예술에게는 제대로 적용될 수가 없음을 주장할 것이다. “예술의 시대”이전과 이후에 예술이 있었다 - 그리고 있다 -는 사실은 예술과 미학 사이의 관계가 예술의 본질의 일부를 이루는 게 아니라 단지 역사적 우연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74~75p]


- 선언문은 특정한 종류의 운동과 특정한 종류의 양식만을 확정해서 이것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예술이라고 선언한다. 20세기의 몇몇 중요한 운동들이 명시적인 선언문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에 불과하다. 예컨대 입체주의와 야수주의는 둘 다 미술에 새로운 종류의 질서를 수립하는 일에 관하였으며, 그들 자신이 발견(혹은 재발견)하였다고 생각한 기본 진리나 질서를 덮어 감추는 것은 모조리 폐기해버렸다. “[80~81p]


- 예술의 종말은 예술의 참된 철학적 본성을 깨닫게 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나의 사유는 전적으로 헤겔주의적인데, 헤겔은 한 유명한 구절에서 이러한 사유를 공표하고 있다.
이런 모든 점을 고려하고, 예술을 그 최고의 규정의 견지에서 바라볼 때, 우리에게 예술은 사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것이고, 과거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해서 예술은 또한 우리에게 그 참된 진리와 생동성을 상실했으며, 옛날처럼 현실 속에서 그 필연성을 고수하고 그 최고의 지위를 지키기보다는 이제는 오히려 우리 표상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예술작품의 내용과 표현수단, 그리고 이 양자가 서로 적합한지 부적합한지에 대해 이론적으로 고찰해보면, 우리는 예술작품을 바라보았을 때 내면에서 그것을 즉각적으로 향유하는 것 외에도 동시에 그 작품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싶은 충동으로 고무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와서 예술은 예술 자체로서 이미 충분한 만족을 주었던 옛날과는 달리 이제 예술에 관한 학문이 필요해졌다. 즉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도록 점차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을 예술로서 다시 회생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이다. [85~86p]


- 19세기의 많은 미술은 사실 매개되지 않은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특히 인상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들이 처음에 불러일으킨 소동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인상주의를 감상하기 위해 어떤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니 최초의 인상주의 관객들로 하여금 인상주의 회화가 어떠한 것인지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방해했던 어떤 오도적인 철학의 제거가 오히려 필요하다. 인상주의 작품은 우리를 미적으로 즐겁게 하는데, 이 사실이 왜 인상주의가 아방가르드 미술의 열렬한 지지자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그토록 광범위하게 찬미되는지를, 그리고 또한 그것이 왜 그렇게 비싼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인상주의 작품은 비평가들을 격분시켰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그것을 수집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지적이고도 비평적인 우월감을 부여할 정도로 대단히 즐거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어떤 철학적 요지를 끌어낸다면, 그것은 역사에는 예리하게 드러나는 올바른 각도라는 게 없으며, 이를테면 급작스런 중단 같은 것도 없다는 것이다. 추상표현주의 운동이 끝난 지 한참 후에도 화가들은 추상표현주의 양식안에서 작업을 계속하였는데, 그것은 주로 그들이 추상표현주의 운동을 신뢰했고 그것이 아직도 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90p]
- 미술계에서 이에 상응하는 인물이 용인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진정으로 미술이 아닌 어떤 것을 삽화이거나 장식이거나 아니면 어쨌든 보다 못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삽화적”이니 “장식적”이니 하는 말은 선언문 시대의 비평에서 모멸적인 용어로 통하였다. [93p]


-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술작품은 언제나 예술작품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암묵적인 신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철학적 문제란 왜 그것이 예술작품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워홀과 함께 예술작품이 이래야 한다는 특별한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브릴로 상자처럼 보일 수도 있고 스프 깡통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워홀은 이런 심원한 발견을 이룩한 예술가 집단들 중의 한 명에 불과하다. 음악과 소음의 구별, 무용과 몸동작 사이의 구별, 문학과 한갓된 글쓰기 사이의 구별도 워홀의 돌파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며 그것과 모든 면에서 평행선을 그으면서 진행되었다. [94~95p]


- 물론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의 방식은 자신의 선언문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라면 모조리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것은 인종청소의 형식을 취한다. 투치족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때,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의 갈등도 사라질 것이다. 보스니아인들이 깡그리 사라질 때, 그들과 세르비아인들 간의 갈등도 사라질 것이다. 다른 방식은 투치족이건 후투족이건, 아니면 보스니아인이든 세르비아인이든간에 당신을 만들어주는 그 무슨 차이이든 청소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당신이 어떤 유형의 인간인가 하는 것이다. [98p]


- 달에 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술이 요구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언젠가는 인류가 달에 상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가 예견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원근법의 경우에는 누군가가 예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이 그것을 이미 이용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공자가 현명하게 말하고 있듯이, 그저 도덕적인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것 만으로도 이미 첫 걸음이 내디뎌진 것이다. [103p]


- 우리는 닫힌 역사적 시기의 지평내에 살고 그 안에서 생산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몇몇 한계는 기술적이다. 즉 이젤화가 창안되기 전에는 이젤화를 생산할 수가 없다. 컴퓨터의 발명 이전에는 컴퓨터 아트를 만들 수 없다. 예술의 종말을 이야기할 때 나는 이젤화가 컴퓨터가 예증하고 있는 창조적 기능성과 거의 맞먹을 정도로 예술가들이 앞으로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꿈도 꿔보지 못한 기술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내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어떤 한계는 양식과 관련한 것이다. [108p]


- 따라서 나의 용법에 따르자면, 모방(mimesis)은 하나의 양식이다. 예술이 무엇인지를 모방이 정의내리고 있었던 시대에는 이런 의미를 갖는 다른 양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방은 모더니즘의 도래, 혹은 내가 쓰는 용어로 하자면, 선언문 시대의 도래와 함께 하나의 양식이 되었다. 선언문들은 제각기 예술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정의를 발견하고자 했으므로 문제의 예술을 포착하고자 노력하는 만큼 그것을 의문에 부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엄청나게 많은 정의들이 있었기에 이것들이 어떤 독단론과 비관용에 의해 충동질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불가피했다. [111p]


- 그는 설득력있는 이미지 제작의 기술을 결여하고있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만큼의 지각 “기술”은 가지고 있었다. 곰브리치 자신이 플라톤의 『대 히피아스』로부터 지각적 지혜를 담고있는 놀라운 구절 하나를 인용하고 있다. “우리의 조각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다이달로스가 오늘날 태어난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그런 작품들을 만든다면, 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환생한 다이달로스를 비웃었던 사람이라면 고졸기의 조각상들을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비웃을 것이다. 이러한 비웃음에 깔려 있는 저넺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지각체계가 다이달로서의 모방기술만큼이나 미발달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아직도 프락시텔레스의 작품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고, 두 예술가의 작품을 함께 보게 되면 그 누구든지 설령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차이를 즉각적으로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시각체계가 미술해서 행하는 구실을 과학에서 행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과학에는 미술에서와 같은 진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에서는 말초적인 현상을 제외하고 경험과 연관시킬 필요가 없는 표상들 속에 진보가 존재한다. 과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세계는 우리의 감각기관들이 드러내는 세계와 부합할 것을 전혀 요구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거이 바로 바자리적인 회화사의 전체 요점이었다.[118~119p]


- 학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지각적 사응이, 학습되어야 하는 언어 습득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라. [125p]


- 그런데 이것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칸바일러가 모든 양식들을, 특히 인상주의 양식을 글쓰기 형식으로 간주하며 이로부터 유추해서 우리가 연습만 하면 인상주의를 읽을 수 있듯이 입체주의를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입체주의에 익숙해졌고 (입체주의 풍경화나 초상화나 정물화는 이제 미술관의 흔해빠진 품목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입체주의 그림을 “읽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것도 분명하지만, 이 작품들은 우리가 익숙하게 글로 옮겨 쓰는 언어만큼 투명해지는 것에 저항해왔다. 피카소가 그린 칸바일러 초상화는 사진처럼 보여지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낯이 익다는 사실이 그 그림을 자연적으로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프라이의 이론과 칸바일러의 이론은 어떤 난해한 언어를 유창하게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고 있는, 따라서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어떤 사람의 이미지를 불러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사람도 인상주의 캔버스를 읽기 위해 연습하지는 않는다. 인상주의의 캔버스는 전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이는데, 그것은 그것이 전적으로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결국 인상주의는 바자리적 의제의 지속이다. 즉 인상주의는 빛과 그림자 사이의 자연적인 차이들을 갖고서 시각적 외관을 정복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126~127p]


- 특별히 준비된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이런 식으로 새로운 작품들에 순응하고 민감하고도 분별력있게 반응하는 것도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예술과 상호작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술의 종말을 주장하는 이론과 같은 것은 전혀 뜻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뒤따라오는 온갖 예술들에 대해 그저 계속해서 순응하고 반응하기만 할 뿐이다. 이론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서 말이다. 1980녀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수집했는데, 무엇이 그것을 예술로 만들어주는지, 혹은 왜 그것이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자격있는 정의 같은 것이 부재한 상태에서 단지 그것이 미술이기 때문에 수집했을 따름이었다. [130p]


- 내가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미술사에서 모방의 시대로부터 모던 시대로의 변화는 르네상스의 그림 전략으로부터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당시에는 급진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는 인상주의의 전략까지의 발전을 특정짓는 변화와는 전혀 다른 종류와 질서의 변화라고 하는 나의 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내가 보기에 모던으로부터 포스트모던으로의 변화 역시 이러한 변화들과는 다른 유형의 변화이다. 왜냐하면 이 변화들에는 회화의 기본 구조가 흔들리지 않고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라팔엘로로부터 코레조, 카라치 형제, 프르고나르와 부셰, 앵그르, 들러쿠루아를 거쳐 마네에 이르기까지 어떤 깊은 연속성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1893년의 관점에서 볼 때, 진보적 발전사를 계속해서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139p]


- 칸바일러가 보기에, 새로운 기호체계가 옛 체계를 대체했으며, 이것 역시 언젠가는 대체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느 정도 의미하는 바는, 입체주의가 인상주의를 넘어서는 발전을 표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그 어떤 분명한 의미도 없는 것 같으므로, 미술의 큰 이야기는 결국 발전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컨바일러의 테제는 에르핀 파노트스키에 의해 언명된 주목할 만한 미술사관과 어렴풋하게 닮았다. 파노프스키의 미술사관에 따르면, 미술사란 서로 대체되기만 할 뿐이고 따라서 발전하는 것은 아닌 일련의 상징형식들로 이루어진다. 가장 놀라운 것은, 파노프스키가 진보의 상징으로 간주되어왔던 하나의 발견, 즉 선원근법을 하나의 방식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또한 선원근법은 공간을 조직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건축이나 신학이나 형이상학이나 심지어는 도덕적 규약과 같은 한 문화의 다른 측면들 속에서 드러나는 어떤 근원적인 철학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파노프스키가 도상해석학(iconology)을 통해 연구했던 일종의 문화적 총체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문화적 측면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총체들 사이에는, 따라서 이것들을 표현하고 있는 예술들 사이에는 연속적인 발전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발전사를 갖는다는 것은 이 문화적 총체들 중의 어느 한 총체가 가졌던 예술, 즉 대략 1300년에서 1900년까지의 서양미술에 해당하는 특징이다. 그 이후로 우리는 모더니즘과 함께 대략 80년 동안, 그러니까 1880년부터 1965년까지 지속한 새로운 문화적 총체 속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상징형식의 철학을 충실하게 따르자면,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규정하는 모든 것 속에서, 즉 우리의 과학과 우리의 철학과 우리의 정치와 우리와 도덕적 행위의 규약 속에서 동일한 근원적인 구조의 표현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때가 되면 설명할 것이지만, 나는 이 견해에 대해 결코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쨌든 이것은 미술사에서의 내적 변화라 부를 수 있는 것과 외적 변화라 부를 수 있는 것 사이의 차이를 표상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내적 변화는 하나의 문화적 총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밑바닥에 놓여 있는 그 복합체를 건드리지 않고 놔둔다. 외적 변화란 한 문화적 총체로부터 다른 문화적 총체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140~141p]


- 그래서 내가 여기에서 제안하는 바는, 모더니즘 일반을 이러한 견지에서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다. 즉 그것을 사태가 예전과 같이 지속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리하여 사태가 도대체 지속할 수 있으려면 새로운 토대가 주어져야 할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시기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왜 모더니즘이 그토록 자주 선언문을 내놓는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43p]


- 이것이 바로 내적 비판으로서, 이것이 예술의 경우에 결국 의미하는 바는 모더니즘의 정신 하에 있는 예술은 모든 점에서 자기성찰적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예술이 바로 예술 자체의 주제이며, 그린버그의 본질적인 관심영역이었던 회화의 경우를 들자면 회화의 주제가 바로 회화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더니즘은 회화 자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회화를 갖고 회롸를 파고드는, 내부로부터 비롯되는 일종의 집단적인 탐구였다. [144p]


- 모더니스트적인 작품은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다른 예술의 매체로부터 빌려왔거나 다른 예술의 매체가 빌려간 것으로 여겨지는 일체의 효과를 의무적으로 제거”하여야 한다. 그 결과 자기비판 하에 있는 모든 예술은 “순수해질 것이다.” 순수의 개념은 그린버그가 실제로 칸트의 순수이성의 개념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칸트는 “경험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섞여 있지 않는” 인식의 양태를 순수하다고 불렀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선천적인 순수 인식이다. -중략- 평면성을 강조하는 것이 회화로부터 재현을 추방하는 것은 아니지만, 삼차원 공간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 환영은 실제로 추방되었다. 환영 자체가 다른 예술로부터 빌려온 것이며, 따라서 순수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미술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바자리 프로젝트는 사실상 침략의 프로젝트였다. 다시 말해, 회화는 조각의 특권을 찬탈함으로써만 진보적 발전사를 가질 수 있었다. [145~146p]


