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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g Oct 13. 2016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지은이 / 로버트 맥기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로버트 맥기 지음. 
*아주 오래전에 정리한 글인지라, 페이지 번호, 출판사, 역자에 대한 정보가 없다. 


- 배급업자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한 가지 동기를 가지고 움직인다.
바로 돈이다. 변한 것이 있다면 요즘의<작가>들은 그들의 전 세대 작가들 처럼 힘을 가진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자부심으로 가득 찬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처럼 인상적이고 현란한 영상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그게 다이다. 


- 너무나도 많은 시나리오 자가 지망생들이 좋은 시나리오 한 편을 써내는 것은 교향곡을 작곡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때로는 그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해보지 않는다. 좋은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 어려운 까닭은, 작곡가들은 음표들의 수학적 순수성에 근거해 작곡을 하는 반면에 시나리오 작가들은 인간 본성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는 혼돈 속으로 파고 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초보자는 순전히 자기 자신의 경험에만 의존한 채, 과거 경험과 여태 보아왔던 영화들 속에서 무언가 말할 거리와 말할 방법을 찾게 되리라는 기대만으로 뛰어들고 본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이란 과대 평가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작가는 인생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깊이 있는 인생을 살며 치밀하게 인생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꼭 필요한 조건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충분하지는 않다. 가장 중효한 것은 자기화된 지식이다.


-초보자가 기능적인 면에서 저지르는 실수는, 그가 접해 온 소설이나 영화, 연극들의 이야기적인 요소들을 무의식적으로 흡수해왔다는 데 있다. 작가들은 이를 일컬어 본능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단순한 습관, 그것도 견고하게 한계 지워진 습관일 뿐이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 만들어져 있는 표준을 모방하거나 아니면 그에 반항하는 전위 예술가로 자신을 상상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야기란 삶의 진실을 발견해 내기 위해 삶으로부터 추상화된 것이되 구체적인 삶의 감각을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이야기란 반드시 삶의 모습을 담고 있어야 하지만 아무런 깊이나 의미가 없는 보통 삶의 단순한 복사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란 말이야>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건을 이야기에 포함시키기 위한 가장 약한 구실일 뿐이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실제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조차 일어난다. 그러나 이야기란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의 세계가 아니다. 사소한 실제 사건들은 우리들을 진실 근처에도 데리고 가지 못한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은 진실이 아니라 사실일 뿐이다. 진실이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 그 자체이다.


- 사건이란 변화를 의미한다. 창문 밖이 말라 있었는데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나 보니 젖어 있다면 그새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가 온 것이다. 이로 인해 세계는 마른 상태로 부터 젖은 상태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날씨가 바뀐 것만으로는 영화를 만들 수 없다. 이런 영화를 시도해 본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이야기적 사건>은 특정한 의미를 띤 것이어야 한다.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나려면 무엇보다 등장 인물에게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누군가가 쏟아지는 빗속에 흠벅 젖어 있는 풍경은 단순히 비에 젖은 거리에 비해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


-플롯을 짠다는 것은 이야기의 위험 지형 속을 헤매고 다니다가 수많은 미로를 만났을 때 단 하나의 확실한 통로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롯은 사건들에 대한 작가의 선택이며 시간 소에 그것들을 직조해 넣는 일을 말한다.
어떤 일을 포함할 것인가? 어떤 것을 제외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사건을 어떤 사건 다음에 배치할 것인가? 사건들에 대한 명학한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 작가는 이 선택을 훌륭하게 해내기도 하고 변변찮게 해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플롯이다.


-일관되는 사실성이란 인물들과 세계 사이의 관계 방식을 설정해 내는 허구적 장치로서, 이야기의 전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지 되는 이 관계에 의해서만 의미는 창조될 수 있다.

예를 들면<판타지>로 분류되는 모든 영화들은 이 사실성의 별난 규칙들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아크플롯을 따르고 있다.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 에서 사람 들장 인물이 잠겨 있는 문을 향해 만화 등장 인물인 로저를 몰아가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로저는 갑자기 이차원으로 변해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서는 문 밑의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탈출한다. 사람은 닫혀 있는 문에 가서 부딪친다. 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앞으로 이야기의 규칙이 된다는 데있다. 즉 어떤 사람 등장 인물도 로저를 잡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로저가 언제든지 이차원의 평면으로 둔갑해서 달아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진행되는 장면에서 로저가 붙잡히게 하고 싶으면 작가는 사람이 아닌 등장인물을 고안해 내거나 앞서의 추적 장면을 다시 쓰는 수밖에 없다. 


-한 주에 마흔 시간씩 일하면서 글을 쓰는 일도 가능하긴 하다. 그렇게 살아온 작가들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일정한 시점에 도달하면 피로감이 몰려오고 집중도가 떨어지고 창의력은 무너지고 그만두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리게 된다. 


