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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g Nov 26. 2022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안규철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안규철


초판 1쇄 발행 2014년 10월 31일

2판 1쇄 발행 2022년 10월 27일


발행. 사무소, 워크룸 프레스(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19길 25, 3층)

기획. 사무소, 워크룸


글. 김선정, 김성원, 김해주, 박찬경, 보이스 그로이스, 안소연, 우정아, 윤난지, 이건수, 이찬웅, 최태만

번역 및 감수. 고아침, 김은지, 김정은, 김현경, 닉 히먼, 리처드 해리스, 아트앤텍스트, 송미경, 앨리스 킴, 정다빈, 정도련


- 유학을 경험한 많은 이들처럼 나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동아시아에서 온 이국적인 존재로서 나를 입증하고 인정받기 위해 오방색이나 무속 같은 민속적인 소재를 소환하는 것에 내가 그들과 다른 존재임을 인정받으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현재를 통해서 나를 입증하고 싶었다. '외투는 어디서나 외투이고, 의자는 어디서나 의자인' 보편적 사물의 의미에 주목했던 것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보편성을 미술에서 찾으려 한 셈이다. 그런 선택을 하면서 놓쳐 버린 것들, 아직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지난날을 돌아보는 나이에 이르러서 나는 '그들'로부터도 '우리'로부터도 좀 자유로워진 것을 느낀다. 누가 나를 평가하든 말든 이제는 주어진 시간을 '보편성'과 '구체성'을 함께 붙잡는 데 써야 하지 않을까. [6p]


- 예전에,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미래에 도래할 새로운 질서를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과거와 현재에 대한 통찰과 미래의 비전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면서 현재속에 미래를 구현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미래도 과거도 상정하지 않은 채 지금 이 순간의 현재에 참여하는 일이 되었다. 역사는 '끝났다'고 선언되었고, 역사적이거나 이론적인 평가는 지금 당장의 시장과 자본의 평가, 경매 낙찰가와 유튜브 조회 수, '좋아요'수로 대체되었다. 지금 당장 일시적으로 가져다 쓰고 버리는 일회용의 미학(나는 그것을 다이소 미학'이라고 부르고 있다.)의 지배 아래서 우리는 역사적 맥락을 잃어버렸다. 과거와 미래로 이어지는 통로가 사라진 곳에서 미래를 말하는 자는 시대착오로 비판받기 쉽고, 과거를 들먹이는 자는 보수적 민족주의자라는 혐의를 받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현재만을 말하는 것, 직접적이고 강렬한 자극과 파열음에 익숙한 동시대 관객에게 더 강력하고 낯선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미술의 일이 되었다. 전 지구적 재난과 종말의 위협 앞에서, 혐오와 적의, 두려움과 불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이나 '연대'같은 말을 입에 올리는 것도, 절제와 품위를 말하는 것도 비웃음거리가 되기 쉽다. [51~52p]


- 우리는 근대 미술작품이 정말 훌륭한 즉, 혁신적이고, 급진적이고, 한발 앞선 걸작으로 인정받으려면 동시대인들의 찬사를 즉각적으로 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혹여 그랬다가는 관습적이네, 따분하네, 그저 상업성만 짙네 등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현대 예술가들이 대중의 취향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다. 그리고 실제로 현대 대중들 역시 본인의 취향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드는 것을 보니 썩 뛰어난 작품은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거나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보니 아주 뛰어난 작품인가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14p]


- 사실 한국의 모더니즘은 비판적이거나 전위적인 성격이 빠진 모더니즘이었어요. 서구에서 모더니즘이 보여 온 급진성이나 전위성을 생각하면 우리 모더니즘이 민중미술이나 현실과 발언 같은 데서 등장하는 급진성도 인정할 수 있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오히려 불온하다고 매도하고 배척했지요. 한편 민중미술 진영은 구체적 형상과 직접적인 소통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미술의 가능성의 가지를 쳐내고 있었습니다. [180p]


- 서울의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예술을 하겠다고 독일로 갔는데, 독일의 미술대학에서 작업을 하면서도 내가 이 미술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정말 까마득하고 힘든 일로 느껴졌거든요. 문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삶이고 하나는 예술입니다. 삶의 문에는 손잡이가 없어서 열 수가 없고, 예술의 문에는 손잡이가 다섯 개나 있으니 고뇌를 할 수밖에 없죠. 그리고 삶의 예술 사이에 있는 중간 지점으로서의 공간, 내 정신의 작업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 도대체 내가 하고 잇는 일이 뭘까. 그것을 오브제를 통해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그게 화분속의 의자가 됐습니다. 무명작가가 이 방에서 하는 일은 결국 죽은 나무를 심고 계속 물을 주고 가꿔서 다시 자라게 하는, 그런 부조리하고 불가능한 일인 것이죠. [181p]