- 순수성, 정화, 오염물과 같은 용어를 쓰면서 동시에 용인과 관용의 태도를 손쉽게 취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린버그의 견해는 그때의 시대정신이라 부를 만한 것으로부터 그 에너지를 끌어내었기 때문에 그만이 홀로 탄핵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어느 정도의 관용과 개방성을 기대해도 될 법한 오늘날에조차도 -상대주의와 다문화주의의 우리 시대에서조차도- 뉴욕의 비평담론의 한 특징으로 남아 있다. [150~151p]


- 따라서 나에게 명백한 사실은, 환영주의가 회화의 기본 목표이기를 그만두고 모방이론이 미술에 대한 정의이기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붓질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모방이론이 인상주의 캔버스에게 타당성을 소급해서 부여했는데, 이제는 널리 받아들이고 있는 점이지만 이것은 인상주의자들이 잘못 생각한 이유들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은 점묘주의 회화에서 점을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상적으로는 이 점들은 사라지고 하나의 분명한 이미지가 대신 나타나야 한다. 물론 눈도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점들이 사라지고 하나의 분명한 이미지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은, 그 그림 자체가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을 때, 그리고 붓질이 그 그림은 투명성을 함축하는 그런 의미에서 “꿰뚫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라보아야 하는 것임을 시사했을 때, 비로소 확인될 수 있었다. 이렇게 확인될 때, 이 그림을 잘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구분, 전문가와 일반 관객 사이의 구분 자체가 희미해졌다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그 그림(painting)을 물감-칠하기(paint-ing)로 본다는 것은 그것을 예술가의 시점에서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인상주의와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갖느다. 즉 인상주의자들이 적용한 붓질은 관객의 지각 속에서 용해되어지도록 의도된 것이기에, 사물을 예술가의 시점에서 본다는 것은 예술가가 관객의 시점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에 의해 그 사물이 결정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물론 이때 환영이 잘 작동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것은 연극상연과 유사한데, 연극상연에서는 연출가가 환영을 촉진할 것이라고 믿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무대를 설치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붓질을 관객의 의식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게 하는 미술적 충동과 같은 것을 연극상연도 역시 가지고 있는데, 즉 연극상연의 메커니즘을 관객의 연극경험의 일부로 만드는 것, 말하자면 무대 뒤와 무대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 따위에서 이에 상응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어떠한 연출가도 로프를 잡아당기는 것과 무대의 플랫을 이동하는 것만으로 구성된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데까지 가본 적은 없었다. 이러한 연극을 상연한다는 것은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 표준이 된 것과 같은, 오로지 붓질로만 이루어지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과 아주 유사하다. 어쨌든 인상주의 회화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전문가의 시점이 아웃사이더의 시점이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이제 그림물감이 일을 넘겨받게 되었으며, 예술가들은 화가의 즐거움이 화가와 마찬가지로 그림물감의 감각주의자가 된 관객의 즐거움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중략- 반 고흐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종류의 주장을 제기할 수가 있는데, 우리가 그의 미술의 이미지들에 아무리 사로잡힌다 하더라도 그의 끌로 파낸 것 같은 주름진 표면을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서조차 낭만적 “예술가”의 이미지가 여전히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의 회화가 누리는 인기의 한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예술가의 열정적인 몸짓을 담고 있는 그 부인할 수 없는 표면들을 우리가 감지한다는 것은 실로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160~161p]


- “실용성이 미술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하는 물음은 미술이란 미적 만족만을 위해―만족 자체만을 위해―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써먹는 수사학적 말대꾸이다. 따라서 미적인 것을 실용적인 것과 분리하는 동일한 논리적 심연이 예술을 일체의 유용한 것으로부터 분리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주의 미학은 오늘날의 보수적인 미술비평가에게도 일정하게 봉사하고 있다. 즉 그것은 미술이 이러저러한 인간적 관심사, 특히 정치적 관심사에 기여하도록 하겠다는, 예술가들이 품을 수도 있는 일체의 도구적 야망을 미술에 부적합한 것이라고 제쳐놓는 것이다. 보수적인 미술비평가는 이렇게 반문한다. “미술이 정치와 무슨 관련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마치 이 물음은 수사학적이고 이에 대한 답변―“전혀 관련이 없다!”―은 기정사실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176p]


- "그린버그의 말을 일종의 격언식으로 의역하자면, 미술에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거은 미술에서 좋은 것에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미술이나 서양미술이나 재현미술 일반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미술들 속에 있는 좋은 것에만 해당된다.“ 그리고 그린버그의 두 번째 신조에 따르면, ”숙련된 눈“은 어떤 유형의 미술에서건 나쁜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분간해낼 수 있으며, 이것은 그 미술이 속해 있는 전통의 생산환경들에 대한 특별한 지식의 유무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숙련된 눈의 소유자는 그 어디에서건 미적으로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최근에 한 유명한 큐레이터가 아프리카 미술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좋은 눈만 가지고 좋은 것, 더 좋은 것, 최고로 좋은 것을 구별해낼 수 있다고 떠벌인 적이 있었다.
비평가로서 그린버그가 갖고 있는 장점과 약점은 바로 이러한 신조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예컨대 다른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아직 가지지 못하고 있던 때에 그린버그가 잭슨 폴록의 좋은 점에 착안하고 그를 위대한 화가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에는 미술에서 좋은 것은 언제 어디에서나 동일하다는 그의 확신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추상회화가 생산되고 있던 1940년대에 폴록의 작업을 알아보는 눈이나 그것이 예술적으로 좋다는 것을 감지해내는 능력―그것의 예술적 위대함을 선언하는 능력은 커녕―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이 당시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견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던 바로 그런 때에, 이러한 비평활동을 펼쳐보였다는 것이 다른 비평가들은 거의 얻어낼 수 없었던 신임장을 회고적으로 그린버그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좋은 비평가의 기준이란 곧 일종의 쌍벽을 이루는 것들을 발견해내는 것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바,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이후의 비평적 실천에서 불가피하게 어떤 유해한 결과가 초래되게 된다. 즉 그 비평가는 자신의 “숙력된 눈”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어 있으며, 이렇게 되면 그에게는 이런저런 예술가의 옹호자로서의 역할이 지정되게 되는 것이다. 그의 비평가로서의 위상은 그 예술가에대한 평판과 함께 오르락내리락 할 것이다. 그의 비평적 평판이 이 예술가의 예술적 좋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신임장을 찾아나서는 비평가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들의 뒤를 몰래 추적하는데, 이것은 부분적으로 주변부 화랑과 신선한 재능을 가진 신진 예술가와 모험적인 미술상에게 희망을 주고 생산시스템이 경직되는 것을 방지하기는 할 것이다. 이것과 정반대되는 경우가 한 비평가가 무시한 예술가가 결국 좋거나 심지어는 위대한 예술가임이 판명될 때 자신이 불충분하게 좋은 눈을 가졌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178~180p]


- 그린버그는 새 그림이 제자리에 놓일 때까지 그 그림에 등을 돌리고 서 있다가 갑자기 돌아서서는 마음에게 일체의 선행하는 이론들이 개입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 그림을 자신의 숙련된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고 한다. 마치 시각적 자극의 전달과 사고의 속도 사이에 무슨 경주라도 있듯이 말이다. 또는 볼 시간이 될 때까지 눈을 가렸다는 말도 있다. 그린버그와 관련해서 이런 유형의 일화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이것은 화실이나 갤러리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어떤 표준적인 자세 같은 것이 되었다. [181p]


- 중요한 미술과 중요하지 않은 미술 사이의 차이에 관한 기준을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그린버그는 이렇게 응답했다. "기준들이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미술과 나쁜 미술 사이의 차이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이상으로 말입니다. 예술작품들은 당신을 많은 적든 감동시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여태까지 말은 이 문제에 있어서 쓸모없는 것이었습니다…어느 누구도 미술과 미술가에게 처방을 내려 주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기다기고 있다가 일어나는 것을, 즉 예술가가 하는 것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182p]


- 결국 비평가의 과제는 일종의 제7감으로서의 눈의 판결에 항상 기초해서 무엇이 좋으며 무엇이 좋지 않은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제7감으로서의 눈은 예술 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알아내는 감각, 그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감각이었다. 만약에 우리가 이것을 반응에 기초하는 비평으로 여긴다면, 이 전통은 현재 그린버그에 비해 철학적으로 훨씬 덜 탄탄한 비평가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83~184p]


- 팝아트는, 혹은 대부분의 팝아트는 상업미술―일러스트레이션, 상표, 포장 디자인, 포스터 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상업미술가들은 이러한 다채롭고 선언적인 이미지들을 책임져야 했기에 좋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월렘 드 쿠닝은 한때 간판쟁이였는데, 순수미술의 목적을 위해 간판쟁이의 특수한 재능을 전용하는 데 있어서 그가 그 자신을 성공적인 간판쟁이로 만들어준 그 눈마저 활용하지 않았다고 상상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이것과 정반대되는 교훈적인 사례가 바로 와토의 경우이다. 와토는 자신의 화상 제르생의 상점 간판을 그릴 때<우아한 축제>에서 발휘한 재능과 눈을 활용하였다. 와토의 마지막 작품이자 실로 대단한 걸작으로 판명난 이 상점 간판은 실제로 한 동안 제르생의 화랑 앞에 걸려 있으면서 사건의 속사정이 어떠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제르생의 간판은 예술은 실용적인 용도를 가지지 않는다고 하는 미학의 첫 번째 교리에 대한 하나의 우연한 반증이라 하겠다. [185~186p]


- 다문화주의는 1984년에 대두하기 시작하여 1990년대에 와서 적어도 미국의 미술계를 전염병처럼 뒤덮게 되었다. 다문화주의의 모델에 따르면,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주어진 문화적 전통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미술을 어떻게 감상하였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전통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전통 안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것을 감상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질적인 자기 자신의 감상방식을 이 전통에 부과하지 않으려고 할 수는 있다. 이러한 상대화가 우리 자신의 문화 내에서도 여성이나 흑인이나 소수인종의 미술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린버그가 80년대 후반과 90년대의 미술계에서 마치 “원시주의와 모던 미술”과 같은 불길한 전시회에 책임을 져야 할 악당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은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칸트주의적 보편성이 이러한 가차 없는 상대성으로 대체되었을 때, 특성이라고 하는 개념은 불쾌하고도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것으로 치부되게 되었다. 미술비평은 일종의 문화비평이 되었다. 그것도 주로 자기 자신의 문화에 대한 문화 비평 말이다. [190~191p]


- 왜냐하면 희망컨대, 나는 미적 좋음이라는 것이 예술의 종말 이후의 미술에 대해서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91p]


- 세상의 많은 미술작품들(동굴화, 페티시, 제단화 등)은 사람들이 예술이라고 하는 개념을 말하지 않았던 시대들과 장소들에서 만들어졌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갖고 있던 다른 신념들에 의거해서 미술이 해석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대상들에 대해 갖는 관계가 무엇보다도 관조적인 것은, 그것들이 구현하고 있는 관심들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며,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비춰주었던 신념들이 이제 더 이상 그것들을 찬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게 때문이다. 관조가 예술작품으로서의 이것들의 본질에 속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만든 사람들은 이것들을 관조하는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니까 말이다. [192p]


- 내가 이미 시사했듯이, 어느 정도 추상적인 이러한 미 원리는 문화적 계통들뿐만 아니라 동물종의 계통들마저 가로지르고 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최근에 들어와 대칭성을 다양한 동물종들에게서 나타나는 성적 매력과 관련짓기 시작했다. 암컷 전갈파리는 대칭적인 날개를 가진 수컷에게 변함없는 편애를 보여준다. 암컷 제비는 양쪽 꼬리깃털에 동일한 크기와 색깔의 창사골 무늬를 가지고 있는 수컷을 더 좋아한다. 대칭적이지 않은 뿔을 가진 수컷 사슴은 짝짓기 게임에서 탈락할 것이다. 대칭성은 아마도 해당 수컷이 불균형 성장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어떤 기생충들에 저항하는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기호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는 실험분야이긴 하나, 섹스보다 더 실제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듯하다. 즉 그것이 조각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의지가 작동하고 있지 않을 때조차도 우리가 서로에게 던지는 것과 동일한 호색적인 눈으로 즐겨 바라보는 미적 편애들이 어떤 연유로 생겨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현명한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미술에 도입한 옛날의 그 친애하는 선택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듯하다. 여러분은 “이 모두를 말로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그 방향으로 먼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무늬의 원리는 건강과 번식력의 외적 상징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철학에서 드러나듯이 좋음을 미와, 나쁨을 미의 부재와 즐겨 동일시하는 - 사실 이것은 도덕적으로 다소 곤란한 동일시이다 - 고찰방식이기도 하다. [194~195p]


- 쇼펜하우어는 대칭성이 미의 필수조건임을 부인하면서 폐허를 그 반례로 제시하였다. 우리는 쓸데없이 반례들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제 대칭성과 미의 논지는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으며, 대칭성으로부터 폐허로의 이행은 취미의 역사에서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의 이행을 나타낸다. 폐허라는 것이 있으며, 또한 이중에서도 다른 것보다 더 아름다운 폐허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와 함께 우리는 성적 반응이 촉발되는 영역을 떠나 의미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헤겔의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자연미의 영역을 떠나 예술미로, 그리고 그가 정신이라 말하는 것의 미로 가게 된다. 폐허라는 것은 시간의 가차없음, 권력의 퇴락, 죽음의 불가피성을 내포한다. 폐허는 무너진 돌을 매체로 삼고 있는 낭만적 시이다. 폐허는 꽃을 보려고 벚나무를 찾아갔을 때 만발한 벚나무와도 같아서, 아름다움의 덧없음, 시간의 경과 등 진화의 올림픽을 재촉하는 특징들의 무상함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는 다시는 결코 오지 않을 A.E. 유스망의 봄을 생각한다. 꽃을 만들어낼 수 없다 할지라도 누군가는 나무를 심으며, 헤겔이 예술작품에 관해 말하면서 표현하였듯이, “이것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물음, 민감한 가슴에 대한 하나의 말걸음, 마음과 정신의 부름이다.” 그리고 이것은 워홀만큼이나 모리스에게도, 몬드리안만큼이나 폴록에게도, 베르메르에게 만큼이나 할스에게도 진실이다. [196p]