- 관객이 줄어드는 것은 다음의 이유들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는 완전하고 취소 불가능하고 닫힌 결말이 있으며, 자신들의 갈등의 주원인은 자신들 외부에 있으며, 자기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있어서 유일한 활동적인 주인공이며, 자신의 삶은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지속적이고 인과적인 내적 연관성을 지닌 사실성에 근거해 유지되고 있으며, 모든 사건들은 바로 이 사실성 안에서 이해될 수 있고 의미 있는 이유를 가지고 일어난다고 믿는다. 

고전적인 설계는 기억과 예감, 모두에 대한 본보기이다. 우리가 과거를 돌이켜볼 때 일어났던 사건들을 반구조적인 방법으로 바라보는가? 미니멀리스트적인 방법으로 바라보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개별적인 사건들을 기억 속에서 불러내어 아크플롯에 근거해 그 기억들을 재구성해 낸 뒤에야 선명하게 과거를 되살릴 수 있다. 우리가 앉아서 미래의 희망에 대한 백일몽을 꾸고 있을 때, 그 꿈들은 미니멀리스트적인가? 반구조적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환상과 꿈을 아크플롯의 틀에 맞게 녹여댄다. 고전적인 설계는 인간의 지각 체계의 시간적, 공간적, 인과적 유형을 드러낸다.


-작가는 자신이 쓰고 있는 작품을 신뢰해야 한다.
자가가 창작해 내는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은 모두 관객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나는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믿는다>고. 작가의 열정적인 신념이 대본 속의 매 순간마다 들어차 있지 않으면 독자들은 금세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눈치 챈다. 
이야기란 작가가 관객에게 심어놓고 싶어하는 감정과 생각의 총화, 즉 작가의 사상과 열정의 총화이다. 상업 영화를 여전히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업주의의 오염을 피하기 위해 기묘한 선택만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신경질적인 발작증의 문학적 등가물이 결과물로 나올 뿐이다. 마치 권위적인 아버지의 그늘에 묻혀 사는 어린아이의 절망적인 반항처럼 젊은 작가는 단지 파괴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상업 영화의 규범들을 때려부순다. 그러나 가부장에 대한 분노에 찬 부정이 곧 창의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의를 끌기 위해 비행을 저지르는 것과 같을 뿐이다. 단지 남과 달라 보이기 위해 유벌난 짓을 하는 것은 상업 영화의 문법을 노예처럼 따라해서 성공을 거두는 것 만큼이나 공허한 일이다. 작가는 자신이 확신하는 것만을 써야 한다. 


-상투성은 관객이 어떤 작품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이다. 상투성은 사람들의 무지를 통해 전염되는 전염병처럼 모든 종류의 이야기 매체에 만연되어 있다. 처음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미 결망을 예견할 수 있기 때문에 지겨울 수밖에 없었던 소설이나 영화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고, 이미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상투적인 인물이나 장면들 때문에 불만스러웠던 적 또한 한두 번이 아니다. 전 세계에 걸쳐 만연해 있는 이 유행병의 원인은 단순 명확하다. 모든 상투성의 근원을 추적해 올라가다 보며 단 한가지의 원인에 도달하게 된다. 작가가 자신이 쓰고 있는 이야기 안의 세계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작가들은, 사실은 그렇지 못하면서도 어떤 허구의 세계에 대해 자신들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서 상황을 설정하고 대본을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막상 구체적인 소재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아무것도 건져내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러면 이때 이들이 취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자신의 설정과 비슷한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소설, 그리고 연극들을 찾아본다. 이들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로부터 장면과 대사, 등장 인물들의 일부를 취해 자기 작품 안으로 끼워넣는다. 결국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장면, 들어본 적이 있는 대사, 만난 적이 있는 작품들이 그의 작품을 채운다. 결국 그들은 남이 먹다 남긴 찌꺼기를 데워서 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맛은 번한 음식을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는 그들의 타고난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다루는 이야기의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기 대문이다. 이야기에서 다뤄지는 세계에 대한 통창력과 지식은 작품의 독창성과 탁월함을 위한 근본적인 요소이다.


