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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g Oct 13. 2016

여행의 기술

지은이 / 알랭드 보통 | 옮긴이 / 정영목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이 쓰고 정영목이 옮긴 것을 도서출판 이레 고석이 2004년 7월 26일 처음 펴내다. 

이재현이 책임편집을, 이현정이 내교를, 이주연이 북디자인을 맡다.
주소 413-756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파주 출판단지 513-10 이레빌딩

2008년 11월 3일 박은 책 (초판 제17쇄)


- 우리는 여행의 현실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하다. 물론 염세주의파 - 데제생트가 명예 후원자 노릇을 할지도 모른다 - 는 현실이 반드시 실망스럽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단 현실은 기대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에 좀 더 가까울 수 있고, 또 좀 더 보람도 있을지 모르겠다.[22~23p]


- 내가 상상한 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동안 내가 상상했던 것들과 비교한다면 이것은 뜻밖의 사태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이 섬에 대한 나의 생각들은 광고 팸플릿과 비행 시간표를 읽는 가운데 짜 맞추어진 세 가지 고정된 이미지 주위만 맴돌고 있었다. 첫 번째는 석양을 배경으로 야자나무가 서 있는 해변의 이미지였다. 두 번째는 좌우로 열리는 유리문을 통하여 나무 바닥과 하얀 침대가 들여다보이는 호텔 방갈로의 이미지였다. 세 번째는 담청색 하늘의 이미지였다.
만일 누군가 강요를 했다면 이 섬에 다른 요소들도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당연히 인정했겠지만, 이 섬에 대한 나의 인상이 형성되는 데는 그런 요소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 중략-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니 광범위한 것들이 자신들 역시 바베도스라는 말의 울타리 안에 포함될 자격이 있다고 우기고 나섰다. 노란색과 녹색이 섞인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 로고로 장식된 커다란 석유 보관 시설이나, 말끔한 갈색 양복을 입은 입국 심사 관리가 들어가 앉아 있는 작은 합판 초소가 그런 예였다. -중략 - 이런 풍부한 이미지들에 문제가 하나 있다면, 묘하게도 그런 것들 때문에 내가 찾으러 온 바에이도스를 보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었다.[23~24p] 


- 이렇게 자세히 늘어놓아도 ‘그는 오후 내내 여행했다’라는 기만적인 문장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맨 처음 1분에 행당하는 이야기도 다 못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자세하게 전해주는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는 금세 미쳐버릴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삶 자체는 그런 이야기 양식을 따라, 반복과 엉뚱한 강조와 논리가 서지 않는 플롯으로 우리를 지치게 만들곤 한다. 삶은 우리에게 전차의 바닥, 차 안의 안전 손잡이, 길을 잃은 개, 성탄 카드, 꽉 찬 재떨이의 가장자리에 앉았다가 중앙으로 자리를 옮긴 파리만 보여주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귀중한 요소들은 현실보다는 예술과 기대속에서 더 쉽게 경험하게 된다.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은 생략과 압축을 감행한다. 이런 상상력은 따분한 시간을 잘라내고, 우리 관심을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이렇게 해서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꾸미지 않고도 삶에 생동감과 일관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보푸라기로 가득한 현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26~27p]


-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적어도 의식적인 정신에게는 우연한 현상으로 보일 것이다. 즉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수용하게 되는 짧은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모처럼 과거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들이 형성되고, 불안이 완화된다. 그러나 이 상태는 10분 이상 지속되는 일이 드물다. 아일랜드 서해안 너머에서 며칠마다 기상 전선들이 뒤엉켜 덩어리를 이루듯이, 의식의 지평선에서도 불가피하게 새로운 패턴의 불안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미래의 복잡한 문제가 드러나면서 과거의 승리는 이제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광경도 늘 우리 주위에 있는 풍경처럼 스쳐 지나가게 된다.[34~36p]