- 전통적인 것을 날것 그대로 가져가다 보여 주며 그것을 한국적 현대 미술이라고 강변하는 것이 저는 정말 싫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을 서양 사람들에게 완전히 이국적인 종족처럼 보여 주고,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이런 짓을 왜 계속해야 하는지 의문이었죠. 그런데 그건 아마 문화 전반이 성숙하면서 조금씩 개선되는 문제였던 것 같아요. 옛날에는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나 '서편제'가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지만 지금은 박찬욱, 홍상수 같은 영화감독들이 현재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고 나가서 한국적인 영화로 인정받고 있으니까요. [183p]


- 상당수 작가들은 아이디어와 열정이 샘솟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러나 실제로 들여다보면 자기 재능에 대한 의심으로 괴로워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작가적으로 더 이상 가망이 없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단 말이에요. 저 자신이 그렇죠. 그래서 이런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일종의 치유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95p]


- 미술관이 기대하는 스펙터클이라는 것. 관객에게 어떤 새로운 감각적인 체험을 제공해서 뭔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관객들이 만족해서 돌아가게 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이 있어요. 뉴미디어도 그렇고 사람들을 몰입시키고 감탄하게 만드는 거창한 볼거리를 만드는 것도 그렇죠. 현대 미술관 건축의 스케일은 또한 작가로 하여금 그 공간을 채울 것을 요구합니다. 거대한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구경거리, 이것이 미술에 요구되는 하나의 큰 축이라면 다른 하나의 축은 여전히 집 안의 알록달록한 장식이 되는 그림에 대한 수요거든요. 둘 사이 어딘가에 무언가 다른 길이 잇을 거라고,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건 순간순간의 상황에 대한 어떤 반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5p]


- 내게는 미술을 하면서 계속해서 미술을 의심하는 병이 있다. 범람하는 이미지의 강력한 힘 앞에서 수공업적 이미지 생산자로서 무력감을 느끼고, 자본과 경제가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미술의 역할에 대해 회의한다. 이미지를 다루면서도, 실상을 가리고 왜곡하는 이미지의 수상쩍은 속성을 경계한다. 미술을 통해서 세상의 지배적인 힘들과 경쟁하려 했었고, 이미지에 대한 의심과 절제로 인해 미술과 비미술의 경계선을 배회하는 자가 되었다.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때때로 자족적인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 조용히 실종되려고도 했다. 모호한 선문답이 아닌 정교한 언어로 작업을 규정하려 했고, 그러면서도 논리의 사다리를 버리고 허공속으로 날아오르기를 꿈꾸었다. [301p]


- 인간이 이 세상에 볼 수 없는 것이란 없으며, 보이지 않는 것이란 곧 없는 것이라는 믿음은 분명 우리에게서 중요한 무언가를 박탈하고 있다. [324p]


-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1만장의 벽돌이나 한 장의 손수건이나 티끌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나는 세상에 길이 남을 중요한 일을 한다고 믿으면서 사소한 일들에 소홀했음을 반성하고자 했다. [324 ~ 325p]


- 나는 주변의 사물과 텍스트를 가지고 사소하고 어이없는 농담을 하는데 관심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몰두하는 중요한 일들에 무관심하거나 이러한 현실의 위중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삶을 그렇게 생존과 추락의 갈림길로 내모는 이 압도적 현실에 순순히 투항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심각한 미술에 반대하지 않고 감각적인 구경거리로서의 미술에 반대하지 않으나, 그것들이 과연 우리 삶의 다른 가능성들에 대한 생각을 확장하고 있는지 의심한다. 나는 전형적이고 예측 강능한 반응과 해법에 안주하는 예술에 반대한다. [331p]


- 이 모든 것이 질문들이고, 그 질문들이 결국 하나의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이것이 맞는가?' 또는 '이대로 좋으가?', '이것 아닌 다른 것은 없는가?' 이 질문은 대안, 다른 길,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고, '지금 여기'가 아닌 곳, 유토피아에 대한 질문이다. 부재하는 어떤 것을 상상하고, 형상으로 만들고, 사람들의 생각속에 하나의 이야기가, 비어 있는 하나의 방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술이 더 무슨 일을 하겠는가? 잡담으로 채워진 세계에 침묵의 산책로를 내는 일,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매번 낯선 숲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일. [369p]


- 한국에서 정확하고 '아귀가 맞는' 무엇인가를 '해낸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는 대개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것일 테니, 구태여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445p]


- 삶과 예술의 일치라는 대전제 아래서 많은 사람이 집단적으로, 미술과 삶 사이의 벽을 허물고 현실의 떡을 만들 수 있기를 꿈꾸었고, 그둘 중 상당수는 실제로도 그러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더 이상 그림의 떡은 없어도 좋은가? 

 손에 잡히고 배를 채워 주는 떡만을 우리는 필요로 하는가? 나는 세상에 대한 미술의 이 같은 대응 속에 다시금 이 시대의 기능주의, 물질주의의 윤리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4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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