-당신의 주제는 무엇인가? 헤밍웨이나 디킨스처럼 당신의 인생경험으로부터 직접 우러나온 것인가? 아니면 몰리에르의 경우처럼 사회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당신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가? 당신이 영감을 받는 원천이 어디에 있든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당신이 그 작품을 끝내기 한참 전에 당신의 경험에 대한 애정은 썩어 없어질 것이며, 당신의 생각에 대한 애정 역시 생각하기도 싫은 상태가 되어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당신 자신이나 당신의 생각에 대해 쓴다는 일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지겨워 하게 될 것이며 결국 이 경주를 끝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한번 더 자신에게 물어보자. 내가 가장 선호하는 장르는 어떤 것인가? 이 질문을 먼저 던지고 난 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 안에서 써나가라. 왜냐하면 당신이 가진 아이디어나 당신이 겪었던 경험에 대한 열정은 잦아들 수 있지만 영화에 대한 애정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르야 말로 영감을 항상 새롭게 일깨워 주는 원천이다. 당신이 쓴 대본을 다시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전율이 일어야만 한다. 이 작품이야말로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이며 비가 오는 날시에도 줄을 서서 기다리게 만드는 종류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지식인 친구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소재라고 해서 쓰지는 말라. 이 글을 쓰면 영화 이론지에서 비평적인 찬사를 받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쓰지는 말라. 당신이 선택한 장르 안에서 솔직해져라. 왜냐하면 작품을 쓰고 싶게 만드는 모든 이유들 중에서, 작품을 쓰는 기간 전체를 통하여 작가를 추슬러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작업에 대한 애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잃어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작가는 매일 아침 책상으로 출근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등장인물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꿈속을 돌아다니다 보니 해가 지고 머릿속은 아직도 흥분 상태이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기 위해 워드 프로세서를 끈다. 그러나 컴퓨터는 끄지만 머릿속의 상상력의 세계는 꺼지지 않는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등장 인물들은 머릿속을 뛰어다니고 밥그릇 옆에 메모를 할 만한 종이 조각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만 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주앉아 있던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저기...., 자기 지금 딴 데 가 있지?>사실이다. 마주앉아 있는 시간의 절반은 딴 데에 쏠려 있는데, 항상 마음이 딴데 쏠려 있는 사람과 살아줄 수 있는 사람은 더군다나 그리 많지 않다.
작가의 욕망은 삶 자체를 재규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가는 시간과 돈, 그리고 사람까지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작가에게 진실인 것은 그자 창조해 내는 인물 하나하나에게도 진실이다. 


-작가들은 대개 자신이 쓰는 이야기 속에서 어떤 사건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고, 어떤 상황은 전개되다가 반전되어야 한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잇다. 어떻게 해야 통찰력 있는 정서로 채워진 장면을 쓸 수 있을까? 작가는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이 인물은 어떤 식으로 이 행동을 수행해야 할까?>그러나 이런 식의 질문은 상투성과 윤리적 도식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이 인물이 이런 시으로 해보면 어떨까?>그러나 이런 질문은 반짝하는 재치는 있으나 정직하지 못한 대답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또는<만약 이 인물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어떤 식으로 행동할까?>라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질문은 작가 스스로 인물과 거리를 두고, 무대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인물을 그려보는 가운데 그 인물의 정서 상태에 대해서는 어림 짐작하는 데 머무르고 만다. 그리 어림짐작은 거의 틀림없이 상투성으로 귀결된다. 아니면 이런식으로 질문할 수도 있다.<만약 내가 저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질문이 이렇게 되어야만 작가의 개인적인 상상력이 작동하기 시작하고 가슴이 뛰기 시작하지만 불행히도 작가는 그 인물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정서는 작가에게 아주 솔직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등장인물에게 핑요한것은 그 반대의 정서일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이렇게 물어보자.<내가 만약 그 상황에 처한 그 인물이라면 어떻게 할것인가?>- 작가 자신을 감동시키는 작품만이 관객들을 감동시킬수 있다.


-작가들이란 본능적으로 변증법적인 사고 구조를 갖춘 존재들이다.


-호튼푸트가 시나리오를 이런 식으로 썼다고 가정해 보자. 외톨이인 데다 알코올 중독자인 슬레지가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삶의 아무런 목적도 찾을 수 없다. 그러다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여자의 아이 또한 좋아져서 그 애를 키우고 싶어진다. 새롭게 종교도 가지고 새로운 노래도 몇 곡 만든다. 끝. 이런건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백일몽일 뿐이다. 의미에 대한 추구가 주인공의 마음속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면, 이 이야기의 작가인 푸트는 어떤 식으로 이 변화를 표현해 내었는가? 그는 주인공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고 선언하는 식의 방법은 쓰지 않았다. 자기 설명적인 대사로는 아무도 납득 시킬수 없다. 변화는 극적인 사건에 의해 시험되어야마 하며 커다란 압력하에서 주인공이 취하는 선책과 행동, 즉 필수적인 장면(위기)과 마지막 장의 절정에 시험 받아야만 한다.


-산업화된 나라의 교육받은 계층들은 대체로 물리적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자유롭다. 외부 세계를 염려할 필요가 없어진 만큼 이제 내부 세계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의식주에 의료 문제 까지 해결되어 한숨 돌리고 보니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 문득 자각하게 된다. 이제는 신체의 안위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행복을 원하게 되고 그러면서 내면 생활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정신과 육체와 감정과 영혼의 갈등에 정말 흥미가 없는 작가라면 제 3세계를 한번 돌아보라. 그리고 지구상의 다른 종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그들 대다수가 여전히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 야만적인 폭력과 횡포에 시달리며 짧은 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자기 아이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리라는 기대도 품지 못한다. 

