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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하라 켄야 | 옮긴이 / 이정환

by Joong

白 백
2009년 5월 29일 초판 발행
2010년 6월 15일 2쇄 발행
지은이 하라 켄야
옮긴이 이정환
펴낸곳 (주)안그라픽스 413-756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파주출판도시 532-1


머리말
-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때에는 일방적으로 정보를 던지는 것보다 상대방의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쪽이 오히려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얼마나 많이 설득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들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질을 좌우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때로는 의도적으로 빈 그릇을 만들어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해 왔다. 예를 들면, 국기나 십자가 등의 매우 간결한 심벌은 어떤 의미를 상징하는 한정적인 기호라기보다는 그 심벌을 접한 사람들이 낳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속이 텅 빈 커다란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거대한 분묘나 교회 등의 공간 또는 다실이나 정원 등도 그중 하나에 해당한다. [15p]


제 1장
백의 발견


- 둥근 고리를 이루는 스펙트르|spectre|에 따라 삼차원의 입체로서 표현된 색의 체계는 물리 현상으로서의 색의 구조를 이해하기 쉽도록 이끌어준다. 그러나 인간이 이 구조에 비추어 색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깨어진 달걀에서 새어나오는 짙은 노른자의 윤기나 깊은 맛이 우러난 녹차의 색의 배합은 단순한 색채만이 아니라 물질성을 동반하는 질감이며, 맛이나 냄새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런 것들을 복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인간은 색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색은 시각뿐 아니라 모든 감각과 관련된 대상이다. [21p]


-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의 반복적인 작용으로 ‘종유 동굴’이 만들어지듯, 인간이 자연의 모습이나 세상의 변화에 맞섰을 때에 탄생하는 심상|心象|이 조금씩 퇴적되어 색의 이름이 된다.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변화를 이루면서 어느 순간, 그것은 색이라는 거대한 의식 체계를 이룬다. 전통색이라는 색의 체계는 아마도 세상 속에 언어와 문화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게 존재할 것이다. [25~26p]


- 한편, 백은 ‘색의 부재’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한층 더 특수한 색이다.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의 잠재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상태를 일본어로 ‘키젠’이라고 부른다. 백은 색이 나타나기 이전의 미연형|未然形|이며 이른바 ‘키젠’에 해당하는 색이다.
빛의 색을 모두 섞으면 백이 되고 그림물감이나 잉크의 색을 모두 제거하면 역시 백이 된다. 백은 모든 색의 종합임과 동시에 무색이며, 색을 벗어난 색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색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백은 색으로 존재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색을 벗어난 만큼 보다 강한 물질성을 환기시키는 질감이며, 틈이나 여백과 같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잉태한다. [28p]


- 엔트로피의 증가란, 특이성을 줄이고 평균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30p]


- 백은 현실 세계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백을 보고 백을 접한 것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현실 세계의 백은 오염되어 있다. 그것은 백을 지향한 흔적으로서만 존재한다. 백은 섬세하고 부서지기 쉽다. 그것은 탄생의 순간에서조차도 완벽한 백이 아니며 접촉하는 순간 백이라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즉시 오염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백은 의식 안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는다. [31~32p]


제 2장
종이


- 종이는 하얗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종이가 하얗다는 사실은 결코 평범한 현상이 아니다. 하얀 종이의 발명은 인류 역사에서도 매우 빛나는 업적, 즉 강한 의미를 지닌 사건임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오늘날 종이는 너무도 당연하게 일상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특별함에 완전히 익숙해진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생활 속에서의 백은 보기 드물고 특별한 것이었다. 그런 특수한 성질을 가진 물질을 팽팽한 느낌이 드는 얇은 판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기에, 종이의 탄생이 인간에게 안겨 준 그 상상력에는 헤아릴 수 없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35p]


- 미디어의 본질은 실용성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인간의 창조성이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충동을 얼마나 자극하고 고무시키는가 하는 점에 있다. [35p]


- 나무껍질은 어스 컬러|earth color, 대지의 색깔|이지만, 필요한 섬유만을 남겨 체로 거르면 새하얀 종이가 된다. [37p]