- 그러나 이런 아름다움 속에서도 나에게는 아무런 기쁨이 없었다. 나는 몇 시간 전 크렘 캐러멜을 둘러싼 싸움 이후로 미학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즐기지 못했다. 부드러운 수건, 꽃, 매혹적인 풍경도 소용이 없었다. 어떤 외적인 받침대를 갖다 받쳐도 내 기분은 올라갈 줄을 몰랐다. 오히려 완벽한 날씨와 저녁에 해변에서 바비큐를 해 먹기로 한 일정이 내 기분을 모욕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날 오후 선크림과 에어컨 냄새에 눈물 냄새가 뒤섞이는 비참한 상태에 빠져들자, 인간의 기분을 지배하는 엄격하고 무자비한 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육지의 사진을 보고 그런 웅장함에는 행복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고 상상했던 순간에는 위험하게도 무시해버렸던 논리였다. 아름다운 대상이나 물질적인 효용으로부터 행복을 끌어내려면 그전에 우선 좀더 중요한 감정적 또는 심리적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런 요구들 가운데는 이해에 대한 요구, 사랑, 표현, 존경에 대한 요구가 있다. 따라서 중요한 인간관계 속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몰이해와 원한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의 마음은 화려한 열대의 정원과 해변의 매혹적인 나무 오두막을 즐기려 하지 않는다. 아니, 즐길 수가 없다.[40~41p]


- 집단적 외로움과 마주치자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1882~1967, 미국의 화가)가 그린 유화 몇 점이 떠올랐다. 그의 그림들은 황량함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자체가 황량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보는 사람이 자신의 슬픔의 메아리를 목격하게 함으로써 그 슬픔으로 인한 괴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준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차를 몰고 가야 할 곳은 외로운 휴게소인지도 모른다.[72p]


-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109p]


-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전에 와서 사실들을 발견한 탐험가들은 그런 행동을 통하여 의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해놓았다. 이런 구별은 세월이 흐르면서 거의 불변의 진리로 굳어져, 마드리드의 중요한 것들은 이미 가치가 확정되어버렸다. 플라자 데 라 빌라는 별 1개, 팔라시오 레알은 별 2개, 모나스 테리오 데 라스 데스칼자스 레알레스는 별 3개, 플라자 데오리엔테는 별 없음.
그런 구별이 반드시 거짓은 아니지만,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안내 책자가 어떤 유적지를 찬양한다는 것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위 있는 평가에 부응할 만한 태도를 보이라고 압력을 넣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안내 책자가 입을 다물고 있는 곳에서는 기쁨이나 흥미가 보장되지 않을 것 같았다. -중략- 홈볼트는 이러한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그가 가본 곳을 그보다 먼저 여행한 유럽인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홈볼트는 상상력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아무런 자의식 없이 자신의 관심을 끄는 것을 따라갈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설정한 위계를 따르거나 의도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의 범주들을 만들 수 있었다. 홈볼트는 리오네그로의 산 페르난도 선교단에 이르렀을 때, 모든 것이 흥미롭다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도 있었고 또 어떤 것도 흥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158~159p]


- 호기심은 몇 가지 크게 뭉뜽그려진 질문들로 이루어진 중추로부터 밖으로, 때로는 아주 먼 곳까지 확장되는 작은 질문들의 사슬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왜 선과 악이 있을까?’ ‘자연은 어떻게 움직일까?’ ‘나는 왜 나일까?’ 상황과 기질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질문들을 중심에 놓고 살아간다. 우리의 호기심은 세계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포괄하다가, 마침내 어느 지점에서는 어떤 것에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오묘한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 뭉뚱그려진 커다란 질문들은 언뜻 보기에는 남의 관심을 끌 수 없을 것 같은 작은 질문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산속에서 파리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하고, 16세기 궁전의 벽에 그려진 특정한 벽화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오래전에 사라진 이베리아 군주의 외교 정책이나 30년 전쟁에서 토탄土炭의 역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163~165p]


- 여행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물을 볼 때는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며,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며, 질문이 없으므로 흥분도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은 질문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뭔가가 떠오를 때는, 엉뚱한 것이 떠오르는 경향이 있다. 차가 꽉 막히는 긴 카레라(도로라는 뜻) 데 산 프란시스코 끝에 서 있는 이글레시아 데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에서도 많은 것이 떠올랐지만, 그것에 대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없었다.[169p]


