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우스다 쇼지 | 옮긴이 / 변은숙
스기우라 고헤이 디자인
2011년 12월 20일 1판 1쇄 발행
지은이 우스다 쇼지
감수자 정병규
옮긴이 변은숙
펴낸곳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84-1 삼성빌딜 A동 2층)
- 스기우라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그래픽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건축을 떠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까닭이 있었겠지만, 밀리미터 단위의 정밀한 건축도면과 도면을 토대로 실제 시공하는 기술자들의 ‘현장 사양’ 사이의 괴리가 너무 크다는 것에 대한 실망도 한 가지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6p]
- 힘과 속도감 넘치는 디자인으로 근대 포스터 표현을 확립한 아돌프 무롱 카상드르Adolphe Mouron Cassandre, 1901~1968, 프랑스의 그래픽 디자이너·판화가가 “포스터는 상인과 손님 간의 전달 관계일 뿐이다. 전화기 같은 것이다. 포스터를 만드는 사람은 메시지를 발신해서는 안 된다. 전달해야 한다”고 아주 적절하게 말했듯이, 포스터는 차례대로 사람의 눈을 쏘아볼 필요가 잇따. 그런데 스기우라의 작품은 레코드 재킷 연작. 레코드 재킷은 음악과 함께 손바닥 안에서 천천히 훑어보며 디자인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지나는 길에 흘낏 보고 마는 것이 아니다. [32~33p]
- “현재의 디자인 상황이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일본 디자인의 상황과 유럽 디자인의 상황은 별개로 생각해야 합니다. 유럽은 그들 자신의 손으로 일궈낸 기계문명의 본질을 이해하고, 바우하우스 운동 같은 합리주의적이고 기계기능주의적인 면에서 디자인을 추구하며 고민해왔는데, 일본은 완전히 반대여서, 아와즈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일본 디자인은 미국적인 상업주의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형태로든 디자인은 장식을 해야 한다는, 반기능적이고 장식적인 관점입니다. 일본 디자인계에는 그런 의식이 팽배합니다. 디자이너를 그런 단순한 선전자로 보지 말아야 하며, 우리 디자이너도 좀 더 근원적인 인간성의 장에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종합하는 관점에서 여러 가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6p]
- “저는 건축과 출신으로 그래픽 디자인에 관해서는 전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꼭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무조건 디자인 현장이나 인쇄 현장에 가서 보고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그때 현장에서 만나는 기술자들과 기계들이 모두 저의 선생님이었습니다. (중략) 현장에서는 어떻게 활자를 골라내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판이 만들어지고 교정쇄가 만들어지는지를 직접 보고 듣고 배울 수 있습니다. 물건이 생산되는 현장에서 프로세스와 탄생의 순간을 눈으로 배운 것이지요. 자신이 디자인한 것이 고속으로 찍혀 나오고 증폭되어 독자의 손에 전해집니다. 디자인의 무서움, 사회적 책임을 인쇄 기계한테 배웠습니다." [73p]
- “학술서, 그중에서도 자연과학 서적은 무척 수수해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이런 책은 디자인할 필요가 없다고 아예 정해놓기라도 한 것 같다.”[82p]
- 그리고 스기우라가 목격한 불탄 폐허로 변한 도쿄와 다시 급속하게 부흥하며 발생한 전후의 혼돈, 어수선한 광경에도 영향을 받았다. “무질서 속이야말로 뭔가가 태어나는 근원이라고 직감”했던 소년 스기우라의 원체험이 일련의 노이즈 작품에 깊이 투영되어 있다. [89~90p]
- 세계는 읽고 해석하는 게 아니라 듣고 이해하는 것이다.[90p]
- 그런 나는 그것들 ‘물物’들을 하나만 꺼내 ‘형태’로서 들여다보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 순식간에 죽은 것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집합체 속에서 동질의 다른 것과의 단층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세포들이 서로 다른 유기체를 구축하듯이 개체차를 형성하는 근원적인 것의 탐구. 거꾸로 말하면, 개성적이고 미묘하게 변화하는 그들 ‘물질’이 공존하고, 서로 투쟁하는 다이내미즘―이 두 가지 사이를 방황하는 것이 내 숙제이다.
나에게 ‘형태’란 정주할 줄 모르는 이 순환작용의 순간적인 정착이다. [95p]
- "이 대학에서 학생들은 예스 또는 노의 대답을 교수에게 요구합니다. 학생과 상담을 하고 있으면 ‘스기우라 선생님, 이게 좋은지 안 좋은지 알려주세요’라는 말을 합니다. 확실한 이진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교수는 다양한 체계와 경험을 원용하면서 이것은 이런 점에서 예스이고, 이런 점에서는 노라는 해부를 하게 됩니다. 눈앞에 있는 것 또는 아이디어의 세부를 디지털화해서 해부하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요인으로 나누어 해부합니다. 울름에 있을 때 일상적인 대응법이었지요.