-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추상표현주의에서의 공간은 “도 다시 눈속임 그림의 환영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 그것은 ‘읽히는 것’ 이라기보다는 더 촉각적인 것, 즉각적인 지각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이것은 물감이 삼차원적으로 됨에 따라 조각의 정체성을 띠게 되었으며, 공간이 또 다시 환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는 물감이 실재(real)가 되었다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어쨌든 “상당히 많은 추상표현주의 그림들이 삼차원 공간의 더욱 더 일관된 환영을 바란다고 당당하게 소리치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한에서 그것은 재현을 바란다고 소리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관성은 삼차원적 사물들의 촉각적인 재현을 통해서만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203p]


- 그러나 나는 하나의 답변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전통적이 회화와는 대조적으로 추상표현주의의 캔버스는 미술 이외에는 될 수 있는 게 전혀 없었다는 사실과 관련을 맺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추상표현주의의 캔버스는 예컨대 벽화와 같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도 없었고, 전통회화에서 우리가 흔하게 보는 장인적인 솜씨에도 들어맞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사실 그것 자신의 추동력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것이 시장의 추동력에 의해 외적으로 강화됨으로 해서 수집의 대상이 된 것이다. 추상표현주의의 그림들은 소장품의 형식으로 존재했으며, 따라서 바자리적 회화와는 대조적으로 삶으로부터 더욱 더 단절되었고, 미술계 안에 더욱 더 격리된 상태로 존재했다. 그것은 회화란 자고로 그 자체의 자율적인 역사를 가져야 한다는 그린버그주의적 요구사항은 제대로 충족시켰는지 몰라도, 외부로부터의 투입이 결여된 관계로 붕괴되고 말았다. 차세대 예술가들은 현실 및 삶과의 접촉 속으로 미술을 되돌려놓고자 했다. 바로 이들이 최고의 예술가들이었으며, 나의 역사적 지각으로는 시각예술을 위한 새로운 진로를 열어준 것은 다름 아닌 팝아트였다. [204p]


- 예컨대 “뉴욕”은 “뉴욕은 유엔의 본거지이다”라는 문장 속의 뉴욕 시를 가리키기 위해 이용된다. 그러나 이 표현 자체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될 때는 그 표현은 언급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뉴욕은 두 음절로 구성된다”는 문장에서 “뉴욕”이라는 표현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자리 내러티브로부터 그린버그 내러티브로의 이행은 이용의 차원 속에 있는 예술작품으로부터 언급능력을 가지는 예술작품으로의 이행과 같았다. 이에 따라 비평 역시 작품들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해석하는 접근방식으로부터 작품들 자체가 무엇인가를 기술하는 접근방식으로 이행하였다. 달리말해서, 비평은 의미로부터 존재로, 혹은 약간 느슨하게 말하자면, 의미론으로부터 구문론으로 이행하였다. [211~212p]


- 모더니즘 미술은 취미에 의해 규정된 미술이며, 본질적으로 취미를 가진 사람들, 특히 비평가들을 위해 만들어진 미술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미술은 위협적인 세게의 어두운 힘들에 맞서는 그것의 능력 때문에 만들어졌다. -중략- 그러나 이 아프리카 조각상들은 좋은 취미의 친선대사로서 무수한 벽난로 선반 위에 모셔졌다. 그것도 그것들을 거기에 올려놓은 사람들의 인품을 전혀 변화시키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아프리카 미술을 수집하는 당대 예술가들의 한 놀라운 전시회는 사실 이 예술가들의 기존 인품이 아프리카 미술이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정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일반적인 요점은 감정과 형식(내가 처음 듣기에 나의 스승 수잔 랭거가 만들어낸 것으로 보이는 결합)은 전체적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경향을 보여왔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아프리카 미술에서는 취미보다는 감정이 형식을 규정한다. 모더니즘의 종말은 취미의 폭정의 종말을 의미하였으며, 그린버그가 초현실주의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 바로 그것 - 초현실주의의 반형식적, 반미학적 측면 -을 위한 여지를 열어주었다. 미학은 여러분이 뒤샹과 오랫동안 동행하게 해주지는 않을 것이며, 뒤샹이 요구하는 유형의 비평은 흄의 계명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219~220p]


- 내가 알고 있는 한, 바로 이것이 비단 모더니즘의 시대에 종말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더니즘을 특징지었던 역사적 계획 전체를 종말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미술의 본질적 특질들을 우연한 특질들로부터 구별해내고, 연금술적으로 말하자면, 미술을 재현이나 환영 따위의 오염물질로부터 “정화”해내고자 함으로써 말이다. 뒤샹이 한 일이란 오히려 어떻게 미술이 실재와 구별될 수 있는지를 분별해내는 프로젝트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철학이 막 시작되던 때 플라톤을 고무시켰던 문제이자, 내가 가끔 주장했듯이 위대한 플라톤의 체계를 거의 온전하게 발생시킨 문제이다. 플라톤은 피카소가 철학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은 하나의 미술 전통 속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미술은 곧 권력의 도구라고 하는 사실이었다. 뒤샹은 미술과 실재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미술을 철학적으로 공민권을 빼앗긴 미술의 시초와 다시 연결시켰다. 플라톤은 올바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기형적인 대답을 내놓았던 것이다. [221~222p]


- 미술사의 시작 이전에는 미술과 공예 사이의 차별적인 구분 따위가 없었으며, 공예가 예술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려면 그것을 조각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주장을 할 필요도 없었다. 예술가는 필히 전문화되어야 한다는 강제적인 명령 따위도 없었으며, 탈역사적 시대를 가장 잘 예증하고 있는 예술가들 - 모든 매체와 양식들을 동등하게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르하르트 리히터, 자그마르 폴케, 로즈마리 트로켈 등의 예술가들 - 에게서 발견하는 동일한 다방면의 창조성을 우리는 레오나르도와 첼리니에게서도 발견하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순수 미술의 관념이 순수 화가 - 그림만 그리지 다른 것은 전혀 하지 않는 화가 - 의 관념과 손을 잡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의 선택이지 따라야 할 명령은 아니다. 현 미술계의 다원주의는 다원주의자를 이상적인 예술가로 정의한다. 16세기 이래 많은 것이 변했지만, 많은 점들에서 우리는 미술사의 다른 어떤 시기보다 16세기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오랫동안 회화는 미술사의 수레바퀴였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공격받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224~225p]


- 1913년에, 아니 그 전에도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예술가들은 스티글리츠의 화랑에 가끔씩 그림이 걸리던 주변적인 인물에 불과했으며, 헨리와 그의 추종자와 그의 적들이 이해하고 있던 미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기에는 너무나 거친 존재였다. 그러나 호퍼의 시대에 와서는 추상표현주의가 주변적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호퍼와 그를 이해했던 예술가들, 그리고 그가 이해했던 예술가들이 주변적이게 되었으며 말하자면 이사회(理事會)에서 완전히 밀려날 위험에 처했다. [229p]


- 이킨스는 파리 아카데미 보자르의 학생이었을 때 1868년 살롱전에 출품된 그림들이 누드를 나타내는 그 인위적인 방식에 반발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그림들은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날아가거나 춤추고 있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벗은 여인들을 그린 그림이다. 이들은 원래의 그리스어 이름에 따라 프리네스, 비너스, 님프, 헤르마프로디테, 하우리 등으로 불리는 여인들이다.” 그는 “향기로운 비소를 함유한 녹색 안료로 그려진 나무들과 부드러운 밀랍으로 만든 꽃들에 파묻혀 온갖 몸짓을 지으면서 부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여신들”을 그리기보다는 실제 상황 속에 있는 누드를 그리겠다고 맹세했다. -중략- 이른바 애쉬 캔 화파(Ash Can School)를 창설한 헨리는 옷을 벗은 여인들을 보여주되, 그것도 이상화된 여인들과는 상반되는 실제의 여인들이 옷을 벗고 있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호퍼 자신도 누드화를 그릴 때 1941년의<걸리 쇼>나 1952년의<아침 햇살>처럼 에로틱한 상황에서 몽상에 잠겨 있는 한 여인이 자연스럽게 옷을 벗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호퍼의 이러한 그림들 속에는 특별하게 모던하다고 할 만한 것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사실 그의 그림을 보면 마치 19세기 후반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19세기 후반이 20세기 안에 고이 간직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229~230p]


- 또한 그때 바로 나에게 떠오른 생각은 아니었지만, 만약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정말로 특별한 미래라는 것도 없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미술의 미래에 관한 나 자신의 비전도 포함해서 그 어떤 것도 필연적이라거나 불가피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예술가가 예술가로서 자신이 원하는 그 무엇을 하든 모두 옳다는 것을 의미했다. [238p]


- 그 당시에 특히 팝과 관련해서 나의 뇌리를 쳤던 것은, 팝이 고대의 가르침, 즉 플라톤의 가르침을 뒤집어 엎는 방식이었다. 모두 알고 있는 바이지만 플라톤은 예술을 모방으로 해석하여 상상할 수 있는 실재의 가장 낮은 등급으로 좌천시킨 장본인이다. 악명 높은 예가 『국가』 제 10권에서 개진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플라톤은 침대가 가지는 실재성의 세 가지 양태로서 이데아나 형상으로서의 침대, 목수가 제작한 침대, 형상을 모방한 목수를 다시 모방한 침대 그림을 들고 있다. 예술가가 아킬레스는 침대에 누워 있고 침대 아래 바닥에는 헥토르의 시체가 엎어져 있게 묘사한, 또는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신부를 위해 만든 침대 옆에서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리스 항아리들이 있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이렇게 말하고자 했다. 즉 당신은 당신이 모방하고 있는 것의 첫 번째 것을 알고 있지 않아도 모방할 수 있으므로 (소크라테스가 서사시인 이온과의 격정적인 대화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듯이), 예술가들은 지식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이다. 예술가들은 단지 현상의 현상만을 “알고 있다”. 그런데 1960녀대 초의 미술세계에서 사람들은 갑자기 실제 침대를 보기 시작했다. 라우센버그의 침대, 올덴버그의 침대, 그리고 곧이어 조지 시갈의 침대 따위를 말이다. 내가 주장했듯이, 이것은 마치 예술가들이 미술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제기되는 물음은, 이것들이 결국 침대라면, 도대체 그 무엇이 이 침대들을 예술로 만들어주는가 하는 것이엇다. 그러나 그 어떤 문헌도 이것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나는 “예술계”에서 하나의 이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무엇보다 조지 디키의 예술제도론을 불러일으켰다.<브릴로 상자>가 이 물음을 일반화시켰다. 적어도 지각적 기준에서는 그것과 정확하게 닮은 실제 대상은 한갓된 사물이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인공물에 불과한데도, 그것은 어떻게 예술작품이 되는가? 그러나 그것이 인공물이라 할지라도, 그 인공물과 워홀이 만든 것 사이의 유사성은 정확했다. 플라톤이 침대 그림과 침대는 구별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것들을 구별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워홀의 상자들은 훌륭한 목공 솜씨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우리가 미술과 실재 사이의 차이를 이제 더 이상 순수하게 시각적인 견지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또한 그것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실례들을 보여주면서 가르친다는 게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가정해왔다. 따라서 워홀과 팝아티스트들은 철학자들이 미술에 관해 쓴 글 모두를 거의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거나, 아니면 국지적인 중요성만을 갖는 것으로 만들었다. 내가 보기에, 팝을 통해 비로소 미술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철학적 물음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물음은 이런 것이었다. 사실상 그 두가지가 똑같아 보일 경우, 예술작품과 예술작품이 아닌 어떤 것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은, “미술”의 의미를 실례들을 들어 가르치는 게 가능했던 때에는, 또는 미술과 실재 사이의 구별이 항아리에 그려진 침대 그림과 실제 침대 사이의 차이처럼 지각적인 구별로 여겨지던 때에는 결코 생겨날 수 없었다. [240~241p]


- 서양미술의 역사는 내가 바자리 에피소드와 그린버그 에피소드라고 부르는 두 개의 주요 에피소드로 나뉜다. 두 에피소드 모두 진보적이다. 미술을 재현적인 것으로 이해한 바자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술이 “시각적 외관의 정복”에 더 능숙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실재를 묘사하는 데 동영상이 회화보다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회화에 대해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모더니즘은 그렇다면 회화는 과연 무엇을 할 수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고 모더니즘은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린버그는 미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조건들로의 상승이라고 하는 견지에서, 특히 그 무엇이 회화예술을 다른 모든 예술로부터 구별해주는가 하는 견지에서 하나의 새로운 내러티브를 정의내렸다. 그리고 그린버그는 이것을 매체의 물질적 조건 속에서 찾아내었다. [241~242p]


- 고급 미술 속의 팝, 즉 고급미술로서의 팝과 팝미술 자체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가 있다. 팝의 선구자들을 추적하고자 할 때에는 특히 이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더웰이 자신의 몇몇 콜라주에 골와즈(Gauloise) 담배갑을 이용했을 때, 혹은 호퍼와 호크니가 팝과는 거리가 먼 그림들에다 광고계로부터 나온 요소들을 이용했을 때, 이런 것이 바로 고급 미술 속의 팝에 해당한다. 대중적인 미술들을 진지한 미술로 취급하자는 것이 앨러웨이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나는 대중문화를 이용하는 미술작품을 가리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매체의 산물들을 가리키기 위해 이 용어 및 ‘팝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팝아트 자체는 내가, 대중적인 문화로부터 고급미술로 변용하는 상징들이라 부르는 것 속에 들어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처럼 로고를 재창조해낼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캠벨 수프 통조림이나 상업미술을 하나의 회화 양식으로 이용하는 진짜 유화의 주제로 만들 것을 요구한다. 팝아트가 그토록 자극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변용적이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배우나 오페라 스타처럼 마릴린 몬로를 다룬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았다. 그러나 워홀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황금색 물감 바탕 위에 설정함으로써 그녀를 하나의 아이콘으로 변용시켰던 것이다. 팝아트 자체는 미국 고유의 업적이며,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도처에서 그토록 전복적이었던 것은 그것의 기본 입장이 변용되기 때문이다. 변용(變容)은 종교적인 개념이다. 그것이 원래 나타난 마태복음에서 변용이란 한 인간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렇게 변용이란 평범한 것을 숭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팝이 크토록 엄청난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것을 의미했던 사물들이나 사물들의 종류를 그것이 변용시켜 고급미술의 주제로서의 지위를 갖게 상승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247~248p]