만일 내면 세계나 더 넓은 바깥 세상의 심대한 갈등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거든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라. 죽음은 미래로부터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화물열차 같은 것이다. 시시각각 남은 시간들을 좁히며 다가온다. 작은 만족이라도 맛보며 살고 싶다면 이 기차가 도착하기 전에 어서 인생의 적대 세력과 맞붙어야 한다.
대충 스트레스에 적응해 사는게 인생은 아니다. 훔친 핵무기로 도시 전체를 인질 삼아 벌이는 거물급 범죄자들의 과잉 갈등 따위도 인생이 아니다. 두고두고 인정받는 작품을 만들고 싶은 예술가 라면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과 자기 가치를 발견하는 문제나 혼란스러운 내면의 평안을 회복하는 문제, 인간을 둘러싼 거대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문제, 인생은 이런 궁극적인 문제들에 관한 것이다. 인생은 갈등이다. 그게 인생의 본질이다. 이 투쟁을 어디서 어떻게 조합하여 연출할지는 작가가 결정해야 한다. 


-시나리오를 쓰는건 정신적인 것을 물질화 시키는 예술이다. 시나리오 작가는 내적 갈등의 시각적 상관물을 창조한다. 대사나 내레이션으로 생각이나 감정을 설명하는게 아니라 인물의 선택과 행동의 이미지를 통해서 내면의 생각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을 영화로 만들려면 반드시 재창조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관습을 어기거나 깨는 건 자유이지만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관습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점.


-이야기는 인생과 달라서 언제든 되돌아가 고칠 수가 있다. 처음에는 터무니 없는 것 같아도 우선 깔아놓고 나서 말이 되게 만들 수 있다. 논리적인 추론은 창의력 다음에 생각할 부차적인 일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고 일차적인 것은 상상력이다. 아무리 별난 아이디어라도 기꺼이 생각해 보려는 마음, 말이 되든 안 되든 우선 이미지들을 자유롭게 떠올리려는 의지야말로 다른 것에 우선한다. 열 중의 아홉은 쓸모없는 상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비논리적인 아이디어 하나가 작가의 내면에 나비 같은 영감을 불어 넣을 수 있다. 그 나비들의 퍼덕임이 당신에게 속삭일 것이다. 이렇게 정신나간 생각에도 뭔가 멋진것이 숨어 있다고 말이다. 안 보이던 관계가 보이는 직관적인 순간이 있다. 그러면 되돌아가 말이 되게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들 것이다. 논리는 애들 장난이다. 영화 화면으로 당신을 인도하는 건 오직 상상력이다.


-어떻게 관객의 정서적인 경험을 만들어 내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감정에는 즐거움과 고통, 이 두종류만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각각 다양한 변형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생이 주는 감정은 즐거움과 고통, 둘 중 하나인 셈이다. 


-효과 감소의 법칙은 이런 것이다. 어떤 일을 자주 경험하면 할 수록 그 효과가 줄어든다는 것. 이야기만큼이나 현실에도 적용되는 사실이다.
웃음이 연거푸 나올 때가 많으니까 코미디는 이 원칙에서 예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웃음은 감정이 아니다. 기쁨이 감정이다. 웃음은 우스꽝스럽거나 터무니 없는것을 향해 던지는 비판이다. 공포든 애정이든 어떤 감정 속에서도 웃음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웃음은 항상 일종의 안도감을 동반한다. 농담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설정과 일격이다. 설정삼아 잠깐 동안이라도 위험이나 섹스나 음담패설 따위로 관객의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일격을 날려 웃음이 터지게 한다.<일격을 가하는 농담을 날릴만큼 설정이 무르잇었을 때가 언제인가?>하는 문제가 코미디 타이밍의 비결이다. 코미디 배우들은 본능적으로 이 순간을 감지한다. 하지만 일격을 세번 연속으로 날리면 그렇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그들은 객관적으로 배워서 안다.
한가지 예외가 있긴 하다. 때로는 이야기가 긍정에서 긍정으로, 또는 부정에서 부정으로 이동할 수 잇다. 단, 이때는 두 사건들이 아주 현격한 대조를 이루어서 돌이켜 보았을 때 앞의 사건이 거의 반대의 성격을 띨 정도라야 한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자. 두 연인이 다툼끝에 헤어진다. 부정적이다. 다음에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해한다. 이 두번째 전환이 너무나 강력하게 부정적이라 거기에 비하면 처음의 다툼이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살인에 비추어 관객은 앞의 결별을 돌이켜볼 것이고<적어도 그때는 말로나 싸웠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보이는 그대로인 것은 없다. 이 원리는 시나리오 작가에게 삶의 이중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 즉 모든 것이 최소한 두 층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을 요구한다. 따라서 작가는 동시에 이중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 첫째로는 삶의 감각적 표면, 즉 시각과 소리, 행위와 말을 글로 묘사해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는 내면의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욕망의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행동과 반응, 충동과 이드id, 경험이나 속성에 따른 명령 등이 모두 여기 포함 된다. 현실에서 그렇듯 허구의 세계에서도 살아있는 가면으로 진실을 가려야 한다. 인물의 실제 생각과 감정은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 뒤에 숨어 있다.
오래된 할리우드 식 표현 중에 이런게 있다.<액면 그대로 드러난 게 그 장면의 전부라면 그건 땡치거다.>인물의 말과 행동이 내면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면적인 글쓰기를 경계하는 말이다. 이런 글 쓰기는 보조텍스트를 텍스트에 직접 써넣어 버린다. 
예를 들면 이런 글쓰기 이다. 멋지게 생긴 두 사람이 촛불이 은은한 탁자에 마주보고 앉아 있다. 크리스털 포도주 잔과 두 연인의 촉촉한 눈망울이 불빛에 반짝인다. 미풍이 커텐을 살랑인다. 뒤로는 쇼팽의 야상곡이 흐른다. 두 연인은 갈망하는 시선으로 서로의 눈을 들여다 보며 탁자 위로 서로 손을 어루만지며 속삭인다.<사랑해, 사랑해....>게다가 둘 다 진심이다. 이건 연기가 불가능한 장면이고 참담하게 실패할게 분명하다. 