저는 그런 이진법적 사고 또는 디지털적 사고에 일말의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이렇게 웅얼거렸지요. ‘아마 그렇겠지…….’ 동양적인 애매함입니다. 그게 자꾸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퍼햅스’, 독일어로는 ‘페라이히토’를 웅얼거렸지요. 그래서 ‘퍼햅스 선생’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섬광처럼 스치는 게 잇었습니다. 나는 퍼햅스다. 그것은 매우 강한 계시였습니다.“ [107p]
- “학생한테 지금 당장 포스터나 카탈로그를 하라고 해도 시작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내가 아닌 타인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나에서 출발해 나 아닌 것으로 확대하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구조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1학년 때는 가장 작은 것, 자기 주변의 디자인을 생각하고, 다음 해에는 조금 멀리, 학교 주변의 디자인, 그 다음해는 도시, 이렇게 내용이 넓어지도록 계획을 세웠지요. 의식의 확대가 하나의 축이고, 영역의 확대가 다른 하나의 축입니다. [109p]
- 그라데이션은 제 3장에서 언급한 『피안과 주체』의 속표지와 마찬가지로 제판 카메라로 그라데이션 촬영을 한 것이다. 이것도 초점이 어긋난 것 같은 부정적인 인상이 강하다. 일반적으로 잘 쓰지 않는 가공과 조작을 중층적으로 구사함으로써 이 포스터에서는 꿈과 환상의 경계를 떠도는 듯한, 일찍이 없었던 이미지가 떠오르게 된다. 인용한 문자도 판독하기 어려운 곳이 적지 않고, 노이즈적이다. 가독성에 대한 적극적인 침범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76p]
- “나는 요즘 포스터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몇 가지 까닭이 있다. 먼저 2분의 1 B전지는 그것을 두 번 접고, 네 번 접고……. 그렇게 계속 여섯 번 접어서 둘로 자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손에 들고 읽는 64페이지짜리 책이 홀연히 나타난다. 네 장으로 자르면 포스터를 만들 수 있지만, 250페이지짜리 책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한 권의 책에 상당하는 포스터는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포스터가 붙은 수직면의 대부분은 공공의 벽면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다나카 가쿠에이씨 무리가 올려놓은 땅값처럼 이권이 광란하는, 누군가 이미 사들인 ‘장소’이다. 사람들의 눈에 충격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살피는 경제구조가 여러 겹으로 얽히고 설켜 있다. 크기에만 홀려 이미지들을 함부로 다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디자인의 꽃’이라며 무비판적으로 찬미하는 포스터. 프랑스에서 근대 포스터가 등장한 이래 역사적이고 체계적이로 이야기되어온 장르다.
미국의 유대인 여성철학자인 수전 손택Susna Sontag, 1933~2004은 포스터가 일찍이 ‘예술’로서 인지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포스터는 (사진이나 영화처럼) 전근대사회부터 이어지는 역사는 없다. 포스터는 기계복제시대에만 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라며 독일의 유대인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잘 알려진 복제예술론에 입각한 취지를 전재하면서 “포스터는 등장한 지 20년 만에 하나의 예술양식으로 널리 인식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일찍부터 그래픽 디자인의 왕좌에 등장한 포스터의 존재를 스기우라만큼 정면으로 비판한 예를 일찍이 나는 본 적이 없다. “문자 그대로 세계 정상급 레벨로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고 인사말에도 언급된 이 전시회의 취지에 일종의 찬물을 끼얹는 대담하고 불손한 발언이다. -중략-= 좌익 미술가들이 엄혹한 감시의 눈을 빠져나가 사거리마다 전봇대 같은 곳에 선전지나 포스터를 붙이고 대중에게 표현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분투했던 일을 적었다. 비합법이기는 했지만 게시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전후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포스터 게시 조건은 좋아졌는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상황은 더 나빠졌다. 도시 공간 구석구석까지 관리가 더욱 철저해졌기 때문이다. [179~181p]
- 다 아는 사실이지만 포스터는 표면만 사용할 수 있다. 뒷면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공간이다. 스기우라가 지적하듯이 독자가 ‘읽는다’는 적극적인 행위가 매개되는 책에 견주면, 지나가다가 한번 쳐다보고 마는 포스터는 얕게 보이기도 한다. [182p]
- 무의식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진동을 내포하고 있는 안구운동. 그 특성은 매초마다 30~100에 이르는 ‘고시미동(물체를 계속 보고 있는 상태에도 안구가 움직이는 현상 - 옮긴이)’에 있으며 그러한 ‘시세포적 자극이 끊임없이 갱신’되어 본다는 것의 요인이 형성된다. 그리고 시선은 얼굴이라면 눈, 코, 입, 귀 같은 돌기물을 주시하고, 무의식 중에 윤곽선을 그린다. 그것은 유아의 ‘태양인간’의 발생과 같은 맥락에서 발생하는 현상일 것이다. [187~188p]
- 끝으로, ‘도상의 발생’이다. 무분별하고 산란한 상태, 노이즈 상태에서 “뭔가 도상다운 것이 제시되면 반사적으로 그중에서 도상적인 것을 찾게 된다”, 또는 “차이를 발견하려고 주시한다”같은 사람의 지각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적극적인 활동을 많은 사례를 들어 참조하면서 해명했다.
거꾸로, ‘기억 속의 형태의 소멸’에서도 구체적인 예를 들며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 소겡 거처하는 도상은 끊임없이 유지구조(기억 같은) 속에서 흔들리며 계속해서 자취를 바꾸고 있다.” 우리는 기억을 유지하는 것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것을 도상과 형태에 대입시켜 그 기억의 성쇠를 탐색한 보고이다. [189~190p]
- 강연을 마무리하며 스기우라는, 현대 디자인은 A사 B사의 제품이 각각 고립적으로 존재하며 서로 연결고리가 없다고 비평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아시아의 도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세계관을 공유하며 서로 중첩된다고 했다. 현대 디자인의 위상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는 고찰이었다. [217p]
- "일본에서는 회사 간에 서로 전혀 조정하지 않고 물건을 만들고 있으며, 지금 쓰루오카 히데요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건축과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 따로따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런 부분을 조정해야 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역시 접점을 만듦으로써 서로 자극을 주는 아주 역동적이면서 활성화된 물건과 물건의 이어짐을 설정해감으로써, 접점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217~21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