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이해

지은이 / 마셜 매클루언 | 옮긴이 / 김상호

by Joong

미디어의 이해
Understanding Media

인간의 확장
The Extensions of Man
지은이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
편 집 W. 테런스 고든
옮긴이 김상호
펴낸이 박영률
커뮤니케이션북스(주) -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571-17
초판 1쇄 펴낸날 2011년 4월 22일 (원저 1964년)


역자 서문


- 『미디어의 이해』는 미디어 관련 서적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인용되는 가장 중요한 책 가운데 하나다. 가장 많이 읽힌 책이어서가 아니라 가장 자주 이야기되는 책이어서 그렇다. 책을 직접 읽은 사람보다 제목과 저자, 이 책의 유명한 구절이나 저자가 사용했던 유명한 용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저자가 활동했던 캐나다와 미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미국의 유명 [vii]


- 매클루언은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곤 했다. 그를 가르쳤던 20세기 교수들의 근본목표는 지각을 훈련시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학부학생들에게 영문학을 가르치든, 회사의 실무자에게 그들이 얼마나 회사나 일에 무지한지를 설명할 때든, 그의 이력을 통틀어서 매클루언의 목표를 가장 적절하게 보여 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지각의 훈련이라는 말이다. [xvii]


- 미디어의 효과가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 상호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인류의 기술은 말하기였다. 그것으로부터 글쓰기, 인쇄, 그리고 전신 등등이 나왔다. 글쓰기로 전환되면서, 말하기는 강력한 시각적 편향을 획득한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사회 문화 조직에서 효과를 지속하고 있다. 시각적 힘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다른 부분에서는 상실이 발생했다. 글쓰기는 말하기를 다른 신체 감각에서 분리시켰다. 이어 라디오의 발달이 말하기를 확장시키면서 비슷한 상실이 일어난다. 라디오는 말하기를 청각이라는 하나의 감각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라디오는 말하기가 아니다(왜냐하면 우리는 듣기만 하니까). 그러나 라디오는 글쓰기처럼 그것이 말하기를 담고 있다는 환영을 창조해 냈다. [xxii]


- 매클루언은 “높은 정세도high definition"라는 말을, 텔레비전을 설명하는 기술적인 언어세도 볼 수 있듯이 높은 해상도, 선명함, 세밀함 등과 같은 시각적 형식과 관련된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알파벳의 글자, 숫자, 사진, 그리고 지도는 높은 정세도의 예다. 만약 양식이나 모양 혹은 이미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것은 정세도가 낮은 것이다. 정세도가 낮은 스케치나 만화를 볼 때, 우리 눈은 보이는 것을 훑어보고 빠진 부분을 채우게 된다.
매클루언이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가 말하는 것은 전달되는 사실fact이나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 감각이 그 매체에 보여 주는 반응이다. 위에서 말한 예는 모두 시각에 대한 것이지만, 이 원칙은 소리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높은 정세도의 미디어는 많은 정보를 주고, 수용자의 참여를 별로 요구하지 않는다. 낮은 정세도의 미디어는 적은 정보를 주고, 수용자로 하여금 빠진 부분을 채워 넣게 한다. 이것이 뜨거운 미디어와 차가운 미디어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다: 높은 정세도는 뜨겁고, 낮은 정세도는 차갑다. [xxiii]
- 미디어는 확장을 통하여 이전에 없던 힘을 부여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확장시킨 신체의 그 부분을 움직이지 못하게 무력화시키고 마비시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은 증폭하는 동시에 절단한다. 증폭amplification이 절단amputation으로 바뀌는 것이다. 중추신경체계는 절단이 만들어 내는 압력과 감각의 상실에 대해 스스로 지각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반응한다. [xxvi]


- 인간의 다양한 신체 감각 사이의 비율과(한 미디어를 사용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특정 감각은 다른 감각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는가) 그 비율의 조정 그리고 적응의 결과를 통해서 그는 모든 질문과 대답을 제시하곤 한다. 이런 태도는 불가피하게 정신적인 차원에까지 논의를 확대시킨다. 예를 들면, 알파벳이 발명되고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시각의 강화가 초래되었을 때, 시각은 청각에 비해서 우선성을 획득하게 되었고 이것은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에서부터 문자 사회의 공간에 대한 개념까지를 변화시키는 효과를 동반하게 되었다. [xxix]


- 감각은 그것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지각의 파편화 정도에 따라 순서가 매겨질 수 있다. 시각이 첫 번째인데, 눈은 아주 특화된 기관이다. 그다음 청각이 오고, 촉각, 후각, 그리고 미각인데, 시각에서 미각으로 진행될수록 감각의 특화는 약해진다. 시각과 미각을 비교해 보자. 눈은 엄청난 거리 바깥에 있는 다양한 자극을 수용할 수 있지만 혀는 사물과 직접 닿을 때에만 달고, 시고, 쓰고 짠 맛을 구별할 수 있을 뿐이다. [xxx]


1부
1판 서문
- 지금까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우리의 감각과 신경을 확장했던 것처럼, 이제 깨달음이라는 창조적 과정도 인간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집합적이고 협동적인 형태로 확장될 것이다. 특정 생산물을 팔기 위해 광고주들이 오래도록 추구해 왔던 의식의 확장이 ‘좋은 일’이 될 것이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의 여러 가지 확장에 대해 그 양상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그런 질문에 대답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피부이건, 손이건, 발이건 간에 그 어떤 종류의 확장도 정신적, 사회적 구조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5~6p]


- 퇴조해 가는 기계 시대에는 우리가 그리 큰 염려를 하지 않아도 많은 일이 가능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한 반응이 상당한 시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처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행위와 반응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실제로 우리는 신화적이고 통합적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사고방식은 전기 이전 시대의 낡고 파편화된 공간과 시간에 머물러 있다.
문자라는 기술을 통해 서구인은 반응에 구애받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분화시키는 것은 어떤 장점이 있는가? 만약 외과 의사가 수술을 하다가 인간적인 감정에 휘말린다면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반응과 행동을 분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가장 위험한 사회적인 수술도 완벽한 초연함으로 행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의 초연함은 사실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개입하지도 않는 태도였다. [6p]


- 전체성, 공감 능력, 그리고 깊이 있는 인식에 대한 우리 시대의 열망은 전기 기술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현상이다. 이전 기계 산업 시대에는 개인적인 주장을 강력히 내세우는 것이 당연한 표현 방식이었다. 각각의 문화와 시대는 거기에 속한 사람이나 사물에 적용되는, 그 나름의 최적 지각 모델이나 인식 모델을 가지고 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은 그렇게 특정한 패턴이 부여되는 것에 대한 반감이라고 할 수 있다. [10p]


2판 서문
- ‘쿨’한 농담에는 ‘쿨’한 영화처럼 이야기 줄거리가 별로 없다.[14p]


- 멜로디는(“순환도로”같은) 연속적이고, 연결되어 있으며, 반복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동양의 ‘쿨’한 예술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시각적으로 조직화된 서양에서처럼 연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禪의 미술과 시는 사이와 틈을 통해서 참여를 창조해 낸다. 동양 예술에서 관람자는, 스스로가 작품 속의 여백을 메워야만 하기 때문에 작가가 되어 버린다. [15p]


- 오늘날 청소년들은 전자적으로 모든 양상이 전개되는 세상에서 자랐다. 이 세상은 바퀴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회로를 통해서 돌아가고, 잘게 나뉜 부분들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인 패턴들에 의해서 파악된다. 오늘날 학생들은 신화적으로 살고 있다. 그것도 아주 깊숙이. 그러나 학생들이 학교에 가면 분화된 정보라는 것을 통해 만들어진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은 주어진 과목들간의 연결점을 찾을 수 없다. [18~19p]


- 예술이 지각을 단련시키는 방법이기보단 일반 소비 상품의 하나로 제공되고 있는 상황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멍청하고 속물적인 행태다. 미디어 연구는 단번에 지각의 문들을 연다. 바로 이 때문에 최고 수준의 연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젊은이들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학생들이 최대한 빠짐없이 모든 것을 공부할 수 있도록 초대할 수 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누구라도 자기 친구들의 삶과 일 그리고 자신이 사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데 전화나 라디오 혹은 자동차가 어떤 효과들을 낳았는지 쭉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22~23p]


- 우리는 훈육보다는 발견 과정에 중점을 두는 새로운 교육의 시대에 들어섰다. 아이들에게 내용을 제공할 수 있는 수단이 다양해지면, 통찰력이나 패턴 인식의 필요성 역시 높아진다. [23p]


- 현대 작동하고 있는 교육 체계는 분화되어 있고 시각 중심적인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전자적으로 세상을 전환하는 것에 따른 혼돈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누그러뜨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 [24p]


- 예술은 미디어 연구에서만이 아니라 미디어의 사용을 조절하는 방법의 발달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26p]


01 미디어가 메시지다
- 그런데 이런 미디어의 내용이나 용도가 너무 다양해서 인간관계의 형태를 만들어 가는 데에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다름 아닌 미디어의 “내용” 대문에 그 미디어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 각종 산업들이 자신이 관여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일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은 겨우 오늘날에 와서였다. 예를 들어 IBM사는 자신들이 사무 장비나 기기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정보를 처리하는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명확한 비전 속에서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반면에 제너럴 일렉트릭 사는 전구와 전기시설을 판매해 상당한 이윤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사실은 AT&T와 마찬가지로 정보를 이동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33p]


- 전깃불은 ‘내용’을 갖고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상황이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미디어를 제대로 연구하지 못하고,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소중한 사례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전깃불은 어떤 브랜드 이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의 미디어로 주목받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주목받고 있는 것은 전깃불이 아니라 ‘내용’(사실상 또 다른 미디어)이다. 전깃불의 메시지는, 산업에서 전력의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총체적으로 급진적이고, 전면적이며 또한 탈집중적이다. 왜냐하면 전깃불과 전력은 그것들을 이용한 구체적인 사용들로부터는 분리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디오, 전보, 전화, 텔레지번이 심도 깊은 관여를 창출해 내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인간 관계망의 형성에서 시간적, 공간적 요인들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33p]


- 몇 년 전 미국 경영인 데비이드 사르노프David Sarnoff는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이런 연설을 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기술적 도구들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죄는 묻지 않고, 대신 그 도구들을 속죄양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현대 과학의 산물들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 가치는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말은 요즘 몽유병 환자들이 말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애플파이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이다” 혹은 “천연두 바이러스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이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또 “총기들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그것들이 사용되는 방식이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즉 탄환이 표적으로 삼은 사람에게 명중되면 그 총기는 좋은 것이고, 또 텔레비전 브라운관이 목표로 했던 사람에게 정확히 영사되면 그것은 좋은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지금 심사가 뒤틀려 비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르노프의 발언에는 깊이 음미해 볼 만한 사항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새로운 기술의 형태로 확장시키고 절단함으로써 전형적인 나르시스적 자기 마비 상태에 빠져 모든 미디어의 본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 사르노프는 인쇄 기술로 인해 쓰레기 같은 하찮은 것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성서와 선각자나 철학자의 사상들도 전파되었다고 말하면서, 인쇄 기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사르노프는 그 어떤 기술도 지금 우리의 현재 상태에 단순히 그 새로운 기술만을 추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36~37p]


- 연속성이 순간적인 것에 자리를 물려줄 경우 우리가 구조와 구성의 세계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물리학에서 일어났던 일도 회화와 시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등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특수화된 부분들에 주목하다가 이제는 전체적인 장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미디어가 메시지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전기의 속도와 전체적인 장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 시절 메시지는 곧 ‘내용’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그림은 무엇에 대한 것이냐고 묻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멜로디는 무엇에 대한 것이라든가 집이나 옷이 무엇에 대한 것이냐라고 질문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 문제들에 관한 한 사람들은 전체적인 유형, 즉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형식과 기능에 대한 일정한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기 시대에 접어들자 구조와 구성이라는 이 통합적인 사고는 널리 확산되었고, 그 결과 교육 이론도 그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수의 분야에서는 특화된 ‘문제들’과 씨름하는 대신, 이제는 마치 자기장에 펼쳐진 자기력선과 같이, 수數라는 장에 펼쳐진 힘들을 따라가는 그리고 어린아이들도 수의 이론과 각종 ‘집합들’에 관해 생각해 보는 구조적 접근법이 등장하고 있다. [41~42p]


- 모든 미디어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인 대응, 즉 “중요한 것은 미디어들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다”라는 식의 대응은 기술에 관해 전혀 모르는 멍청이들이 보여 주는 감각 마비 상태다. 왜냐하면 미디어의 ‘내용’이란, 도둑이 집 지키는 개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사용하는 육즙이 흐르는 고깃덩어리처럼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효과가 강렬해지는 것은 또 다른 미디어가 ‘내용’으로 주어진다는 점 바로 그것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내용은 소설이나 연극 혹은 오페라다. 영화라는 형식의 효과는 그 프로그램의 내용과는 무관하다. 글스기나 인쇄의 ‘내용’은 말이다. 그러나 독자는 인쇄인지 말인지를 거의 대부분이 의식하지 못한다. [51p]


- 동양인들이 서구의 기술에 대해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면에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가진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별반 소용이 없을 것이다. 기술의 효과들은 견해나 개념들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감각 비율이나 지각 패턴을 아무런 저항 없이 서서히 변화시킨다. 진지한 예술가는 감각 마비 현상 없이 무사히 기술에 직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각 지각상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52p]


- 만일 사회나 문화를 형성하는 힘이 미디어의 내용이 아니라 미디어 그 자체에 있다면, 여기서는 간략히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겠지만, 엄청난 양의 책을 쓸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중요한 문제들이 제기된다. 그것은 바로, 기술적 미디어가 원료나 천연자원, 즉 석탄이나 면화, 석유와 똑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면화나 곡물, 목재, 생선, 소 등과 같은 주요 원료 한두 가지에 전체 경제가 의존하고 있는 사회는, 그것의 결과로 조직이 명확한 사회적 패턴을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몇 가지 주요 원료에만 집중적으로 의존할 경우, 경제적인 면이 극도로 불안해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인내가 생겨나게 된다. 미국 남부 사람들의 열정과 유머는 이처럼 제한된 원료로 꾸려 나가는 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몇 가지 상품들에 힘입어 형성된 사회는 그 상품들을 사회를 연결해 주는 힘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거대 도시가 신문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처럼, 면화와 석유가 공동체의 모든 정신생활에 반드시 지출되어야 하는 고정비용과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전체에 구석구석 퍼져 있는 사실은 어떤 사회에서는 각각의 독특한 문화적 향기를 빚어낸다. 사회는 그 사회의 삶을 형성해 나가는 각각의 원료에 대해 코나 그 밖의 모든 다른 감각으로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56~57p]


