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한병철 | 옮긴이 이재영
아름다움의 구원
제1판 제1쇄 2016년 5월 25일
제1판 제2쇄 2016년 5월 26일
지은이 한병철
옮긴이 이재영
펴낸이 주일우
펴낸곳 (주)문학과지성사 (서울 마포구 잔다리로 7길 18)
- 오늘날 우리는 왜 매끄러움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매끄러움은 미적 효과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의 사회 전반적인 명령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긍정사회를 체현하는 것이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아요Like를 추구한다. 매끄러운 대상은 자신의 반대자를 제거한다.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다. [9~10p]
- 밀착성과 무저항성이 매끄러움의 미학의 본질적인 특징들이다.
매끄러운 것은 디지털 장치들의 외관만이 아니다. 디지털 장치들을 거쳐 이루어지는 소통도 매끄럽게 다듬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주로 기분 좋은 것들, 다시 말해 긍정적인 것들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것들은 제거된다. 가속화도니 소통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10p]
- 제프 쿤스의 예술의 핵심은 매끄러운 표면과 이 표면의 직접적인 작용에있다. 그 외에 해석할 것도, 해독할 것도, 생각할 것도 없다. 그것은 좋아요의 예술이다. [11p]
- 시각은 거리를 유지하는 반면, 촉각은 거리를 제거한다. 거리 없이는 신비도 있을 수 없다. 탈신비화는 모든 것을 즐기고 소비할 수 있게 해준다. 촉각은 완전히 다른 타자의 부정성을 파괴한다. 자신이 만지는 것마다 세속화한다. 시각과 달리 촉각은 경이로움을 느낄 능력이 없다. 그래서 매끄러운 터치스크린도 탈신비화와 전면적인 소비의 장소다. 터치스크린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을 만들어 낸다. [15p]
- 스마트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매끄럽게 반들거리는 조형물들을 보면서 타자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만날 뿐이다. [16p]
- 오늘날에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도 매끄러워진다. 추 또한 악마적인 것, 섬뜩한 것 혹은 끔찍한 것의 부정성을 잃어버리고 소비와 향유의 공식에 맞춰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19p]
- 정보는 지식의 포르노그래피적인 형태다. 정보에는 지식의 특징인 내면성이 없다. 지식은 흔히 일정한 저항을 극복해야만 쟁취할 수 있고, 이런 점에서 지식에는 부정성 또한 내재한다. 지식은 아주 다른 시간 구조를 갖고 있다. 지식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펼쳐진다. 이에 반해 정보에 내재된 시간은 무차별한 현재 지점들로 구성된, 매끈해진 시간이다. 사건도 운명도 없는 시간이다. [23p]
- 오늘날에는 소통 또한 매끄러워진다. 소통은 정보의 원활한, 즉 마찰 없는 교환이 되어 매끄러워졌다. 매끄러운 소통에는 타자와 낯선 자의 부정성이 일절 기어들 수 없다.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반응할 때, 소통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 타자로 인해 발생하는 저항성은 동일한 것의 매끄러운 소통을 방해한다. 매끄러움의 긍정성은 정보와 소통과 자본의 순환을 가속화한다. [23p]
- 디지털 네트워크는 몸을 네트워크에 연결시킨다. 자동운전 자동차는 정보들의 이동 단말기에 지나지 않으며, 나는 그저 거기에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자동차 운전은 순수한 조작적 과정이 된다. 속도는 상상적인 것과 완전히 격리된다. 자동차는 더 이상 권력과 점유와 전유의 환상들로 채워진, 연장된 몸이 아니다. 자동운전 자동차는 남근Phallus이 아니다. 내가 그저 연결되어 있기만 한 남근이란 모순이다. 카셰어링Car-Sharing도 자동차에서 마술성과 성스러움을 제거한다. 나아가 몸도 탈마술화한다. 남근에는 함께 쓰기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남근은 점유와 소유와 권력의 상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연결 혹은 가입과 같은 함께 쓰기 경제의 범주들은 권력과 전유의 환상을 파괴한다. 저동운전 자동차에 앉아 있는 나는 행위자도, 조물주도, 연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세계와 연결된 소통 네트워크 안에 있는 하나의 인터페이스에 지나지 않는다. [28p]
