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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g Oct 13. 2016

건축의장강의

건축의장강의 ,KENCHIKU ISHO KOGI,

도서출판 국제(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1동 소재), 

처음낸날 1998년 3월 10일, 다시낸날 2003년 9월 20일


- 이 경우 한 가지 방법으로 아무 특성이 없는 넓은 공간을 요구에 따라 자유롭게 칸막이를 해서 쓰는 방법이 있다. 미국의 초,중학교에 자주 보는 방식이다. 이런 공간 구조는 확실히 대응성이 높고 자유도가 커서 사용하기 쉬운 면은 있지만, 왠지 슈퍼마켓이나 공장 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이유는 공간을 에워싸는 힘이 너무 빈약하고, 통합성이나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28p]


- 공간이란 '나'에서 시작하여 '나'를 감싸는 것으로 생겨나, '나'와 함께 '내'가 필요로 하는 다른 이를 그 안에 에워싼다.[28p]


- 그러므로 벽은 '벽에 부딪친다', '벽을 세운다'고 한 것처럼 난관이나 차별도 의미한다. 따라서 벽에서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가게 해준다는 것은 항상 특수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입구의 문지방 위에서 사람을 불러들일까, 거기에 그대로 머무를까 하는 판단은 그 사람을 자기편이라 여기는가, 아니면 타인인 채로 놓아 두는가 하는 중요한 판단임을 알 수 있다. '저 집은 문지방이 높다' 든가 '문지방을 넘었다'는 표현이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일상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음은 그런 점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들은 종종 개방적이라든가 폐쇄적이라는 대비적인 개념을 사용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개방적인 것은 바람직하고, 폐쇄적인 것은 좋지 않은 것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건축공간에서 생각해보면 올바른 개념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따. 닫힌 존재가 없으면 여는 가치도 없으며, 의미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아이덴티티는 자신의 중심, 즉 고정점을 가지고 자기의 영역 즉 에워쌈을 갖지 않으면 결코 확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여는 것, 문을 열고 창문을 여는 근사함이 생겨나는 것이다.[40p]


- 학교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초등학교도 있고 중학교도 있으며 고등학교도 있다. 규모도 크고 작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세워지는 장소나 시대도 여러 모로 다르다. 따라서 학교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된다. 칸은 이 '형태'의 차이는 디자인의 차이라고 말한다. 디자인은 개개의 건축에 따라 모두 고유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학교에는 학교임으로써 얻어지는 공통의 '형태'가 있다. 아니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형태'를 'From'이라고 불렀다. 이는 '본질'이라는 생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본질'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Form'은 말이나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정의되기 이전의 측정하기 어려운 것(unmeasurable)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하고, 우리들은 그것에 근거하여 개개의 조건에 따라 개개의 디자인을 이끌어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4p]


- 건축이란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람, 그것에 자금을 내는 사람을 위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건축가가 건물을 기획하는 사람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뿐만 아니라 건축가는 그것을 사용하는 여러 사람들과, 그 건물 앞을 지나는 여러 사람들, 기획한 사람이나 설계한 건축가나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 건물에 관계할 모든 사람을 염두에 두면서 설계해야 한다.
칸이 말하는 'Form'이란 상상할 수 있는 만큼의 건물에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의 집단으로부터 '공통으로' 떠오르는 무엇이다.[46p]


- "건축이란 방(room)의 통합체이다."[48p]


- 이것을 깨단게 되면, 여러분들은 분류라는 것이 가공의 편의적인 것이며, 실제는 모두 연속적인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현실을 떠나 공론(空論)을 주고받을 때, 흑백의 극단론은 알기 쉽고 그럴 듯하지만, 그러한 토론은 종종 현실을 보는 눈을 잃게 된다. 현실에는 완전한 흑도 없고 완전한 백도 없으며, 모든 것은 여러 단계의 회색으로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109p]