02 뜨거운 미디어와 차가운 미디어
- 뜨거운 미디어란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키는 미디어다. 여기서 고밀도란 데이터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한다. 사진은 시각적인 면에서 고밀도다. 반면 만화는 제공되는 시각적 정보가 극히 적다는 점에서 저밀도다. -중략-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어서 듣는 사람이 보충해야 하는 연설은 저밀도의 차가운 미디어다. 반면에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가 채워 넣거나 완성해야 할 것이 별로 없다. 따라서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의 참여도가 낮고, 차가운 미디어는 참여도가 높다. 당연히 라디오 같은 뜨거운 미디어는 전화 같은 차가운 미디어와는 매우 다른 영향을 미치게 된다. [60p]


- 전문성이 강한 인쇄 문자는 중세의 집단적 길드와 수도원의 속박을 끊고 기업과 독점이라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패턴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독점이라는 것의 극단적인 현상들이 법인法人이라는 형태, 즉 여러 사람의 인생을 함께 좌지우지하는 비인격적 제국을 다시 되돌려 놓는 순간 전형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쓰기라는 미디어를 아주 강렬한 형태, 즉 반복이 가능한 인쇄라는 형태로 더욱 뜨겁게 만드는 것은 16세기의 민족주의와 종교전쟁들로 이어졌다. 돌처럼 무겁고 다루기 힘든 미디어는 시간을 묶어 두는 것이다. 글을 쓰는 데 이용되면, 돌은 참으로 차가운 미디어가 되고 시대를 통합하는 데 기여한다. 반면 종이는 정치의 제국과 오락의 제국 모두에서 공간을 횡적으로 통합하는 데 기여하는 Em거운 미디어다. [60~61p]


- 검열은 우리 정신적 가치의 중추적 체계를 방어하는 것처럼, 경험이 시작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경험의 엄청나게 많은 부분을 냉각시킴으로써 우리 신체적 중추신경체계도 방어해 준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냉각시키는 체계는 평생 지속되는 일종의 정신적인 사후경직이나 몽유 증상이라는 상태를 가져오게 되는데, 특히 이 현상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시기에 잘 관찰할 수 있다. [62p]


- 여기서 전체적인 메시지는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 반복되는 동심의 나선 주위를 돌며 그 의미를 추적하고 또 다른 방향에서 추적하고, 또 이것을 반복한다. 따라서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고들’ 용의만 있으면 처음 몇 문장만 읽고 중단한다 해도 그 메시지 전체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는 이런 종류의 계획에 자극을 받아 나선적이고 동심원적인 형태를 기초로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했다. 그것은 전기 시대에서는 피해 갈 수 없는 계속 반복되는 형식인데, 그 형식에는 전기 속도가 지니고 있는 순간적인 특성, 그리고 계속 덧씌워진 깊이에 의해 이루어진 동심원적 패턴이 부과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평면들이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이루어진 동심원적 패턴들은 통찰을 위해 필요하다. 사실 이 동심원적 패턴의 관찰은 통찰의 기법일 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연구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미디어도 독자적으로는 의미나 존재를 갖지 못하고 오직 다른 미디어와의 지속적인 교섭 속에서만 의미나 존재를 갖기 때문이다. [65~67p]


- 왜냐하면 고도로 발달됐다는 말 자체에는, 이미 참여의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뜻과 함께 전문화를 제어하는 사람들이 전문화를 강하게 요구해 온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72p]


- 영원히 지속되는 경계 상태의 대가는 무관심이다. [76p]


03 과열된 미디어의 반전
- 매클루언은 이 장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주제 중 하나인 ‘전기는 탈중심화시킨다’는 점을 밝힌다. 이 전면적이고 피할 수 없는 전기 기술의 효과는 수천 년 동안 기계 기술하에서 이루어진 사회 조직의 특징, 즉 확장을 향한 지배적인 경향을 유보시키고 있다. [81p]


- 사실 우리가 인구에 관심을 쏙데 된 것은 결코 그 숫자의 증가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기로 인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삶에 개입하게 되었고, 그 결과 서로 아주 가깝게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의 경우에도 배우려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해서 위기가 초래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새롭게 교육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지금까지는 교과과정의 각 부문들이 각기 독립적으로 다루어지다가 이제는 지식의 상호 관련성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각 학문들의 독자적 영역이라는 것은 국가의 주권과 마찬가지로 전기의 순간적 속도라는 조건하에서 급속하게 융해되어 버렸다.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기계적, 일방적으로 팽창한다는 낡은 패턴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전기 세계에서는 이제 적절하지 못하다. 전기는 중앙집권화시키지 않고 탈중앙집권화 시킨다. 그것은 철도 체계와 전기 무선망 체계의 차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철도는 종착역과 대도심을 필요로 하지만, 농가에서나 중역의 사무실에서나 똑같이 이용할 수 있는 전력은 어떤 장소든 중심이 되게 한다. 따라서 대도심과 같은 거대하게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반전 패턴은 아주 일찍부터 토스터, 세탁기, 진공청소기 등 ‘일손을 덜어 주는’ 전기 기구들에서 나타났다. 그런데 사실 이 기구들은 일손을 덜어 준 것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 데 그 핵심 역할이 있다. 19세기에 하인이나 하녀에게 위임했던 일을 이제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이런 원리는 전기 시대에 전면적으로 적용된다. [86~87p]


- 말하자면 지배계급들이 디즈니랜드를 여행하는 동안 지식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늘 그래 왔으니까. [90p]


- 전환점이 반전의 지점,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이라는 것을 고대 세계에서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스인들의 휴브리스hubris라는 개념에 잘 나타나 있는데, 토인비는 이 개념을 그의 책, 『역사의 연구』에서 ‘창조성의 복수’와 ‘역할의 반전’이라는 제목 아래 제시하고 있다. [91~92p]


04 기계 장치 수집가 : 마치된 사람 Narcosis, 나르시스
- 그리스의 나르시스에 관한 신화는 ‘나르시스Narcissus'라는 말이 보여 주듯 인간의 경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 말은 혼수상태나 감각 마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나르코시스narcosis'에서 파생된 말이다. 젊은 나르시스는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다. 이처럼 거울을 통해 자신을 확장할 경우,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확장된 이미지나 반복된 이미지의 자동제어체계servomechanism가 되기 전까지는 그 지각이 마비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숲 속의 요정 에코는 나르시스가 내뱉은 단편적인 말을 다시 메아리로 울리면서 사랑을 얻으려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나르시스의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기 떄문이다. 나르시스는 스스로, 자기 자신이 확장된 것에 적응하는 데 골몰했고, 결국 폐쇄된 체계에 갇히고 말았다. [97p]


- 비록 요나스와 셀리에가 의도했던 바는 결코 아니지만, 그들은 인간의 발명과 기술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공하였다. 질병(또는 불안)에 관한 그들의 이론은 왜 인간이 일종의 자가 절단을 통해 신체의 다양한 부분들을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과도한 자극이 신체에 가해져 스트레스를 일으킬 때, 중추신경체계는 상해로 인해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기관이나 감각, 기능을 단절하거나 고립시킨느 전력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한다. [98p]


- 생리학적으로 중추신경체계는 감각들에 관계된 다양한 미디어를 통합하는 전자 네트워크 같은 것인데,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중추신경체계는 그 기능을 위협하는 것들은 모두 통제하고 국소화시키고 절단하고 심지어 상해를 일으키는 신체 기관은 통째로 그 기능을 제거해야 한다. 신체는 중추신경체계를 지탱하고 보존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물리적, 사회적으로 일어난 갑작스런 자극의 변화를 완충하는 역할을 한다. 갑자기 사회적으로 실패하거나 치욕을 당하는 것은 충격인데, 사람에 따라서는 심장까지 반응이 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을 위협하는 그런 상화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근육 이상 증세가 생길 수도 있다. [100p]


- 전기 기술 시대의 도래와 함께, 인간은 중추신경체계 그 자체를 하나의 살아 있는 모델로 확장, 또는 자기 자신의 외부에 설치했다. 사정이 이 지경까지 왔다는 것은 기술 발전의 단계가 인간에게 필사적이고 자살에 가까운 자가 절단을 요구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인데, 마치 중추신경체계가 광폭한 기계주의의 투석과 화살에 맞서는 보호 완충기로서의 역할을 신체 기관에게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된 것이다. 인쇄술의 발명 이후 진행된 여러 신체 기관의 계속적인 기계화가 사회적 경험을 지나치게 광폭하고 과도하리만큼 자극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중추신경체계가 더 이상 견뎌 낼 수 없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100~101p]


- 충격은 모든 종류의 지각에 감각 마비를 유발하거나, 자극에 반응하는 정도를 높여서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그 때문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고통이나 감각에 무뎌지는 것이다. [102p]


- 강렬한 자극에 대해 단일 감각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 또는 단일하게 확장시키거나 고립시키는 것, 또는 기술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절단된’ 감각이라는 것은 기술이 그것을 만든 사람이나 사용하는 사람에게 미치는 마비 효과에 대한 부분적인 이유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중추신경체계는 특화된 자극의 도전에 전신 감각 마비라는 반응으로 대응하기 때문이다. [102p]


- 모든 발명이나 기술은 우리 신체의 확장 또는 자가 절단인데, 이 같은 확장은 신체의 확장되지 않은 다른 기관 그리고 신체의 다른 확장물들 사이의 새로운 결합 비율 또는 새로운 균형 상태를 요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텔레비전 영상이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감각 비율이나 감각 ‘폐쇄’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텔레비전 영상의 도입이 가져오는 효과는 각각의 문화가 지니고 있는 기존의 감각 비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103~104p]


- 우리 자신을 기술적인 형태로 확장한 것들을 보고, 사용하고, 지가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확장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라디오를 듣거나 인쇄물을 읽는 것은 이 같은 우리 자신의 확장물들을 개인적인 체계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폐쇄’ 또는 지각의 치환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 우리의 기술을 계속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인식할 때 무의식적인 지각과 마비를 일으키고 있는 나르시스의 역할을 그대로 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기술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 기술의 자동제어체계로 만듦으로써 관련을 맺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왜 우리가 기술을 조금이라도 쓰게 되면 이들 대상, 즉 우리의 확장물들을 신이나 작은 종교인 것처럼 섬겨야만 하는가에 대한 이유다. [106p]


- 생리학적으로 볼 때, 기술(또는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된 신체)을 정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그 기술에 의해 끊임없이 변형되고, 다시 그의 기술을 새롭게 변형시키는 방법들을 찾아내게 된다. 마치 벌이 식물의 생식기이듯이 인간은 말하자면 기계 세계의 생식기로서 언제나 새로운 형태들을 수태하고 진화시키는 것이다. 기계 세계는 인간의 소망과 욕구를 촉진시킴으로써, 말하자면 인간에게 부를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사랑에 보답한다. [107p]


05 잡종 에너지 : 위험한 관계
- “우리의 생애 대부분에 걸쳐 예술과 오락의 세계에서는 내란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활동사진, 레코드, 라디오, 토키 등…” 이것은 라디오 미디어 분석가 도널드 맥위니Donal McWhinnie의 견해다. 이런 내란은 대부분 우리 정신의 깊은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고 증폭시킨 힘들 사이에서 치러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디어들 간의 상호 작용은 바로 이 전쟁을 달리 부르는 말일 뿐인데, 이것은 우리 사회와 우리 정신 모두에서 지속적인 힘을 지니고 전개된다. “눈먼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갑작스럽다”는 말이 있다. 미디어의 잡종화 또는 이종 교배는 핵분열이나 핵융합 못지않게 엄청나게 새로운 힘과 에너지를 분출한다. 우리가 일단 이런 분야에서 관찰해야 할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 문제들에 대해 눈을 떠야 하는 것이다. [111p]


- 사실 에너지와 변화를 격렬하게 쏟아 내는 거대한 이종 교배들 중에서 문자 문화와 구전 문화의 만남을 능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표음 문자로 인해 사람들이 귀 대신 눈을 갖게 된 것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한 사회 구조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과격한 폭발일 것이다. “뒤쳐진 지역들”에서 빈번하게 반복되는 눈의 폭발을 우리는 ‘서구화’라고 부른다. 오늘날 서구의 문자 문화가 중국, 인도, 아프리카의 문화들과 이종교배를 하게 되면서, 서구인들은 인간의 능력과 공격적이고 격렬한 힘의 방출을 경험하는 중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표음 알파벳에 바탕을 두고 진행되어 온 기술의 역사를 오히려 온건해 보이게 만들고 있다. [112~113p]


- 문자 문화는 부족적이고 구전적인 사회의 복잡한 망 속에서 자란 사람보다 훨씬 단순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세분화된 인간들이 동질화된 서구 세계를 창조해 내는 반면, 구전적인 사회들은 전문 기술이나 눈에 보이는 특징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정서적 혼합물들에 의해서 차별화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전적 전통에서 자란 사람의 내면세계는 복잡한 감정이나 정서의 덩어리들인데, 실리적인 서구인들은 효율과 실용성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미 오래전에 이런 정서나 감정을 자신으로부터 내몰고 억제했다. [113~114p]


- 한마디로 전깃불의 메시지는 총체적인 변화다. 전깃불은 세상을 변형하는 힘과 정보를 전달하는 힘을 제약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순수한 정보다. [117p]


- 소유주들은 미디어가 권력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은 이 권력이 ‘내용’ 혹은 미디어 내에 있는 또 다른 미디어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117p]


-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 감각들의 확장인 미더악 새로운 감각 비율을 구성하는데, 우리 개인의 감각들 사이의 비율만이 아니고, 미디어들끼리 상호 작용할 때는 미디어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비율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발성영화를 통해 영화의 영상들을 변화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라디오는 뉴스 기사의 형식도 바꾸어 놓았다. 텔레비전은 라디오 편성은 물론 사물의 형식 혹은 다큐멘터리 소설의 형식도 급격하게 변형시켰다. [118p]


- 그러나 영화나 관련 미디어의 소유주의 관점에서 볼 때,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대중의 심리 한 부분에 중대한 새로운 인식 형태gestalt나 패턴이 숨어 있다는 것을 보증해 주는 일종의 보험과 같다. 이는 말하자면 세심하고 치밀한 업자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다 줄 수 있는 유전이나 광맥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할리우드의 사업자들이 문학사의 연구자들보다 훨씬 예리한 안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사가들은 대중적 취향이 강의에서부터 문학 개론서에 이르기까지의 여과 과정을 거치고 난 뒤가 아니라면 그런 취향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121p]


