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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g Jun 27. 2018

2018년 6월 27일

가락동


수박. 과일에 대한 깊은 맹신이 있는 어머니는, 내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와 작은 플라스틱 접시에 과일 조각들을 내어온다. 감사와 불편이 섞인 감정들이 덕분에 고개를 쳐들고 마는데, 그 와중에 조잡한 플라스틱 접시와 과한 장식의 금속 포크는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어 결국 짜증이란 감정을 불러오고 만다. 하지만, 수박은 너무 좋다. 수박이 있다면 나머지 것들은 용서가 된다. 누구나 그런 과일은 하나쯤 있기 마련이 아닐까. 여름이 다 싫어도 수박이라면 좋다. 


무지 칫솔 거치대. 어느 날 유치한 모양의 빗방울 플라스틱 캡에 나의 칫솔이 꼽혀있는 것을 보고 왠지 모를 반발심에 일부러 무지 매장에 들러 구매- 어디선가 얼핏 그런 플라스틱 캡으로 칫솔을 보관하면 세균 덩어리로 이를 닦는 거라는 기사를 본 것 같기도 하다. 욕실에서 혼자 한국스럽지 않은 목소리를 내면서 온갖 잡스러운 물품들로 다시 비빔밥이 되는 걸 보면 여전히 한국스러운 전형적인 아파트 실내 풍경이다. 전반적으로 만족하지만, 바닥 쪽에 서서히 때가 끼는 것은 귀찮음 질량 보존 법칙을 느낀다. 


폭스바겐 폴로 차키. 고백하건대, 장기간 리스로 차를 운영할걸 그랬노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자차는 자차로 애정이 생기지만 이 리모컨 키만큼은 그렇지 않다. 매번 수신호 거리가 달라져서 안 터질 때는 바로 앞에서 눌러도 차가 열리지 않는다. 원래 이런 건지 내가 잘못하는 건지, 글로벌 대기업의 음흉함인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괜히 제일 미운건 폭스바겐 '코리아'-


ADA 모스 활착용 실. 교토에서 여행 중에 후배 J와 구매하였다. 자연스러움과 인위적인 것이 극단으로 가면 어떻게 모순적이지 않고 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수조 용품 브랜드의 물건. 하지만 언제나 꿈의 어항을 생각하며 아직도 써보지 못하고 있다. 꿈의 집부터 사야 할 듯.


귀이개. 쇠로 된 엄청 오래된 물건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집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조금 더 날렵한 형태이며 뒤가 유치한 색상의 플라스틱으로 마감된-) 귀이개들이 모두 분실되는 운명을 겪을 동안, 분실과 발견을 거듭하며 아직까지 남아있다. 요즈음의 나온 자극적인 느낌의 사용감보다 적절하게 둥근, 상처를 입지 않을 만큼의 배려가 있다. 그런 물건들의 시대가 어쩌면 조금 그리운 걸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자극으로 멋을 낼 줄 알았던 인류의 시대가-


삼다수 생수 뚜껑. 정수기를 믿지 못하는 아버지 덕분에, 500ml 용량의 삼다수가 주기적으로 배달되면서 책상에 2-3개쯤의 뚜껑이 굴러다닌다. 별 것 아닌 기술이지만, 이런 나선 구조가 인류에게 얼마나 큰 선물을 한 것인지를 고려해 볼 때 창시자의 이름을 모르는 것에 조금은 미안함을 느낀다. 하다못해 엘리베이터의 창시자는 자기 이름의 브랜드 OTIS를 거의 대부분의 엘리베이터에 써두고 있는 걸 보면, 디자인의 사용자가 얼마나 상류층인가에 대한 문제도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 식이라면 오히려 이름이 너무 유명하게 남아있는 디자이너는 존경하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 


파버카스텔 F 심 연필. F~8B까지 있는 연필세트를 구매했다가 아직까지 홀로 남아있다. 내가 환갑이 되어도 다 사용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이 있다. 견고함, 정확함에 약간 염증이 있는 나로서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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