- 나는 팝아트 역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 즉 역사의 현 시점에서 집단 정신을 제공하는 평범한 것들인 일상적인 문화적 경험의 대상들과 아이콘들을 미술로 변용시킨다고 생각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추상표현주의는 숨어 있는 과정들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초현실주의적인 전제들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것의 실행자들은 원초적인 힘들과 접촉하고 있는 무당이 되고자 했다. 그것이 철저하게 형이상학적이었다면, 팝은 가장 일상적인 삶의 가장 일상적인 것들, 즉 콘플레이크, 수프 통조림, 비누 뭉치, 인기 영화배우, 만화 따위를 찬양했다. 그리고 변용의 과정을 거쳐 팝은 이런 것들에게 거의 선험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250p]


- 미술을 가장 폭넓은 맥락 속에서 들여다봄으로써 얻을 수 있을법한 장점 중 하나는, 적어도 현재의 경우, 그것이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워홀의<브릴로 상자>와 같은 팝 작품들을 구별하는 다소 협소한 문제에 있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무엇을 이룩했건 간에 뒤샹은 일상적인 것을 찬양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는 미적인 것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고 미술의 경계선들을 시험하기는 했을 것이다. 사실 미술사에서 이전에 이런 일을 행한 사람은 없었다. 뒤샹과 팝 사이에 어떤 외적인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팝이 우리로 하여금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들 중 하나이며 또한 팝의 성과이기도 하다. [253p]


- 폴 들라로쉬와 더글라스 크림프 모두 사진에서 회화의 종말을 보고 있지만, 양자 사이에는 물론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1839년에 들라로쉬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회화의 모방적 야망으로, 그는 만약에 화가가 숙달해야 하는 그 모든 재현기술이 대가가 그린 그림과 동일한 신뢰성을 갖는 모방을 생산해내는 하나의 메커니즘, 즉 사진에 의해 성취될 수 있게 된다면, 그림그리는 법을 배울 이유가 거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사진에도 그 나름의 기술이 있지만, 들라로쉬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표면위에다 이미지를 획득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써, 이것이 이제 사진장치에 의해 가능해짐에 따라 화가의 손과 눈이 더 이사이 요구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급진주의자인 크림프는 분명히, 회화가 불러일으키는 계급적 연관성, 순수미술관의 제도적 함의, 그리고 발터 벤야민이 나눈, 아우라를 가지는 예술작품과 기계적 재생산을 수단으로 해서 획득된 예술작품 사이의 그 유명한 구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의 주장은 들라로쉬의 주장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이다. 그것은 회화의 종말 ― 특히 이젤화의 종말 ―을 주장한 20세기의 거의 모든 선언들처럼 정치적이다. 베를린 다다이스트들,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예술의 역할을 결정하는 책무를 지고 있던 모스크바 위원회, 멕시코의 벽화가들(시케이로스는 이젤화를 “미술의 파시즘”이라 불렀다)은 모두 다 회화에 대한 탄핵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추동되었던 것이다. 물감냄새를 사랑하는 예술가들은 “후각적인 예술가”라고 경멸적으로 특징지은 뒤샹은 아마도 예외가 될 것이다. 사실 뒤샹에게 어떤 정치적 의제를 돌린다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는 한층 격화된 초현실주의의 제스처 속에서 회화를 절멸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우리 시대에 전통적인 의미의 미술은 설 자리가 없으며, 그것이 존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것은 기괴한 것이 되어버렸다. 신지식계급은 그것을 완전히 절멸시키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다.” 이러한 반회화적 태도를 각각은 회화가 이제는 실추된 삶의 형식에 속하며, 포토몽타주, 사진, “삶 속의 미술”, 벽화, 개념미술, 또는 달리(Dali)자신이 행하고 있다고 생각한 회화 아닌 그 모든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크림프 자신은 영향력 있는 잡지 『옥토버』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 잡지는 미국의 지적 간행물이 다 그렇듯이 (『파티잔 리뷰』가 대표적이다) 동시대 문화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과 미술에 대한 종종 엘리트주의적인 태도를 결합하고 있었다. 『옥토버』의 경우 다른 점은, 이 잡지가 지지하는 미술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소비를 규정하고 있는 제도적 틀과는 대립적인 제도적 틀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대안적인 제도틀이 실제로 미술을 규정하는 제도틀로 작동하고 있는 사회는 회화를 주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들, 그러니까 갤러리, 컬렉션, 미술관, 그리고 평해지는 전시회를 위한 일종의 광고란으로 봉사하고 있는 미술간행물 따위를 가지고 있는 사회에 비해 대개 도덕적으로 더 바람직한 사회라 할 것이다. -중략- 예술가가 자신의 그림으로 자본주의의 가치를 비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들이 그림이라고 하는 한갓된 사실 하나가 그 그림의 내용 속에서 비판되거나 심지어 비난받고 있는 그 사회의 제도들에 대한 승인을 함축하고 있었다. 예술가로서 자신을 표현하기를 원한다는 것만으로도 내재적으로 기존의 사회제도와 타협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262~264p]


- 회화는 죽었다라는 1981년의 선언과 동일한 효과를 주장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선언들 사이에는 하나의 뚜렷한 차이가 있다. 어떤 방식으로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1981년에는 회화가 어디로든 더 나아갈 데가 없다는 증거가 있었다. 라인하르트의 전체가 검정색으로 칠해진 그림이나 로버트 라이만의 전체가 하얀색인 그림, 혹은 다니엘 뷔렝의 음울한 띠무늬 그림이 내적 고갈의 마지막 단계를 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가 되기를 원한 누군가가 이러한 해결책들을 반복하거나 아니면 약간의 지엽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왜 그는 화가가 되기를 원하는가 하는 심각한 물음이 남아 있었다. 실험을 할 수 있는 편안한 변수들 ― 크기, 색깔, 표면의 질감, 가장자리, 심지어 형태까지 ― 이 무수하게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어떤 역사적 약진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 없이 이루어지는 실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모노크롬 회화는 모더니즘 내러티브의 물질주의적 미학 속에서 즐거움과 승리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노크롬을 더 순수하게 다듬어낸다는 것은, 예컨대 달의 궤도를 정확하게 잡아내기 위해 새로운 데이터를 다루어야 하는 마담에 과학기구를 깨끗하게 닦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과학은 결코 종료되지 않겠지만, 그것의 승리들은 이미 획득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회화의 경우, 헤겔의 용어를 다시 한 번 더 빌려 쓰자면, “그 최고의 규정의 견지에서 바라볼 때, 우리에게 예술은 사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것이고, 과거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에술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해결책의 토대를 이미 수립되었으며, 이제 이것은 더 이상 예술가들이 추구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침내 철학자들의 손에 넘겨졌던 것이다. [265p]


- 워홀의 첫 번재 만화 패널이 자신의 예술적 의도의 진지함을 선언할 수 있었던 것도 물감의 두께와 사용량을 통해서였다. 미술이 일종의 예방조치적 물감사용법에 대한 이러한 필요성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약 3년이 소요되었다. 철학이라고 하는 산문은 오늘날까지도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바로 실제적인 제도적 압력의 한 기능이 아닌가 한다. 즉 대학교수의 종신재직권을 얻고자 하는 지원자는 진지한 철학자로 여겨지기 위해 자신이 논리적인 인품의 소유자임을 보여주어야 하며, 종신재직권을 획득한 우에도 유약한 존재로 여겨질까 두려워 순전히 장식적일 뿐인 형식주의를 포기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69~270p]


- 철학에서의 검증주의는 미술이론에서의 모더니즘과 매우 유사하다. 모더니즘은 어떤 것들을 금지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예술실천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매체 속에서 행할 것을 강요하거나, 비평이 구성되어야 할 방식을 정의내리거나 했던 것이다.[270p]


- 회화 자체는 문제의 그 미술제도들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집단만의 탁월한 미술형식으로 표상되었으며, 따라서 회화가 점점 더 정치적으로 공정치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도 불가피했다. 그리고 미술관은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는 말해주는 바가 거의 없는 억압적 사물들의 저장소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회화가 삐딱하게 정치화되었으며, 이상하게도 회화의 열망이 순수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정치적으로 여겨졌다. 하얀색 올오버 페인팅은 과연 여성들, 아프리카계 미국인, 동성애자, 라틴 아메리카인, 아시아계 미국인, 그리고 미국에 있을지 모르는 그 밖의 소수인종들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그림은 백인 남성 예술가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근래에 있었던 주요 전시회들 중 가장 정치적인 전시회인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가 단지 일곱 명의 화가들만을 초대했다는 사실이 이러한 상황과 정화갛게 들어맞는다. [274p]


- 미술관은,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미술관은 매우 오래된 제도가 아니다. 나폴레옹 뮈제(나중에 루브르 미술관이 된다)로 처음 생겨났을 때, 그것의 의제는 모든 면에서 정치적이었다. 그것의 원래 의도는 나폴레옹이 승리의 전리품으로 가져온 작품들을 전시하는 것과, 예전의 특권적 장소 ―왕들의 궁전― 에 입장한 일반 인민들에게 이러한 그림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여전히 나라의 왕이며 왕권이 부분적으로는 위대한 미술품 컬렉션의 소유로 규정되는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베를린에 있는 칼 프리드리히 쉰켈의 알테스 무제움은 나폴레옹이 훔쳐간 작품들을 되돌려받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따라서 프러시아의 힘과 프랑스의 패배를 선언하고 독일인들에게 국가적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거대한 19세기 미술관들은 이와 유사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내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새로 독립한 나라들이 미술관을 짓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고 “문화재”를 반환하라는 압력을 가하는 것에도 비슷한 동기가 깔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274~275p]


- 미국은 국가의 정체성을 특별히 미술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미국의 내셔널 갤러리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와 같은 국가주의적 함의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는 알테스 무제움과 동일한 지도적 가치들 하에서 일종의 승리의 사원으로 건립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미술관은 언제나 자신을 무엇보다 교육적이고도 정신적인 것으로, 그러니까 권력의 사원이기보다는 미의 사원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적 온건한 미국 미술관의 역할로 인해, 언제나 가장 고양된 형태의 미술관만을 생각해온 사람들에게는 미술관을 억압의 제도라고 공박하는 해체론적 공격이 그토록 야만적으로 비춰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미술관에 대한 그 어떤 명백한 대안도 여지껏 구상되어 본 적이 없다. 게다가 공식적인 해체론에 따르면 억압받는 예술가의 범주에 속할 만한 만은 훌륭한 예술가들이 오히려 미술관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일종의 억압으로 보고 있다. 그들의 의제는 미술관을 우회하는 것, 미술관이 해체되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미술관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얻고자 한다. [275~276p]


- 그림 자체가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건 간에 주기적으로 회화의 죽음이 선언되었다. 예컨대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에는 화자가 당대의 퇴폐를 한탄하면서 “순수예술은 죽었고 회화예술은…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고 말하는 한 구절이 나오는데, 그는 이 말로써 돈에 대한 사랑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회화 예술이 지금까지는 그 자체를 위해 연마되어 왔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과, “금전”의 추구가 테크닉의 연마를 집어삼켜서 예술가들이 가치 있는 그림을 그리는 “법을 망각하였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모든 신들과 사람들이 금괴를 저 대단한 그리스인 아펠레스와 피디아스가 그린 것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마당에, 회화가 퇴폐에 빠져버렸다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이때가 바로 2세기이다!
예술의 종말에 관한 나 자신의 주장은 회화의 죽음에 관한 주장들과는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사실 예술의 종말 이후에도 회화는 극도로 활력이 넘쳐났지만, 어쨌든 나 자신으로서는 크림프가 분명히 그렇게 보고있는 모더니즘 내러티브를 인정하지 않는 한, 모노크롬 캔버스를 근거로해서 회화의 서거를 선언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284~285p]


- 데 스틸 운동은 단 세 가지 색채 ― 빨강, 노랑, 파랑 ― 와 세 가지 비색채 ― 하양, 회색, 검정 ― 만을 자기 자신에게 허용했다. 이것들은 어떤 형이상학적 공명을 가지고 있다. 즉 세 가지 색채는 원색이고, 세 비색채는 색채원뿔의 중심을 관통하는 축의 끝점과 중간점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색채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오랜지색과 초록색은 단지 이차적인 색상에 불과하며, 대각선에 탐닉한다는 이유로 반 되스부르크를 경멸한 몬드리안에게 대각선이 수상쩍은 것이었듯, 순수주의자에게 오랜지색과 초록색은 수상쩍은 색상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만이 하얀색으로 가게 된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그가 오랜지색과 초록색을 사용하였던 이유와 같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별다른 형이상학적이고 우주론적인 함의가 들어 있지 않는 이유와 같을 것이라고 말이다. -중략- 이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라이만 자신의 생각과 동길글 면밀하게 들여다보아야 할이지 모른다. 이 그림들이 하얀색이고 사각형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모노크롬 회화는 자신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과소결정(과잉결정에 대한 반대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모든 회화에 대해 언제나 적용할 수 있는 말일 것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좋아 하든 않든 간에 비평이 문학의 경우와는 달리 회화예술에서는 일정한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된다. 사실 문학이론의 최근 경향이 텍스트를 회화처럼 다뤄서는, 문학에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회화에서 볼 수 있는 능력과 마찬가지로 거의 하는 일이 없다는 느낌을 갖도록 하지만 말이다.[289~290p]


