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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g Oct 21. 2016

에로스의 종말

지은이 / 한병철 | 옮긴이 / 김태환

에로스의 종말


제1판 제1쇄 2015년 10월 5일

제1판 제6쇄 2016년 3월 15일


지은이 한병철

옮긴이 김태환

펴낸곳 (주)문학과지성사 (서울 마포구 잔다리로7길 18)


- 생산성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해야 함은 곧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해야함은 할 수 있음으로 대체된다.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채찍이나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명령하고 착취하는 타자에게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체는 자기 자신을, 그것도 자발적으로, 착취하기 때문이다. 착취자는 피착취자이기도 하다.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에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29~30p]


-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는 엄청난 강제를 낳으며 성과주체를 심각하게 망가뜨린다. 성과주체는 자가 발전된 강제를 자유라고 여기며, 강제를 강제로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자신의 강제 구조를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가상의 자유 뒤로 숨긴다. 그 속에서 개개인은 스스로를 더 이상 예속된 주체Subjekt가 아니라 기획하는 프로젝트Projekt로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간계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빚을 탕감받고 속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로써 채무의 위기뿐만 아니라 보상의 위기까지 발생한다. 

 채무의 탕감도, 보상도 모두 타자를 전제한다. 따라서 타자와의 유대가 없다는 사실이 바로 보상의 위기와 채무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초월적 조건을 이룬다. 이러한 위기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너리 퍼져 있는 견해와는 반대로 자본주의가 종교일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규는 죄(채무)와 죄사함(채무 면제)의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죄(채무)를 만들기만 할 뿐이다. 자본주의에는 속죄의 가능성, 채무자를 채무에서 해방시켜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은 성과주체를 우울증에 빠뜨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을증은 소진증후군과 더불어 할 수 있음이 초래하는 구제할 수 없는 좌절이며, 다시 말해 심리적 파산 상태를 드러내는 질병이다. [31~32p]


-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41p]


-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성애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하는 자본이다. 전시가치를 지닌 신체는 상품과 다를 것이 없다. 타자는 성애화되어 흥분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질성이 제거된 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소비할 뿐이다. 그러한 타자는 성적인 부분 대상들로 파편화되기에 더 이상 하나의 인격성을 지니지도 못한다. [41~42p]


- 이용 가능한 현재는 동일자의 시간이다. 반면 미래는 절대적으로 경이적인 시간을 향해 열린다. 우리가 미래와 맺는 관계는 아토포스적 타자, 즉 동일자의 언어 속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와의 관계다. 하지만 오늘날 미래는 타자의 부정성을 벗어버리고 모든 재앙을 차단한 긍정성, 최적화된 현재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있었던 것의 박물관화는 과거를 파괴한다. 과거는 반복 가능한 현재가 되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부정적 특성을 상실한다. 기억은 있었던 것을 그대로 다시 눈앞에 떠오르게 해주는 단순한 복원의 기관이 아니다. 있었던 것은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기억은 앞으로 나아가는 살아 있는 서사적 과정이며, 이 점에서 데이터 저장 장치와 구별된다. 데이터 저장 장치와 같은 기술 매체는 있었던 것에서 모든 생명력을 빼앗아간다. 그것은 무시간적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세계는 전면적인 현재의 지배 속에 놓이게 된다. 전면적 현재는 순간Augenblick을 폐기한다. 순간이 없는 시간은 그저 더해지기만 할 뿐, 더이상 상황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클릭Klick의 시간으로서, 결정과 결단은 알지 못한다. 순간은 사라지고 클릭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46~47p]


- 검색 엔진이자 소비 엔진으로서의 사회는 찾을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소비할 수 없는 부재자를 향한 모든 갈망을 폐기한다. 그러나 에로스가 깨어나는 것은 "타자를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얼굴들"에 직면할 때이다. "얼굴visage"은 비밀이 없는 페이스face의 대척점에 있다. 페이스는 포르노처럼 발가벗겨진 채 전시되는 상품이며, 시선에 완전히 노출되고 남김없이 소비된다. [48p]


- 모든 삶의 영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모든 부정성, 모든 부정의 감정은 회피된다. 고통과 열정은 안락한 감정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흥분에 자리를 내준다. 속성 섹스의 시대, 즉흥적 섹스, 긴장 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에는 성애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 부정성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오늘날 사랑은 소비와 쾌락주의적 전략의 대상으로 쪼그라든다. 타자를 향한 갈망은 동일자의 안락함으로 대체된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자의 편안한 내재성, 편하게 늘어져 있는 내재성이다. 오늘날의 사랑에는 어떤 초월성도, 어떤 위반도 없다. [51~52p]


- 관광 역시 순례와 대립된다. 순례가 장소에 묶여 있다면, 관광은 "비-장소"를 양산한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인간의 거주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본 장소에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것"이 깃들어 있다. 역사, 기억, 정체성이 장소의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지나쳐버릴 뿐 머무르지 않는 관광의 "비-장소"에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68~69p]