- 종종 우리들은 무엇에서 영향을 받았다든가, 무엇을 모방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그 내용은 말처럼 간단한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이미 그 사람의 안에는 그것을 재미있다고 보는 관점이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같은 것을 보더라도 전혀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110~111p]


- 건축물의 입구는 전기회로의 스위치처럼 'ON'이나 'OFF' 두가지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모든 입구가 역의 개찰구처럼 차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열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닫힐 뿐이라면, 입구 설계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며 재미도 없을 것이다. 건축공간의 입구는 양극단을 선별할 뿐만 아니라, 복잡한 중간항에 대응한다. 완만하게 단계적으로 대응한다. 또한 선별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인간에게 작용하여 준비시키고, 입구에 들어가는 데 어울리는 상태까지 인간을 변경시키고 완성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항상 입구를 결연히 확신을 가지고 통과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방황하고 주저하며 유보한다. 입구는 때로 그러한 유보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118p]


- '장소(place)'란 무엇인가가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장소'란 방의 특성이부여되어 있는 지형에 관한 것이다. 지형의 굴곡, 경사, 바위나 물 또는 수목 등은 '방'의 구성 요소인 중심, 에워쌈, 덮개, 개구부, 입구 또는 보다 넓게 개방과 폐쇄, 빛과 그림자라는 여러가지 특성을 만들고 있다. 그러한 특성을 찾아냈을 때 그리고 그것에 특정한 의미를 주었을 때, 그 지형은 나의 장소가 된다. 그리고 그 의미의 발견과 부여가 되풀이됨에 따라 그 장소의 성격은 강화 되어 간다. 이것이 장소의 기억이고 지속이다. [138p]
- 미국의 철학자 수잔K. 랭거는 "건축은 장소의 특성을 시각화한다."는 말로 장소와 건축의 관계를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반대로 장소의 특성을 시각화하지 않는 건물은 건축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그렇게 불릴 자격이 없는 것이다. 냉장고나 자동차처럼 공장에서 규격으로 만들어진 조립 주택을 건축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146p]


- 하늘을 나는 미디어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고, 그것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낳는다는 생각이 있으나,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비록 어떤 종류의 새로운 관계를 낳는다 해도, 그것은 '장소'를 대신하고, 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더불어 살고, 더불어 일하지 않고는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없다. 거기에는 공간과 장소를 공유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그리고 관념적인 공간이 아니라, 공간을 각각의 신체의 연장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둘러싸이고 닫히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장소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짊어진 원죄 같은 것이기도 하다.[147p]


- 그러나 건축가가 스타가 된 요즘에는, 반대로 "에술가인 척하는 건축가는 싫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 경우는 건축가란 무엇인가보다도, 예술가인 척한다란 무엇인가가 문제시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더라도, 건축은 예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제약이 많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건축에는 기능, 대지, 게다가 비용이라는 엄격한 제약 때문에 그림이나 음악 같은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닐까,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곳에 예술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은 가족이 이렇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이런 의문이 생기는 바탕에는 애당초 예수이란 완전하게 자기목적인 자유로운 것이며, 미(美)는 단지 아름다움만을 목적으로 하며, 그 외의 목적을 가지는 것은 예술을 타락시킨다는 견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견해는 18세기 말에 시작된 것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I' art pour l' art)'이라고 외친 '예술 지상주의'라고 불리는 주장 속에 가장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예술이 목적없이 만들어진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림도 조각도 음악도 모든 것은 무엇인가 목적이 있어 만들어지고 있었다. 예술 지상주의는 특히 19세기 낭만주의 미학 예술론에서 강화되었다. 그것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사고 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소설가 고티에(T. Gauti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뿐이다. 유용한 것은 모두 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인가의 필요가 나타난 것이며, 더구나 인간의 필요는 그 빈약한 성질과 같아서, 저속하고 불쾌하기 때문이다. ...... 집에서 가장 유용한 장소는 변소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인간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추한 것이며, 미(美)란 거기에서 떨어진 곳에만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 있다. 때문에 낭만주의 예술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아득한 옛날', '먼 저쪽'을 동경하며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154~155p]