- 그런데 여기 오니 덤불 속에 뭔가가 있다. 아마 모피도 덮여 있고 꼬리도 달렸을 것 같다. 장과나 날벌레를 먹는 데 관심이 있는지, 잎 사이를 급히 달리며 입으로 소리를 낸다. 그러나 그 모든 기묘함에도 불구하고, 그 생물은 나와 같은 시간에 살고 있다. -중략- 위즈워스의 시적 야심 가운데 하나는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동물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보통 그런 동물들을 무시한다. 똑바로 보는 일도 거의 없고,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지도 않는다. 뾰족탑 위의 새나 덤불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생물처럼 어렴풋하고 특징 없는 존재들이다. 위즈워스는 독자들이 평소의 관점을 버리고, 잠시라도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면 어떨지 생각해보게 하며, 인간의 관점과 자연의 관점 사이를 오가게 한다. 왜 이런 일이 흥미가 있을까? 왜 심지어 깊은 영감을 주기도 할까? 어쩌면 오직 한가지 입장만 가지고 사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205~206p]


- 그러나 그 장면을 내가 온전히 받아들인 것은 불과 1분뿐이었다. 곧 일에 대한 생각이 침입을 했고, M이 전화를 걸어 여인숙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 장면이 내 기억 속에 고정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어느 날 오후 중반 런던에서 여러 가지 근심으로 마음이 짓눌린 상태에서 교통 체증에 걸려 있는데, 그 나무들이 나에게 돌아왔다. 수많은 모임들과 답장을 못한 편지들을 밀쳐내고, 내 의식 속으로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수많은 차량과 군중을 떠나, 이름은 모르지만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분명하게 보이는 나무들에게로 돌아갔다. 이 나무들은 근심의 소용돌이로부터 나를 보호했고, 그날 오후 나에게 거창하지는 않지만 살아야 할 이유를 주었다.[212p]


- 굴욕은 인간 세계에서는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의지가 도전받고 우리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따라서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풍경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이다.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한다.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사막의 돌과 남극의 얼음 벌판에 쓰인 교훈이다.[229p]


- 하느님은 착하게 살았는데도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느냐는 욥의 질문을 받자 욥의 눈길을 자연의 엄청난 현상으로 돌린다. 하느님은 말한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놀라지 마라. 우주는 너보다 더 크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놀라지 마라. 너는 우주의 논리를 헤아릴 수 없다. 산 옆에 있으면 네가 얼마나 작은지 보아라. 너보다 큰 것.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라. 세상이 너한테는 비논리적으로 보이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이 모든 것의 척도는 아니다. 숭고한 곳들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하찮음과 연약함을 생각하도록 하라.[241p]


- 우리가 관객으로서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가가 어떤 장소를 규정할 만한 특징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냈다면, 우리는 그 풍경을 여행할 때 그 위대한 화가가 그곳에서 본 것을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248p]


- 어쩌면 어떤 장면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 파악하는 감각을 기르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시각 예술을 공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예술 작품들은 사실상 우리에게 “프로방스의 하늘을 보라, 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라, 올리브 나무를 제대로 평가하라”라고 말해주는 아주 섬세한 도구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면 밀밭에 있는 수백만가지 요소 가운데서도 관객의 미감과 관심을 자극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을 그려낼 것이다. 이런 작품은 보통 대량의 정보속에 파묻혀 사라져버리는 요소들을 전경에 내세워 그것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일단 그것이 눈에 익으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것에 자극을 받아 우리 주위의 세계에서도 그것을 발견하려 들게 된다. 이미 발견했다면,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 삶에서 그것들에 무게를 실어주게 된다. 어떤 새로운 단어를 여러 차례 들어도 눈치 채지 못하다가, 그 의미를 아는 순간 비로소 그 단어를 듣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252~253p]


-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 가지 중심적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이나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를 포함하여],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하여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298p]


-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총알에게는 빨리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에게는-그가 진정한 사람이라면-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Thomas Cook1808~1892)[301~302p]


- 혼자 여행을 하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함께 가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도록 우리의 호기심을 다듬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특정한 관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어떤 측면이 나타나는 것을 교모하게 막을 수도 있다.[3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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