-실생활에서 우리 눈은 표면에만 머물곤 한다. 우리 자신의 필요와 갈등과 몽상에 너무 빠져, 잠시 물러나 타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을 차분히 관찰할 겨를이 없다. 가끔은 커피숍 구석에 앉은 한쌍을 프레임 안에 넣고 혼자 영화의 한순간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그들의 웃음 뒤에 감추어진 지루함이나 누속에 깃들인 괴로움이나 서로에게 품고 있는 기대 따위를 읽어내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고 그나마 잠깐 동안이다. 반면 이야기라는 의식에서는 다르다. 우리는 끊임없이 인물의 표정과 행동을 꿰뚫어보며 말하지 않은것, 인식 되지 않은 것의 심층을 읽어낸다.


-아이러니 한 이야기의 여섯가지 유형과 각각의 예
첫째, 항상 원하던 것을 마침내 손에 넣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오셀로'의 예를 보자. 오셀로는 자기가 늘 원하던 것을 마침내 손에 넣는다. 아내가 자기에게 진실하고 한번도 자기를 배신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너무 늦었다. 이미 아내를 살해한 후이기 때문이다.
둘째, 목표를 향해 열심히 앞으로 돌진해 왔는데 알고보니 바로 코앞에 놓여 있었다.
'골치 아픈 여자'의 예를 보자. 탐욕스런 사업가 샘은 샌디의 아이디어를 훔쳐 큰돈을 벌고도 그녀에게 한 푼도 지불 하지 않는다. 샌디의 남편 켄은 샘의 아내 바바라를 납치해서 샌디의 몫이라 생각하는 이백만 달러를 몸값으로 청구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샘이 이 뚱End하고 잔소리 많은 마누라를 처치하러 집에오는 길인 줄도 모르고 바바라를 납치한다. 켄이 샘에게 전화해 이백만 달러를 요구하지만 기뻐 날뒤는 샘은 계속 발뺌을 한다. 켄이 계속 몸값을 낮추다가 결국 1만달러에 이르렀을 때 샘이 말한다.<그냥 그 여자를 죽이고 끝내 버리지 그래.>그 사이 케슬러의 지하실에 갇혀 있던 바바라는 갇힌게 아니라 휴양 온 사람처럼 지내고 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에어로빅 프로그램들을 전부 따라하고 샌디가 해주는 훌륭한 건강식을 먹으면서 바바라는 미국에서 제일 좋은 다이어트 훈련원들을 찾아다닐 때보다 더 살을 많이 뺀다. 그러면서 자기의 납치범들을 좋아하게 된다. 샘이 몸값을 내지 않으니 그녀를 그냥 돌려보내야 겠다는 납치범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바바라가 말한다.<내가 돈을 가져다 줄게요.>여기까지가 제 1장이다.
셋째,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행복에서 없어선 안 될 것을 내팽개쳐 버렸다.
'물랑 루즈'에서 몸이 불구인 화가 툴루즈 로트렉은 아름다운 수잔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 앞에 나서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다. 그녀는 친구로서 그와 동행하며 파리 곳곳을 다닌다. 그녀가 자기와 시간을 보내는 건 오로지 잘생긴 남자들을 만날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로트렉은 확신하게 된다. 그는 술에 취해 화를 내며 그녀가 자기를 이용한다고 비난하고는 그녀의 삶에서 뛰쳐나간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수잔에게서 편지를 받는다.<툴루즈 보세요. 나는 언젠가는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항상 바랬어요. 그런 일은 없으리라는 걸 지금에야 깨달았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친절한 사람이고 당신도 알다시피 내 처지가 절박하니까요. 안녕히.>로트렉은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다니지만 이미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떠나고 없었다. 그는 죽도록 술을 마신다.
넷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한 행동이 알고 보니 오히려 정확히 목표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이었다.
'투씨'의 예를 보자. 마이클은 지나친 완벽주의 때문에 뉴욕의 모든 제작자들이 멀리해서 일감이 없는 배우이다. 그는 여자 행세를 하고 소프 오페라에 캐스팅된다. 촬영 현장에서 그는 줄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가 너무나 연기를 잘하는 덕분에 줄리의 아버지가 그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한편 줄리는 그가 레즈비언이라고 의심한다.
다섯째, 무언가를 파괴하기 위한 한 행동이 거꾸로 자기가 그것에 파괴당하기에 꼭 알맞은 일이 되어버렸다.
'비'의 예를 보자. 독실하고 완고한 종교인 데이비드슨 목사는 매춘부 새디톰슨의 영혼을 구제하려 애쓰다가 그만 그녀를 향한 욕정에 빠져 그녀를 겁탈한 뒤 수치심을 못 이겨 자살한다.
여섯째, 자기를 비참하게 만들 게 틀림없다고 믿는 무언가가 수중에 들어와 그걸 없애려고 갖은 애를 쓰는데 알고 보니 그게 행복한 선물이었다.
'아이양육'의 예를 보자. 앞뒤를 안가리는 무모한 사고계의 명사 수잔은 순진하고 답답한 고생물학자 데이비드 헉슬리 박사의 차를 무심코 훔치다가 이 박사를 마음에 들어하게 되고 그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수잔을 떼어놓으려 갖은 애를 쓰지만 그녀는 브론토사우루스라는 공룡의<늑간 쇄골>뼈를 그에게서 훔쳐감으로써 어이없이 도망치려는 그의 노려을 수포로 만든다. (만일<늑간 쇄골>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아마도 머리가 어깨 한참 밑부분에 달린 이상한 동물의 뼈일 것이다.) 데이비드를 화석 같은 아이에서 생을 포용하는 어른으로 바꿔 놓으면서 수잔의 집요한 노력은 보상을 받는다. 
아이러니한 진행에서 핵심적인 것은 확실성과 정확성이다. 많은 훌륭한 영화들에서 보면 주인공들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고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정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인생이 가, 나, 다, 라, 마 처럼 순서대로 정해져 있는 줄 안다. 바로 그때 인생은 방향을 틀며 그들을 우스갯거리로 만든다.<날마다 그런 건 아니지. 으늘은 마, 라 , 다, 나, 가 라고 . 미안허이>


