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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g Oct 13. 2016

디자인의 디자인(DESIGN OF DESIGN)

지은이 / 하라 켄야 | 옮긴이 / 민병걸

디자인의 디자인(DESIGN OF DESIGN)
하라 켄야(KENYA HARA)
민병걸 옮김
출판사 : 안그라픽스 ,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파주출판도시 532-1
초판 발행일 : 2007년 2월 27일


-세계는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만들어 낼 것으로 기대되는 부를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손에 넣고자 달음박질을 시작하였고 그것이 가져올 본래의 풍요로움은 맛볼 여유도 없이 가능성에만 매달려 쓰러질 듯 기우뚱하면서도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다음 한발을 내딛는 듯한 실로 불안정하고 스트레스가 만연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기술의 진보는 비판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과거 산업 혁명이나 기계 문명에 반기를 든 사람들은 선견지명이 없어 결국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일종의 강박 관념이 현대인의 의식 깊은 곳에 뿌리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구나 느끼고 있을 불만을 입으로 내뱉지 못한다. 아마도 테크놀로지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흔히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사회는 시대의 흐름에 쫓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도태시켜 버린다.
그러나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테크놀로지란 좀 더 천천히, 서서히 진화되었어야 했다. 시간을 들여 시행착오를 거쳐 숙성되었던 편이 좋았다. 과도한 경쟁에 광분하여 불안정한 토대에 불안정한 시스템을 쌓아 놓고는 그것을 반복하면서 진화해 온 각종 기간 시스템은 불확실하고 깨지기 쉬운 체질을 지닌 채 질주하고 있으며 그 질주를 멈추지 못하고 점점 피폐해진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불건전한 테크놀로지 환경 속에서 날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미 테크놀러지는 한 사람의 지식만으로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절대량을 훨씬 뛰어넘어 증식하고 있으며, 그 끝은 흐릿해져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한 상황에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사상이나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그저 왕성하기만 한 생산과 커뮤니케이션이 아름다울 리 없다.[30~31p]


-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입국 수속을마치고 여권을 건네받으면서 직원에게 ‘Happy birthday!'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직원은 입국 수속을 하면서 바로 오늘이 그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직원은 ’Happy birthday!'라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해 준 친구는 그 말 때문에 그 나라가 조금 더 좋아졌다고 했다.
말하자면 별것 아닌 작은 한마디에도 커뮤니케이션의 씨앗이 숨어 있다. 사토 마사히코의 스탬프는 그 씨앗의 존재와 그것을 발아시키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이것은 전자 미디어의 가능성에 대해 몽상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에서의 실천이 다소 느슨해져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가 커뮤니케이션 음치를 벗어날 수 있도록 중요한 힌트를 제시한다.[49~50p]


- 그때 쿠메 컨고는 “마카로니는 구축적인데 비해서 스파게티는 비구축적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마카로니에는 형태가 있으나 스파게티에는 형태가 없다. 오늘날 건축은 비국축적인 스파게티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마카로니의 구축성을 어떻게 해체하는가가 나의 주제이다. 그 방법으로 양자의 경계를 완화해 보고 싶다.”라고 답하며 스파게티의 양 끝을 연결한 듯한 마카로니를 제안해 왔다.[53~54p]


- 후카사와 나오토가 디자인한 CD 플레이어를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거의 ‘환풍기’와 유사한 형태이다. 중앙에 CD를 넣고 환풍기의 끈에 해당하는 위치에 설치된 코드를 잡아당기면 마치 환풍기가 움직이는 것처럼 CD가 회전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CD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뇌에 새겨진 환풍기의 기억이 작용하여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몸이 자기도 모르게 미세한 반응을 보인다. 특히 뺨 부근의 피부가 매우 섬세한 촉각 센서를 활성화해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려 한다. 그러나 바람은 오지 않고 대신 음악이 곁에서 들려올 것이다. 환풍기 형태로 디자인한 탓에 오디오 기기로서의 성능은 다소 희생되었을지 모르지만 음악을 기다리는 인간의 센서를 활성화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성능을 배가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64~65p]


- 그러나 감각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5개로 집약될 리 없다. 예를 들어 손끝에서 미묘하게 느껴지는 미세한 접촉과 손바닥으로 손잡이를 누르는 듯한 감각이 동일한 ‘촉각’으로 분류되는 것은 왠지 모르게 저항감이 느껴진다. 뼈나 힘줄에 대한 자극은 오히려 ‘압각’이라고 하는 편이 좋지 않을가? 미각도 마찬가지다. 입안과 혀로 느끼는 감촉과 후각이 미묘하게 뒤얽힌 감각, 입 안 가득히 빵을 물었을 때나 혀끝으로 달콤한 크림을 핥을 때의 느낌 또는 뜨거운 수프를 마실 때의 감각을 과연 모두 묶어 ‘미각’으로 불러도 되는 것일까?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스웨터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에 느끼는 감각과 후각은 스웨터를 다시 본 것만으로도 뇌의 한쪽 구석에 떠오르게 된다. 수세미의 표면이 얼마나 거친지, 마룻바닥을 맨발로 걸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이런 것들은 기억 속에 경험된 감각으로 축적되어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나 사진을 마주 대하는 것만으로도 뇌 저편에서 재생되어 풍요로운 이미지를 형성한다.
감각은 이와 같이 서로 연계된다.[72p]