- 디지털 미는 자연미에 대립한다. 디지털 미에서는 타자의 부정성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은 전적으로 매끄럽다. 그것에는 어떠한 균열도 있어서는 안 된다. 부정성 없는 만족, 다시 말해 내 마음에 든다라는 것이 디지털 미의 징표다. 디지털 미는 어떠한 낯섦도, 어떠한 비동일성도 허용하지 않는, 동일한 것의 매끄러운 공간을 형성한다. [42~43p]
- 오늘날의 긍정사회는 갈수록 더욱더 상처의 부정성을 축소시킨다. 이는 사랑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상처를 초래할 수 있는 큰 도박은 전부 회피된다. 성적 충동의 에너지는 파산을 막기 위해 자본 투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산 투자된다. 지각 또한 부정성을 점점 더 회피한다. 좋아요가 지각을 지배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언제나 다르게 보는 것을, 다시 말해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를 피하고자 한다면 다르게 볼 수도 없다. 본다는 것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일한 것이 반복될 뿐이다. 감수성이란 상처 입을 수 있음을 뜻한다. 상처란 보기의 진리계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상처가 없으면 진리도, 나아가 지각조차도 없다. 동일자의 지옥 안에는 진리가 없다. [54p]
- 죽음의 부정성이 없다면 삶은 굳어져 죽은 것이 된다. 그리고 매끄럽게 다듬어져 좀비가 된다. 부정성은 생명을 활성화시키는 힘이다. 그것은 또한 미의 정수이기도 하다. 미에는 허약함이, 연약함이, 부서짐이 내재한다. 미가 매력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부정성 덕분이다. [69p]
- 섹시함은 도덕미나 개성미에 대립한다. 도덕과 덕성 혹은 개성은 특별한 시간성을 갖고 있다. 이것들은 지속성, 견고성, 불변성에 기초한다. 개성은 원래 낙인찍힌 기호,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의미한다. 불변성이 개성의 주요한 특성이다. [74p]
- 견고성과 지속성은 소비에 적합하지 않다. 소비와 내구성은 서로를 배제한다. 유행의 가변성과 휘발성이 소비를 가속화한다. 그래서 소비문화는 내구성을 감소시킨다. 개성과 소비는 서로 대립한다. 이상적인 소비자는 개성이 없는 인간이다. 이 개성 없음이 무차별한 소비를 가능하게 한다. [75p]
- 사람이 개성이 없고 형상이 없을수록, 매끄럽고 뱀장어처럼 미끄러울수록 더 많은 친구를 갖게 된다. 페이스북은 개성 없음의 시장이다. [75p]
- 공유 경제는 "소유"도 불필요하게 만든다. 그리고 소유를 가입으로 대체한다. 디지털 매체는 어떠한 고정된 선도, 표시도 새겨 넣을 수 없는 개성 없는 바다와 같다. 디지털 바다 위에는 어떠한 요새도, 문턱도, 담장도, 참호도, 경계석도 세울 수 없다. 견고한 개성은 네트워크화하기 힘들다. 그것은 연결능력, 소통능력이 없다. 네트워크와 세계와, 소통의 시대에 견고한 개성은 그저 장애이자 단점일 뿐이다. 디지털 질서는 새로운 이상을 예찬한다. 그 이상이란 바로 개성 없는 인간, 개성 없느 매끄러움이다. [76~77p]
- 빅데이터와 같은 데이터 무더기로부터 유용한 정보를 추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로부터는 인식도 진리도 생겨나지 않는다.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이 역설하는 "이론의 종말"은 이론을 모조리 데이터로 대체시킨다. 이는 진리의 종말, 내러티브의 종말, 정신의 종말을 의미한다. 데이터는 오로지 더하기만 할 줄 안다. 더하기는 네러티브와 대립하는 것이다. 진리에는 어떤 수직성이 내재한다. 이에 반해 데이터와 정보에 내재하는 것은 수평성이다. [85~86p]
- 사물들을 망으로 연결하는 "사물의 인터넷"에는 내러티브가 없다. 정보 교환으로서의 소통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계산할 뿐이다. 내러티브가 있는 결합들은 아름답다. 오늘날에는 합산이 내러티브를 몰아낸다. 내러티브가 있는 관계들이 정보들의 결합에 밀려난다. 정보의 합산으로부터는 아무런 내러티브도 생겨나지 않는다. 은유는 내러티브가 있는 관계들이다. 은유는 사물과 사건들이 서로 대화하게 한다.
세계를 은유화하는 것, 다시 말해 시화하는 것이 작가들의 과제다. 작가들의 시적인 시선은 사물들 사이의 숨은 연결을 발견해낸다. 미는 관계의 사건이다. 미에는 특별한 시간성이 내재한다. 미는 직접적인 향유를 거부한다. [109~110p]
- 미는 오랫동안, 천천히 걷는다. 즉각적인 접촉 속에서는 미를 만날 수 없다. 오히려 미는 재회로서, 재인식으로서 일어난다. [11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