- 그러면 생각해보자. 제약이 있다는 것은 예술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일까? 뛰어난 예술작품은 아무런 제약이 없는 완전한 자유 속에서만 성립하는 것일까? 자신이 감동했거나 항상 마음속에 두고 있는 작품을 떠올리면서 생각해보라. 한 가지 예로 미켈란젤로의 유명한<천지창조>를 생각해보자. 이 그림은 천재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회화라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이 그림은 바티칸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복잡한 교차 볼트의 천장에 그려져 있다. 이 건물은 이미 있었던 것이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은 아니다. 이 장소는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건축가에게 대지가 주어지는 것과 같다. -중략- 그렇다면 그런 것이 그의 예술적 창조의 장해가 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당연히 주어진 조건 안에서, 오히려 그 조건을 이용하여 창작한 것이다.[157p]


- 그렇게 되면 건축과 조각을 구분하는 조건을 다른 것에서 찾아내야 한다.
여기에서 건축공간이란 나의 신체의 외연이며, 살게되는 공간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감싸고 덮는 것이라는 건축공간의 정의이다. 이 공간의 정의에서 보면 무어의 조각은 사람은 살지 않으므로, 그것은 공간이 아니라 허공(void)이라고 불러야 한다. 여기에서 건축의 조형에서는 '에워싸는 것'이 본질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건축이란 살기 위한 에워쌈을 만드는 것이다. -중략- 조각과 다른 또 하나 명확한 건축의 중요한 특질은 건축은 반드시 하늘 아래 대지 위에 선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여기에서 건축 조형의 또 하나의 본질을 발견한다. 즉 '받치는 것'이다. [165~166p]


- '에워싸는 모티프'의 근원인 공간의 외연 그 자차에는 물체로서의 형태가 없다. 그것이 최초로 형태가 되는 거은 인간의 신체를 감싸는 의복에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신체를 감싸는 최초의 에워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복에는 구축성이 없다. 의복은 받치는 기능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복의 형태는 부정형이며,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형태가 심하기 바뀐다. [168p]


- 박람회가 끝난 후에도 영구 구조물로 남기자고 하는 운동도 일어났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건축가로서 기쁜 일이지만, 나는 그 보존에는 반대하였다. 축제는 아쉬움 속에 끝나는 것이며, 축제의 떠들썩함이 일상생활 속에서 형태로만 남는 것만큼 허무하고 쓸쓸한 것은 없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80p]


- 벽과 공간도 서로 상대를 부정적으로 매개하고 있다. 벽은 공간을 배제하고 있다. 공간은 벽에 부딪쳐 거기에서 끝난다. 본래 공간은 벽을 밀어낸 틈새로서 성립하고 있다. 공간이 방해되는 벽을 밀어내고 항상 더 넓어지려고 하는 것은 그 본성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은 벽에 부딪쳐 거기에서 끝남으로써 현실의 존재가 된다. 전혀 가로막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지는 공간은 그저 머리속에서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 우리들이 만들려고 하는 현실의 존재는 이러한 상호 부정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대립에 의해 성립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존재, 리얼리티를 이해한다는 것은바로 이 대립의 공존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리얼리티가 없는 사고란 이러한 대립을 일방적으로 배제한, 즉 극단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184~185p]


-그러나 축제의 동요는 오래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시 매일의 일상생활로 돌아가 노동하며 생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때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은 그들을 '받치고' '에워싸는' 것이 아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이제 그 조형에 싫증을 내고 있었다. 과격하고 선동적인 조형은 자극적일수록 사람들은 그것에 쉽게 싫증을 낸다. 그것은 현대 상업주의의 선정적인 광고 속에 과격한 표현이 계속해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지금 다시 구성주의 디자인이 인기를 끄는 배후에 상업주의가 존재한다는 것도 똑같은 상황이라고 생각된다.[217~218p]


- 슈타이너의 괴테아눔[217p]


