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지은이 / 한병철 | 옮긴이 / 김태환

by Joong

피로사회
제1판 제 1쇄 2012년 3월 5일
제1판 제13쇄 2012년 7월 18일
지은이 한병철
옮긴이 김태환
펴낸곳 (주)문학과지성사(121-840 서울 마포구 서교동 395-2)


신경성 폭력
- 지난 세기는 면연학적 시대였다. 즉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였던 것이다. 냉전 역시 이러한 면연학적 도식을 따른다. 지난 세기의 면역학적 패러다임 자체가 철저하게 냉전의 어휘와 본질적으로 군사적인 장치Dispositive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를 장악한 이러한 면역학적 장치의 본질 속에는 어떤 맹목성이 있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12p]


-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Andersheit과 타자성Fremdheit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이질성은 면역학의 근본 범주이다. 모든 면역 반응은 이질성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면역학 이후 시대의 차이, 후기근대적 차이는 더 이상 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면역학적 차원에서 차이란 같은 것das Gleiche이나 마찬가지다.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관광객, 또는 소비자는 더 이상 면역학적 주체가 아니다. [13~14p]


-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이질성은 탈경계과정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면역학적으로 조직화된 세계는 특수한 공간구조를 지닌다. 그것은 경계선, 통로, 문턱, 울타리, 참호, 장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 과정을 가로막는다. 오늘날 삶의 모든 영역은 일반적인 난교 상태로 특징지어지며, 이는 면역학적 관점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이질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문화이론적 담론뿐만 아니라 오늘의 생활감정 자체까지도 지배하고 있는 혼성화 경향 역시 면역화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타자에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면역학적 지각 과민은 어떤 혼성화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5~16p]


-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privative하기보다 포화saturativ시키며, 배제exklusiv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exhaustiv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21p]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 gesellschaft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Gehorsamssubjekt"가 아니라 ”성과주체Leistungssubjekt"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갈라놓는 규율 기관들의 장벽은 이제 거의 고대의 유물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23~24p]


-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노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호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24p]


-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 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다. 그렇다고 능력이 당위를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다. 성과주체는 규율에 단련된 상태를 유지한다. 그는 규율 단계를 졸업한 것이다. 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 향상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25p]


-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28p]


-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29p]


깊은
심심함
-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주의구조와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업무 부담의 증가도 시간과 주의를 관리하는 특별한 기법을 요구하는데, 그러한 기법은 다시 주의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수렴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저긴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30~31p]


-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32p]


활동적 삶
-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속에 빠뜨린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극단적으로 덧없는 것은 인간 삶만이 아니다. 세계 자체도 그러하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노동하는 동물이 어떤 유에 속하고 자신이 속한 유를 위해 노동하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동물다운 느긋함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 탈서사화는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 노동 자체가 적나라한 활동이다. 벌거벗은 노동은 벌거벗은 생명에 정확히 조응하는 활동인 것이다. 벌거벗은 노동과 벌거벗은 생명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된다. 서사성을 지닌 죽음의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벌거벗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난다. [42p]


-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43~44p]


보는 법의 교육
-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48p]


-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49p]


-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50p]


-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부정적 힘은 단순한 무력함, 무언가를 할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력함은 단순히 긍정적인 힘의 대립항일 뿐이다. 무력함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결국 그 무언가에 대한 종속이며 그 점에서 긍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부정적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이런 긍정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52~53p]


바틀비의 경우
피로사회
- 효율성과 가속화의 경제학은 형식의 소멸을 가져온다. 한트케는 깊은 피로를 치유의 형식, 더 나아가서 회춘의 형식으로 승격시킨다. 피로를 통해 세계는 경이감을 되찾는다. “지친 오디세우스는 나우시카의 사랑을 얻었다. 피로는 젊음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젊었던 적은 없었다고 할 만큼. 모든 것은 피로가 가져온 평온 속에서 경이롭게 된다.” [69~70p]


-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의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Zwischenzeit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체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71~72p]


우울
사회
- 자아 피로는 자아의 잉여와 반복에서 비롯되는 피로다. 하지만 치유적 피로는 이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한 피로 속에서 자아는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긴다. 그것은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으로서의 피로, 건강하고 “세상을 신뢰하는 피로”이다. 반면 자아 피로는 고독한 피로, 세계가 없는, 세계가 부족한, 세계를 지워버리는, 개개인을 고립시키는 피로이며,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의 대가로 타자와의 모든 관계를 파괴해버리는 피로다. [82p]


