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다니엘 킬 | 옮긴이 / 조정옥
예술에 관한 피카소의 명상, 다니엘 킬 지음, (주)사계절출판사(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소재), 옮긴이 조정옥
- 나의 작품은 일종의 일기를 쓰는 방식이다.[14p]
-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어떤 것도 끝을 낼 수 없다는 것, "난 작업을 잘해냈고 내일은 일요일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그림을 끝내자마자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림을 중단하고, 더 이상 손대지 않기로 결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그 아래에다 '끝'이라고 쓸 수는 없다.[16p]
- 세잔과 고흐는 한순간도, 오늘날 우리가 세잔이나 고흐의 그림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만들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그들이 본 것을 표현하고자 했고 거기에 온 정력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놓았다. 그들은 그렇게밖에 달리 만들 방도가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은 세잔이나 고흐가 되었다.[19p]
- 그리고 이 화가들은 그 당시 상상도 못할 정도의 고독 속에서 작업했다. 고독은 그들의 불운임과 동시에 축복이었을 것이다. 이해받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을까? 이해받는 것이 본래적으로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이해를 받는다면 그것은 더욱더 위험하다. 인간은 항상 오해받아왔다. 인간은 스스로 고독하지 않다고 믿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실제로는 점점 더 고독해진다.[20p]
- 나는 내 그림 속에 어떤 사물이 들어 있는가에만 관심이 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사람들이 그림에 있는 특정한 사물로부터 어떤 특정한 의미를 이끌어 낸다면, 비록 그 의미가 옳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의도와 무관하다.[31p]
- 나는 '발전'이라는 단어가 잘못 사용되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나는 발전되어가지 않는다. 오직 존재할 뿐이다. 예술에는 미래도 과거도 없다. 그리스인이나 이집트인의 예술은 과거가 아니다. 그들은 여느 때에 못지않게 오늘날 더욱더 생명력을 가진다. 변화는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한 예술가가 표현방식을 변화시킨다면 그것은 사고방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가와 모든 인간에게 항상 허용되는 일이다. [40p]
- 추상미술이란 없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가지고 시작해야한다. 나중에 실체의 모든 흔적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사물의 이념이 이미 그 사이에 지워질 수 없는 표시를 남겼으므로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58p]
- 틴토레토와 같은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화폭의 테두리를 마무리할 때에야 비로소 그림이 완성되는 데 반해, 세잔은 붓질을 하자마자 단 한 번에 이미 하나의 그림이(그리고 그것은 수채화에서 더 잘 볼 수 있다) 된다.[75p]
- 마티스는 아주 건강한 폐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가 색을 쓰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티스의 작품 속에 나란히 놓인 세 가지 색, 말하자면 초록, 보라, 청색을 보고 있으면 그 색들이 결합해 '바로 그 색'이라고 칭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색을 불러들인다. 그것을 색의 언어라고들 한다. 마티스는 "각각의 색에게 스스로 확장할 수 있는 자신의 영역을 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점에서 나는 그와 완전히 일치한다. 다시 말하면 색은 자기 자신을 초월해나가는 어떤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한 색깔을 어떤 구불구불한 검은 선의 내부에 가두어둔다면, 당신은 적어도 색의 언어라는 입장에서 보면 색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색이 퍼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막는 격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색이 어떤 정해진 형태로 표현되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색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확장의 가능성이다. 색이 조금이라도 그의 한계 저편에 놓이는 지점에 도달하면 이 팽창력이 효력이 있게 되며, 만일 그것이 팽창의 끝에 도달했다면 옆에 있는 색도 끼어들어 올 수 있는 일종의 중립적 영역이 생겨난다. 이러한 순간에 당신은 색이 숨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마티스는 그림을 그린다. 그렇기 때문에 "마티스는 아주 건강한 폐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77~78p]