- 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사람들은 "누군가를 과대평가"하고, "그에게 실제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며 "그를 이상화"하게 된다. 그녀에 다르면 오늘날의 상상은 이와 반대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기술 덕택에 정보로 채워져 있다. "인터넷을 통한 예측적 상상은 [......] 정보가 희박한 상상의 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인터넷 상상은 [......] 전체를 포괄하는 관점보다는 개별 속성들에 의존한다. [......] 이러한 특수한 구도 속에서 사람들은 과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이상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일루즈는 선택의 자유가 증가함에 따라 욕망의 "합리화"가 이루어진다고 가정한다. 욕망은 더 이상 무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식적 선택을 통한 결정에 주의를 집중하고, 타인에 관하여 무엇이 이성적인 관점에서 소망할 만한 기준인지 숙고하며, 이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것을" 요구받는다. 더 나아가 상상이 고조됨에 따라 "남성과 여성이 파트너에 대해 가지는 바람도, 함께하는 삶의 전망에 대한 요구도 변화했고 상향 조정되었다." 이로써 오늘날 사람들은 "환멸"도 더 자주 경험한다. 하지만 환멸이란 "상상의 악명 높은 하녀"일 뿐이다. [72~73p]


- 정보로 충만한 고선명high definition 영상은 아무것도 불확정적인 상태로 놓아두지 않는다. 하지만 환상은 불확정적인 공간 속에 거주한다. 정보와 환상은 서로에 대해 대립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타자를 "이상화"할 능력이 없는 "조밀한 정보"로 이루어진 상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의 구성은 정보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결여의 부정성을 통해 비로소 아토포스적인 이질성을 지닌 타자가 생성된다. 부정성은 타자를 "이상화"와 "과대평가" 너머에 있는 더욱 고차원적인 존재의 평면으로 데려간다. 정보는 그 자체가 타자의 부정성을 해체하는 긍정성이다. [76p]


- 오늘날 세워지는 국경의 철조망이나 장벽은 더 이상 환상을 자극하지 못한다. 철조망과 장벽은 타자를 발생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경제적 법칙만이 지배하는 동일자의 지옥을 관통한다. 그리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가 분리된다. 이 새로운 경계를 낳는 것은 자본이다. 하지만 돈은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만든다. 돈은 본질적 차이들을 지우며 평준화한다. 새로운 경계는 배제하고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 그것은 어딘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문턱이나 다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81p]


- 용기와 관련된 것으로는 이를테면 기존의 질서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면서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촉발하는 분노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분노는 사라지고 짜증과 불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짜증과 불평에는 단절의 부정성이 없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다. 또한 에로스 없는 이성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으로 전락한다. 계산으로서의 이성은 사건,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다.[83p]


- 정보는 그 자체 긍정적이다. 데이터에 바탕을 둔 실증과학, 데이터를 비교하고 평균을 내는 게 전부인 실증과학은 강한 의미에서의 이론에 종언을 고한다. 그러한 과학은 서사적이기보다는 가산적이고, 해석학적이기보다 폭로적이다. 여기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적 긴장이 없다. 그리하여 실증과학은 단순한 정보들로 해체된다. 정보와 데이터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오늘날 오히려 이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이론은 사물이 서로 뒤섞이고 통제할 수 없이 증식하는 것을 막아주며, 이로써 엔트로피의 감속에 기여한다. 이론은 세계를 설명하기 전에 세계를 정제한다. 우리는 이론이 제의나 예식과 공통의 기원을 지닌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세계에 형식을 부여한다. 즉 사물들의 흐름을 일정한 형태로 빚어내고, 이들이 범람하지 않도록 경계를 만들어준다. 오늘날 정보의 더미는 형식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정보의 더미는 세계의 엔트로피, 혹은 소음 수위를 엄청나게 높인다. 사유는 고요함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고요함속으로의 탐험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이론의 위기는 문학과 예술의 위기와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중략- 책은 홍수처럼 출간되지만 정신은 정지 상태입니다. 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위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하는 정보의 더미,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소음으로 표출된다. 투명사회, 정보사회는 소음 수위가 매우 높은 사회이다. 하지만 부정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오직 동일자뿐이다. 정신Geist이란 본래 불안을 의미한다. 정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다.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실증과학은 어떤 인식도, 어떤 진리도 산출하지 못한다. 정보는 그저 알아두기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알아두기는 인식이 아니다. 알아두기는 긍정적이며, 가산과 축적을 특징으로 한다. 긍정성으로서의 정보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아무것도 선포하지 못한다. 정보는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다. 반면 인식은 부정성이다. 인식의 본질은 배제하고, 엄선하고, 결단하는 데 있다. 인식은 기존의 것 전체를 뒤흔들고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한다. 과다한 알아두기에서는 아무런 인식도 산출되지 않는다. 정보사회는 체험사회다. 체험 역시 가산과 축적을 특징으로 한다. 그 점에서 체험은 경험과 구별된다. 경험이란 대체로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험은 완전히 다른 것 속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지 못한다. 체험에는 변신시키는 에로스가 깃들어 있지 않다. 사랑이 긍정적 체험의 도식으로 전락할 때, 남는 것은 성애뿐이다. 성애 역시 가산과 축적의 원리를 따른다. [92~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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