- 건축가는 세계와 필사적으로 대면하고 있다. 그러나 창작의 절망적인 어려움 속에서 또 하나의 더욱 극단적인 태도가 생겨난다. 그것은 창작 그 자체의 부정을 향하는 태도이다. 이것이 니힐리즘이다. 이것은 상황의 어려움을 직시하고 직접 나타낼 것을 찾는 것이며, 현대 사상과 예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이다. [223p]


- 니힐리즘의 근저에는 그와 같이 심오하고 억제할 수 없는 생명이 머물고 있음은 나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인간은 부정된 자신을 회복하고 주장하기 위해서라면 파괴도 광기도 발명하는 존재인 것이다. [228p]


- 그렇지만 초현실주의자의 방법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그 주장에는 바꿔치기가 있다. 그들의 한계란 부정에 의해 생겨나는 힘이 언제나 그것이 부정하려고 하는 상대의 힘의 크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전통의 질서나 기계주의의 미학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을 때, 초현실주의의 파괴력은 확실히 큰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힘을 잃으면 스스로도 힘을 잃는다. 반발력에 의존하는 부정적인 작업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다. 또 주장의 바꿔치기란 오토마티즘(automatisme, 무의식적 자동작용)이라고 그들이 이름붙인 그 방법론 안에 있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무의식을 자동적으로 기술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암흑과 혼돈만이 아니라, 광명과 질서까지도 취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 안에는 그 양자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중략- 우상을 부정한다는 주장을 근거로 스스로가 우상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런한 바꿔치기 연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건축작품을 만들 수는 없었다.[229p]


- 예전에 잘 된 것은 우연이니 다음은 어떨지 모르겠다고 의심해서는 일을 할 수 없다. 아니, 실은 그러한 불안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뛰어난 미장이는 의심을 털어버리고, 벽과 회반죽과 자신을 믿고 손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작업현장의 실재론'이라고 부른 그것이다.
-중략-
"자연과학자는 그 사람이 어떠한 철학을 가지고 있더라도, 적어도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고 있을 때의 기본적 태도는 소박한 실재론의 입장이다.'[223p]


- 그렇다면 방법은 둘 중의 하나다. 가장 확실한 길은 토털 시스템을 전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옛 민가를 그대로 모방해서 세우는 것이다. 즉 러스킨의 말대로 고딕 양식을 규범으로 하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우 현재 설계하는 건물의 요구 조건 중에서 옛 건물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조건은 아마도 그대로 충족되지 못한 채 방치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구법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눈에 대한 문제를 한 번 더 생각하고, 그것에 적합한 지붕의 형상을 다시 생각해보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려운 길이다. 전통적인 민가의 지붕을 무시하지 않고, 그렇다고 반성없이 그대로 따르는 것도 아니라, 그것을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행동적 회의'이다.[242~243p]


- 건축이 생성되는 어떤 순간, 창작 과정의 어떤 결정적인 순간은 분명히 나타나지만, 그것은 금새 다시 숨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에 만드는 행위속에서 다시 파악되어야 한다. 고딕 건축을 처음으로 만든 13세기 건축가에게 확실하게 보인 질서가 19세기에 그것을 모방하여 만든 건축가에게 똑같이 보이는 일은 결코 없었다.
끊임없는 재검토와 재시도, 이것이 침묵하고 있는 질서에 가까이 가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243p]