-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Dublinners』과 『율리시스』에서도 같은 방법이 사용되었다. 고전적인 것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들에서 진정한 잡종 에너지를 창출해 냈던 것이다. 엘리엇은 보들레르Baudelaire가 “일상생활의 이미지를 최고의 강렬함으로 고양시키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고양은 시의 힘을 직접 분출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 상황이 다른 문화 상황과 잡종적인 형태가 되도록 간단히 조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바로 이런 식으로 전쟁과 이민의 초기에는 새로운 문화적 혼합이 평범한 일상의 규범이 된다. 또한 기업 경영에 대한 조사 연구에서는 잡종의 원리를 창조적 발견의 기법으로 삼고 있다. [122p]


- 두 개의 미디어가 혼합되거나 서로 만나는 순간은 새로운 형식이 탄생하는 진리와 계시의 순간이다. 왜냐하면 두 미디어가 나란히 마주칠 때, 우리는 두 가지 형식들이 마주치는 접점에 서게 되고 그 접점은 우리로 하여금 나르시스의 감각 마비 상태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미디어들이 만나는 순간은 미디어가 우리의 감각들에 가했던 실신 상태와 감각 마비 상태에서 풀려나는 자유의 순간이다. [123p]


06 번역자로서의 미디어
- 우리가 “기계화”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과 우리 인간의 본성을 증폭되고 특수화된 형태들로 번역하는 것이다.[125p]


- 모든 미디어는 경험을 새로운 형식들로 번역하는 힘을 가졌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은유다. [126p]


-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사물에 대한 정보 수준이 높아졌을 때 어떤 것이든 연료나 섬유 혹은 건축 자재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기 기술의 등장과 함께, 모든 재화들이 우리가 ‘자동화’ 그리고 정보 검색이라고 부르는 유기적 패턴들 속에 확립된 정보망이라는 것을 통해 상품들로 보이게 되었다. 전기 기술 아래에서 인간의 전체 비즈니스는 ‘배우는 것’과 ‘아는 것’으로 되어 가고 있다. 우리가 여전히 (그리스어에서 가정을 의미하는) ‘경제economy'라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통해 살펴보면, 이런 현상은 모든 형태의 고용이 ’급료를 받아 가며 배우는 것‘이 되고, 모든 형태의 부가 정보의 이동에서 생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업이나 일자를 찾는 문제는, 부를 획득하는 것이 쉬운 것과는 정반대로 어려워질지 모른다. [128~129p]


-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는 “세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권의 책 속에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 세상의 모든 광경을 컴퓨터 한 대의 기억장치로 전환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줄리언 헉슬리가 관찰한 것처럼, 단순한 생물체들과는 달리, 인간은 경험을 축적할 줄 아는 자신의 능력에 바탕을 둔, 전달하고 변형하는 장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 자체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인간의 저장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아래의 시구에 나타나는 것처럼 경험을 변형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130p]


- 수 세기 동안 ‘공통 감각 혹은 통각通覺, common sense'은 하나의 감각으로 경함한 한 종류의 경험을 모든 감각들로 번역하고, 그 결과를 계속해서 하나의 통합된 이미지로 인간 정신에 전달해주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간주되어 왔다. 사실 감각들 간의 통합된 비율이라고 하는 이 같은 이미지는 오랫동안 합리성ratio-nality의 징표로 여겨졌고, 컴퓨터 시대에도 그 자리를 쉽게 유지할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감각들의 비율을 의식의 수준에 근접할 정도로 프로그램화하는 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수준은 차바퀴가 회전하고 있는 발의 확장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우리의 의식을 확장한 것이 될 것이다. 이미 우리의 중추신경체계가 전자기 기술로 확장 혹은 번역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을 컴퓨터의 세계로 전환하는 작업은 단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소한 우리는 오락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나르시스적 환상에의해 마비되거나 산만해지지 않는 현명한 방식으로 의식을 프로그램화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오락의 세계는 우리 스스로를 확장해 놓은, 눈길을 사로잡는 술책들을 우리가 만나게 되자마자 나르시스적 환상으로 우리를 둘러싸기 때문이다. [133~134p]


07 도전과 붕괴: 창조성의 보복


- 한스 셀리에가 ‘스트레스’를 질병의 원인으로 파악한 것도 이 중국 현인의 세계관과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에 그는, 의사들이 항상 개개의 질병을 인식하고 각각의 고립된 병인들에 대한 특유의 치료법을 알아내려고 하면서도 ‘병이 들었다는 바로 그 증후군’ 자체에 대해서는 왜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미디어의 프로그램 ‘내용’에만 관심이 있고 미디어 자체에는 주목하지 않는 사람은 ‘병이 들었다는 바로 그 증후군’ 자체를 무시하는 의사들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39~140P]


- 예술가란 자연과학이건 인문학이건 관계없이 어떤 분야에서든, 자신이 속한 시대에서 자신의 행동과 새로운 기술이 갖는 함의를 파악해 내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통합적인 정신의 소유자다. [143p]


- 새로운 기술이 일으키는 가장 명백한 폐쇄나 혹은 심리적 결과는 바로 그 기술에 대한 수요다. 자동차가 생겨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자동차를 원하지 않았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존재하기 전에는 아무도 텔레비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처럼 그 자체에 대한 수요를 창조해내는 기술의 힘은, 무엇보다도 기술이 우리 자신의 신체와 감각들의 확장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각능력을 상실할 경우에는 다른 감각들이 일정 정도 시각의 역할을 떠맡는다. 그러나 이용 가능한 감각들을 사용하려는 욕구는 호흡만큼이나 지속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왜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계속 켜 놓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충동은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개인의 감각 생활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하다. 왜냐하면 그 충동은 기술이 우리 신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전기 기술은 중추신경체계와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대중이 원하는 바’라는 것이 우리의 신경에 재생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이 문제는 대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떤 종류의 광경과 소리를 더 좋아하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과 귀와 신경들을 빌려서 그것에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개인 사업자들에게 우리의 감각과 신경체계를 일단 넘겨주고 나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남지 않게 된다. 상업적인 이득을 꾀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눈과 귀와 신경을 빌려 주는 것은, 일상적 말하기의 권리를 개인 회사에 넘겨주는 것 혹은 지구 대기를 한 회사가 독점하게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우리의 중추신경체계를 여러 회사들에 빌려 준 것과 동일한 이유로 인해, 이와 유사한 일이 이미 우주 공간에서도 일어났다. 우리 자신의 신체의 확장물들을 정말로 ‘저기 바깥에’ 있는 것, 우리와는 전혀 별개인 것으로 간주하는 나르시스적 태도를 취하는 한, 우리는 모든 기술적 도전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마치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진 것처럼 버둥대다가 결국엔 붕괴하고 말 것이다. [146~147p]


- 그러면 사회 전체가 정복당하고 노예화되었을 때 그 사회는 어떻게 대처하는가? 신체장애를 가진 개인이 전사들의 사회에서 취했던 것과 동일한 전략이 그 사회에서 쓰이게 된다. 노예화된 사회는 전문화를 통해 지배자들에게 꼭 필요한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전문가의 모습에 노예근성과 소심함이라는 낙인을 찍게 된 것은 아마도 하나의 대응 자극으로서의 전문가주의로 타락해 버린, 인간의 오랜 노예화 과정의 역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서구 세계를 관찰해 온 많은 사람들은 서구인들이 전문화된 수요의 증가로 인해 기술에 굴복하게 된 것을 일종의 노예화로 파악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생겨난 파편화는 정복당한 포로들의 의도적인 전문화 전략과 달리 자발적이고 열성적인 것이었다. [148p]


- 로마의 노예 제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의 기계화된 산업과 시장 조직에서의 전문화는 서구인들을 오직 한 가지 형식으로만 나누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비트 단위로 작동되는 생산 방식이라는 도전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파고들었으며 또한 우리를 모든 방향과 모든 영역 속으로 그토록 위풍당당하게 확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그러한 도전이다. [154p]


2부
08 음성 언어: 악의 꽃인가?
- 음성 언어는, 개인주의와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관습이 발생하는 데 필요한 시각적 힘을 확대하고 증가시키는 데에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162p]


- 사실 산문이나 이야기는 여러 페이지를 들여 하나의 흐느낌, 신음, 웃음, 찢어질 듯한 외침 등을 표현한다. 음성 언어에서 빠르게 그리고 묵시적으로 표현된 요소들을, 쓰인 언어에서는 계속해서 주절주절 늘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말을 할 때, 그때그때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에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 자신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이야기를 한다는 행위 그 자체에도 음조나 동작 등을 통해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글쓰기는 대개 고립되고 전문화된 행위이기 때문에 반응을 보여야 할 필요도 없고, 또 그럴 만한 기회도 거의 없다. 문자 문화를 가진 사람이나 사회는 문자 문화를 모르는 사람이나 사회가 경험하는, 어떤 상황에서의 감정이나 정서적 개입과 같은 것으로부터 초연하게 행동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발전시킨다. [163p]


- 지성인들이 어마어마하게 광대한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 것은 바로 언어에 의한 인간의 확장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언어가 없었다면 인간의 지성은 관심을 쏟는 대상에 완전히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63p]


09 문자 언어: 귀 대신 눈
- 알파벳이란, 권력과 권위 그리고 멀리 떨어진 군사 조직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의미했다. 파피루스와 결합해 알파벳은 전혀 흔들리지 않던 사원의 관료주의와, 승려들의 지식 및 권력 독점에 종지부를 찍었다. 알파벳이 나오기 전에는 수많은 기호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글 쓰는 일을 숙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알파벳은 불과 몇 시간이면 다 익힐 수 있었다. [169p]


- 표음 문자인 알파벳은 독특한 기술이다. 상형 문자나 음절 문자 등 많은 종류의 문자가 있지만, 의미론적으로 무의미한 문자들이 의미론적으로 무의미한 소리에 상응해서 사용되는 것은 알파벳뿐이다. 문화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시각 세계와 청각 세계의 이 엄격한 구별과 병렬은 조잡한 동시에 무자비한 것이었다. 표음 문자는 이집트의 상형 문자와 중국의 표의 문자인 한자 등에서 형식들을 통해 확보할 수 있었던 의미와 지각의 세계를 희생시켜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으로 보다 풍부한 쓰기의 형식들은 마술처럼 보일 정도로 불연속적이고 전통적인 부족적 언어의 세계로부터 뜨겁고 획일적인 시각 미디어로 갑작스럽게 전환할 수 있는 수단을 사람들에게 전혀 제공하지 못한다. [170p]


- 따라서 알파벳만이 ‘문명화된 인간’-즉 문자로 된 법전 앞에서 평등한 독립적 개인들-을 만들어 내는 수단이 되어 온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과 개인의 분리, 공간과 시간의 영속성, 법률의 균등함 등은 문자 문화를 가진 문명화된 사회들의 주요 특징이다. 인도나 중국 같은 나라가 가진 부족 문화는 그 지각이나 표현의 범위, 정교함이라는 면에서는 서구 문화보다 훨씬 뛰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가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형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부족 문화에서는 개인이나 독립된 시민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공간이나 시간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연속적이거나 균질화된 것이 아니며 대단한 감정적 연대를 지니고 있는데 그 강도는 매우 응축된 것이다. 여러 문화들에 던지는 알파벳의 메시지는 시각적 획일성과 연속성이라는 패턴을 확정하는 힘이다. [171p]


- 알파벳을 가진 문화들만이 상호 연결된 선형적 계열화를 정신적, 사회적 조직화의 지배적 형태로 만들어 나갔다. 보다 빠른 행동과 형태 변화(응용 지식)를 위해 모든 종류의 경험을 획일적인 단위들로 분해하는 것은, 서구 문화가 인간과 자연 모두에 대해 누렸던 힘의 비밀이다. [173p]


- 문명은 문자 문화에 바탕을 둔다. 왜냐하면 문자 문화란, 알파벳에 의해 시간과 공간으로확장된 시각에 따라 하나의 문화가 일률적으로 처리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부족 문화에서 경험은 시각의 가치들을 억누르고 있는 지배적인 청각 감각적 생활에 의해 얻어진다. 차갑고 중립적인 눈과 달리 청각은 감수성이 고도로 강하고 섬세하며 모든 것을 포괄한다. 구전 문화에서는 행위와 반응이 동시에 일어난다. 표음적인 문화는 어떤 행위를 할 때,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억누르는 수단을 제공한다. 반응 없이 행동하는 것, 관여 없이 행동하는 것은 서구의 문자문화에 속한 사람들의 고유한 장점이다. [173p]


- 러시아에서 바스크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포루투갈에서 페루에 이르기까지 서구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알파벳들은 모두 그리스-로마 문자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 문자의 형태와 음성이 의미상 말의 내용과 분리되는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이 알파벳들은 문화 간의 번역과 동질화를 위한 가장 철저한 기술이 되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문자 문화들은 단지 하나의 문화에만 봉사해 그 문화를 다른 문화들과 분리하는 데 기여해 왔다. 비록 조잡하기는 해도 표음적인 문자들만이 그 어떤 언어의 소리든지 간에 하나의 동일한 시각적 부호로 번역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175p]


10 도로와 종이의 경로
- “은유metaphor"라는 말은 그리스어 ‘meta'와 옮기다 혹은 수송하다를 뜻하는 ’pherein'이 결합된 것이다. 이 책에서는 모든 형태의 상품과 정보 수송을 은유와 교환으로 다루고 있는 사람, 받는 사람, 메시지 이 모두를 번역하고 변형한다. 어떤 종류의 미디어 혹은 인간의 확장물들의 사용은 우리 감각들 사시의 비율을 바꾸듯이 사람들 간의 상호 의존의 패턴들도 바꾼다. [179p]


- 이같이 속도가 증가한다는 것은 보다 먼 거리에서도 훨씬 쉽게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179p]


- 속도 증가는 일부 경제학자들이 말한 ‘중심-주변’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 구조가 중심을 발생시키고 통제하기에 부담을 줄 만큼 확장되면, 각 부분들은 서로 분리되기 시작하고 새로운 중심-주변 구조를 세운다. [180p]
- 전기의 속도는 도처에 중심들을 만든다. 주변은 이제 지구상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81p]


- 서구인이 자기 자신이 만든 새로운 가속화로 인해 탈서구화하고 있다면, 아프리카인들은 서구의 오랜 인쇄 기술과 공업 기술로 인해 탈부족화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오래된 미디어와 새로운 미디어 모두를 이해한다면 이런 혼란과 붕괴는 조율되고 조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속화를 위해 기능들을 세분화하고 분리하는 과정에서 구가해 왔던 우리의 성공은 우리가 그런 상황에 무관심해지고 무감각해진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적어도 서구 세계에서는 그러했다. 자기 자신의 문화가 지닌 각종 동인들과 그 한계들에 대한 자각은 그 문화 속의 자아 구조를 위협하는 듯이 보이고, 그래서 그런 자각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게 마련이다. 니체는 이해는 행동을 멈추게 하는데, 행동하는 인간들이 이해를 따른 위험들을 피하려고 하는 데서, 그들이 그 사실에 대한 직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182p]