- Q다움(Q-ness)은 분명히 좋음이나 위대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설혹 피에로가 위대한 것이 그가 Q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양식적으로는 부정적인 속성들이 미적으로는 긍정적이라는 것인데, 명료성을 약간 희생하고서 말하자면, 뵐플린이 회화적인 것과 선적인 것을 구별하고 있듯이, 우리가 이 속성들에게 긍정적인 이름을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가는 이 작품은 회화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면서 이와 동시에 그 작품은 선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경우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인데, 라이만의 어떤 그림들은 분명히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Q가 아니면 ~Q이다는 것은 논리학의 문제이다. 이밖에도 치러야할 대가가 또 있다. 양식상의 부정적인 술어들을 갖고서는 간단한 모형들을 형성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데 반해, 우리가 단순히 “개방적” / “폐쇄적”이나 “기하학적”/“생물형태적”과 같은“대립쌍들”을 이용할 때에는 이러한 가능성이 상실된다.[295p]


- 양식모형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는 장점 중 하나는, 그림들 속에 들어있는 잠재적 속성들이라 부를 수 있는 것, 그러니까 그 그림과 동시대에 살았던 관객들은 볼 수 없었던 그러한 종류의 속성들에게 그것이 나름의 지위를 부여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잠재적 속성들이 동시대의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차후의 예술발전들의 조명 하에서 오로지 회고적으로만 그것들이 눈에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코레조가 좋은 예가 된다. 즉 한 세기 후의 사람인 카라치 형제는 코레조를 선배로, 따라서 초기 바로크로 보았던 것이다. 사실 코레조는 그의 명성이 아마도 최고조에 달했던 18세기에 들어와 “<주피터의 연인들>과 같은 작품들로 인해 열렬하게 평가되었으며 로코코를 선취하고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바로크 양식이 창안되었을 때, 동시대인들로 하여금 코레조를 한 명의 예술가로 받아들이는 것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특징들이 갑자기 해명되었으며, 로코코의 시각에서 더욱 더 많이 해명되기에 이른다. 매너리스트들은 자연스러움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우아미를 찬양했다. 그리고 자연스러움에 대한 이러한 경시가, 오늘날 어떻게 하여 그 용어가 코레조의 동시대인인 파르미지아니노에게서 발견되는 극단적인 기교와 동의어가 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코레조는 나중에 매너리스트로 불리기는 했어도, 그의 동시대인들이 더 자연스러운 어떤 방향 속에서 양식을 인정하고자 했던 움직에는 반발했다. 따라서 코레조는 17세기와 18세기에 재발명되었듯이, 매너리즘이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진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재발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 그의 잠재적 특징들이 풀려나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후기 마네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초기 뉴욕형 회화에 이르게 된다. 앙드레 브르통은 우첼로와 쇠라를 선구적인 초현실주의자들로 분류했지만, 초현실주의가 창안되어 제대로 평가받게 되는 데에는 이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 ― 아킴볼도와 한스 발둥 그린이 당장 머리에 떠오른다 ― 이 필요했다. 1984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원시주의와 모던 아트“ 전시회가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된 것은, 이 전시회가 무심결에 원시미술작품들을 모던 미술과 동일한 친족성의 부류 속에 묶었고, 그럼으로써 양식분석이라면 당연히 주목해야 할 원시미술과 모던 미술 사이의 그 심원한 차이들을 완전히 간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아프리카산의 키가 크고 가느다란 조각상이 자코메티의 특징적인 한 작품과 어떤 ”친족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이런 의미의 친족성은 이 작품들 각각이 키가 크고 가느다란 이유들은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각 작품에 대한 우리의 지각에 엄청난 손상을 입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친족성이 가지는 문제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 양식모형 자체가 가지는 주요문제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양식모형이라고 하는 장치에는 역사적인 감수성을 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어떤 무역사적인 미술관(美術觀)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299~300p]


-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은 예술계의 일원이 된다는 것, 다른 유형의 사물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술작품에 대해 상이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심지어 나는 예술작품들은 모두 다 평등하다는 일종의 정치적 비전을 갖고 있기까지 했다. 각 예술작품은 그 밖의 모든 예술작품과 동일한 수의 양식적 특질들을 갖고 있다는 그러한 의미에서 말이다. [304p]


-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은 두 개의 슬라이드를 비춰주며 하는 미술사 강의에서의 미술교육 관행과도 서로 맞아떨어졌다. 이런 식의 강의에서는 인과적으로 역사적으로 서로 거의 관련이 없는 두 작품이 나란히 비춰지고 비교되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상기한다고 말해지곤 했는데, 이러한 미술교육 관행은 어느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일반적인 비평적 관행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마치 모든 예술작품을 동시대의 것으로, 다시 말해, 완전히 시간을 벗어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나 같다. [305p]


- “어떤 것을 예술로 본다는 것은 눈이 볼 수 없는 어떤 것 ― 예술이론의 분위기, 예술의 역사에 대한 지식, 즉 예술계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여러분은 내가 이 문장 중에서 특히 예술계를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게 아니라, 주어진 작품이 다른 작품들과 맞아떨어진다는 것에 대한 지식, 다른 작품들이 주어진 작품을 가능케 한다는 것에 대한 지식이었다. [305~306p]


- 하피프는<중국풍 빨간색 33x33>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것은 “족히 수 백 점이나 되는 그림의 흐름 속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나머지 작품들의 맥락 내에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제 스스로 존재하기도 한다.” 이 말은 라이만의 작업에 대해서도, 혹은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예술가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작품은 자신이 놓여 있는 작품군으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는 바, 이로부터 우리는 오늘날 회화가 놓이는 장소가 곧 전시회라고 하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전시회는 작품이 홀로 판단되고 평가받는 맥락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이 자신이 놓은 장소로부터 끌어내는 에너지와 의미 모두가 지각적인 것은 아니다. -중략-
나는 모노크롬 회화에 대한 이러한 논의를 비평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의 한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작품들 사이의 유사성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이것들의 개별 역사들을 생각하여야 한다는 점을 우리가 일단 깨닫는다면 말이다. 우리는 이 작품들이 어떻게 세상에 도래하였는지를 설명해야하고, 이 작품들이 내리는 진술에 의거해서 읽는 법을 배워야 하고 평가하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이 작품들이 모방적인 형이상학적인지, 형식주의적인지 아니면 도덕적인지를 판단해야 하며, 만약에 우리가 여전히 친족성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 작품들이 상상된 양식모형상의 그 어디에 놓일 수 있는지와 그와 비슷한 작품들은 무엇인지를 결정하여야 한다. 말레비치의<검정색 사각형>은 지면과 수평을 이루지 않고 비스듬하게 걸려있었기 때문에 로버트 맨골드의 사각형 그림들 중 하나와 어떤 친족성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맨골드의 사각형 그림들은 완벽한 꼭짓점의 코드를 준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벽한 꼭짓점의 의무를 충족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친족성은 각 작품의 비평적 분석을 위한 출발점에 불과하며, 우리가 비평적 검토를 계속해나가면 이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각 작품에 관해 우리가 알아야 할 흥미로운 사실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모노크롬 작품들로 채워진 미술관이 있을 수 있을 거싱고, 내가 『평범한 것의 변용』의 첫 장에서 상상해보았듯이, 빨간색 사각형 그림들만으로 이루어진 갤러리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빨간색 사각형 그림들은 겉으로는 모두다 완전히 똑같아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서로 엄청나게 다른 것들이다. [313~314p]


- 브루클린 지역사회는 이 위대한 건축물에 구현되어 있는 그 엄청난 비전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브루클린 미술관의 순회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맨해튼 미술계쪽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미술관의 영구 소장품들은 대단히 높은 학문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의 공공 수집품은 브루클린 공립학교들의 의제에 따른 것이다. 또한 그것은 브루클린에 점점 더 많이 살고 있는 예술가들을 위한 귀중한 자원이지만, 이들은 모든 사정을 고려해볼 때 여건이 허락한다면 맨해튼에서 더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예술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브루클린 주민들은 “브루클린의 부와 지위와 문화와 사람들을 빛낼” 미술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했을 때 브루클린의 고상한 버버들이 염두에 두었던 예술미에 대한 그러한 갈증을 별로 보여준 바가 없다. 도요새 떼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초등학생들의 무리를 빼놓는다면, 브루클린 미술관의 전시실들은 거대한 텅 빈 공간과 같으며, 어떤 연령층의 사람들은 청년기 시절의 미술관에서 향수를 느끼고 있다. [323~324p]


- 버버와 러스킨이 겪은 예술경험은 사람들이 판에 박힌 예술경험이라 부를 만한 것, 혹은 러스킨의 경우에는 판에 박힌 미술관 경험이라 부를 만한 것에 해당되지 않는다. 버버와 러스킨은 어떤 실존적인 맥락 속에서 예술작품을 만났으며, 그때 예술이 제때에 읽은 철학 한 편과도 같이 그들의 시선에 들어왔다. 투린의 시립 갤러리에 있는 다른 작품들도 동일한 재주를 부릴 수 있었는지, 혹은 다마스쿠스 타일이 다른 때에도 버버에게 동일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경험이 그들을 특별히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버버는 사실 딸을 그녀 자신의 말마따나 미술관의 일부에 시집보내고 자신의 장식적인 아내는 미술관 중의 미술관을 위해 일하는 일종의 도슨트로 돌릴 정도로 예술작품과 미술관의 모델을 인간관계를 위한 모델로 이용하기도 했다. 미술관은 아마도 행복한 삶을 위한 모델로서는 매우 형편없는 모델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러스킨의, 뇌새적인 여인 에피 그레이와의 그 슬픈 미완성 결혼은 베로네제의 작품이 승인하고 있는 관능적인 쾌락주의가 러스킨의 성적 억압을 해소하지 못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심리학자라면 러스킨을 사로잡은 그림의 “세부”가 시녀의 치마에 달린 주름장식이라는 사실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버버와 러스킨은 그들의 삶이 자신들을 구원해준 그 예술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은총을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하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다. 버버는 미술관 중의 미술관을 통해서, 러스킨은 저술과 런던에 있는 노동자 대학에서의 드로잉 강의를 통해서 말이다. 두 사람은 모두 미적 전도사들이었다. [326~327p]


- 예술경험은 예측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음의 어떤 선행상테에 따라 달라지며, 동일한 작품이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때에는 심지어 동일한 사람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거듭해서 위대한 작품들로 돌아가는 이유이다. 이 작품들 속에서 매번 새로운 어떤 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보는 데 이것들이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327p]


-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담 버버처럼 한편으로는 엄청난 재산을 모아오면서도 여태까지 미술에 대해 “눈이 멀고” 감각이 마비된 사람에게는 설혹 그가 미술을 경험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미술과 함께 살았다 하더라도 미술이 의미하는 바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미술관 자체는, 그것이 또 무슨 다른 일을 행하건 간에, 이런 종류의 예술경험을 얻을 수 잇게 해준다는 사실로 인해 정당화된다. 이러한 경험들은 미술사적 학식하고도, 미술감상하고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경험들은 미술관 밖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나는 가끔, 내가 회화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 것은 군인으로 이탈리아에 참전해서 피카소의 청색 시대의 걸작<인생>의 복제품을 우연히 보았던 바로 그때 느닷없이 결정되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그때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어떤 심원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언제인지는 몰라도 제대를 해서 일반 시민의 생활로 돌아기기만 하면 클리블랜드에서 회화 자체를 경험하는 순례여행을 떠나리라는 결심을 그때 굳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이 베로네제가 러스킨을 감동시킨 방식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작품들을 만나는 곳은 여전히 전형적인 미술관이다. 얼마 전 한 언론 이벤트에서 어떤 사람이 난해한 사진 전시회를 기획한 큐레이터에게 자신은 그런 사진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고백했는데, 내가 보기에 이에 대한 그 여성 큐레이터의 답변은 매우 깊이가 있어 보였다. 그녀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가정에서 우리가 이런 것들에 직면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을 위해서 미술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쨌거나 놀라운 일이 아니냐고 대답했다. [328~329p]


- 오늘날 확실히 미국에는 어떤 급진적인 비전이 허공을 떠돌고 있는데, 이것은 최소한 아담 버버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의 전제, 즉 수백만의 사람들이 미술을 갈망하고 잇다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갈망하는 미술은 지금까지의 미술관이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미술이다. [329p]


- *이 단락은 발췌할 수 없어 전문을 정리하였다.