- 그러나 한 사람의 만드는 인간으로서 명심해 두고자 하는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두가지만을 여기서 말하겠다. 하나는 '시대성'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건축은 '시대'를 표현하고, '시대정신'을 나타낸다는 주장이 범람하고 있다. 정신이라는 표현이 19세기적이며 무겁기 때문인지 '시대의 분위기', '시대의 감각'이라는 가벼운 말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말을 사용하든지 그 근저에는, 시대에는 그것에 적합한 하나의 형식이나 형태가 있다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시대와 일치하고 있는 작품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가치관이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서 '시대를 앞선다'거나 '시대를 예측하는'것이 중요하다는 태도가 나오게 된다.
나는 이런 사고방식에 오늘날 커다란 잘못을 범하게 되는 한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에서도 시대가 한 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다고 안이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몇 번씩 말한 바 있다. 어느 시대에나 사회는 몇 가지의 상반되는 힘의 대립과 투쟁 위에 성립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를 생각할 나위도 없이,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솔직하게 바라보면 명백해진다. 애당초 현재 살고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순되고 대립되는 힘 속에 놓여있음이 명백한 현실인데, 어떻게 그 총체를 하나의 '정신', 하나의 '분위기'로 환원시킬 수 있겠는가? 물론, 전 시대의 어떤 특성을 다음 시대에는 주목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시대를 전 시대의 특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반드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시대가 만약 한 가지 색으로만 되어 있다면, 우리는 인간에 대해 빈약한 편견을 가진 셈이다. '역사', 기록되어 있는 역사는 항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기록된 것, 하나의 견해에 근거한 이야기(historia)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무언가를 새롭게 제안할 때 '시대를 예측한다'는 상투적인 외침 속에는 그것이 망각되어 있다. 표면적으로느 새로워지려고 해도, 그러한 말을 외치는 태도속에는 유일하고 올바른 역사관이 우리들을 바르게 인도한다고 외친, 저 낡은 마르크스 주의의 망령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는 더욱 올바른 경제 예측이 더 많은 이윤을 낳는다고 하는, 다시말해 투기로 이어지는 가치관이나 처세술마저 그 말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신중하게 살고 있는 인간에게 시대란 그런 예측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법이다. 시대란 만들고 있는 우리들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현실성(reality)이지, 예측하는 투기의 대상은 아니다. 건축 프로젝트가 자신을 행위와 실천 속에 던지는 투기가 아니라, 처세술 같은 투기가 되어 있다는 것에 오늘날의 커다란 불행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미 19세기에 이것을 깨닫고, "시대 자체가 하나의 통합된 전체를 이루고 있어서 처음과 마지막이 있으며, 계획과 발전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나는 오늘날이야 말로 새삼스럽게 이 경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만드는 행위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으로서 한 가지 더 예를 들고 싶은 것은 정보 미디어 문제이다. 오늘날 정보 미디어는 널리 우리들의 생활 속에 만연되어 있다. 우리들은 인쇄물이나 전파 매개물로 사람이 사건을 알게 된다. 예술작품이나 건축을 만들고 사람에게 알리는 것도 정보 미디어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들은 오늘날 실제의 건축을 보기 전에 잡지에 실린 사진을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미디어로 전해지는 정보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특성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일부만이 취급되는 순간에 그것은 변형되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됨을 알아야 한다. 정보 미디어가 전하는 건축은 지금가지 몇 차례 인용하였듯이 다고베르트 프라이가 말한 '살아 있는 현실성'으로서의 공간 자체가 아니다. 일부만이 잘리고 과장된 것이다. 때로 그것은 심지어 현실과는 전혀 다른 '허구의 표상'일 때도 있으며, 바로 그 허구성이 용의주도하게 준비된 경우도 있다. 오늘날 미디어 정보는 현실에서 완전히 분리되고 독립된 자율적인 존재가 되어 가공의 표상 속에서 평가되며 다시 그것은 미디어에 실려 확대되어 간다. 그리고 그때 정보 미디어에 실린 건축 이미지는 실체가 없는 가공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정적이며 강한 힘을 요구한다. 일찍이 혁명 후의 러시아가 센세이셔널리즘을 대중 선동에 이용했듯이, 오늘날에는 상업주의가 광고 매체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때 건축은 거기에 사는 사람, 가 앞을 걷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잡지에 실린 사진에는 산맥이나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보였던 웅장한 건물이 실제로는 자그마한 유원지같은 건물이라든가, 자연의 숲을 대신하는 공간을 건축적으로 실현했다고 설명된 건물이 실은 변두리 쓰레기장과 같은 초라한 공간인 것은 이렇게 해서 생긴 결과이다.[244~2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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