- 무엇이든 초고는 다 걸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라고 해서 선반위에 놓인 사진들을 카메라로 죽 훑으면서 갑과 을의 학창시절부터 군대, 결혼식을 거쳐 동업하게 된 사연 등을 보여주는 방식이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그건 말하는 거지 보여주는 게 아니다. 카메라에 그런 일을 시키는 건 극영화를 홈 비디오로 전락시키는 짓이다.<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라는 것은 인물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진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감이 있는 작가들은 이야기 전체에 걸쳐 해설을 조금씩 다룬다. 그러다 마지막 장의 절정쯤에서 해설이 완전히 드러날 때가 많다. 이런 작가들은 두 가지 원칙을 준수한다. 첫째, 관객이 이성적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은 절대 포함 시키지 않는다. 둘째, 몰라서 혼란이 생기는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로 해설을 그냥 전달하지 않는다. 관객의 관심을 유지하는 길은 정보를 주는게 아니라 이해에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라는 말은 관객의 지성과 감성을 존중하라는 뜻이다. 관객이 가진 최선의 능력을 끌어내어 영화 보는 의식에 동참하도록 초대하라. 보고 생각하고 느끼면서 관객이 나름의 결론을 이끌어내도록 해야 한다. 관객을 아이 취급하면서 작가의 무릎에 앉혀 인생을 설명하려 들지 말아라. 내레이션의 오용과 과용은 게으를 뿐만 아니라 관객을 얕잡아보며 생색 내는 짓이다. 만일 이런 추세가 계속 된다면 영화는 질 나쁜 소설로 전락하고 영화예술은 말라죽고 말 것이다.