- 사람들이 “시골을 한 바퀴 돌고 오자”고 말하기 시작할 무렵에 도로는 시골의 대체물이 되어 갔다. 초고속도로의 등장과 함께 도로는 시골의 대체물이 되어 갔다. 그래서 고속도로가 도시가 되는 단계가 오게 되었는데, 그 도시는 대륙을 가로질러 계속 뻗어 나갔고 이전의 도시들을 모두 해체하면서, 오늘날 그 주민들을 황폐하게 만드는 거대한 도시군으로 변해갔다. [185p]


- 토인비는 가속화라는 요인이 물리적인 문제를 도덕적인 문제로 전환시킨다고 본다. 그의 언급에 따르면, 개가 끄는 수레, 짐마차, 인력거 등으로 붐볐던 고대의 도로는 사소하게 성가신 것들과 그리 심각하지 않은 위험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수송하는 데 슬 수 있는 힘이 커짐에 따라 이제 더 이상 견인하고 운반하는 문제는 없게 되었지만, 공간의 소멸이 너무나 쉽게 여행자를 소멸시켰듯이, 이제 문제는 물리적인 것에서 심리적인 것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원리는 모든 미디어 연궁 적용된다. 상호 교환의 수단과 인간의 상호 결합의 수단 등은 모두 가속화에 의해 개선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다시 속도는 형태와 구조라는 문제들을 강조한다. 좀 낡은 사회 조직들은 이 같은 속도를 고려해서 만들어졌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낡은 물리적 형태들을 새롭게 빠른 움지김에 적응시키려고 할 때, 자신의 기존 삶의 가치가 차츰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186~187p]


- 사람들의 마음에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와 나라의 물리적 자원을 통제하려는 자 사이의 투쟁은 어느 한 시대나 한 장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187p]


- 커뮤니케이션의 가속화로 인해 중앙 권력은 언제나 자신의 작용 범위를 보다 먼 변경까지 확장한다. 알파벳과 종이의 도입으로 인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무직과 행정직으로 훈련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8p]


- 모든 조직들, 특히 생물학적 조직들은 다양한 외부의 충격과 변화의 와중에서 내부 조건을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투쟁한다. 인간 신체의 확장물인 인간이 만든 사회 환경도 예외가 아니다. 정치적 조직의 한 형태로서 도시는, 풍부하고 새로운 확장물들을 통해 언제나 안정성, 일관성, 균형성, 그리고 ‘항상성’ 등을 행사하면서 새로운 압력과 자극에 대응한다. [192p]


- 로마의 도로와 로마의 거리는 어디서건 균일하고 반복 가능한 것이었다. 해당 지방의 언덕이나 관습에 맞춰 만드는 일은 없었다. 파피루스의 공급이 줄어들자, 바퀴를 사용한 교통도 도로 위에서 멈춰 버렸다. 로마가 이집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파피루스의 부족은 관료제와 군사 조직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세적인 세계는 균일한 도로나 도시 혹은 관료제 등이 없는 상태에서 성장했고 바퀴와 맞서 싸웠다. 그리고 나중에 도시 형태들이 철도에 맞서 싸웠듯이, 오늘날 우리는 자동차와 맞서 싸우고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속도와 힘은 기존의 공간적, 사회적 질서들과 결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4p]


- 11세기부터 교육과 상업을 꾸준히 가속화시킨 것은 근동을 거쳐 유럽에 전해진 중국의 종이였다. 그리고 중국의 종이는 “12세기의 르네상스”를 위한 기초를 제공했고 인쇄를 대중화했으며, 결국 15세기의 인쇄기 출현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196p]


- 심지어 고등 교육에서 전문가들의 학습조차 상호 관련성들을 무시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런 복합적인 방식으로 인식하게 되면 개별화된 전문성을 획득하는 속도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197p]
- 인간은 전기 기술에 의해 중추신경체계를 확장해 왔기 때문에, 전쟁에서건 사업에서건 전장은 정신적인 이미지 만들기와 이미지 부수기로 바뀌어 버렸다. 전기 시대 이전에는 고등 교육이 유한계급의 특권이자 사치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고등 교육은 생산과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 되었다. 정보 자체가 교통의 주된 내용이 된 오늘날에는, 고도의 지식에 대한 요구가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에 쫓기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억누르고 있다. [199p]


- 거대 도시의 공간은 전화, 전신, 라디오, 텔레비전 등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도시 계획자들이 이상적인 도시 공간들에 관해 논의하면서 ‘인간적인 규모’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전기 제품들과 무관하다. 우리 자신의 전기적 확장물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의 관여와 조직에 관련된 문제들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자동차와 초고속도로의 소박한 시대를 갈망할는지 모른다. [202p]


11 수數: 군중의 프로필
- 서구 사회에서 개인이 집단으로부터 공간적으로(사생활), 사고의 방식에서(‘관점’) 그리고 직무상으로(전문주의) 분리된 현상은, 문자 문화와 그에 따라 파편화된 산업 및 정치 제도군에 의해 문화적, 기술적으로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동질화된 사회적 인간을 만들어 내는 인쇄된 말의 힘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증대되어 왔으며, ‘대중 마인드’라든가 시민군의 ‘대중 군국주의’ 같은 역설을 빚어내고 있다. [205p]


- 고대 세계에서 숫자는 물리적 사물들의 속성과 사물들의 필연적 원인에 마술적으로 연결되었다. 이는 최근까지도 과학이 모든 사물이나 대상을 수량화하는 경향을 띠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수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건 간에 언제나 청각적이고 반복적인 공명共鳴과 촉각적인 차원을 동시에 갖는 것처럼 보인다. [209p]


- 다시 말해 수는 발성된 말처럼 청각적이고 반향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촉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수는 촉각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통계에서는 숫자들을 모으거나 결집시키는데, 이 숫자들은 현대의 동굴벽화 혹은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는 통계학자들의 도표를 만들어 낸다. 어떠한 의미에서건 모여진 숫자들은 통계를 통해, 대중적인 취향이나 감정에 관한 원초적인 직관과 마술적인 잠재의식이 사람들에게 새롭게 밀어닥치도록 하는 상황을 제공한다. 그래서 “여러분은 유명 브랜드를 사용할 때 보다 큰 만족감을 느낀다.” [211p]


- 이런 문제들을 연구해 온 토비아스 단치히는 (그의 책『수: 과학의 언어Number: The Language of Science』에서) 이런 사람들의 균형 감각이나 운동 감각은 숫자 감각보다 훨씬 강하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분명 숫자가 출현하게 되면 그 문화에는 시각적인 강조가 점점 두드러지게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214p]
- 통계학자의 그래프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들에서는 다양한 권력의 목적들을 위해 인간을 조종한다는 목표가 솔직하게 표현된다. 예를 들면 큰 주식 중개인 사무소에는 ‘분석의 달인’이라 불리는 현대의 마술사가 있다. 그가 하는 마술적인 기능은 큰 주식 거래에서 작은 규모의 구매자들의 매매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매일 조사하는 것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이런 작은 규모의 구매자들의 매매는 80%까지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작은 규모의 구매자들의 실패에 대한 통계 자료는 역으로 큰 구매자들이 80%까지 바른 예상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리하여 오류에서 진리가 나오고, 빈곤에서 부가 나온다. 모두 다 수 덕분이다. 이것이 현대의 수의 마술이다. [219p]


- 계산반 위에 ‘3’과 ‘2’가 나란히 있으면 그것이 32인지 302인지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틈”이나 “공백”을 의미하는 아랍어인 “sirf"가 라틴어에 들어와 ”cipher"(Ziphrium)가 되고, 결국 이탈리아어 “zero"가 되는 것은 13세기에야 이루어진 일이었다. 원래 ‘zero'는 어떤 장소가 비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시대 회화에서 원근법과 ”소실점“이 나타난 뒤부터, 오늘날 없어서는 안 될 ”무한“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 회화에서 나타난 새로운 시각적 공간이, 몇 세기 전에 이루어진 선형적인 글자 배열처럼 숫자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222~223p]


- 오늘날 새로운 균형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또한 실내나 실외에서 신체를 의례의 하나처럼 노출하려는 것도 그런 움직임 중 하나다. 심리학자들은 오랫동안 우리 청각의 상당수가 피부 자체를 통해 일어난다고 가르쳐 왔다. 온몸을 옷으로 가린 채, 또한 획일적인 시각적 공간에 갇혀 살았던 수 세기가 지난 후, 전기 시대는 온몸의 피부 전체로 생활하고, 숨 쉬고, 듣는 세계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 물론 이런 유행 속에는 신기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들어 있고, 감각들 간의 궁극적인 균형 상태는 옷이나 주택 둘 다에 존재했던 상당수의 새로운 관행들을 버리게 만들 것이다. 그런 한편 새로운 의상과 주거 방식이라는 환경 속에서, 우리의 통합된 감수성은 그것들의 재질과 색조에 대한 광범위한 깨달음들 사이를 신나게 뛰어다닐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시대를 음악, 시, 회화, 건축 등에서 가장 우대한 시대 중 하나가 되게 만들 것이다. [232p]


12 의복: 우리의 확장된 피부
-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인쇄된 페이지에서 상스러운 단어(욕)를 본다는 것은 오싹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다반사로 상요하는 단어들도 일단 인쇄만 되면 누드처럼 광기를 불러일으켰다. 대부분의 상스러운 단어들은 강렬한 촉각적 몰입을 가져오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그것들은 시각적 인간들에게는 저속하고 강렬한 것처럼 보인다. 누드도 마찬가지다. 아직 문자 문화와 산업적인 시각 질서에 의해 추상화되지 않아 여전히 모든 전체적인 감각들로 이루어진 생활에 젖어 있는 뒤쳐진 문화에서, 누드는 단지 애처로운 일일 뿐이다. [231p]


13 주택: 새로운 외관과 새로운 전망
- 문자 문화 인간, 즉 문명화된 인간은 공간을 제한하고 폐쇄해 기능들을 분리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부족적 인간은 자신의 신체 형태를 자유롭게 확장해 우주까지도 끌어들였다. 부족적 인간은 스스로 우주의 한 기관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적 기능을 신성한 에너지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인도의 종교 사상에서 인간의 신체는 종교 의식적 차원에서 우주적 이미지와 연결되었는데, 이것은 결국 주택이라는 형식으로 수용되었다. 주택은 부족적인 비문자 문화 사회에서는 신체의 상像인 동시에 우주의 상이었다. [236p]


- 그러나 우주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은 서구인들만의 독특한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미세한 부분과 전문가적 작업들에 대한 집중적 관심을 강화시킨다. 왜냐하면 전문가란 거대한 오류를 향해 가고 있으면서도 세세한 잘못은 결코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236~237p]


-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시적 형태의 이글루가 휴대용 난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놀랄 것이다. 에스키모인들은 오랫동안 원형 돌집에서 살아왔으며, 대부분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눈 벽돌로 만든 이굴루는 이 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에서 아주 최근에 생겨난 변화다. 이글루에 살게 된 것은 백인들이 휴대용 난로를 갖고 오면서부터였다. 이글루는 사냥꾼들이 잠시 동안 사용하기 위해 고안된 임시 거처다. 에스키모인은 백인과 접촉한 이후에야 비로소 사냥꾼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그저 식량 채집자였을 뿐이다. 이 이글루의 사례는, 단일한 요인-이 경우에는 인공적인 열-의 집중적 강화에 의해 새로운 패턴이 고대의 생활양식 속에 도입되는 방식을 잘 보여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복잡한 생활에서 하나의 단일한 요인의 집중적 강화가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기술적으로 확장된 능력들 사이에 새로운 균형이 생기게 되고 이에 따라 새로운 자극과 발명으로 인한 새로운 외관과 새로운 “전망”이 만들어진다. [239p]


- 이 전깃불이라는 영역에서는 미디어가 메시지이며, 또한 전깃불이 있을 때에는 감각의 세계가 존재하다가, 불이 꺼지면 그 세계는 사라져 버린다. [242p]


- 빛은 ‘내용’없는 정보다. 이는 마치 미사일이 바퀴나 고속도로 없는 차량인 것과 같다. 미사일이 연료뿐만 아니라 엔진도 소모하는 자기 충족적인 운송 체계이듯이, 빛은 그 안에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인, 자기 충족적 커뮤니케이션 체계다. [242~243p]


- 레이저 광선이란 집중적 방사에 의한 빛의 증폭이다. 방사능 에너지의 집중은 빛에 있는 몇 가지 새로운 속성들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레이저 광선, 말하자면 강화된 빛으로 인해 빛은 전파처럼 정보를 운반할 수 있도록 변조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강도가 워낙 세기 때문에 단 하나의 레이저 광선만으로도 미국 내 모든 라디오와 텔레비전 채널이 전하고 있는 정보들을 한꺼번에 전달할 수 있다. 이런 레이저 광선은 시각의 범위를 벗어나 있으며, 군사적으로 사용될 경우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243p]
- 광선으로 그림 그리기란 일종의 벽 없는 집과 같다. 지구의 온도 조절 기능으로까지 확장된 바로 그 전기 기술은 체온 조절 기제의 확장으로서의 주택이 필요 없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벽 없는 의식을 만드는 데 있어, 집합적 의식이라는 과정을 전기적으로 확장하는 것은 언어 장벽을 사라지게 만들지 모른다. [244~245p]


14 돈: 가난한 자의 신용카드
- 돈은 언제나 상품과 공동체의 성격을 어느 정도 담고 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원자재나 상품에서 보다 멀리 있는 것들까지 인간의 장악력을 확대하는 돈의 기능은 그 초창기에는 아주 미미했다. 장악력과 교역 행위의 유동성 증가는 처음에는 아주 작다. 그래서 그것은 어린아이에게서 언어 능력이 생겨나는 것에 비유된다. 처음 몇 달 동안의 사물 장악력은 반사적 수준에 머물러 있고, 자기 뜻대로 손이라도 뻗치려면 적어도 1년은 지나야 한다. 말하는 능력은 물건들을 자신으로부터 떼어 놓을 줄 아는 능력의 발달과 보조를 맞춘다. 말하는 능력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는 힘을 주며 이 힘은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 능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화폐로서의 돈에 대한 인식의 성장과도 보조를 같이한다. [247~248p]