1. 공공미술 (Public Art)
미국에는 언제나 모종의 공공미술, 즉 기념건축물들의 건립이 있어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 버버와 같은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대중이 미술관을 가는 게 아니라 미술관으로 하여금 대중에게로 가게 하여야 한다는 사실에, 공공장소에 비기념물들을 두어서 대중이 이에 대해 미술관 내의 작품들에 반응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즉 미적으로-반응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처하고자 했다. 이 전략은, 표면상으로는 대중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미술관의 이름으로 공간들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벽없는 미술관을 만들어내었다는 점에서, 교묘하게 건축술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들 자신은 미술의 선택에 발언권을 갖지 못했으며, 내가 관리자들이라 부르는 사람들-아무 것도 모르는 일반 대중들과는 달리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미술의 선택을 결정하였다. 이런 것이 관리자들 측에서 벌이는 권력놀이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커다란 미술 드라마 중 하나인, 뉴욕 연방광장에 있는 리처드 세라의<틸티크 아크>를 놓고 전개된 갈등에서 이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나는 『네이션』지의 내 칼럼에서 이 조각품의 철거를 역설했다는 사실을 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철거찬성입장은 내가 생각하기에 당시 미국의 어떠한 미술간행물도 수용하지 않았던 입장이다. 나는 『아트포럼』의 발행인인 토니 코너가 자신도 나의 입장에 대단히 많이 동의하지만 잡지를 통해 이걸 죄다 말할 수는 없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미술계는 이 문제에 관한 청문회에서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과는 없었다. 결국 세라의 조각 작품은 철거되었으며, 연방광장의 추악해진 공터는 본래의 일상적인 용도에 맞게 대중들에게 반환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 논쟁은 그 어떤 단일 사건보다도 미술관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권력을 더 폭넓은 대중에게 드러내 보였다고 생각된다. 사실 사우너은 언제나 권력의 상징이었지만, 어떤 점에서 이 사실은 그것의 실천과 주장에 스며들어 있는 정신성을 통해 위장되어 있었다. 미술관이 미를 통한 진리의 사원으로 표상되는 한, 권력의 적나라한 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2. 대중의 미술 (The Public's Art)
이 쟁점을 다루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미술관 밖의 공간에서 살아가게 될 미술을 선택하는 데 있어 대중에게 더 많은 발언권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과도하게 힘든 사항은 아닐 것이다. 사실 그것은 참여민주주의가 관철될 수 있는 장소 중의 하나여야 한다. 예술작품에 관여하는 대중은 그들의 미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크리스토는 언제나 관련되는 대중을 참여시키고 있으며, 사실 의사결정과정이 그가 행하는 작업의 일부이다. 의사결정과정에 대중이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작품은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어서 후세들이 이를 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사결정은 여전히 미술관 개념에 입각해 잇으며, 이런 연유로 해서 문제의 미술이 어디에 놓여 있건 간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곳은 바로 미술관이 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술관 밖의 공간들은 그 미술작품들이 존속하는 동안 일종의 초연한 미술관 구역이 되며, 그 작품에 대한 반응은 미술관 작품에 대한 반응과 동일하고, 대중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원망, 선호, 욕망에 대해 자문을 해주는 전문가 집단에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으로 설정된다. 캘리포니아 주의 일부 지주들이 크리스토의<러닝 펜스>-이 작품은 부분적으로 이 지주들의 허락 덕분에 성취될 수 잇었다-에 대해 보여준 반응은, 마이젤스 브라더의 영화에서 이들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강도와 시적 감흥에 있어서 베로네제에 대한 러스킨의 반응에 견줄 만하다. 나는 조금 후에 참여미학의 개념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른 대안들-대중을 예술가로 변모시킴으로써 비미술관적인 미술을 창작하는 따위의 대안-을 다루기 전에, 우선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해야 한다. 즉 대중이 미술관의 의사결정과정에 개입할 권리를 얻게 되면, 미술관과 대중은 모두 다 무엇이 전시될 수 있고 무엇이 전시될 수 없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과연 어디에다 경계선을 그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대중은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미술과 이에 수반되는 검열의 문제로 엄청나게 시달려왔다. 그러나 캐나다에서는 최근에 비평적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서열에 속하는 미술작품-바넷 뷰먼의<불의 소리>와 마크 로드코의<넘버 16>-의 구입을 놓고 엄청난 항의가 제기되었다. 미술관을 종족화하는 것-이것은 결국 미술관이란 특정한 그들을 위해, 그들 자신의 미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이 갖는 하나의 분명한 장점은 무엇이 “그들의” 미술이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일이 “그들”에게 달려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것은 미술관을 벗어나 있는 대중이 할 일은 아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되면, “그들” 역시 세금 부담을 져야 한다는 점을 빼놓고는 검열의 문제를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공동체에 사는 버버 같은 사람들의 두둑한 주머니로 후원되는 미술관중의 미술관의 경우에는 이런 세금문제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양심껏 자신들의 돈을 다른 좋은 일보다는 미술에 할당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행동하는 문화”와 같은 전시회조차, “그들 자신의 미술”을 생산하도록 기금을 제공받은 사람들 이외의 집단들과 관련해서는, 세금 걱정 없이 개최될 수가 없었다. 이 전시회를 위해 수많은 비영리 단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립예술기금으로부터 주요한 재정적 후원이 있었던 것이다. 이 전시회 텍스트에는 전체 사업의 예산액이 들어 있지 않으므로, 캔디 막대<위 갓 잇!>을 만드는 데 납세자들에게 얼마만큼의 부담이 돌아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작품은 캔디에 굶주린 시카고 주민들에게 팔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많은 돈을 벌지 못했다. 그들은 그것을 미술작품으로 좋게 봐주는 쪽으로는 한 입도 맛보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한편, 캔디 제조공장이 마침 거기에 있지 않았더라면, 이 캔디가 미술작품으로 만들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제과공들이<위 갓 잇!>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시간 동안 이 공장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물론 리처드 세라는<틸티크 아크>가 요구하는 거대한 내후성 강철판을 얻기 위해 강철압연공장을 세워야 했던 것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 1400년 이래 만들어진 아마도 거의 모든 미술로부터 컨템퍼러리 미술을 구별해주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 이 특징은, 컴템퍼러리 미술의 일차적인 야망은 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의 일차적인 관계양상은 관객으로서의 고나객에 대해 관련을 맺는 게 아니라 이 미술이 전해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른 측면들과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모든 미술의 일차적인 영역도 미술관 자체가 아니며, 미술작품들이 점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해서 미술관처럼 구성되는 공적 공간들도 분명히 아니다. 그러한 공적 공간들을 차지하고 있는 미술작품들은 우선적으로 미적인 성격을 띠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관객에게 말을 걸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1992년 『아트포럼』에 기고한 한 에세이에서 나는 이렇게 글을 쓴적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미술관이 가능케 하는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사람들과 접촉하고자 하는 미술이다…그리고 미술관은 미술관대로 미술 안팎에서 부과되는 그 엄청난 압력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삼중의 변화-미술제작에서, 미술제도에서, 미술관객에서-를 현재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이 “행동하는 문화”라고 하는 전시회를 가능케 한 하나의 텍스트로 인용된 것을 보고 전혀 놀라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내가 또한 놀라지 않았던 것은, 나의 생각이 어느정도는 그 전시회의 주요 발의자인 메리 제인 제이콥이 이전에 보여준 노력에 고무되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에너지와 사회적 비전을 소유한 독립 큐레이터이기도 한 그녀는 스폴레토-USA에서 괄목한 말한 장소특정적 미술 전시회를 기획하기도 했다.
미술관 밖의 미술은 퍼포먼스 미술과 같이 미술관에 속하는 것으로 쉽게 판단되지 않는 몇몇 장르들로부터 인종적, 경제적, 종교적, 성적, 민속적, 혹은 민족적 노선-물론 공동체를 규정하는 다른 노선들도 있다-에 따라 정의되는 특정 공동체에게 주어지는 미술-<위 갓 잇!>은 이런 미술의 징후적 실례이다-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를 가진다. 악명 높은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는 미술관의 전시공간에게 느닷없이 주어진 일종의 비미술관적 미술의 앤솔로지였다. 1993 이전의 휘트니 미술관은 내가 마음에 두어왔던 경향의 미술작품들을 전시해왔던 미술관이었고, 그러한 전시회를 통해 바로 그 경향을 인정하였다. 나는 그러한 미술을 지지할 태세가 되어 있었던 만큼, 휘트니 미술관 안에서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식의 비미술관적 미술을 본다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퇴행적인 정치적 성향을 보여준다 하겠다. 거의 확실한 점이지만, “그들 자신의 미술”이 가져다주는 자연스러운 귀결은 그들 자신의 미술관, 즉 특수이익집단의 미술관일 것이다. 전형적인 것이 바로 그들의 동족의식에 화답하고 있는 뉴욕의 유대 미술관이나 워싱턴에 있는 국립 여성미술 뮤지엄(National Museum of Women in the Arts) 등인데, 이런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미술은 바로 해당 공동체의 미술이므로, 미술에 대한 경험이 각 개인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동일시되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으며, 관객도 그들과 타자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미술관이 이미 종족화되었다는 주장은 다양한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그들 자신의 미술관들이 바로 미술관이라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다양한 그들은 관객을 한쪽으로는 백인 남성이나 권한을 보유한 계급으로 다른 한쪽으로는 권한을 박탈당한 주변부 계급으로 분할한다.)


