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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g Dec 04. 2022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

의사가 되어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다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


1판 1쇄 발행 2019년 8월 9일

1판 6쇄 발행 2022년 4월 4일


지은이 김선영

그린이 곽명주

펴낸이 주연선

펴낸곳 은행나무(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 11길 54)


- 죽음에 적응하는 마지막 석 달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율성이 상실되어가는 이 시기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아니,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일까. [71p]


- 사별 이후에 가족들이 보이는 태도를 평가하거나 비교할 수는 없다. 개인의 역량 차이로 돌릴 일은 더 아니다. 그들에게는 각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엄마는 조금 소심하긴 해도 유머러스하고 회복탄력성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엄마에게 잘했다고, 최선을 다했다고, 고맙다고,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아픈 남편을 돌보는 삶 그 자체를 걱정했고, 남편 없이 살아갈 날들을 걱정해주었지만, 엄마의 삶을 긍정하고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포함해서…… 엄마는 이에 죄책감과 회피라는 방어기제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91p]


- 슬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킨다. 빛나던 지성도 슬픔 앞에서는 무릎을 꿇게 된다. 그 틈새로 흘러들어 채워지는 것은 신비, 천연, 초자연 따위에 대한 기대와 환상. 슬픔을 잊게 해주는 맹목적 믿음. 그 믿음을 미끼로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장사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진정한 인술을 펼치는 재야의 실력자인 양 환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환자의 이해할 수 없는 선택 뒤에는 슬픔이 있다. [115p]


- 죽어가는 사람은 두려움과 불안에 가득 차 있다. 툭하면 화를 낸다. 대소변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고 씻지도 못하니 냄새가 난다. 그것이 그를 더욱 수치스럽게 하고 그래서 더 화를 내게 된다. 아프니 더 화가 난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병과, 그 병을 만든(만들었다고 생각하는)원인과, 가족과 의료진이 원망스러워 화가 난다. 한편으론 죄 없는 이들에게 화내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의식이 없거나 혼란스러운 경우도 많다. 이럴 땐 보호자가 화를 내기도 한다. 이렇게 될 때까지 뭘 한거냐며. [135p]


- 환자는 이틀 후 임종하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눈, 그의 눈을 바라보며 상급 종합병원 의료진의 노동력도, 부족한 상급 병원의 병실도,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돈도, 어느 정도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에 낭비하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의 일이니까. 사람이란 누구나 예외 없이 불완전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를 매길 수 없이 소중한 존재니까. [160p]


- “그럼 앞으로 뭘 하고 싶니?”

 뭐하고 먹고살 거냐. 너의 가치를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초등학생에게 묻기는 너무 가혹한 질문인데도, 반사적으로 불쑥 나온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들이 쉽게 그 가치가 떨어지기도 하고 순식간에 없어지기도 하는,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하기 너무도 쉬운 불확실성의 시대에 내 아이가 어떻게 밥벌이를 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불안은 이런 식으로 순간 아이 앞에 맨얼굴을 드러낸다. 어떻게 살고 싶니, 라고 물어봤어야 했을까. 불안을 드러내지 않고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193 ~194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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