- 오늘날 종이는 공업 제품이며 거기에는 백을 계측하는 기준이 있다. 측정치로서의 백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탄산마그네슘이라는 물질이다.
철봉 연기를 하는 체조 선수가 연기를 하기 전에 하얀 가루를 손에 묻히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탄산마그네슘이다.
이 가루의 하얀 정도가 백의 기준이 된다. 탄산마그네슘과 비교하여 하얀 정도가 얼마나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 종이에서의 백의 비율로 제시되어 왔다. [47p]


- 하얀 정도는 물리적인 지표일 뿐 감수성의 지표는 아니다. 따라서 백의 강도가 높다는 것만으로 백은 강한 인상을 줄 수 없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이 새하얗게 느껴지더라도 그 뒤쪽에 복사 용지 정도의 종이를 놓아 보면, 꽃 그 자체의 백은 종이의 백만큼 하얗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꽃잎은 담단한 색을 담은 수분을 머금고 있는 무거운 느낌의 백이다. 그러나 화려함을 자랑하는 꽃들이 우리 마음에 전해 주는 백의 느낌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다. 요컨대, 백은 감각 안에서 끓어오르는 현상인 것이다. [48p]


- 이 모든 필사의 재로는 모두 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양가죽은 그대로 무두질을 하면 평평하기는 해도 양의 체형을 띠게 되는데 문자나 기호가 기록된 것을 보면 모두 사각형이다. 설형 문자가 새겨져 있는 점토판 역시 위에서 보면 사각형이다. 인간은 자연을 사각형으로 꾸미고 고쳐 가면서 자신들의 환경을 만들어 왔다. [52~53p]


- 책은 사각형 종이로 만들어져 있다. 이 사각형의 공간 안에 언어를 어떻게 접어서 수납할 것인가. 기본적으로 언어는 시간을 따라 하나의 선처럼 연속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언어를 삼중주처럼 구사할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커뮤니케이션이 훨씬 더 복잡해지겠지만 현재까지의 인간의 발성 능력에서 언어는 솔로 악기처럼 단선으로 구사된다. 언어를 문자로 치환할 때에도 하나의 연속적인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한정된 공간에 끈처럼 선적인 언어를 집어 넣는 것이 책이라는 그릇의 구조이다. [54p]


- 기록된 언어는 항상 정치나 종교 등의 힘과 언제나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문자나 그 집적은 일종의 아우라를 발하는 듯한 정교한 구축물로 자연스럽게 진화되어 간다. 다시 말해 읽을 수 있으면 된다는 식이 아니라 멋지고 장엄하게 격식을 갖추고 존재해야 한다는 운명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56p]
- 명조체에는 줄기 끝에 ‘우로코|물고기 비늘과 같은 삼각형 모양|’라는 돌기가 있는데, 이것은 해서의 시작 부분|기필|과 맺음 부분|종필|을 반영한 것이다. 하얀 종이에 비치는 환자의 가독성과 조형성의 세련미를 추구한 결과 이런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62p]


제 3장
공백 空白


엠프티너스 Emptiness
- 네 귀퉁이의 기둥을 금줄로 연결하면 안쪽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무언가가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탄생한다. 이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야말로 신사의 중요한 의미이며, 그 잠재성에 손을 모은다는 의식 활동이 신도의 신앙심이다. [73p]


- 신들은 자유자재로 세상에 편재하지만, 이들을 납치하여 우리 자신을 위해 움직이도록 만들 수는 없다.
단, 의도적으로 ‘공백’을 만든다면, 신은 그 안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공백은 어떤 존재가 머무를 가능성이기 때문에 신은 그것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73p]


- 커뮤니케이션이란 의미 있는 내용물을 주고받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반드시 내용물이 개재되지 않더라도 커뮤니케이션은 성립된다. 커뮤니케이션은 사람과 사람의 의식이 소통하는 것으로, 그것은 눈과 눈을 마주 보고 시선을 맞추는 것도 포함된다. 눈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반드시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서로의 의식이 교차했다면 역시 그것을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중략-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은 기호를 주고받는 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서로 이해만 할 수 있다면 인연은 만들어질 수 있다. 기호의 엔코드와 디코드를 거쳐 의미를 해독하는 수고를 줄이고 서로의 시선을 맞추는 것만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이보다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없다. [79p]