3. 하지만 그것이 미술일까?
공동체 기반 미술, 적어도<위 갓 잇!>에 의해 예증되는 그런 유형의 공동체 기반 미술을 가능케 하는 것 중의 일부는 1970년대 초반이나 아니면 가장 빨리 잡는다 해도 1960년대 후반 이전까지는 사실상 언명된 적이 없는 어떤 이론들이다. 물론 일찍이 마르셀 뒤샹이 자신의 첫 번째 레디메이드를 제시한 1915년에 이러한 이론들을 위한 지반이 이미 닦였다는 주장은 제기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요셉 보이스가 공민권을 부여하는-어떤 대상에게 예술로서의 공민권을 부여하는-이론에 관해 가장 급진적인 진술을 한 인물일 터인데, 그는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생각했다.(물론 이것은 누구라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는 다른 것이다.) 이 두 테제는 연결되어 있다. 만약에 미술이 예컨대 회화나 조각이라는 견지에서 협소하게 이해된다면, 두 번째 테제는 모든 사람이 화가나 조각가다는 말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음악가나 수학자다는 말만큼이나 뻔한 거짓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어떤 수준까지는 드로잉이나 모양내기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일반적으로는 예술로서의 회화나 조각이 시작되는 지검에 미치지 못하고 중도에서 멈춰버린다. 내가 말할 수 있는한, 보이스식의 공민권 부여과정에는 그러한 비위에 거슬리는 단계적 변화가 수용될 여지가 없다. 그것이 미술이면 미술이고, 그렇지 않으면 미술이 아닌 것이다. 여타 캔디 막대들로부터<위 갓 잇!>을 구별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기준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캔디 막대들 자체를 놓고 맛이나 크기, 영약학적 고려 따위에 의거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기준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위 갓 잇!>은 이러한 캔디 막대는 그저 캔디 막대에 불과하다. 예술작품인 캔디 바는 특별하게 좋은 캔디 바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지 그것이 예술이라는 의도를 갖고서 생산된 캔디 바이면 족한 것이다. 심지어는, 그것의 식용성이 그것이 예술이라는 것과 일관되기 때문에 그것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볼 만한 사실은, “다중”(multiple)이라 불리는 보이스의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이 평범한 종이 한 장 위에 올려놓은 초콜릿 한 조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작품과<위 갓 잇!>사이의-그리고 이 두 작품과, 젊은 개념미술가 재닌 안토니가 1993년의 그녀의 작품<갉아먹다>속에 집어넣은 그 거대한 초콜릿 덩어리 사이의-차이들을 밝혀내는 것도 분명 가치 있는 작업일 것이다. 이 작업은 단 것을 무지 좋아하고 다식증도 가지고 있는 어떤 군인의 호구지책, 간단한 식사, 그리고 폭식 사이의 차이, 따라서 이에 따른 그의 영야 상태들 사이의 차이를 밝혀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감식안이라든가 역동적인 파생시장에서 유래하는 어떤 “특질”감이 이러한 초콜릿 작품들에게도 감돌고 있다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하다고 할 것인데, 파생시장에서는 누군가가 보이스의 초콜릿 작품을 두고 “특별한 고특질” 운운하며 광고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때 특질이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그의 초콜릿이 구석은 멋들어지게 빠졌고 모서리는 뚜렷하게 다듬어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질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미술로서의 “다중”의 정신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삽을 그렇게 만들지 않느다”는 이유를 들어-다시 말해, 그것의 제작 솜씨나 금속 두께를 근거로 해서-뒤샹의 논삽에게 고가를 요구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미술작품이 초콜릿으로 만들어졌을 때 미술에게 주어지는 의미의 배열하고도 큰 관련이 없다.
“특질”이 보이스가 고려하는 미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란 어렵지 앟으며, 『뉴욕 타임즈』에 실린, “특질은 시대에 뒤떨어진 관념인가?”라는 제목의 한 유명하고도 논쟁적인 글에서 브렌슨이 “특질”에 대해 의문을 제가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에서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특질 개념을 적용한다는 게 부적절하다는 것이 “그들 자신의 미술”의 징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여성미술-나는 여성들이 만든 순수미술이 아니라 퀼트와 같이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맡아왔던 미술을 말한다. 이러한 여성미술은 처음에는 순수미술의 미술관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은 분명히 특질에 입각한 평가에 종속되었던 것이다. 성상금지령 때문에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은 회화와 조각을 만들지 않았지만, 그들이 미술이라 생각하고 만들었던 것이 특질의 기준에 입각해서 점수가 매겨졌다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브렌슨에 따르면 “행동하는 문화”를 예고해준 “가장 예언적인 목소리”인 보이스의 작품조차 특질의 관념을 의문에 부친 바로 그 기준에 의해서 때에 따라 그 평가가 들쭉날쭉하였다. 나는 보이스의 어떤 작품이 최고이며, 그것이 좋은 작품이라면 왜, 그리고 무엇이 그 작품을 좋은 작품으로 만드는지에 관해 합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보이스의 작품은 다마스쿠스 타일이나 베로네제의<솔로몬과 시바 여왕>이 제공하는 것과 동일한 서열의 예술경험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보이스는 1970년에 에딘버러 미술대학에서<켈틱(킨로흐 란노흐) 스코티시 심포니 Celtic (Kinloch Rannoch) Scottish Symphony>라는 퍼포먼스(그는 퍼포먼스라는 말 대신에 “행동”이라는 말을 썼다)를 상연했다. 전매특허와 같은 펠트 모자를 쓰고 사냥꾼 조끼를 입은 그가 황량한 큰방에 서 있거나 어떤 전자장치에 둘러싸여 물감으로 뒤덮인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사진으로 기록되었다. 아래의 인용문은 이 퍼포먼스의 일부분에 대한 묘사이다.
그의 행동은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다. 그는 칠판에 뭔가를 갈겨썼고, 크리스첸센(피아노 연주자)의 40분짜리 서킷에 있는 막대기로 칠판을 바닥 이리저리로 밀었으며, 자신이 제작한 필름(편집관정에서 리즘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성공작이라 할 수는 없는)과 시속 3마일 정도의 느린 속도로 표류하듯이 카메라를 지나가는 란노흐 모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벽에서 젤라틴 조각들을 떼어내어 쟁반에 담고 이 쟁반을 다시 강박적인 행동을 자기 머리 위에다 비우는 동작을 하는 데 한 시간 반 이상을 보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40분 동안 정지상태로 서 있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이 퍼포먼스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기충격을 받을 정도로 강력했다. 나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내내 거기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다 마치 개종을 겪은 듯했다. 몰론 이에 대해 모두 다르게 설명했지만 말이다.
나는 “개종”이라는 말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그 말이 러스킨의 “비개종”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위의 묘사를 읽어보려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그 퍼포먼스 현장에서 스스로 개종을 체험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이스에 관해서, 마치 그가 자기 자신의 관념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간혹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감탄할 만한 양식을 갖고 있는 놀라운 예술가이다.
이러한 이의들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 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가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미술을 생산하는 주변부 공동체 구성원들은, 지배적이긴 하나 본질적으로 그 공동체에 대해서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미술문화의 가치를 이미 내면화하고 있으며, 보이스의 경우에도 그가 예연자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를 형성시킨 제도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을까 하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는 말이다. 참된 공동체 기반 미술은 기준에 종속되지만, 이 기준은 미술관과 그것의 산하 제도들 속에 고이 모셔져 있는 지배적인 미술문화에 적용되는 기준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를 계속 끌고 가보자는 것이 현재의 내 목표는 아니다. 미술관이 정의하고 있는 종류의 미술이 누리던 전성시대는 지나갔으며, 이제 우리는 미술개념의 혁명기에 진입하였다고 상정해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말하자면 1400년경에 미술개념의 출현과 함
께 생겨나서 미술관을 바로 그러한 유형의 미술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하나의 제도로 만들어낸 혁명만큼이나 중요한 혁명 말이다. 이미 수많은 곳에서 주장했지만, 내가 여기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예술의 종말이 도래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바로 그 미술개념에 의해 생겨난 내러티브가 내적으로 투사된 자신의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술이 변한다면, 미술관 역시 기본적인 미적 제도로서의 위상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행동하는 문화”와 같은 전시화가 예증하고 잇는 그러한 유형의 비미술관적 전시-이러한 전시에서는 미술과 삶이 미술관의 규역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뒤섞인다-가 규범이 될 것이다. 아니면, 여전히 남아 있게 될 지배적인 미술문화(이제 미술문화는 어떤 성적이고 경제적이고 인종적인 유형의 영역으로 이해되고 있다)에 대해 미술관이 계속해서 종족화됨에 따라, 미술관 자체가 미적으로 주변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분명 그간 미술관이 받아왔던 압력이 상당부분 떨어져 나가겠지만, 어떤 대가를 치루기는 해야할 것이다.
이 대가가 무엇인지 말하기 전에, 특히<위 갓 잇!>과 같은 작품과 관련해서 “하지만 그것이 미술일까?”라는 물음을 다루어보기로 하자. "미술관 중의 미술관“기준에 의하면 이것은 분명히 미술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술상에서의 개념적 혁명들이 있을 수 있으려면 어떤 초역사적인 미술개념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역사적 미술개념을 분석하는 것이 예술철학의 과제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 과제의 몇몇 발걸음은 이미 내디뎌졌고 그 중 일부는 나 자신에 의해 내디뎌졌다고 본다. 또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위 갓 잇!>이 어떤 적합한 정의(어느 누구도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서야 주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 못한 정의) 하에서는 미술로서의 자격을 꽤 그럴듯하게 부여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아주 많은 것이 이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수 세기 동안 지배해왔던 미술개념에 적합한 기준으로 보면 이 작품에게는 결여된 것이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오래된 개념에 의해 공민권을 부여받은 작품 속에는<위 갓 잇!>이 갖고 있는 것이 많이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위 갓 잇!>과 같은 작품 덕분에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미술개념은 예전의 미술개념과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 미술관과 대중
사람들이 다문화시대의 미국을 위해 미술관이 할 수 있는 제한적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러한 말 속에서 미술관이 약간 값싸게 취급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러스킨이 자기 아버지에게 전달한 경험, 혹은 제임스가 아담 버버라는 주인공을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경험, 혹은 1970년 에딘버러에서의 보이스의 행동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전달하고 있는 경험이, 다문화주의에 대한 경험들이 그러하듯이, 계급, 젠더, 인종의 제약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경험들을 가지기 위해서는 약간의 지식이 필요할 것이고, 또한 이것은 사람들이 그러한 경험을 가지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지식일 것이다. 이것은 도슨트나 미술사가나 혹은 미술교육 교과과정 따위에 의해 전달되는 유형의 미술 감상과는 전혀 다른 질서에 속하는 지식이다. 또한 이것은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새기는 법을 배우는 것하고도 거의 관련이 없다. 이것은 철학과 종교에, 삶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매체에 속하는 경험들이다. 이쯤에서 나는 갈망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아담 버버의 생각으로 돌아가 볼까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갈망하는 것은, 아니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것은 의미이다. 즉 종교, 혹은 철학, 혹은 마지막으로 예술이 제공해 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의미 말이다. 이것들은 헤겔의 그 엄청난 비전 속에 나타나는 것으로, 그가 절대정신이라 부르는 것의 세가지(오로지 세 가지밖에 없다) 계기이다. 제임스의 시대에 아담 버버와 같은 사람들이 사원 같은 거대한 미술관 건물들을 짓겠다는 생각에 고취된 것은 그들이 미술작품을 의미의 지주로 지각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예술작품이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도 그것이 종교 및 철학과 맺고 있는 친족성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예술은 그저 지식의 한 대상이라기보다는 지식의 원천으로 이해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른 기대들이 이것을 대체하게 되었으며, 파리에 있는 로저스와 피노의 걸작인 퐁피두 센터와 같은 다른 건축물들에 반영되게 되었다. 이 다른 기대들이라는 게 무엇이건 간에 미술을 만들고 지지하고 경험하게 하는 훌륭하고도 타당한 이유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미술관은 내가 예증하고자 한 그런 종류의 의미의 가능성에 입각해 있는 한, 더욱 더 우회하기가 힘든 장애물이 될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이러한 기대들은 이런 종류의 의미에, 따라서 이러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게 하는 데 바쳐진 미술관에 의존하고 있다. 그 동안 미술관은 아주 많은 다른 문제들에도 매우 열성적으로 반응해 왔기 때문에, 미술관의 각 전시실에 아직도 그림들이 걸려있으며 전시실에 놓은 상자에는 아담 버버가 일 세기전에 브라이튼에서 자신이 점찍은 약혼녀와 함께 구매를 고려하였던 그런 종류의 놀라운 사물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미술관이 여전히 그의 직관-수백만의 사람들이 갈망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하는-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5. 예술의 종말 이후의 미술
<위 갓 잇!>이 단지 초콜릿 막대가 아니라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예술의 종말 이후에나 비로소 가능하다.<위 갓 잇!>은 1970년대에 출현하여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예술가다는 취지의 주장을 제기한 어떤 강력한 이론들에 의해서 예술로서의 공민권을 부여받게 된다. 이 작품이 한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공동체 기반의” 미술이라는 사실은 공민권을 부여하는 어떤 정치적 이론들의 성과이다. 이 이론들은 미술관과의 미술에서는 전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개인들의 집단에게서 미술이 그들의 삶에 부여할지도 모르는 의미들을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사실 이러한 주장은 이 이론들이 깔고 있는 강령의 논리적 귀결이다.<위 갓 잇!>은 제조되는 모든 캔디 막대에게 예술의 지위를 안겨 주지는 않는다. 뒤샹이 눈삽 하나를 가지고 예술작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모든 눈삽이 예술작품으로 둔갑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 정도까지는 인정할 수 있다면, “그들 자신의 미술”이라고 하는 개념이 받아들여진 이후에 과연 미술관이 어디에 위치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도록 하자.
맨 먼저 해야 할 말은,<위 갓 잇!>을 미술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모두가 그 초콜릿 막대를 “그들 자신의 미술”로 삼고 있는 바로 그 집단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그 작품은 관객을,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 그 미술작품 속에 구현되어 있는 사람들과 그 공동체의 일원은 아니지만 예컨대 마이클 브렌슨과 같이 공동체 기반 미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로 나누게 될 것이다. 이때 공동체 기반의 미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란 다양한 미술계들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개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다양한 공동체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행동하는 문화”와 같은 전시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예술작품들의 생산을 촉진시킨다. 그런데 이들이야말로 개인적으로는 미술관과 미술갤러리, 미술전시회와 미술간행물의 세계에서 편안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위 갓 잇!>은 그 어떤 의미에서도 “그들 자신의 미술”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이들은<위 갓 잇!>에 대해, 러스킨이 베로네제의<솔로몬과 시바 여왕>에 대해 갖는 관계나 아니면 아담 버버가 다마스쿠스산 청색 타일에 대해 가졌던 관계와 거의 동일한 관계를 견지하였다. 이런 관계가<위 갓 잇!>을 탈종족화하는 데 즉각적으로 도움을 주기는 했다. 팔자 좋은 백인 남성들에게<위 갓 잇!>은 결코 “그들 자신의 미술”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우연찮게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되었을 뿐이다. 그것도,<위 갓 잇!>과 같은 작품들을 감상하는 관객층을 형성한 팔자 좋은 백인 남성 여성들이 미적 근거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근거에 입각해서 그 작품들을 감상하였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따라서<위 갓 잇!>은 이것을 그들 자신의 미술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미술인 것은 아니다. 그것이 미술인 한,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속한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미술계가 그 초콜릿 막대를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제과공들이 어떤 보호 하에서, 그리고 어떤 역사적 시점에서-즉 어떤 의미에서 무엇이든 가능해진 예술의 종말 이후에-그것을 만들었을 때, 그것이 미술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미술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솔로몬과 시바 여왕>이 러스킨에게 불러일으킨 것과 같은 경험을<위 갓 잇!>이 언젠가는 어떤 사람에게 불러일으킬지 않을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솔로몬과 시바 여왕>이 러스킨의 것에 비견할 만한 경험을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켰을까? 이 캔디의 미술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미술계하고는 담을 쌓고 사는 저 모든 남녀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그들이 캔디를 갖고서 미술을 만들 수 있으며 이와 동시에 시카고에서 가장 좋은 캔디 막대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내리고서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미약한 가능성이 그 작품을 미술관 안에 두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미래 세대의 교화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달리 이 작품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332~347p]
- 본질을 생각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한 용어에 의해 지시되는 사물들의 부류를 가리키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 용어가-용어들의 의미에게 간혹 주어지는 오래된 용어를 쓰자면 외연적으로 및 내포적으로-함축하고 있는 속성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방식이다. 귀납법에서 우리가 그 용어의 외연을 형성하고 있는 항목들에게만 특유하게 있는 공통된 속성들을 끌어내고자 할 때, 우리는 외연적으로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외연의 그 극단적인 이질성- 이 점은 특히 모던 시대에 들어와 더 심해졌는데-이 때때로 예술작품의 부류는 정의가능한 속성들의 집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부정의 토대를 형성했으며, 따라서 예술은 게임과 마찬가지로 기껏해야 가족유사성을 갖는 부류에 불과하다는 긍정-내가 예술철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을 때에 흔하게 있던 생각-의 토대를 형성했다. 나의 추측이 옳다면, “진실로 예술(Art)과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본래 의도도 바로 이러한 계열의 사유에 어느 정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350~351p]


-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은 i) 무엇에 관한 것이며, ii) 그것의 의미를 구현한다는 것을 말한다. 구현이라는 말은 의미의 차원들을 포착하는 것들인 내포와 외연을 벗어나거나 넘어서는 것이다. [354p]


- 예술개념은 본질주의적이기 때문에 무시간적이다. 그러나 이 용어의 외연은 역사적으로 지표화된다. 다시 말해, 예술의 본질은 역사를 통해 드러난다. 아마도 이것이 “모든 시대에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유는 특정한 발전단계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할 때에 뵐플린이 의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역사는 예술개념의 내포보다는 외연에 속하는 것들로, 다시 헤겔이라고 하는 주목할 만한 예외를 제외한다면, 철학자들 중에 예술의 역사적 차원을 진지하게 고려한 철학자는 거의 없다. 곰브리치는 이와는 달랐으며, 명예롭게도 자신의 획기적인 저작 『미술과 환영』의 목적이 “어떻게 해서 미술이 하나의 역사를 갖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그는 왜 미술이 역사를 가지는지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왜 도상적 재현이 역사를 가지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결국 그가 왜 뒤샹을 자신의 설명 속에 집어넣는 데 그토록 곤란함을 느꼈는지를 말해준다. 결국<샘>은 만들기와 맞추기하고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그의 동료 포퍼가 헤겔에 대해 가한 조롱을 물려받지 않았더라면, 내용과 표현수단 둘 다 역사적 개념이라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들에 응답하는 마음의 능력은 지각이 아니라, 다시 말하건대, “판단”이지만 말이다. 이 두 가지의 (이를테면 헤겔주의적인) 조건들에 주어진 역사적 구속들을 감안해볼 때,<샘>(어쨌든 배관配管의 역사 주위를 맴돌고 있는)과<브릴로 상자>(집안의 청결 기준은 말할 것도 없고 제조업의 역사를 암시하고 있는)는 이보다 앞선 그 어떤 시대에도 예술작품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우리는 이 작품들의 역사적 순간을, 이것들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었을 그 어느 때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356p]


- 다시 말해, 예술개념은 예술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과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즉각적으로 나오는 귀결은, 예술정의는 그 어떤 양식상의 명령들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혁명의 시기들에 등장하곤 했던 저항할 수 없는 양식상의 명령들은 뒤에 남겨진 것은 “진짜 예술이 아니다”고 말하곤 했다. 어떤 작품들에게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기를 즐겨 거부했던 사람들은 예술이 역사적으로 우연하게 갖게 된 하나의 특징을 예술의 본질이나 그 일부로 들어올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하나의 철학적 실수인 바, 본질주의와 함께 하는 든든한 역사주의가 결여되었을 때에는 특히 벗어나기가 어려운 실수이다. 간단히 말해, 다원주의가 실제로 역사적으로 실현되었건 않았건 간에, 예술상의 본질주의는 다원주의를 수반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강제집행에 의해 예술작품이 겉으로 어쩔 수 없이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 상황들을 상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틀에 들어맞도록 국립예술기금의 법을 뜯어고치게 되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말을 역사적 외연을 갖는 다른 개념들에 적용해봐도 그 결과는 분명하고도 즉각적이다. 예컨대 여성성이라고 하는 개념은 매우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무엇이 여성의 범주에 적합하게 들어맞는 것으로 여겨지는지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매우 상이하다.(“남성” 역시 역사적 외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358p]