- 일부러 더러워지기 쉬운 천을 사용한 것이다. ‘더러워지기 쉬운 것을 항상 청결하게 유지하겠다.’라는 것을 실천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87p]


- 책이라는 것을 통하여 적당한 무게와 감촉이 있는 소재를 사용하여 표현된 정보가, 아주 작게 집어넣어 존재감이 희박해진 정보보다 사람들에게 더욱 편안한 이용과 만족을 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먹을거리와 인간의 관계와 비슷할지 모른다. 달걀 하나를 맛있게 먹으려고 인류는 수많은 지혜를 사용해 왔다. 조리하는 기구의 종류, 요리법의 다양함, 또 그것을 내놓는 방법이나 식기의 다양함을 상상해 주었으면 한다. 달걀을 한번에 1,000개 조리할 수 있는 장치, 50만 개나 저장할 수 있는 창고가 있다면 유익한 것임은 틀림없지만 그것을 맛보고자 하는 ‘개인의 식욕’과는 별 상관없다. 달걀이 먹고 싶으면 ‘냄비’에 넣고 자신의 취향에 맞게 익히면 된다. 달걀 스탠드에 얹어서 손가락 끝으로 부지런히 껍질을 벗겨 우아하게 생긴 소금 통으로 소금을 쌀짝 뿌린 후 귀여운 은수저로 떠서 입으로 옮기는 사람도 있으리라. 이렇게 제공된 달걀은 좀 귀찮더라도 틀림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정보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디지털 미디어가 아닌 종이를 택하는 이유는 그 소재의 성질과 특징을 이해한 후 그것을 살리고 익혀서 음미하고 싶기 때문이다.[108p]


- ‘~이’는 개인의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강한 태도가 느껴진다. 오늘 점심에는 무엇을 먹고 싶냐는 물음에 ‘우동으로 충분해요.’라고 대답하는 것보다 ‘우동이 좋아요.’라고 대답하는 편이 기분도 산뜻하고 우동에 대해서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 이와 똑같은 말을 옷에 대한 취향이나 음악의 기호, 생활 스타일 등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기호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태도는 ‘개성’이라는 가치와 더불어 언제부터인가 필요 이상으로 존중받게 되었다. 자유란 ‘~이’에 가까운 가치관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이’는 가끔 집착을 포함한 에고이즘을 만들어 불협화음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결국 인류는 ‘~이’를 향하여 지나치게 줄달음치다 이제는 막다른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소비 사회도 개별 문화도 ‘~이’로 달음박치다 세계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으로’ 속에 작용하는 ‘억제’나 ‘양보’ 그리고 ‘한발 물러선 이성’을 평가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으로’는 ‘~이’보다 한 수 높은 자유의 형태가 아닐까? ‘~으로’에 포기나 작은 불만족이 포함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으로’의 수준을 높인다면 포기나 작은 불만족을 완전히 털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으로’의 차원을 창조하여 자신만만하면서도 지혜로운 ‘이것으로 충분하다.’를 실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인양품의 비전이다.[121~122p]


- 현재 우리 생활을 둘러싼 상품의 존재 가치는 양분화되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신기한 소재 사용이나 눈을 끄는 형태를 통해 독자적인 개성을 경쟁하는 상품군이다. 희소성을 연출하여 브랜드로서의 평가를 높이고 고가격을 환영하는 팬들을 만들어 내는 방향이다. 다른 하나는 극한까지 가격을 낮춰 나가는 방향으로 가장 싼 소재를 사용하고 생산 과정을 극한까지 단순화시켜서 노동력이 싼 나라를 생산 거점으로 삼아 태어나는 상품군이다.
무인양품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최적의 소재와 제조법, 그리고 형태를 모색하면서 ‘치장하지 않는 것’ 또는 ‘간결함’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이나 미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 또 쓸데없는 생산 과정을 철저하게 생략하되 풍요로운 소재나 가공 기술은 차근차근 도입한다. 즉 최저 가격이 아니라 풍족한 저비용, 가장 현명한 저가격대를 실현하는 것, 그것이 무인양품의 방향이다.[123p]