- 다른 미디어들과 마찬가지로 돈은 물품이며 자연의 자원이다. 바꾸고 교환하고 싶은 충동이 겉으로 드러난 가시적 형태로서의 돈은 그 제도적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사회에 의존하는 하나의 집합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248~249p]


- 돈은 노동과 기능을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운반 가능한 형태로 확자앟고 증폭시키는 사회적 수단이었는데, 태환 화폐 혹은 지폐가 등장하면서 그 마력을 상당 부분 잃고 말았다. 마치 말하기가 쓰기, 더 나아가 인쇄술이 등장하자 그 마력을 잃은 것처럼, 인쇄된 지폐가 금을 대신하게 되자 돈이 원래 갖고 있던 매력적인 아우라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251p]


- "오늘날 패션계에서 중요한 것은 널리 사용되는 옷감으로 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유행을 따른다는 것은 말 그대로 스타일이나 옷감에 통화의 성격을 부여하게 되어, 부와 표현을 증대시키는 사회적 미디어를 창출하게 된다. 이것은 돈을 비롯한 그 어떤 미디어든지 그것이 어떻게 제도화되고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253p]


- "돈이 말한다.“ 왜냐하면 돈은 은유이며 번연가이며 다리이기 때문이다. 단어나 언어와 마찬가지로 돈은 공동체가 성취한 일, 기능, 경험 등의 저장고다. 그러나 돈은 또한 쓰기 처럼 전문가적 기술이기도 하다. 그리고 쓰기가 말과 질서의 시각적 측면을 강화하고, 시계가 공간으로부터 시간을 시각적으로 분리하듯이, 돈은 일을 다른 사회적 기능들로부터 분리한다. 더 나아가 오늘날 돈은 농부의 일을 이발사, 의사, 엔지니어 혹은 배관공의 일로 번역하는 언어다. 방대한 사회적 은유이자 다리이자 번역가인 돈은, 쓰기와 마찬가지로 교환을 가속화하고 공동체에서 상호 의존의 유대 관계를 더욱 강화한다. 돈은 쓰기나 달력이 그러하듯이 정치적 조직체에 엄청난 공간적 확장과 제어력을 제공한다. 그것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거리를 두고 이루어지는 작용이다. 문자 문화가 고도로 발전하고 파편적인 사회에서 ”시간은 돈“이며 돈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의 축적물이다. [253p]


- 노동이 순수한 정보의 이동으로 대체됨에 따라 노동의 축적이었던 돈은 신용이나 신용카드와 같은 정보 형태와 통합된다. 주화에서 지폐로, 그리고 화폐에서 신용카드로 변화하는 과정에는, 상업적 교환이 정보 그 자체의 이동 쪽으로 향하는 꾸준한 진전이 있었다. 포괄적 정보를 향한 이러한 경향은 신용카드로 대표되는 그런 종류의 이미지이며, 다시 한 번 부족의 화폐라는 성격으로 접근해 간다. 왜냐하면 직업이나 노동의 전문화를 전혀 모르는 부족사회는 화폐 또한 전문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255p]


- 컴퓨터와 전기 프로그래밍으로 무장한 현대에는, 정보를 축적하고 이동하는 수단들이 덜 시각적이고 덜 기계적인 반면 점차 통합적, 유기적으로 바뀌어 간다. 즉각적인 전기 형식들에 의해 창출되는 총체적인 장은, 전기 분자들이 움직이는 속도를 시각화할 수 없는 것처럼 더 이상 시각화될 수 없다. [256p]


- 모든 미디어들은 우리 자신의 확장이거나 혹은 우리의 일부를 다양한 물질적인 것들로 번역시킨 것들이기 때문에, 하나의 미디어를 이해하게 되면 다른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257p]


- 먼 거리에서 재료를 가져오기만 해도 그 재료에 노동이 더해진 것이다. 그 물건은 거기에 무언가가 더해진 만큼 노동과 정보, 혹은 기술적인 지식을 축적하게 된다. 하나의 물건이 다른 것과 교환될 때, 그것은 이미 다양한 사물들을 어떤 공통분모로 번역하거나 환원시키는 화폐의 기능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공통분모(혹은 번역가)는 또한 시간을 절약시켜 주고 활동을 촉진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그래서 돈은 시간이며 이런 작용의 측면에서 볼 때, 노동을 절약하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는 것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262p]


15 시계: 시간의 향기
- 기술의 한 부분으로서, 시계는 조립라인 패턴에다가 균일한 초, 분, 시를 만들어 내는 기계다. 이처럼 균일한 방식으로 처리된 시간은 인간의 경험이 지니는 리듬과 분리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기계적인 시계는 숫자로 계량화되고, 역학적으로 움직이는 우주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한다. 시계가 근대적인 발전을 시작한 것은 공동체 생활을 인도해 줄 규칙과 동 시간대에 행위가 수행되는 질서가 필요했던 중세 수도원 세계에서였다. 개인적 경험이 지닌 고유한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추상적이고 균일한 단위에 의해 측정된 시간은 점차 모든 감각 생활에 침투했는데, 이는 쓰기와 인쇄의 기술이 했던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일하는 것뿐만 아니라 먹고 자는 것까지도 유기체적인 필요가 아니라 시계에 따라 조절되었다. 임의적이고 균일한 시간 측정 패턴은 전 사회에 확산되었고, 심지어 의복조차도 의류 공업에 부합되게끔 매년 바뀌기 시작했다. 그 점에서, 물론 응용 지식의 원리들 중 하나인 시간의 기계적인 측정이라는 것은, 과정들을 균일하게 파편화된 부분들로 만드는 수단인 인쇄술 및 조립라인과 협력했다. [266~267p]


- 위의 시에서 시계-시간이 ‘속도’에 패할 수도 있다는 마벌의 직관은 지극히 옳은 것이었다. 현재 기계적인 것은 전기적 속도들이라는 조건에서 유기적인 통합체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276p]


- 단순한 도구와 달리 기계는 한 과정의 확장 혹은 외화다. 도구는 손, 손톱, 이, 팔을 확장한다. 바퀴는 발을 회전 운동이나 연속 운동의 형태로 확장한다. 수작업을 최초로 완전하게 기계화시킨 인쇄는 손의 운동을 일련의 구분되는 단계들로 분할하는데, 이런 단계들은 바퀴가 회전하듯이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분석적인 연속으로부터 조립라인의 원리가 생겨났다. 하지만 이제 조립라인은 전기 시대를 맞아 진부한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동시성은 더 이상 차례대로 일어나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77p]


- 시계가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표음적인 문자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시각적인 것에 대한 강조가 수용되어야만 한다. 문자 문화는 그 자체가, 인간 공동체에서 궁핍함의 끝없는 유형들로 향한 길을 준비하는 추상적인 금욕주의다. 문자문화가 보편화되면서 시간은 분할되고 또다시 세분화할 수 있는 닫힌 공간 혹은 회화적 공간의 성격을 지닐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시간도 공간처럼 채울 수 있는 것이 된다. “내 스케줄은 꽉 찼다.” [278p]


- 오늘날에 와서 우리는, ≪보그Vogue≫의 업무는 그 잡지가 인쇄되는 과정의 일부로서 옷의 스타일을 바꾸는 것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어떤 것이 유통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통화를 만들어 낸다. 유행은 옷들을 이동시켜 그것을 더욱 빈번하게 유통시킴으로써 부를 창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14장, ‘돈’에서 살펴본 바 있다. 시계는 인간적 유대의 속도를 가속시킴으로써 직무를 변형시키고 새로운 일과 부를 창출해 내는 기계적인 미디어다. 사람들의 만남과 행동을 조정하고 촉진시킴으로써, 시계는 인간의 교환 활동의 양을 가파르게 증대시킨다. [281p]


16 인쇄: 어떻게 그것을 파내 볼 것인가
- 정확하고 반복 가능한 형식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말하는 기술은 서구에서는 오랫동안 당연하게 생각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인쇄와 청사진이 없었다면, 그리고 지도와 기하학이 없었다면 근대 과학과 기술의 세계는 존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흔히 망각한 채 지나친다.[285p]


- 물통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몇 마디 단어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사물을 묘사하는 일은 세상의 모든 단어를 동원한다 해도 불가능하다. [286p]


- 다시 말해 서지학에는 “과거에 더 많이 있었던 것일수록 오늘날에는 덜 남아 있다”라는 대원칙이 있는데, 이는 구텐베르크 이전의 이 같은 인쇄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원칙은 인쇄 문제뿐만 아니라 우표나 초기이 라디오 수신기 등 수많은 항목들에도 적용된다. [288p]


- 반복 가능성은 특히 구테베르크 기술의 등장 이후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역학적 원리의 핵심이다. 인쇄와 활자의 메시지는 일차적으로 반복 가능성이다. 활자와 함께 활자 인쇄의 원리는 통합된 행위를 부분으로 나누고 파편화하는 과정에 의해 그 어떤 수작업도 기계화하는 수단을 도입했다. 음성 언어에서의 다양한 동작과 장면들, 그리고 소리들을 분리시키는 알파벳과 함께 시작된 이 일은 무엇보다도 목판과 활자에 의해 새로운 차원이ㅡ 강도에 도달했다. 알파벳은 시각적 요소를 단어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남겨 두고 음성 언어의 다른 모든 감각적 사실들을 시각적 형태에 환원시켜 버렸다. 이는 목판 인쇄 심지어 사진이 왜 문자 문화권에서 그렇게 열렬히 환영받았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형태들은 쓰인 말인 글에서는 필연적으로 생략되는 포괄적인 동작과 극적인 자세의 세계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289p]


- 어설픈 목판 인쇄는 언어의 주요한 측면을 드러내 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말이 명확한 정의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데카르는 17세기 초에 철학계를 살펴보고 나서 말의 혼란에 기겁을 하고 철학을 정밀한 수학적 형식으로 환원시키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불필요할 정도로 정밀성에 집착한 결과, 철학의 중요한 문제들 대부분이 철학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그리고 철학의 위대한 왕국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과학과 전문 분과들로 뿔뿔이 해체되었다. 시각적인 청사진과 정밀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권력과 지식 모두를 파편화시키는 외파적 힘이다. [291p]


- 낮은 수준의 정밀도를 요구하는 중세 목판의 세계에서는, 각각의 사물이 그 자신의 공간을 창조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연결 짓는 합리적이고 상호 연결된 공간은 없었다. 망막상의 인상이 강해질 때, 대상들은 그 자신이 만들어 낸 공간에 밀착하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에 균일하고 연속적이며, “합리적인” 공간 속에 “담기게” 된다. 1905년에 나온 상대성 이론은 균일한 뉴턴의 공간이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환상이나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며 그 해체를 선언했다. [293~294p]


17 만화, ≪매드≫: 텔레비전에 이르는 길목
- 텔레비전은 단지 이전보다 훨씬 깊숙하게 모든 사람들을 다른 모든 사람들의 삶에 개입시켰을 뿐이다. [299p]


- ≪매드≫는 광고의 세계를 그저 만화책의 세계로 바꿔 놓았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건은 텔레비전 영상이 직접적인 경쟁자로서 만화책을 제거하기 시작하던 시점에 일어났다. 동시에 텔레비전 영상은 예리하고 명확한 사진의 이미지를 흐리고 희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299~300p]


- 피카소는 미국 만화의 오랜 팬이다. 제임스 조이스에서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고상한 지식층은 오랫동안 미국의 대중예술에 몰두해 왔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서 공식 행위에 대한, 진정으로 상상력이 풍부한 반응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반면 고상한 예술은 매우 위력적인 고도의 정세도를 지닌 상황 혹은 “틀에 박혀 갑갑한” 사회 속에서, 노골적으로 뻔뻔스럽게 드러내는 행위 양식들을 그저 회피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고상한 예술은 산업화된 세계의 전문화된 곡예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대중 예술은 우리가 판에 박힌 일상생활에서 빠뜨린 모든 삶과 능력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어릿광대다. 대중 예술가는 통합적인 인간으로 살면서 그 사회의 전문화된 판에 박힌 일상 행위들을 수행하려는 모험을 시도한다. 그러나 통합적인 인간은 모든 것이 전문화된 상황에서는 전혀 무력하다. 적어도 이것이 만화라는 예술 그리고 어릿광대의 예술을 이해하는 하나의 길이다. [300~301p]


- 당시의 연장자들은 일상의 신문이 초현실주의 미술 전시만큼이나 정신없는 것이었다는 점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런 그들에게 만화책이 8세기의 채색 사본만큼이나 색다르다는 사실을 짚어 낼 것을 기대하기란 거의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형식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내용에 대해서도 식별할 수가 없었다. [303p]


-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귀에 거슬리는 아스팔트 정글을 물려주었다. 이 정글에 비하면 열대의 정글은 토끼우리만큼이나 조용하고 유순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상태를 정상적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 아스팔트 정글이 가장 높은 소음 강도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을 고용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락 산업이 일상적인 도시의 격렬함을 제대로 모방하려 했을 때 사람들은 분노했다. [304p]


18 인쇄된 말: 내셔널리즘의 건축가
- 사회적으로 볼 때 인간의 인쇄에 의한 확장은 내셔널리즘, 산업주의, 대량 시장, 보편적 교양과 교육 등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인쇄는 반복 가능한 정확성이라는 이미지를 제시했고, 그 결과 전혀 새로운 형태로 사회적 에너지들을 확장시킬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310p]


- 아마도 인쇄가 인간에게 부여한 선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리 두기와 관여하지 않는 특성일 것이다. 이는 곧 반응 없이 행동하는 힘을 인간에게 부여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래, 과학은 이 선물을 높이 찬양해 왔다. 그러나 전기 시대가 되면서 그것은 오히려 곤혹스러운 선물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전기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든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관여하기 때문이다. [310~311p]


- 새로운 미디어는 이전의 오래된 미디어에 새로 하나 덧붙여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이전의 오래된 미디어가 평화롭게 가만히 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새로운 미디어는 낡은 미디어가 새로워진 미디어 환경에 맞는 새로운 형태와 자리를 발견하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압박을 가한다. -중략- 인쇄는 개인적인 기억들을 무력화시킬 만큼 과거의 기록들에 대한 방대하고 새로운 기억을 제공해 주었다. [312p]


- 따라서 인쇄는 중세 조직이 갖는 통합적 성격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전기가 기존의 파편화된 개인주의에 제기하는 도전과 비슷한 것이었다.
인쇄의 획일성과 반복성은 연속적이고 측정 가능한 양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관념과 힘을 합쳐 르네상스에 스며들었다. 이 관념의 직접적 효과는 자연 세계와 권력 세계 모두 탈신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세분화와 파편화에 의해 물리적 과정을 제어하는 새로운 테크닉은 신과 자연, 인간과 자연, 나아가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켜 놓았다. [315p]