-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은 모든 형식들이 우리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는 말은 우리가 어쨌든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과거의 형식들과 관련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형식들과 관련을 맺는 방식이 우리가 지금 어떠한 시대에서 살고 있는지를 일부 규정하고 있다. [360p]


- 간략히 말해, 특정 시대의 국각적, 종교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공통된 시각적 어법이라는 게 있으며,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시각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시각도 역사를 가진다.” 즉 공통된 시각적 언어도 불가피하게 변하게 된다. 베르니니와 테르보르치가 서로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이 둘은 보티첼리나 로렌조 디 크레디에 대해서보다는 서로 간에 더 가깝다. 보티첼리와 로렌조 디 크레디는 전혀 다른 지층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 지층들을 드러내는 것이 미술사의 일차적인 과제로 여겨져야 한다”고 뵐플린은 생각했다. 그리고 물론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지금 이 경우에 뵐플린이 “드러내는 것”은 보티첼리와 디 크레디는 선적인 데 반해, 테르보르치와 베르니니는 회화적이라는 것이다. 뵐플린이 모든 것이 모든 때에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든다. 즉 선적인 지층 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말해야 하는 것을 회화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말이다. 뵐플린은 어떻게 해서 베르니니가 16세기의 회화적 양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기는 하지만 단지 이 물음을 걷어치우기 위해 던질 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이렇다. “그는 자신이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회화적 양식을 필요로 했다.” 우리가 시각 형식들은 그 자체로는 결코 시각적이지 않은 신념이나 태도 따위를 표현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한, “그가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분명히 시각의 역사를 넘어선다. “시각이 역사를 가지는 것”은 오로지 시각적 재현들이 역사적으로 상호관련을 맺고 있는 삶의 형식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363p]


- 뵐플린이 “바로크 양식이 양감을 취급할 때 드러나는 그 엄청난 에너지”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 과연 조토에게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이 조토가 자신의 미술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과 도대체 어떻게 상응할 수 있겠는가? 간단히 말해, 메시지와 수단 사이에는 어떤 내적 조응이 있는 법이다. [365p]


- 이러한 현실들을 달리 말할 수 있는 단어를 골라보자면 “시기들”이라는 말을 써볼 수 있을 것이다. 시기라고 하는 게 단순히 하나의 시간대가 아니라 수많은 남녀들에 의해 살아진 삶의 형식들이 그 안에 놓여 있으며, 또 그 안에서 이러한 삶의 형식들이 어떤 복잡한 철학적 정체성을 갖게 되는 시간대임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 철학적 정체성이란 우리가 직접 살아보았기에 사태들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 뭔가를 알려주는 어떤 것이기도 하고, 인식된 것이긴 하되 우리가 직접 살았던 것은 아닌 어떤 것이기도 하며, 자기 자신의 시대를 꿰뚫어보는 역사적 통찰력을 타고난 개인들, 달리 말해 자신의 시대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하는 개인들의 경우에는 직접 살 수 있는 것이자 인식되는 것이기도 하는 어떤 것이다. [366p]


- 미래의 삶의 형식들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정말로 거의 없다. 그리고 우리가 미래주의저긍로 살고자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미래에 대한 우리 시대의 비전을 재현하는 데 불과할 뿐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돈키호테에 대한 미래주의적 짝은 벅 로저스와 윌마 디어링이 이 별에서 저 별로 훨훨 날아다녔던 1930년대 이래로 미래의 상징이 되었던 우주 비행사의 어떤 변종일 것이라는 것도 거의 확실하다. 20세기 말에 세르반테스가 지금으로 봐서는 미래에 속하는 삶을 살고자 분투노력하는 어떤 사람에 관한 소설을 쓸 수 있겠지만, 그 미래가 오게 되면 그가 묘사한 그 삶은 오늘날로 날아온 벅 로저스만큼이나 기이하게 보일 것 이다.[367p]
- 즉 삶의 형식이란 그저 우리가 알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직접 살아진 것이다. 예술이 삶의 형식 속에서 어떤 구실을 맡으려면 그것이 이렇게 어떤 구실을 맡고 있는 꽤 복잡한 의미체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다른 삶의 형식에 속하는 예술작품의 경우, 현재의 예술작품과 관련해서 우리가 구성할 수 있는 만큼이나 관련되는 의미체계를 재구성해내야만 그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이전 세대의 작품과 이 작품의 양식을 모방할 수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이 작품이 원래 삶의 형식 속에서 의존하였던 의미체계를 우리가 살아 보는 것이다. 이 작품을 우리의 삶의 형식에 맞추는 방식을 발견할 수 없는 한, 그리고 그때 까지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전적으로 외적이다. [369p]


- 그리고 우리는 후대의 예술가들이 선배들의 방식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은 기술이나 지식과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반종교개혁기의 로마나 메디치 가의 피렌체의 삶의 형식에서는 이전의 양식들로 그려진 회화가 들어설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370p]


- 반 미허른의 약간 서투른 그림을 본 관객들이 이것 역시 바로크 초기에 그려진 베르메르 자신의 그림, 예컨대<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예술로 생각한다고 상상해보자. (사실 베르메르의 이 작품은 반 미허른의 위작보다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감동적이다.)그러나 이것은 아마 반 미허른이 20세기보다는 17세기에서 더 괜찮은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만 보여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가 구사했더라면 화려하게 꽃피었을지 모르는 그 양식은 그 자신의 시대인 20세기에는 단지 “언급”만 될 수 있었지 “이용”될 수는 없었다. 그는 그것이 베르메르의 작품인 척 가장함으로써-다시 말해, 위조자로서-그것을 이용하는 척 할 수 있을 뿐이었다. [375p]


- 동원된 사회과학은 예술의 상태라는 개념이었다. 표적 집단들이 정해지고, 나무랄 데 없는 여론조사표가 만들어졌는데, 이 조사표를 통해 무작위로 선정된 미국의 가정들이 미적 선호에 관련한 일련의 질문들에 답변하게 될 것이다. 조사결과는 통계학적으로 정확하게 “95% 신뢰수준에 허용오차범위 ±3.2% 내에서” 확정되었다. 샘플은 주에 따라 계층화되었으며, 성별 할당도 준수되었다. 그런데 답변 자체는 미적 사회학의 견지에서 특이하게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파란색은 대단히 많은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색(44%)이자, 중부지역의 주들에 살고 있으며 연령은 40세에서 49세 사이이고 연봉은 3만 불에서 4만 불 사이에 이르며 미술관은 전혀 가보지 않은 보수적인 백인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다. -중략- 어쨌든 이런 엄청난 양의 자료에 근거해서 코마르와 멜라미드는 “미국이 가장 원하는 것”이라는 제목을 단 그림을 하나 제작했는데, 이 그림은 예술가가 단 하나의 캔버스에다가 집어넣을 수 있는 최대한의 선호된 특질들을 집어넣고 있다. [382~382p]


- 적어도 내 느낌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여론조사 따위가 아닌 다른 출처에서 나오는 소설을 원할 것이다.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본능으로부터, 아니면 적어도 소설가의-내 느낌에, 과학보다는 직관에 기초하고 있는 게 확실한-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소설을 원한다. 오로지 그것이 거기에 있기를 당신이 원하기 때문에 “소설에서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그 소설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아마 그 소설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당연히 검증될 수도 있다. 최소한 두 종류-로망스 소설과 포르노그래피 소설-이상의 소설을 읽어본 독자들은 공식에 따라 단지 최종 결과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며 창조성에 대해서는 단돈 2센트조차 지불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질문은 이것이 회화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들어맞을까 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가장 원하는 소설”의 겉표지에서 그의 붓과 물감튜브를 보았던 바로 그 예술가가 사람들이 그런 예술가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지금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예술가일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실은 전혀 딴판일 터인데, 사람들이 그 예술가가 그런 식으로 그림을 그리기를 원하는 것은 그가 “국제적인 미술계”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등장하는 예술가 주인공이나 여준인공이 여론조사결과들-예술적 영감은 갈망하는 낭만주의와 손을 맞잡는다던가 아니면 진정한 사랑을 찾아 나서라 따위의 여론조사결과들-을 통해 자신의 영감을 흥정하는 소설이 “가장 원하는 소설”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가 자신의 영감에 다라 그린 그림에서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서 그 결과에 따라 그린 그림들을 사람들이 더 좋아할지 않을지의 여부를 물어보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할 것이다. 지금 말하는 것은 어떠한 과학적 증거로도 뒷받침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부슈모프와 같은 예술가를 원한다. 부슈모프는 코마르와 멜라미드가 막 미국 미술계에 모습을 드러낸 초창기에 만들어낸 가공의 예술가로서 이들은 부슈모프라는 이 이름으로 꿈결 같은 풍경화를 수도 없이 그렸으며 낭만적인 일기장을 계속 써나갔다. 그때 내가 가졌던 생각은 가장 원하는 그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림에서 원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건 가장 원하는 그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림에서 원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384~385p]


- 나는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고도 가장 잘 팔리는 소설이 될 수 잇따고 추정해본다. “가장 잘 팔리는” 소설도 일종의 소설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에 의해 규정될 것이다. 이에 병행하는 나의 직관을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가장 원하는 그림”이 될 수 있다. [385p]


- 내가 그들에게 모든 그림들이 서로 매우 닮아 보인다고 시사했을 때, 그들은 내 말을 대부분 시인하면서, 국가별 차이점들은<가장 원하지 않는 그림>에서 드러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가장 원하지 않는 그림>은 한결같이 추상적이고 예각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색상에 있어서는 황금색에서부터 오렌지색, 연자주색, 보라색에서부터 암회색-케냐의 색채 스케일의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색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크기에 있어서도 다르다.<미국의 가장 원하지 않는 그림>은 작고 초라한 데 반해, 프랑스의<가장 원하지 않는 그림>은 크고 밋밋하다. 그러나 양식만큼은 불변이어서, 국가별 차이들은 세부에서나 드러났다. 초국가적으로 말해서, 가장 원하는 그림은 19세기 풍 풍경화로 판면되었는데, 이것의 퇴화한 후손들이 칼람주로부터 케냐에 이르기까지 달력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파란색이 캔벗의 44%를 차지하고 물과 나무가 있는 풍경화가 선험적인 미적 보편자, 즉 미술을 생각할 때 모든 사람이 맨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 되었다 한다. 모더니즘이 전혀 일어난 적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387p]


- 심리학자 일레노 로쉬와 그녀의 동료들은 정보가 축적되는 방식에 입각해서 범주 이론이라 알려진 심리학의 한 분과를 개발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 이름을 하나 대보라는 요청을 받으면 “개똥지빠귀”라고 대답하고, 동물 이름을 하나 대보라는 요구를 받으면 “개”라고 대답할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검둥오리”라고 답하고, 두 번째 질문에는 “비단구렁이”라고 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개의 한 종류를 불러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라사 압소”보다는 “경찰견”을 댈 것이다. 유명한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하나 대보라는 질문에 중국인들은 아니겠지만 미국사람들은 한결같이 “조지 워싱턴”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야생동물”을 물어보는 질문에 “하마”라고 답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일반적인 답변은 “코끼리”나 “사자”나 “호랑이”일 것이다. 코마르와 멜라미드가 밝혀낸 것이 사람들이 진짜 선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림들을 보아오면서 그들의 눈에 가장 많이 익은 것이었을 공산이 매우 크다. [388p]


- 차이점은 이러한 풍경화들에 나타나는 인물들에서 드러나는데, 여기에서 코마르와 멜라미드의 장난기가 발동된다. 사람들이 비풍경화보다는 풍경화를, 유명한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그림보다는 유명한 사람들이 나오는 그림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코마르와 멜라미드는 유명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림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러시아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조지 워싱턴이라거나 중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웒나다거나 케냐인들이 나폴레옹을 가장 원하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간의 차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곳이 바로 여기이고, 코마르와 멜라미드의 장난기가 발동하는 곳도 바로 여기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동물, 그것도 야생동물이 그려진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그러나 삼손과 사자, 파시파에와 황소, 요나와 고래처럼 유명한 인물과 동물 사이에 어떤 밀접한 내적 관계가 없는 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유명한 인물과 야생동물이 함께 등장하는 풍경화를 갖게 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조지 워싱턴과 하마가 함께 등장할 수 있는 방식은 도저히 있을 수 없으며, 사실 조지 워싱턴과 하마가 하나의 회화적 환경을 공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사실주의 회화를 의미한다면 말이다. [389~390p]


- 코마르와 멜라미드는 선접(選接)을 결합으로 바꿔놓았는데, 결합되는 것들 하나하나는 즐거울지 몰라도 결합 자체는 불쾌할 수 있다. [391p]


- 탈역사적 시대의 진정한 영웅은 회화적 양식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모든 양식을 통달한 예술가, 곧 코마르와 멜라미드이다. 이들의 기질은 이미 헤겔이 희극을 논하면서 예견한 바 있다. “희극의 핵심은 온갖 불운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유머와 태평스런 유쾌함을 유지하는 것, 기본적으로 행복한 성격을 띠는 열중과 아둔함과 기이한 성벽을 뻔뻔스럽게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예술적 비극과 희극의 이러한 양상들이 예술의 종말을 정의내리고 있는데, 이때 예술의 종말이라는 것 자체는 종말이라는 말이 쓰이긴 해도 당연히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의 종말을 예증하고 잇는 희극이 전개되고 있는 장면이다. 코너나 코마르와 멜라미드의 희극은 우연찮게 재미있을 뿐이지, 사실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희극의 본질은 아니다. 희극은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3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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