-각색을 하면 문학 작품을 하나 골라 단순히 시나리오로 옮기면 되니까 힘들게 이야기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이것과 거리가 멀다. 각색의 어려움을 이해하려면 다시 이야기의 복잡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세 가지 이야기 매체가 있다. 산문(소설, 단편 소설, 소품 등), 연극 (본격연극, 뮤지컬, 오페라, 무언극, 발레 등) 영상(영화, 텔레비젼)이다. 세 매체 모두 인물이 삶의 세 층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동시에 겪는 복잡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각각 특유의 힘과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휘하는 건 셋중 어느 한 층위에 한해서이다.
소설의 독특한 능력과 경이로움은 내면의 갈등을 극화할 때 드러난다. 소설의 장기가 이것이고 연극이나 영화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부분이다. 1인칭 이든 3인칭이든 상관없이 소설가는 인물의 생각과 감정에 침투해서 깊이 있고 미묘하면서도 시적으로 이것을 표현해 냄으로써 관객의 상상 속에 내적 갈등의 혼란과 열정을 투영시킨다. 소설에서 개인적인 갈등은 대화로 구체화 되는 반면 초 개인적인 갈등은 묘사를 통해 표현된다. 즉 사회나 환경과 맞붙어 싸우는 인물들을 그림 그리듯 서술한다.
연극의 독특한 권위와 품위는 개인적인 갈등을 극화할때 드러난다. 이것이 연극의 장기로 소설이나 영화보다 훨씬 탁월하다. 훌륭한 희곡은 대부분이 순수한 대사로 이루어진다. 80퍼센트가 들려주기 위한 것이고 보여주기 위한 것은 20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몸짓, 표정, 구애, 다툼 등의 언어 외적인 소통도 중요하다. 하지만 대개 개인적인 갈등은 말을 통해 전개된다. 게다가 희곡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와 달리 파격이 허용된다. 대사를 쓰면서 일상적인 구어의 틀에 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희곡작가는 단지 시적인 대사만이 아니라 셰익스피어나 엘리엇, 크리스터퍼 프라이처럼 시 자체를 대사로 쓸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개인적인 갈등의 표현성을 놀라움 만큼 높이 끌어올린이다. 뿐만 아니라 배우의 살아 있는 음성이 미묘한 변화와 쉼표의 뉘앙스를 더 함으로써 표현력이 더 높아진다.
연극에서 내적인 갈등은 보조 텍스트를 통해 극화된다. 배우가 내면으로부터 인물을 끌어내는 사이 관객은 그의 말과 움직임을 통해 저변에 놓인 생각과 감정을 읽어낸다. 일인칭 소설처럼 연극에서도 인물이 무대 앞쪽에서 독백을 하며 관객과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인물이 이런 직접 화법에서 꼭 진실을 말하는 건 아니다. 혹 진심이라 하더라도 인물이 자기의 내면을 이해할 수 가 없기 때문에 진실을 모두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말해지지 않는 보조 텍스트를 통해 내면의 갈등을 극화하는 연극의 능력도 풍부하다. 하지만 소설에 비하면 제한적이다. 초 개인적인 갈등도 무대에서 표현하기에 불가능하진 않지만 사회를 얼마만큼이나 담아낼 수 있겠느가?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무대 장치와 소도구들이 필요하겠는가?
영화 특유의 힘과 탁월함은 초개인적인 갈등을 극화할 때 드러난다. 사회와 환경에 둘러싸여 삶과 투쟁하는 인간의 거대하고 생상한 이미지들이야말로 영화의 장기이다. 이점에서 희곡이나 소설은 영화를 못 따른다. '블레이드 러너'의 한 프레임을 골라 세계 최고의 산문 작가더러 언어로 그 구성과 맞먹는 표현을 만들어보라고 해보자. 아마도 몇 장씩 말로 채우고도 그 정수를 포착해 내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 한 프레임은 관객이 체험하는 수천 개의 복잡한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개인적인 갈등을 표현하려면 시나리오 작가는 반드시 평범한 대사를 사용해야 한다. 연극적인 언어를 영화에 사용하면 관객은 당연히 이렇게 반응한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있어.>셰익스 피어 작품을 영화화 하는 것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시나리오는 자연스러운 대사가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는 언어 외적인 소통 방식을 통해서도 큰 힘을 얻는다. 클로즈업과 조명과 미묘한 앵글변화로도 인물의 몸짓이나 얼굴의 표현이 대단히 풍부해진다. 그렇다고는 해도 시나리오 작가가 연극에서 처럼 개인적 갈등을 시적으로 풍부하게 표현하기는 힘들다. 


-각색의 첫번째 원칙 소설이나 희곡이 순수하면 할수록 영화에는 더 불리하다. 
굳이 각색을 해야 겠으면<순수한>문학에서 한두 단계 내려와서 갈등이 세 층위에 고루 분포된 이야기를 찾아보라. 이왕이면 초 개인적인 갈등이 강조된 것이 좋다. 
각색의 두번째 원칙 재창조하기를 꺼리지 말라.
영상미학은 이야기의 재창조를 요구할 때가 많다. 원작의 솜씨가 훌륭하고 장편영화에 맞는 규모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밀로스포먼이 '아마데우스'를 연극에서 영화로 각색할 당시 피터 셰퍼에게 한 말이 있다.<아이를 두번 낳는다고 생각하십시오.>그 결과 세계는 같은 이야기의 두가지 뛰어난 번역을 갖게 되었다. 각자 나름의 매체에 충실한 번역들이다. 각색을 하느라 애쓰는 동안 이 점을 명심하라. 재창조된 작품이 원작에서 심하게 벗어났어도 영화가 훌륭하면 비평가들은 입을 다문다.