- 획일성은 또한 말하기와 쓰기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쳐, 독자와 주제에 대한 단일한 톤과 태도가 저술 전체를 일관하도록 했다. “문자의 인간” 혹은 “문인文人”이 태어났다. 이 문자 문화적은 “동일한 톤”은 음성 언어에까지 확장되어, 교양인들로 하여금 지겹기 한량없는 담하에서 단조로운 “높은 톤”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19세기의 산문 작가들로 하여금 오늘날에는 누구도 따르려 하지 않는 것으 도덕적인 특질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문자 문화의 획일적인 성질들이 구어에 침투한 것은 교양인의 말하기도 평준화시켰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쇄의 획일적이고 연속적인 시각적 효과들이 음향상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술적인 영향에서 시작해 더 나아간 일들이 뒤따랐는데, 유머, 속어, 그리고 미국식 영어의 극적인 활력 등은 조금 덜 배운 사람들의 독점물이 되어 버렸다. [318p]


19 바퀴, 자전거, 비행기


20 사진: 벽 없는 매음굴
-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순간들을 분리해 낸다는 것은 사진만이 가지는 독특한 성격 중 하낟. 텔레비전 카메라는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끊임없이 주사선走査線을 보내는 텔레비전 카메라가 보여 주는 것은 단절된 순간이나 국면이 아니라 윤곽, 형태적인 것에 대한 정보, 그리고 투명함이다. [335p]


- 영화나 연극의 스타와 우상은 사진에 의해 대중의 영역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들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꿈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창녀들보다 더 쉽게 살 수 있고, 껴안을 수도 있고, 만져 볼 수도 있다. 대량 생산된 상품들은 그것의 창녀와 같은 측면 때운에 항상 몇몇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335~336p]


- 누구도 사진이라는 것을 혼자만의 일로 전념할 수 없다. 독서와 글쓰기의 경우엔 혼자 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질 수 있으나, 사진은 그런 태도를 허용하지 않는다. [337p]


- 사진 기술은 단순한 기계적 산업주의와 전자적 인간의 그래픽 시대를 구분 짓는 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진술의 발명으로 인해 활자적 인간의 시대가 그래픽 인간의 시대로 변천하였다. [339p]


- 사진이 만들어 낸 가장 커다란 변혁은 아마도 전통 예술에서 일어난 것들일 것이다. 화가는 이제 더 이상 사진에 몇 번이나 찍힌 적이 있는 세계를 그릴 수 없게 되었다. 대신 화가는 인상주의와 추상 예술을 통해 창조의 내적 과정을 표현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소설가도 사진, 출판물, 영화, 라디오 등을 통하여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대상이나 사건을 더 이상 묘사할 수 없게 되었다. 시인과 소설가는, 우리가 통찰력을 얻을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 우리 자신과 우리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정신 내면의 움직임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하여 예술은 외부 세계를 모사하는 것에서 내면을 창조해 내는 것으로 방향을 돌렸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를 그대로 묘사하는 대신, 예술가들은 대중의 참여를 위해서 창조적 과정을 보여 주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이제 예술가들은 우리에게 그 만들어 가는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344p]


- 영화 산업 전반의 실정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기업들은 자신들의 미디어가 아닌 다른 미디어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맹”이어서, 미디어의 새로운 변종 형태가 가져오는 그 놀라운 변화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46p]


- 사진의 시대에, 언어는 그래픽이나 아이콘적 성격을 띠는데, 그것의 “의미”는 의미론적 세계에 거의 속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문자들의 세계에는 전혀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347p]


- 패션이란 우리가 정보를 얻고, 의식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과 함께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단지 사진이 지닌 소극적인 면에 주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적극적인 면에 주목해 볼 때, 사진이 시간적 연속성을 가속화하는 효과는, 전신이나 진보가 공간을 없애 버린 것과 같이, 시간을 없애 버린다. [348p]


- 그는 모든 여행 경험이 “밍밍하고, 미리 짜여 있고, 틀에 박힌” 것이 되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는 왜 사진이 우리에게 이러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알아내려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지식인들도 책이 질문, 대화, 성찰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탄식했을 뿐, 인쇄된 책의 본질을 성찰하려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항상 수동적 성향을 띠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행자들은 수동적이 되었다. 여행자 수표와 여권, 그리고 칫솔만 있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포장도로, 철도, 그리고 증기선 등이 여행의 수고를 없애 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어리석은 순간적인 기분으로 외국으로 달려가는데, 왜냐하면 여행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나 잡지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출발은 지금, 지불은 돌아와서!”라는 여행사의 상투적인 광고 문구는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다. “출발은 지금, 도착은 다녀온 후에!”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란 눈 감고도 찾아갈 만큼 그들에게 익숙한 길을 진정으로 벗어나 본 적이 없으며, 또한 새로운 장소에 도착해 본 적이 없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하이든 베를린이든 베네치아든 패키지여행으로 가는 곳은 자유자재이지만, 그 패키지를 열어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세계는 어떤 다른 미디어를 통해 미리 만나 본 적이 있는 것을 모은 일종의 박물관이 되었다. 심지어 박물관의 전시 담당자들조차도 종종 전시관의 여러 진품보다 그 컬러 사진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350p]


- 사진과 마찬가지로 패키지 여행이, 우리로 하여금 어디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들면서 그 장소의 가치를 떨어뜨렸다고 한탄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그것은 문자 문화라는 파편화된 관점에 가치 판단이 고정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는 또한 글로 묘사한 풍경이 기행 영화보다 훌륭하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이다. [351p]


- 모든 미디어는 우리의 삶에 미디어가 만든 인공적 지각과 임의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존재한다. [351p]


- 그러나 세상의 모든 보수주의도 새로운 전기 미디어의 생태학적 엄습에는 조금도 저항하지 못한다.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후진하는 자동차는 고속도라는 상황과 관련지어 볼 때 변화의 속도를 가속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러한 것은 문화적 반동의 아이러니컬한 모습처럼 보일 것이다. 추세가 한쪽을 향하고 있을 때, 그 방향에 저항하는 것은 변화의 속도를 더 가속시킨다. 변화를 통제하는 것은 그것과 함께 움직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보다 앞서 움직이는 데 있는 것이다. 앞질러 감으로써 변화의 방향을 바꾸거나 통제할 수 있는 힘을 획득할 수 있다. [352~353p]


- 사진은 물감이나 언어보다 훨씬 더 회화적으로 자연 대상물을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역전이라는 효과를 내었다. 사진은 가지 묘사의 방법, 즉 “문장 구성법 없는 진술‘을 할 수 있는 수단을 부여함으로써, 반대로 내면세계를 묘사하려는 자극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문장 구성법 혹은 언어화가 없는 진술이란 동작, 마임, 형태gestalt에 의한 표현이다. [356p]


21 신문: 누설漏泄에 의한 통치
- 책이나 신문은 둘 다 그 내용에 관계없이, 단지 그 형태상의 이유 때문에 “숨은 이야기”의 효과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고백적 성격을 지닌다. 책이 작가의 정신적 모험의 숨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신문은 공동체의 활동과 상호 작용에 관한 숨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신문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파헤칠 때 그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진정한 뉴스는 나쁜 소식이다. 그것은 누군가에 대한 나쁜 소식이거나, 누군가에게 나쁜 소식이다. [360~361p]


- 이러한 사실을 좀 더 일찍 발견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정보의 처리와 이동이 기계 공업적 세계에는 주된 사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기 시대에는 가장 중심적인 사업이요, 부를 만들어 내는 수단이다. 기계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도, 사람들은 신문과 라디오, 심지어 텔레비전조차도 자동차나 비누, 휘발유처럼 그 “하드웨어” 제조사나 사용자가 돈을 내는 정보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회 내에서 자동화가 지배적일수록, 정보가 중요한 상품이라는 점과, 형태를 갖춘 상품은 정보 이동에 따른 부수적인 것일 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정보 그 자체가 전기 시대의 기초적 경제 상품이었던 초기 단계에는, 광고나 오락이 사람들의 정신을 뺏는 바람에 그러한 사실이 불분명했다. 광고주는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시간과 공간을 산다. 그들이 독자나 청취자나 시청자의 일부를 사는 것은, 우리 가정을 공적인 만남의 장소로 사는 것과 같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들은 그 방법만 안다면 기꺼이 독자, 청취자, 시청자에게 시간과 주의를 기울여 준 대가를 직접 지불할 것이다. 지금까지 찾아낸 유일한 방법은 쇼를 무료로 보여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에서 영화가 텔레비전처럼 프로글매의 중간 중간 들어가는 광고 시간을 개발하지 않은 이유는 단지 영화라는 양식 그 자체가 소비 제품을 광고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364~365p]


- 심지어 미국에서도 교양인들은 광고의 세계가 가지는 아이콘적인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별로 익숙하지 못하다. 광고를 무시하거나 개탄의 대상으로 삼을 뿐, 연구하거나 즐기려 하지 않는다. [366p]


-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라디오든 인쇄물이든 또는 영어라는 언어 자체든 간에 미디어의 형태는 무시하면서 그 프로그램의 “내용”에만 초점을 맞출 때 일어난다. [367p]


- 책 지향적인 사람은 신문이 광고와 광고주로부터 압력을 받지 않으면 더 좋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가진다. 그러나 신문을 훑어보는 독자의 눈에 광고나 뉴스 기사가 똑같은 만족도로 비춰지고 있다는 독자 조사 결과는 발행인조차도 놀라게 하였다. [368p]


- 잡지나 신문에서 광고는 지금까지도 가장 훌륭한 부분이다. 신문이나 잡지의 그 어떤 읽을거리보다 광고를 만들 때 더 많은 노력과 생각, 더 많은 기지와 예술이 투입된다. 광고들이 뉴스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광고가 항상 좋은 뉴스라는 점이다. 균형을 잡아 주는 효과와, 좋은 뉴스를 팔기 위해서는 많은 나쁜 뉴스들이 필요하다. 게다가 신문은 뜨거운 미디어다. 강렬함과 독자들의 참여를 높이려면 나쁜 소식이 있어야만 한다. [368~369p]


- 모든 사람들이 가장 먼저 시선을 두는 대목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야구나 주식 폭락이나 눈사태 등 그 어떤 것이든 사람은 자신이 목격한 것에 관한 기사를 가장 먼저 펼쳐 보게 된다. -중략- 왜냐하면 이성을 가진 우리 인간들은 그들의 경험을 새로운 물질적 형식 속에서 보거나 혹은 재인식하는 일을 돈 주고 살 수 없는 인생의 기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번역된 경험은 그야말로 이전의 인식을 재생해 보는 즐거움을 준다. 신문은 우리가 우리의 머리를 사용할 때 갖는 재미를 되풀이하게 해 주고, 우리의 머리를 씀으로써 우리는 외부 세계를 우리 자신의 존재의 그물망으로 번역할 수가 있다. [370~371p]


- 신문에 실리는 것만이 뉴스이고, 실리지 못한 것은 뉴스가 아니었다. “뉴스가 되었다”라는 표현에는 조금 미묘한 부분이 있다. 신문에 실렸다는 것은 뉴스가 되기도 하고 뉴스거리를 만들었다는 것도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뉴스가 된다”는 말은 “약속을 지킨다”라는 말처럼 “행위”와 “픽션”의 양면 세계를 의미한다. 게다가 신문은 매일의 행위이면서, 픽션 혹은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은 대체로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재료로 한다. 모자이크적인 수단을 가지고, 신문은 공동체의 이미지 혹은 공동체의 특징을 만들어 간다. [371~372p]


- 미디어의 소유자들은 항상 대중에게 대중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미디어의 소유자들은 자신들의 힘이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 혹은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378p]


22 자동차: 기계 신부
- 자동차는 획일화와 규격화의 메커니즘이 낳은 하나의 뛰어난 작품이며, 그것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계급이 없는 사회를 만든 구텐베르크의 기술과 문자 문화에 일치하는 것이다. 자동차는 현대의 민주적인 기사인 시민에게 하나의 패키지 상품으로 말과 갑옷과 오만함을 주면서, 그 기사를 잘못 유도된 미사일로 변신시켰다. 사실 미국의 자동차는 수준을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귀족적인 이상을 향하게끔 향상시킨 것이었다. 이와 같은 힘의 대폭적인 증가와 보급은 문자 문화적 교양과 다양한 양식의 기계화가 평준화를 이룰 수 있게 한 동력이었다. 자동차를 지위의 상징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보다 개발된 차종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만 사용하도록 제한하는 것은 자동차와 기계 시대의 특징이 아니다. 그것은 이 획일성과 규격화의 기계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지위와 역할의 기준을 새로이 만들어 가고 있는 전기 시대의 특징인 것이다. [388~389p]


- 동시에 자동차는 가족이 성장할 수 있는 일상적인 환경으로서의 도시를 파괴하였다. 도로, 아니 인도조차도 아이들이 자라면서 일상적인 상호 작용을 하기에는 너무나 긴장에 찬 장소가 되어 버렸다. 도시가 자동차로 이동하는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수록, 심지어 옆집 이웃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389~390p]


23 광고: 이웃에게 안 지려는 야단법석
- 상업 미술가들은 막대한 경비를 들여서 광고를 하나의 아이콘으로 발전시켜 왔는데, 아이콘이란 전문인들의 파편화된 생각이나 측면이 아니라, 복잡한 종류의 것들이 통합되고 압축된 이미지다. 아이콘은 아주 작은 범위 속에 경험의 커다란 영역을 집중시킨다. 그리하여 광고의 경향은 완성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에서 벗어나, 제조 과정에 참여하는 제작자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제조 과정이라는 것의 협동적인 이미지에는 제작자의 역할까지 하는 소비자의 이미지 역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393p]


- 광고는, 시끄럽게 같은 내용을 연속적으로 되풀이하는 반복 속에서 아주 작은 핵심적 내용이나 패턴이 서서히 그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는 매우 진보된 원리에 따라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광고는 시끄러움의 원리를 설득이라는 지평까지 밀고 나간다. 그것은 마치 세뇌시키는 과정과 흡사하다. 무의식을 향해 맹공격을 퍼붓는 이 심층적 원리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다. [394p]