- 일본인의 커뮤니케이션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전하고 싶은 사항을 확실하게 표현하지 않고 얼버무려 버리고 주어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다. 또한 사전 교섭이나 표정 등을 이용하여 애매한 채로 일을 진행하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하고 논리적 구조를 중시하는 서양식 커뮤니케이션의 문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아응의 호흡’이나 ‘사전 교섭’, ‘표정을 통한 의미 전달’은 고도의 커뮤니케이션이기도 하다. 주체를 확실하게 정하지 않거나 책임자를 특정 짓지 않거나 확실하게 말을 하지 않고 일을 진행하는 것은 암암리에 합의를 형성하는 시스템이다. 합의가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사태는 많은 시간을 거치면서 단련된 집단적 커뮤니케이션의 결과이며, 그 자체는 우수한 전달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자연스럽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개입되어 막대한 집단 커뮤니케이션이 작용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런 합의 방법이 정밀하게 재조명되고 연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80~81p]


- 매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결정의 대상이 되는 대상이나 일을 직접 지시하지 않고 괄호로 표현하여 다루는 방법은 공백의 커뮤니케이션이며 엠프티너스의 운용이다.
“그 ( )는 그렇게( ) 처리하면 되겠지요?”사람들, 말이 없다.
“이의가 없는 것 같으니 그 ( )는 그렇게 ( )처리하겠습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이 있다면, 절실한 주제를 직접적인 명사로 표현하는 거북함을 피하고 대명사로 진행해서 억제의 효과를 살리는 방법과, 누군가가 정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빈 그릇에 채워져 대명사화된 주제의 행방을 묵인하는 것으로 참가자 전원이 그 결정 사항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는 켜뮤니케이션의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애매함을 남긴 상태에서 적당히 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밀하게 엠프티너스를 운용하고 합의를 형성하여 책임이나 권력의 편재를 회피하고 있다. [81p]


- 심벌에는 선이나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성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심벌의 완성도에 따라 수용력이 크고 작음이 존재할지 모른다. 그러나 심벌 그 자체는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선도 악도 아니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심벌의 잠재력을 어떻기 기능하도록 만드는가 하는 운용에서의 가능성이다. [85p]


- 다실에 이르는 정원이나 길은 일상에서 비 일상으로 향하는 이동 공간이다. 손질이 잘 되어 있고 치밀하게 제어되어 있는 자연 공간을 경유하는 것으로 인간의 감각은 점차 긴장되고 예민해진다. 그 결과, 아무리 작은 변화라 해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 손님이 다실 안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따라서 미미한 정보가 다실 안에서는 거대한 이미지의 자원이 된다. [97p]


-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자. ‘완코소바’라는 것이 있다. 이 완코소바는 거의 한 입에 먹을 수 있는 적은 분량의 메밀국수를 말한다. 이 작은 그릇에 담긴 메밀국수를 재빨리 먹으면 옆에 있는 종업원이 비어 있는 그릇에 재빨리 메밀국수를 넣어 준다. 그것을 재빨리 먹어 치우면 다시 종업원은 재빨리 비어 있는 그릇에 메밀국수를 넣어 준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옆에 있는 종업원은 그릇이 비는 순간을 재빨리 포착하여 틈을 놓치지 않고 메밀국수를 넣어 주기 때문에 손님은 그 리듬에 이끌려 먹는 속도를 스스로 컨트롤하기 어렵다. 종업원들은 비어 있는 그릇을 차례차례 손님의 눈앞에 쌓는다. 그것이 조금씩 높아진다. 손님은 그것을 곁눈으로 바라보면서 마음 한구석에는 일종의 성취감과 기록에 대한 도전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배가 가득 찰 때까지 메밀국수를 먹는다. 높이 쌓인 그릇은 무엇인가 달성했다는 성과물로 보인다.
‘사고’는 ‘완코소바’와 같은 것이다. 즉, 눈앞에 계속 쌓여 가는 빈 그릇을 보면서 두뇌는 끊임없이 ‘메밀국수’에 대한 ‘사고’를 한다. 다시 말해, 눈앞에서 쌓여 가는 빈 그릇에 뇌는 ‘소바’가 아니라 ‘사고’를 잇달아 넣어 가는 듯 느끼는 것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쌓여 가는 빈 그릇을 볼 때 득달같이 하나의 ‘사고’가 탄생한다. 그리고 다음 빈 그릇이 쌓일 때 또 하나의 ‘사고’가 탄생한다. 이것을 조건 반사처럼 지속적으로 되풀이하는 사이에 어느 순간 ‘사고’는 높이높이, 눈앞에서 퇴적되어 가는 것이다. -중략- 사고나 발상은 ‘공백의 그릇’이 매개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00p]