-<이 대본은 멜로 드라마 같다>는 비난을 피하려고 열정적이고 강력한 사건들이 그려진 큰 장면들을 일부러 피하는 작가들이 많다. 대신 사건이 거의 없는 미니멀리즘식의 개략적인 선만 그어 놓고 미묘한 맛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짓이다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인간의 행위는 멜로 드라마 같지 않다. 게다가 인간이 저지르지 못할 일은 없다. 일간 신문에 기록되는 행위를 보자. 엄청난 자기 희생과 엄청나게 잔인한 행동이 공존하고 대담한 행동과 비겁한 행동, 테레사 수녀와 같은 성자에서부터 사담후세인 같은 폭군의 행동이 나란히 실린다. 작가가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행동은 이미 상상 못할 방식으로다 행해진지 오래다. 어느 것도 멜로 드라마는 아니다. 단지 인간적인 행동일 뿐이다.


-동기가 행동에 맞먹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 그 장면이 멜로 드라마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 내리는 선택이 곧 그 인물이다.


-대사가 길어지면 듣는 사람 얼굴로 화면을 옮겨가며 편집자가 숏을 나눠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면 다른 문제들만 더 생긴다. 듣는 사람을 비추면 화면 밖에서 배우의 말소리만 들리게 된다. 음성과 얼굴이 분리되는 경우 배우가 더 천천히 아주 또박또박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 관객은 입술을 읽기 때문이다. 관객은 대사의 50퍼센트를 배우가 말하는 모습을 보며 이해한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더 이상 듣지 않는다. 때문에 화면 밖에서 대사를 하는 배우들은 관객이 놓치지 않길 바라면서 주의 깊게 한마디씩 내뱉듯 말을 해야 한다. 게다가 화면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말하는 사람의 보조 텍스트를 잃게 된다. 대신 듣는 사람의 보조 텍스트가 관객에게 주어지지만 그것은 관객의 관심 밖일지 모른다.


-인생에는 독백이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며 써라. 인생은 대화이다. 행동이 있으면 반응이 있다.
배우가 긴 대사를 해야 하는데 상대 인물이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는 대사이고 첫 줄이<사람을 왜 이렇게 기다리게 해>라고 해보자. 이 첫 말에 대한 반응을 보기 전에 어떻게 다음 할 말을 알겠는가? 상대가 난처해 하며 사과하는 반응을 보이면 이쪽의 다음 행동도 누그러지고 그에 따라 대사의 억양도 달라질 것이다. 반면 상대가 도리어 인상을 구기며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면 이쪽의 다음 대사도 성난 어조로 바뀔 것이다. 방금 한 말의 반응을 감지하기 전까지 어떻게 순간순간 다음에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할지 알겠는가? 알수 없다. 삶은 언제나 작용과 반작용이다. 독백은 없다. 완벽하게 준비된 말이 있을 수 없다. 중요한 순간을 머릿속으로 제 아무리 많이 연습해 두어도 실전은 즉흥적이다.


-상징주의는 강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의식을 뛰어넘어 무의식 속으로 스며들어야만 한다. 꿈을 꿀 때처럼 말이다. 상징주의를 이용하려면 영화 음악을 작곡할 때와 같은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소리는 인식이 필요없다. 때문에 음악은 듣는 사람이 의식하지 못할 때 가장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상징도 우리의 마음에 와닿고 우리를 감동시키지만 어디까지나 우리가 그것을 상징적인 것으로 인지하지 않을 때의 이야기이다. 정체가 밝혀지고 나면 상징은 그저 중립적이고 지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 변해 무력하고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어떤 이야기든 주의를 끌어 10분정도는 흥미를 유지시키다가 나중에 의미있고 감정적인 경험을 건지게 해줘야 한다. 앞에서 들려준 '디아볼릭'의 줄거리가 독자에게 해준 것처럼 말이다. 장르가 어찌되었든 10분으로 해도 먹히지 않는 이야기가 어떻게 110분 동안 먹히겠는가? 덩치가 커지면 더 나아지는 건 없을 것이다. 10분간의 요약에서 삐꺽대는 대목이라면 모두 영화에서는 열 배로 더 심해진다. 
들려준 사람들의 상당수가 열렬한 반응을 보이기 전까지는 더 진행해 봐야 소용없다. 열렬한 반응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마구 흥분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나직이 한두 마디 감탄사를 뱉고는 잠잠해진다. 훌륭한 예술 작품, 즉 음악이나 춤, 그림, 이야기 등은 머릿속의 잡담을 침묵시키고 듣는 이를 또는 보는 이를 딴 세상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단계별 개요에 따라 요점을 들려줬을 때 이야기가 충분히 강력하면 주변은 조용해진다. 토를 달지도 않고 비평도 없고 그저 즐거운 표정만 있다. 이게 정말 대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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