- 광고는 사람들에게, 특히 사회과학자들에게 최면술을 걸기 위해 잠재의식에 작용하는 약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용은 우리가 광고라 부르는, 국가 교육 예산과 맞먹는 연간 200억 달러라는 막대한 경비를 들이는 거대한 교육 사업의 가장 교화적인 측면 중의 하나인 것이다. 경비가 많이 든 어떤 광고든 그것은 여러 사람의 수고, 주의, 검증, 지혜, 예술과 기술을 나타내는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의 뛰어난 광고 제작에는, 그것에 실린 기사와 사설의 집필 과정에 들어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과 수고가 들어간다. 돈을 많이 들인 광고는, 고층 건물이 잘 다져진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처럼, 대중의 스테레오타입 혹은 기존 태도라는 일정한 ‘틀’과 같은 검증된 기반 위에 조심스럽게 세워진다. 무엇을 광고하든 대기업 상품의 광고를 하나 제작할 때에는 최고의 기술과 능력을 지닌 앞을 내다볼 줄 아는 팀들이 협력하여 참여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모든 광고는 공통된 경험을 활기 넘치는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극화시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사회학자 그룹도 활용이 가능한 모든 사회적 데이터를 수집하고 처리하는 일에서 광고 제작팀을 따라갈 수 없다. 광고 제작팀은 해마다 엄청난 돈을 조사와 수용자 반응 분석에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은 공동체 전체의 공통적인 경험과 감정에 관한 자료들의 거대한 집약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광고가 이러한 공유된 경험의 중심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우리 감정과의 유대를 상실하여 즉시 무너질 것이다. [396p]


- 그렇다면, 젊은이들이 활자에 익숙해지기 위해 훈련된 만큼 그래픽과 사진의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도 훈련을 받아야한다는 것은 당연하고도 필요한 일로 보이지 않는가? 사실 그들에게는 그래픽에 대한 훈련이 더 많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광고라는 무대 안의 배우를 정해서 배치하는 기술은 복잡하고, 또 강한 주의력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399p]


-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광고 카피“라고 이야기하면서 광고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금주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양조업자에게, 그리고 검열자가 책, 영화에 그런 것처럼, 광고주에게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반대자야말로 최대의 환영자임, 촉진자인 것이다. 시의 ”의미“가 시에서, 그리고 노래 가사가 노래에서 가지는 관계처럼, 사진이 출현한 후부터 광고에서 광고 카피의 역할은 부수적이고 잠재적인 것이 되었다. 매우 문자 문화적인 사람은 사진과 같은 비언어적인 예술을 따라잡을 수 없는데, 그래서 그들은 무의미한 비난만 하며 참을성 없이 미친 듯이 날뛰기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 인해 그들은 무력해지고 반대로 광고는 새로운 힘과 권위를 얻는다. 무의식중에 사람의 심층에 전달되는 광고의 메시지는 문자 문화적 인간이 결코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비언어적 형태의 구조와 의미를 인식하고 논의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 [400p]


24 게임: 인간의 확장
-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긴밀한 부족적 사회 조직은 지금 일본에서 전기 시대의 무역과 상업에 매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몇십 년 전에 일본인은 문자 문화와 공업적 단편화를 충분히 진행하여 공격적인 개인 에너지를 방출하였다. 전기의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지금 요구되고 있는 긴밀한 팀워크와 부족적 충성심은 일본을 다시 한 번 그들의 옛전통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게끔 하고 있다. [407p]


- 게임은 특정한 긴장에서 해방시켜 주는, 우리의 심리적 삶의 극적 모델이다. 그것은 엄격한 약속들을 가진 집단적이고 대중적인 예술 형태다. 고대 그리고 문자 이전의 사회는 자연스럽게 게임을 우주 또는 우주 밖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의 살아 있는 극적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409p]


- “연극이란 우리를 괴롭히는 곤경의 모방적 재연이며, 또 재연을 통한 곤경으로부터의 해방이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이 모든 게임, 춤, 놀이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게임과 놀이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려면, 그것들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울림을 전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편 게임이 없는 사람이나 사회는 자동으로 움직이는 로봇과 같이 무기력하게 정신 못차리는 상태에 빠져 있는 좀비가 된다. 예술과 게임은 우리를 틀에 박힌 일상과 관습에서 오는 현실의 압력에서 한 걸음 비켜설 수 있도록 해주고, 그것을 관찰하고 의문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대중적인 예술 형태로서의 게임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의 어느 생활에든 참여할 수 있는 직접적 수단을 제공해 주는데, 그 어떤 단일한 역할이나 직업도 그러한 것을 인간에게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프로‘ 스포츠의 모순이 생긴다. [411p]


- 한 세대의 사회적 실천 방식들은 다음 세대의 “게임” 속에 기호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게임은, 살갗이 벗겨진 해골처럼, 하나의 농담이 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이런 일은 특히 세태가 갑작스럽게 변하는 시기에 일어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어떤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출현이 만들어 낸 결과다. 최소한 한동안 야구의 운명을 어둡게 했던 것은 바로 텔레비전 영상이 가진 포괄적인 그물눈이다. 왜냐하면 야구는 ‘한 번에 하나씩’ 일어나는 게임으로, 포지션이 정해져 있고 각자 맡은 임무가 뚜렷하다. 이것은 파편화된 일이나 전문 직원과 계통이 있는 경영 조직과 같은 것으로, 오늘날 사라져 가고 있는 기계 시대에 속하는 것이다. 전기 시대의 새로운 공동체적, 참여적 생활 방식의 이미지 그 자체인 텔레비전은 통합된 의식과 사회적 상호 의존의 관습을 형성해 나가는데, 이것이 전문화되고 고정된 포지션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가진 야구의 특징적인 스타일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문화가 변화면 게임도 변한다. [413p]


- 더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술의 창조에 참여하기 때문에 원시 사회에 진정한 예술이 없는 것처럼, 전쟁과 비즈니스에서 관객이 너무 전면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예술과 게임에는 규칙, 약속, 관객이 필요하다. 경기의 본질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가 전체 상황의 모델들로서, 전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눈에 띄게 드러나야만 한다. 생활에서든, 바퀴에서든 ‘작동한다’는 것은 상호 작용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 이상의 사람과 집단 사이에는 주고받음, 즉 대화가 있어야만 한다. [415p]


- 그 어떤 게임도 그 형식이 가장 일차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게임 이론은, 정보 이론과 마찬가지로, 게임과 정보의 이동에 대한 바로 이런 측면을 무시했다. 두 이론 모두 시스템들의 정보 내용을 다루어왔고, 데이터를 잘못 파악하게 하는 “잡음”과 “기만”의 요인을 관찰해 왔다. 이는 그림이나 음악 작품을 그것의 내용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경험에서 중심이 되는 구조적 핵심을 반드시 놓치게 될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게임이 우리의 내면적인 생활과 관련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게임의 패턴이지,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게임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보의 이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감각 중 어느 것이 경험하는 과정에 적용되었는가라는 점은, 이를테면 사진이나 전신이냐에 따라, 모든 차이를 만들어 낸다. 예술에서는 적용된 미디어 속에 존재하는 우리 감각들의 독특한 혼합 방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표면상의 프로그램 내용은, 그 구조적 형식이 의식적인 주목이라는 장애물을 통과하는 데 사용되는, 주의를 딴 곳으로 흩트리는 유인물이다. [417~418p]


- 만약 “게임이 매스 미디어인가”라는 질문을 해 본다면, 그 대답은 “그렇다”여야만 한다. 게임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공동체적 삶의 어떤 중요한 패턴에 동시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상황들이기 때문이다. [422p]


25 전신: 사회의 호르몬
- 개별적인 단계들과 전문가적 기능들이라는 기계적 시대를 종결시키는 이 전기 형식의 특수성은 그 형식의 본질을 그대로 설명해 준다. 이전의 모든 테크놀로지(말 그 자체는 제외하고)는 사실상 우리 몸의 어느 부분의 확장인 반면에, 전기는 뇌를 포함한 중추신경체계 자체를 밖으로 드러냈다고 말할 수 있다. [425p]


- 영young은 『과학에서의 의심과 확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뇌가 지니고 있는 능력의 비밀은, 수용 기관의 부분을 자극했을 때 생기는 효과가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하는 굉장한 기회를 제공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대부분의 다른 동물보다 훨씬 높은 정도로 하나의 전체로서 세계에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상호 작용, 또는 혼합 작용을 할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425~426p]
- 바로 뇌처럼, 전기는 존재하는 것의 모든 국면을 동시에 접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전기가 시각적이고 청각적이라는 것은 부수적인 성격이며, 전기는 본질적으로 촉각적이다. [427~428p]


- 모든 혁신은 기존 조직의 균형을 위협한다. 대기업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권장하지만, 막상 내놓으면 한 방에 나가떨어지게 만들어 버린다. 큰 회사에서 아이디어를 다루는 부서는 위험한 바이러스를 분리해 내는 실험실과 같다. 바이러스 하나가 발견되면, 한 무리의 사람들 손에 넘어가 중화되고 면역 조치를 당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대기업에서 눈부신 “생산과 판매의 증가”를 가져올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다면, 그것은 웃기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한 증가는 기존의 경영진에게는 커다란 재앙이 될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경영진에게 자신들의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큰 조직의 내부로부터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지 않는다. 새 아이디어는 작지만 경쟁관계에 있는 조직으로부터 그들을 습격해 오지 않으면 안 된다. [430~431p]


- 전신의 형식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순간적인 즉시성과 총체적인 개입은 아직도 문자 문화적 교양인의 반발을 낳고 있다. 그들의 시각적 연속성과 고정된 “관점”은 즉시적인 미디어의 즉각적인 참여를 대중 스포츠만큼이나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만든다. 이들은 빅토리아 시대에 어두운 공장에서 일한 어린이들처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부와 노고로 인해 불구자가 된 미디어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434~435p]


- 가속화라는 것은 모든 조직에서 해체와 붕괴를 가져오는 하나의 공식이다. 서구 세계의 모든 기계적 테크놀로지가 전기와 결합하게 되면서, 그 결합은 보다 더 빠른 속도라는 것을 향해 세상을 밀어붙였다. 우리 세계의 모든 기계적인 분야가 자기 와해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437p]


26 타자기: 철의 변덕 시대로
- 경제의 한 부분의 속도가 한발 빨라지면, 나머지 전체가 그것을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사업도 타자기가 만들어내는 그 속도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타자기의 상업적 이용을 촉진시킨 것은 바로 전화였다. 매일 몇만 번이나 전화상으로 되풀이되는 “그것에 관한 메모를 보내 주십시오”라는 말로 인해 타자수의 기능이 크게 확대된 것이다. 파킨스의 법칙, 즉 “일은 남아 있는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한 만큼 확장된다”는 것은 바로 전화가 가져다준 기묘한 역학이다. 즉시 전화는 어마어마한 차원으로까지 일을 확대하여 타자기를 움직이게 하였다. 타자 문서가 만들어 낸 피라미드들은 하나의 비즈니스 속의 작은 전화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하여 솟아올랐다. 타자기와 마찬가지로, 전화도 여러 기능을 융합한다. 예를 들어, 콜걸은 자기 자신의 뚜쟁이이며, 창부집의 포주가 된다. [448p]


- 역사학자 부어스틴은, 정보 시대의 유명인은 업적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잘 알려진 존재냐 아니냐로 판가름 난다는 사실에 매우 분개했다. 또 파킨스 교수는, 인간의 일의 구조가 이제 해야되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서 놀라워하고 있다. 경제학자인 그는, 스티픈 포터가 『게임스맨십』에서 그런 것처럼,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부조화와 희극적인 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두 사람 모두, 옛 의미대로 “세상에서 한 걸음 앞서는” 것이 헛된 엉터리 짓임을 밝힌 것이다. 정직한 노고든 영리한 계략이든 그 어떤 것도 야심 많은 중역의 승진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개인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비즈니스에서도, “출세하다”라는 것이 끝나 간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순간적인 유명세만 올리도록 만들어진 반향실과 같은 세상에서, “한 걸음 앞선다”는 것은 없다. [449~450p]


27 전화: 울려 퍼지는 금관악기인가 아니면 따르릉 울리는 상징인가?
- 전화가 미친 사회적 영향 중에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은 홍등가가 사라지고 콜걸이 등장한 것이다. 안목이 없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예상 밖의 일이다. 전화의 형태와 성격은, 모든 전기 테크놀로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놀라운 발전 속에 충분히 잘 나타나 있다. 창부는 전문가이지만, 콜걸은 그렇지 않다. 창부집은 그녀가 사는 집이 아니었다. 그러나 콜걸은 자기 집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이 많은 기혼 부인일 수도 있다. 전화가 모든 일을 분산시키고, 매춘의 장소뿐 아니라 세력 다툼까지 끝내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모든 비즈니스에서 감지되기는 했으나 충분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453p]


- 전화는 글로 쓰이고 인쇄된 책자와는 달리 완전한 참여를 요한다. 모든 문자 문화적인 사람들은 그런 온 신경을 다 쏟아야만 한다는 버거운 요구에는 반발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오랫동안 단편적으로 주의하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문자 문화적인 사람이 외국어를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한꺼번에 모든 감각을 동원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454p]


- 많은 사람들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낙서”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전화 미디어의 본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전화는 우리의 모든 감각과 기능의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냥 틀어 놓고 다른 일을 볼 수 있는 라디오와는 달리, 전화는 하나의 배경으로 사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전화가 제공하는 청각 이미지는 매우 빈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그것을 메우고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라디오의 경우처럼, 청각 이미지가 높은 밀도를 가지고 있어서 높은 정세도를 지닐 때, 우리는 그 경험을 시각화하거나 시각으로 그것을 완성시킨다. 또한 시각적 이미지는 높은 밀도나 강도를 지니고 있으면, 우리는 소리를 더하여 그것을 완성한다. [455p]


28 축음기: 국민의 가슴을 축소시킨 장난감
- 왜냐하면 “깊이”는 “분리,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깊이”는 견해가 아니라 “통찰”을 의미한다. 그리고 통찰은 과정에의 정신적 참여이며, 거기에서 대상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는 이차적인 것이다. 의식은 내용에는 전혀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포괄적인 과정이다. 의식은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한 의식’을 상정하지 않는다. [476p]


- 전화: 장벽이 없는 말
축음기: 장벽이 없는 음악회장
사진: 장벽이 없는 미술관
전깃불: 장벽이 없는 공간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장벽이 없는 교실
[477p]


- 경험의 “비언어적 형태”로서의 영화는 사진처럼 “문법이 없는 진술”의 형태다. 그러나 사실 영화는 활자나 사진처럼,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높은 수준의 독해 능력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비문자 문화적 인간을 당혹스럽게 한다. 카메라가 이동하여 인물을 쫓거나 인물을 시야에서 빼 버리는 것을 문자 문화적인 우리는 쉽게 받아들이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인물이 필름 끝에서 보이지 않게 되면,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 인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한다.[480p]