- 특허까지는 못 받았어도 그 아이디어 중에 ‘임금이 낮은 나라에서 생산에 비싼 나라에 판다.’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 그렇게 도덕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돈’ 혹은 ‘부’를 손에 넣기 위해 세계에서 모두 통하는 규칙과 같은 것이다. 그런 규칙이 사업을 일으킨다든지 수익을 올리는 것에 아주 익숙한 나라들에 의해서 조절되며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소위 세계화globalization이다. 문제로 삼아야만 하는 경제 격차를 오히려 전제 조건으로 간주하여 그곳에서 이익을 만들어 내는 구조를 가져온다. 지금 우리는 미래에는 분명히 규탄받게 될 불평등한 시대와 사회를 살고 있다. [143~144p]


- 상품의 모태가 되는 시장의 욕망 수준이 글로벌 시장에서 상품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마케팅과는 다른 심도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문제이다. 그러한 문제를 생각해 나가는 것이 ‘욕망의 에듀케이션’이다.
홍콩에서 먹는 중국 요리는 맛있지만 도쿄에서라면 그렇게 맛있지는 않다. 그것이 주방장의 기량에 관한 문제라면 솜씨 좋은 주방장을 홍콩이나 중국에서 데려오면 되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곳도 많다. 그러나 이 격차는 노력한다고 해서 메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주방장이 아니라 고객이기 때문이다. 맛있는 중국 요리를 찾는 고객들의 숫자를 비교하면 도쿄는 처음부터 홍콩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주제가 ‘스시’라면 입장은 당연히 뒤바뀔 것이다.[151~152p]


-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본의 1억 3,000만 명의 시장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일본어’라는 방파제로 보호받고 있다. 다행히도 일본인은 영어에 서툴기 때문에 일본 시장은 신기할 정도의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한다. 이 독보적인 시장에서 욕망의 질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이 곧 수확물의 품질을 향상시키고 세계 무대에서 일본의 경쟁력을 끌어올려 줄 수 있을 것이다. [160~162p]


- '쉬운 이해‘라는 것은 정보의 질에 기본 바탕이 된다. 가령 정보의 내용에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로 되어 있다면 그것은 질 높은 정보라고 할 수 없다. 디자이너가 할 일은 정보의 핵심을 누구나 섭취하기 쉬운 상태로 친절하게 정리 정돈해 주는 것이다. ’쉬운 이해‘라는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안다‘라는 것과 ’알고 있다‘라는 것 그리고 ’알지 못한다‘라는 것에 대해서 먼저 이해한 후 침착하고 냉정하게 ’안다‘를 실현하는 과정을 모색해 나가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정보에 질을 가져다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독창성’이란 이제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신선한 방법으로 정보를 표현하는 것이다. 정보는 이해하기 쉬워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람들의 의식에 가까이 다가서기 어렵다. 창의적인 표현이 정보에 부가됨으로써 사람들은 그것에 흥미를 나타내고 감동하고 또 그 정보를 존중한다. 이것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디자이너는 지금껏 이 부분에서 정보의 질에 공헌해 왔기 때문이다. 
해학이란 지극히 높은 정밀도를 가진 ‘이해’가 성립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인간은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웃는다. 내용을 파악할 뿐 아니라 그것을 또 다른 각도에서 감상하는 여유를 가졌을 때 비로소 웃음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패러디를 떠올려 보자. 패러디는 어떤 사물이나 인물에 대한 일종의 비평이지만 그곳에 웃음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평 그 자체가 이미 깊은 이해에 도달했다는 증거이다. 만담이나 풍자만화 역시 이와 비슷하지만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도 ‘해학’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보의 이용자로서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227~228p]


- ‘그림’이란 ‘바탕’에 대비되는 개념, 즉 무의미한 카오스와 같은 배경으로부터 솟아나는 ‘의미 있는 형질’을 말한다. 카오스란 방영 시간 외에 텔레비전 모니터에 나타나는 화이트 노이즈와 같은 것 또는 다양한 정보가 노이즈처럼 날아다니는 정보의 바다 또한 카오스이다. 그 속에서 의미 있는 형질이 솟아오른다. 그것이 그림이다. 이 그림이 인류의 오랜 역사에 걸쳐 대부분이 종이 위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래픽 디자인이란 종이와 인쇄를 다루는 영역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실제로도 그래픽 디자인은 종이와 인쇄 영역에서 커다란 실적을 남겨 왔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진화와 더불어 모니터 스크린을 비롯하여 모든 장소에 그림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그림’ 즉 ‘의미 있는 형태figure'를 다루어온 직능이나 기술은 모든 미디어로 확대되어 나갈 것이다. 이미 짐작했을지 모르지만 ’그림‘이란 ’정보‘라는 개념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정보란 노이즈의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의미로서의 그림이다. 따라서 ’정보의 질‘이란 실제로 그래픽 디자이너의 궁극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235~2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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