- 보나르가 하늘을 그리면 아마도 먼저 보이는 그대로 푸른색으로 그릴 것이다. 그런 다음에 한참 동안 고개를 돌렸다가 그 속에 미미한 보라색을 발견하여 이제는 한두 번의 붓놀림으로 보라색을 첨가한다. 단지 안전을 기하기 위해, 그 다음에는 하늘이 아주 조금 분홍색을 띠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렇다면 거기에 분홍색을 첨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 결과 우유부단으로 인해 잡탕이 되어버린다. -중략- 마티스는 명료하고도 철저한 사고를 거쳐 색깔을 선택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자연에 가까이 머물든 멀리 떨어지든 간에 그는 언제나 한 면 전체를 한 가지 색으로만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실재에 대한 고도로 발달된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색이 그림의 다른 색깔과 어울린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다.[80~81p]
- 예술가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인간인가가 중요하다. [96p]
- 신도 예술가와 다름없다. 신은 기린과 코끼리, 그리고 고양이를 고안해냈다. 정확히 따지면 신은 어떤 스타일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한결같이 새로운 것만 시도한다.[96p]
- 어느 날 내가 자전거 안장과 핸들을 집어다 아래위로 놓아서 황소의 머리를 만든다면 그것은 아주 멋진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곧바로 해야 할 일은 이 황소 머리를 내다버리는 것이다. 길가든 수챗구멍이든 아무 데나 버리되 아주 버려야 한다. 그러면 청소부가 지나가다가 그것을 주워올리면서 이 황소 머리를 가지고 어쩌면 자전거 안장과 핸들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것이다. 그러고는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이것은...... 멋진 일일 것이다.[100p]
- 사랑은 조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증거만이 존재한다.[102p]
-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세잔의 불안감이다. 불안감은 곧 세잔의 회화 이론이다! 그리고 고흐의 고통, 그것은 그 남자가 펼치는 진정한 드라마이다. 다른 모든 것은 사기다.[108p]
- 한 화가가 다른 사람처럼 그린다거나, 다른 사람을 모방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이 뭐가 나쁜가? 오히려 좋은 점이 있지 않은가. 언제나 다른 사람을 따라 하려고 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모방을 하고 싶어하고 그렇게 해보려 시도하지만 항상 실패한다. 그리고 전부 망치고 있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을 되찾는다.[111p]
- 어떤 대상을 완성한다는 것은 그것을 끝내버리는 것이고, 죽여버리는 것이며, 그 대상의 영혼을 빼앗는 것이며, 투우에게 투창을 던져 죽여버리는 것과 같다.[126p]
-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몇몇 화가를 제외하고는, 젊은 화가들은 오늘날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모르고 잇다. 우리의 시도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그 시도에 대해 당당하고 분명하게 대항해나가든지 하는 대신에 과거를 다시 살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모든 세계가 열려 있고 모든 것이 실행될 수 있다고는 하나 과거를 재창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스스로의 약속을 이미 지켜버린 것들에 대해 그들은 왜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집착하고 있는가? 무슨무슨 기법의 그림들이란 게 몇 킬로미터씩 늘어져 있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그리는 젊은이는 드물다. [134p]
옮긴이의 글
- 우리 한반도는 지금 비예술적 시대, 무감각 시대를 살고 있다. 서양미술사를 보면 고독한 예술가를 둘어싼 주위세계도 나름의 예술감각을 소유했다. 예를 들면 고독한 인상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도 좋아하는 각자의 예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를 돌아보면 예술가 혼자서 예술을 하는 반면,, 나머지 세계는 컴컴한 암흑가와도 같다. 삶의 공간을 보더라도 미에 대한 감수성이 스며들어 있는 곳은 드물다. 가난하고 먹고 살기 바쁘기에 예술 따위는 신경 쓸 틈이 없다는 그럴 듯한 이유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삶이 고달플수록 아름다운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 아닌가? 그러면 가난한 인도와 폴란드는 어떤가. 내가 아는 한 거기에는 아직도 예술감각이 건강하게 숨쉬고 있다. -중략- 그러나 예술과 감각의 부재로 우리의 삶이 더욱 고달픈 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도시를 거닐며 눈을 어디에도 편안히 둘 수 없다면, 상점과 버스의 소음박스에서 음악 같지 않은 음악이 당당하게 주먹을 (우리의 정신에다) 휘두른다면, 역사 깊은 고적지 옆에 공장이 세워진다면, 빼어난 절경이 파헤쳐져 건축재료로 쓰인다면, 냇가가 쓰레기와 폐수의 잡탕이라면, 얼마 남지 않은 녹지대가 묘지로 가득 찬다면(살아 있는 인간은 마구 칼에 찌릴는 반면 죽은 자에 대한 갖은 예의는 분에 넘치고), 갖가지 인간 이기주의적인 핑계로 자연속의 각종 동물이 남획된다면......
그 모두가 추하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과 생명까지 위협한다. 어디에서부터 손을 댈 것인가? 전체가 갈아엎어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 달아나고 싶다.
피카소처럼 무엇인가에 몰입하고 싶은 계절에
조 정 옥 [156~15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