- 엠프티너스의 운용에는 역시 수련과 경험이 필요하다. 심플과 단순이 아니라 기능하는 공백을 사용해야 한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불러들이는 잠재력 자체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완벽하다. [102p]


제 4장
백을 향하여


- 하얀 종이에 기록된 것은 다시는 본디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 오늘날, 날인을 하거나 사인을 하는 행위가 의사 결정의 증거로서 사회에 유통되고 있는 배경에는 하얀 종이 위에서 정정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하얀 종이 위에 인주를 사용하여 도장을 찍는 행위는 분명히 되돌릴 수 없다는 성질을 상징한다. [106p]


- 어린 시절, 붓글씨를 연습할 때에는 반지|얇고 흰 일본 종이|라는 종이를 사용했다. 검은 먹으로 하얀 반지 위에 아직 성숙하지 못한 문자를 쓰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문자를 쓰는 연습이었다. 서투른 글씨를 종이 위에 쓰고 나면 다시는 그 종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양심의 가책이 실력을 높이는 에너지가 된다. 연습용 반지라고 해도 하얀 종이이다. 거기에 자신의 서투른 행위의 흔적이 남는다. 종이가 아깝다기보다는 하얀 종이에 되돌릴 수 없는 과실을 누적시켜 가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퇴고라는 미의식을 가속화시키는 것이다. [106~107p]


- 현대 사회에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사고 경로가 탄생했다. 인터넷이라는 미디어는 언뜻 개인적인 언어의 집적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터넷의 본질은 오히려 불완전함을 전제로 한 개인의 집적 너머에,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종합적인 지식 같은 것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즉, 인터넷을 개입시켜 사람들 각자가 생각한다는 발상을 초월하여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생각한다는 상황이 탄생하고 있다. 과거에는 백과사전처럼 엄밀함이 요구되는 정보의 체계를 편찬할 때에도 각 파트는 전문가들이 개별적으로 집필을 담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가필과 정정을 할 수 있는 백과사전 같은 것이 인터넷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잘못된 부분이나 장난, 잘못된 생각이나 정확하지 못한 표현은 전 세계 사람들의 눈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인쇄물을 세상에 내보낼 때의 의식과는 다른 압박감, 양식, 악의, 조소, 존경, 야유, 비평 등 모든 것이 포함된 흥미와 관심이 낳는 지적 압력으로서 정보는 어떤 의미에서 무한대로 갱신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107~108p]


- 단정하지 않는 말에 진위를 매길 수 없듯이, 그 정보는 모든 평가를 회피하면서 문제를 가지지 않는 중립적인 언어로 지식의 평균치를 제시한다. 퇴고가 초래하는 질과는 분명히 다른 새로운 지식의 기준이 탄생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108p]


- 그러나 지속적으로 무한대의 갱신을 하는 정보에는 ‘정서|精書|’나 ‘완성’이라는 가치관이나 미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대로 갱신되는 거대한 정보의 물결이 지식의 압력으로서 정보에 압박감을 제공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정보는 항상 ‘도중’에 놓여 있으며 끝이 없다. [109p]


- 또한 청소는 창조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변화가 아닌 유지에 가치를 두는 태도이기도 하다. [112p]


글을 마치며


- 최근 건축이나 도시, 사람이나 언어는 어딘가 모르게 반투명해져간다. 이른바 반물질적|反物質的|인 존재감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건축은 유리나 신소재로 존재감이 가벼워지고 인터넷상을 떠돌아다니는 언어는 정착도 하지 않고 끊임없이 부유한다. 그것은 어느 순간 갱신되거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오랜 시간 존재한다. 그런 상황에서 신선함이나 가능성을 느끼고 그것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 우리는 매일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아마 이 반투명 세계는 앞으로도 증식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의식의 대부분은 그곳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눈을 만난다. 그것은 손바닥에 조용히 내려앉아 살포시 녹아 빛의 이슬로 변한다. 우리는 사라지는 것도, 갱신하는 것도, 반투명 상태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이 신체를 통하여 백의 섭리를 느낀다. [118~1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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