- 프로이트의 심리적 기구는 명령과 금지로 이루어진 억압적 강제 장치이다. 족쇄를 채우고 억압하는 이런 심리적 장치는 규율사회와 똑같이 장벽과 문턱, 경계선, 국경 감시 초소 등으로 넘쳐난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역시 오직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토대로 조직되어 있는 억압적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철폐해가며 자유로운 사회를 자처하는 성과사회다. [83p]


- 타자와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보상의 위기가 찾아온다. 인정으로서의 보상은 타자 또는 제3자라는 심급을 전제한다. 스스로를 보상하거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칸트에게는 신이 보상의 심급이다. 신은 도덕적 업적을 보상하고 인정해준다. 보상구조에 이상이 생기면서 성과주체는 점점 더 많은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다. 따라서 타자관계의 부재는 보상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초월적 조건인 것이다. 오늘날의 생산관계도 보상의 위기를 불러온 또 다른 원인이다. 완결된 일의 결과로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오늘의 생산관계는 완결을 가로막고 있다. 사람들은 열려 있는 방향으로 일을 해나간다. 시작과 끝이 있는 완결의 형식은 사라져버렸다. [86~87p]


- 자아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정립한다. 이로써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는 경계선이 유지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자와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반면 나르시시즘에서는 타자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나르시시즘적 장애를 겪는 사람은 자기 자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타자관계가 소실되고 이에 따라 안정된 자아의 이미지도 형성되지 못한다. [88p]


- 객관적으로 유효한, 최종적으로 완성된 형식이 불가능하다는 사회적 조건이 주체를 자기 자신의 나르시스적 반복으로 몰아가고 있고, 그런까닭에 주체는 하나의 형태, 안정적인 자아상, 확고한 성격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즉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은 자아 감정의 고양을 위해 의식적으로 “회피”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나르시스적 주체는 완결이 이르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결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를 잃고 열려 있는 공간 속에 흩어져버린다. 완결된 형식의 부재는 무엇보다 경제적 조건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개방성과 미완결성은 성장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89~90p]


-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더욱 줄여놓는다. 가상공간에서는 타자성과 타자의 저항상이 부족해진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사실상 “현실원리” 없이, 다시 말해 타자의 원리와 저항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가상현실 속의 상상적 공간에서 나르시스적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다. 실재가 무엇보다도 그 저항성을 통해 존재감을 가진다면, 가상화와 디지털화의 과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러한 실재를 지워나간다. 실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를 붙잡는다. 즉 일을 중단 시키고 저항하여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라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서 우리를 잡아주는 것이다. [95p]


- 슬픔은 강렬한 리비도가 투여된 대상의 상실과 함께 일어난다. 슬퍼하는 자는 전적으로 사랑하는 타자와 함께 있는 것이다. 후기근대의 자아는 리비도적 에너지의 대부분을 자기 자신에게 사용한다. 그렇게 쓰고 남은 리비도는 계속 늘어나는 연락처와 일시적 관계에 배분되고 흩어진다. 매우 약한 리비도를 타자에게서 빼내어 새로운 대상에 투여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다. 길고 고통스러운 “애도 작업”은 불필요하다. 소셜 네트워크 속의 “친구들”은 마치 상품처럼 전시된 자아에게 주의를 선사함으로써 자아 감정을 높여주는 소비자의 구실을 할 따름이다. [96~97p]


-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Burnout 때까지 자기를 찾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103p]


- 이상 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로 나타난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모든 외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103~104p]


- 오늘날의 폭력은 적대적인 이견에서보다는 순응적 합의에서 나온다. [109p]


-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나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이때 삶과 죽음의 엄격한 분리는 삶 자체마저도 섬뜩한 경직성을 띠게 한다.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의 히스테리에 밀려난다. 생물학적 생존의 과정으로 환원된 삶은 벌거벗은 생명이 된다. 삶을 감싸던 서사성은 완전히 벗겨졌고 삶은 생동성을 잃어버렸다. 생동성이란 단순히 생명력이나 건강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다.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조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 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자기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 [112~113p]


-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114p]


역자 후기
-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화은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생산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학교 교육과 관련하여 체벌이나 학생 인권 조례 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은 우리 역시 그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과정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일 것이다. 의무 과목의 축소 및 철폐, 자기 주도 학습의 강조,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입시 전형 방식의 도입(예컨대 입학사정관제)은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내기보다는 더욱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쟁, 한병철이 말하는 “절대적인 경쟁”(남과의 상대적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를 끝없이 뛰어넘어야 하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고 있다. 입시 지옥에서의 해방을 약속한 최초의 교육부 장관이 내세운 구호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20개에 가까운 교과목의 무게에 신음하던 학생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을 이 구호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123~1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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