- 인쇄물 같은 다른 미디어에 비교해 생각해 본다면, 필름은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필름은 여러 페이지의 산문으로 묘사할 수 있는 인물과 풍경이 담긴 한 장면을 순식간에 제시한다. 바로 다음 순간 필름은 이 상세한 정보를 되풀이해서 제공할 수 있고, 또다시 되풀이하는 과정을 계속할 수 있다. [484~485p]


- 사진이 화가로 하여금 추상적이고 조각彫刻적인 예술로 나아가게 한 것처럼, 필름은 작가로 하여금 필름이 대항할 수 없는 말의 간결성과 깊은 상징주의를 향한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485p]


- 1920년대에 와서 미국의 생활 방식은 통조림으로 만들어져 전 세계에 수출되었다. 세계는 통조림으로 만들어진 꿈을 사려고 앞다퉈 줄을 섰다. 영화는 최초의 대大소비자 시대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하나의 유인책이고, 광고이며, 그리고 그 자체로 주요 상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 연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정보를 이요하기 쉬운 형식으로 저장하고 있는 영화의 힘은, 그에 맞설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490p]


- 호텔 방에서나, 집에서나 혼자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못 된다. 텔레비전의 모자이크적 이미지는 사회적 관계의 완성과 대화를 요구한다. 인쇄 이전의 필사본도 마찬가지다. 필사본의 문화는 고대와 중세의 모든 문화가 보여 주고 있듯이, 구어적이며, 대화와 토론을 요한다. 텔레비전으로부터 주된 압력을 받아 생겨난 것은 자동학습기계teaching machine였다. 사실 이러한 고안품은 책을 ‘대화’라는 방향으로 개조한 것이다. [491p]


- 실제로 영화는 노래나 글로 쓰인 말 같은 단일 미디어가 아니다. 그것은 색채, 조명, 음악, 연기, 대사 등을 맡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작업한 집합적 예술 형식이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만화 등도 집단적 활동을 하는 전체 팀과 기술의 위계적 구조에 의존하는 예술 형식이다. 영화 이전에 있었던 이와 가은 집단적 예술 행위의 가장 뚜렷한 예는 공업화의 초기이던 19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대규모 교향악단의 탄생이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공업이 차츰 전문화, 파편화됨에 따라 판매와 공급에서 팀워크가 더 많이 요구되었다. [492p]


30 라디오: 원시 부족의 북
- 뜨거운 미디어와 차가운 미디어를 비교해서 말한 것에 비추어 본다면, 라디오는 뜨거운 미디어라는 정의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클루언의 그런 정의를 잘 살펴보면, 그가 강조하는 것은 라디오가 각기 상이한 문화에서 다른 효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즉 뜨거운 미디어냐 차가운 미디어냐의 문제는 오직 그 미디어가 도입되는 문화가 문자 문화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혹은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것이다. [500p]


- 문자 문화적 능력에 의해 인간의 내적 삶이 분절되고 시각적인 것들로 변환되는 심리적 전환 없이는, 축적된 생산의 지속적인 이동 그리고 영구적으로 가속화된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을 보장해 주는 경제적 "도약"은 있을 수 없다. [506p]


- 미디어의 변형하는 힘은 설명하기가 쉽지만, 이 힘이 왜 무시되고 있는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테크놀로지의 심리적 작용이 일바적으로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스트레스와 충격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의식의 어떤 본질적인 마비를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511p]


- 비록 미디어가 메시지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통제는 프로그램 편성 영역을 넘어선다. 규제는 언제나 "내용"에 대한 것으로 향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또 다른 미디어다. 책의 내용이란 구술된 말이듯이, 신문의 내용은 글로 된 진술이고, 그리고 영화의 내용은 소설이다. 그러므로 라디오의 영향은 그 프로그램 편성과는 완전히 독립된 것이다. 미디어에 대하여 전혀 연구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인데, 이 사실은 문자 문화적인 인간의 글쓰기 습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토착민이 "당신은 왜 쓰는가? 기억해 두면 되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미디어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려면 상업적 이해에 관계된 사람들은 변함없이 중립적 전략으로서 "오락"을 선택하는 것이다. '눈 감고 아웅 하는' 방법들 중 이보다 더 굉장한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이런 방법이 그 어떤 미디어라 하더라도 그것이 최대한 보급될 수 있게 보장하기 때문이다. 문자 문화적인 사람들은 신문, 라디오, 영화를 논쟁하거나 견해를 표명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결국 신문, 라디오, 영화뿐만 아니라, 책의 기능도 축소될 것이다. 상업적인 오락 전술은 정신생활과 사회생활 모두에 동일하게, 모든 미디어가 미치는 영향의 속도와 힘이 최대치가 될 수 있게 보장해 준다. [513p]


31 텔레비전: 소심한 거인
- 텔레비전 출연자로서의 성공 여부는 낮은 압력으로 다가가는 스타일을 갖출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비록 그 사람의 저압 연기를 내보내는 것은 상당히 높은 압력의 조직이지만 말이다. [522p]


- 라디오는 청취자의 참여를 텔레비전만큼 요구하지 않는다. 라디오는 배경음으로서, 또는 다른 소음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이용되기도 하는데, 영리한 10대들이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라디오를 이용할 때가 바로 이런 경우다. 텔레비전은 배경의 역할을 할 수 없다. 텔레비전은 당신을 끌어들인다. 우리는 텔레비전과 함께해야만 한다. [524p]


- 텔레비전이 등장한 뒤로는 정말 많은 것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 영화뿐만 아니라 전국적 규모의 잡지 또한 이 새로운 미디어로부터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심지어 만화책까지도 크게 쇠퇴했다. 텔레비전의 등장 이전에, 미국인들의 독서력이 낮은 것에 대한 많은 우려가 있었다. 텔레비전의 등장 이전에, 미국인들의 독서력이 낮은 것에 대한 많은 우려가 있었다. 텔레비전이 등장한 이후,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지각의 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딴사람이 된 것이다. [524p]


- 텔레비전 영상은 1초 동안 300만개의 점을 시청자에게 보낸다. 시청자는 그중 단지 수십 개만 받아들이는데, 그것으로 영상을 구성하는 것이다.
영화의 이미지는 1초 동안 수백만 개가 훨씬 넘는 데이터를 제공한다. 영화관객은 시각적 인상을 구성하기 위하여 텔레비전을 볼 때처럼 엄청나게 데이터를 삭감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에 영화를 볼 때 사람들은 전체 화상을 이미 완성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텔레비전 모자이크를 볼 때, 그 영상이 기술적인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점들을 쇠라나 루오의 패턴과 같은 추상 예술로 재구성한다. 만약 기술이 진보되어 텔레비전 영상의 질을 영화가 주는 데이터의 수준까지 끌어올린다면, 이와 같은 일은 모두 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우리가 원근감과 빛과 그림자와 같은 세세한 사항들을 추가하게 되면 만화를 바꿀 수 있을까?” 그 답은 “예”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미 만화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진보된” 텔레비전 역시 더 이상 텔레비전이 아닐 것이다. 지금의 텔레비전 영상은 빛과 그림자로 된 점들의 모자이크 그물눈인데, 영화화상의 질이 극히 낮은 경우라 하더라도 영화 화면은 결코 이런 것이 될 수 없다. [526~527p]


- 그러나 고정된 시점과 3차원적 시각에 익숙한 문자 문화적 사람들이 2차원적 시각의 특성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만약에 그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그들은 추상 예술을 대하면서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또 제너럴 모터스 사는 자동차 디자인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며, 사진 잡지는 지금 읽을거리와 광고의 관계 때문에 골치 아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텔레비전 영상은, 매 순간 우리가 모든 힘을 다해 감각을 참여시켜 그물눈 속의 공간을 “닫아” 주기를 요구한다. 이와 같은 참여는 엄청난 운동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촉각적인 것이다. 촉각성이라는 것은 피부와 사물에서만 일어나는 개별적 접촉이라기보다는 감각 간의 상호 작용이다. [528p]


- 미디어들의 효과는 개별적으로 따로 고립시켜 놓고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미디어를 연구할 때에는 모든 가치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530p]


- 가장 최근에 일어났으며, 가장 눈부신 우리 중추신경의 전기적 확장인 텔레비전의 영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어렵다. 텔레비전은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을 “체계적”으로 또는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참으로 비현실적인 일일 것이다. 그 대신에, 거의 무작위로 수집된 데이터의 복잡한 형태gestalt로서의 텔레비전을 “보여 주는” 것이 훨씬 실현 가능한 일일 것이다.
텔레비전 영상은 낮은 밀도 혹은 정세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영화와는 달리, 대상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줄 수 없다. 이 차이는 옛날의 필사본과 인쇄된 글자의 차이와 유사하다. 인쇄는 그때까지 산만한 문헌들로 존재하던 곳에 높은 밀도와 획일적인 정확성을 가져다주었다. 인쇄는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나 수학과 연관 짓는, 정확한 측정과 반복 가능성에 대한 기호를 가져왔던 것이다. [532~533p]


- 조안 우드워드Joanne Woodward는 어느 인터뷰에서 영화배우일 때와 텔레비전 배우일 때의 차이점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영화에 출현했을 때에는 사람들이 ‘저기 가는 사람은 조안 우드워드야’라고 속삭이더군요. 텔레비전에 출연하게 된 요즈음에는 ‘저기 가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라고 말하더군요.” [534p]


- 모드 사람은 그가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경험한다. 게다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경험이다. 특히 미디어나 테크놀로지와 같은 집합적인 문제들이 관련되는 곳에서, 개인은 거의 불가피하게 자시에게 가해지는 효과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535p]


- 모자이크적 그물눈인 텔레비전이 예술에서 원근법을 조장하지 않는 것처럼, 생활에서는 선형적인 것을 조장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이 등장한 뒤로, 공업계에서 조립라인은 사라져 버렸다. 경영에서도 직원들의 인사 계열이 사라졌다. 댄스파티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남자들의 줄도, 당의 정책 노선도, 손님을 맞는 주인들의 줄도, 나일론 양말 뒤쪽의 연필 선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540p]


- 애드거 앨런 포는 저널리즘의 세계에 나타난 전신 모자이크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이용해, 상징시와 추리 소설이라는 두 가지 놀라운 발명품을 만들어 냈다. 상징시나 추리소설은 독자에게 “스스로 하기” 식의 참여를 요청한다. 포는 불완전한 이미지나 과정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를 창조적인 과정에 개입시킨 것이다. 보들레르, 발레리, 앨리엇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이것에 탄복하여 그 뒤를 따랐다. 포는 전기의 역동적인 힘이 창조의 과정에 대중이 참가함으로써 나오는 힘의 한 종류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동질화된 소비자들은 추상 시, 추상 회화, 추상적 구조를 가진 그 밖의 다른 예술 작품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그 작품을 완성할 기회가 주어지면 불평을 한다. 그런데 포는 깊은 참여가 전신 모자이크의 출현 바로 이후에 이루어진 것임을 그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보다 더 선형적이고 문자적인 교양이 높은 사람일수록 새로운 예술을 “쉽게 말해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543p]


- 획일적인 활자의 선에 맞춰 앞으로 달려가는 오랜 문자 문화적 습관은 갑자기 깊이 읽는 독서법에 밀려났다. 물론 깊이 읽는 독서법은 그와 같이 인쇄된 말에는 적절치 않다. 말을 깊이 탐색한다는 것은 인쇄 문화보다는 구술문화와 필사본 문화 본래의 전형적 특색이다. [546p]


- 영화처럼 야구는 개인적인 기교와 스타플레이어를 내세우는 뜨거운 미디어였다. 진정한 야구팬은 타자와 투수가 수많은 게임에서 거둔 성적에 관한 통계 기록을 갖고 있다. 끊임없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 주식, 채권 그리고 생산과 판매의 기록들로 이루어진 공업 도시에 소속된 게임이 야구인데, 통계 숫자보다 더 뚜렷하게 이 게임이 제공하는 독특한 만족감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야구는 뜨거운 인쇄물과 영화 미디어가 처음 시대에 속하는 게임이었다. [547p]


- 무엇이든지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사물을 이해하려면 파고들어야 하는 텔레비전 세대에게 이것은 확실히 서툰 광고일 것이다. 텔레비전 시청자는 풍부한 촉각적 효과를 탐하는 마음이 매우 강하므로 차라리 스키를 타려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548p]


- 과거 10년 동안의 의복과 스타일은 매우 촉각적이고 조각과 같은 형태여서, 텔레비전 모자이크의 새로운 성격을 과장된 형태로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신경이 털이 덥수룩한 모양을 한 패턴으로 확장된 텔레비전 영상은 의복, 헤어스타일, 걸음걸이, 동작에서도 그것과 관련된 이미지의 홍수를 불러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압축된 내파에 이른다. 그것을 의복과 공간이 비전문화의 형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방, 물건, 대상을 특정 목적에 맞게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목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인데, 한마디로 아이콘적인 것이다. 음악, 시, 그림에서, 촉각적 내파는 일상적인 대화에 가까운 성격을 고집하는 것을 의미한다. [549~550p]


- 이제까지 텔레비전 영상이 잠재의식에 미치는 힘을 장황하게 예를 들어 가며 살펴보았는데, 이쯤 되면 “텔레비전 같은 새로운 미디어가 잠재의식에 가하는 작용에 대항해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면역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나올 듯하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우둔하다 싶을 정도로 완고함을 가지고 그것을 굳게 부인하며 새로운 경험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하나의 미디어가 지닌 특유한 힘에 대하 가장 명료한 이해라는 것도, 주어진 경험의 패턴에 순응하게 만드는 일상적인 감각들의 “폐쇄”를 전혀 막아설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551~552p]


- 텔레비전에 받아들여지는 타입과 받아들여지지 않는 타입을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방식이 있다. 겉모습에서 역할과 지위가 뚜렷이 드러나는 사람은 텔레비전에 어울리지 않는다. 교사처럼 보이기도하고, 의사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한 비즈니스맨처럼도 보이는 등, 동시에 십여 가지의 일을 하는 사람 모두로 보이는 사람이 텔레비전에 어울린다. [554p]


- 텔레비전과 학습 과정의 관계에 대해 물으면, 분명히 그 답은 텔레비전 영상이 참여, 대화, 깊이를 부각시킴으로써, 교육에서의 긴급 대책이 필요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모든 교실에 텔레비전이 있게 될 것이냐 아니냐는 작은 문제에 불과하다. 혁명은 이미 가정에서 일어났다. 텔렙비전은 우리의 감각 생활과 정신 작용을 바꾸어 놓았다. 텔레비전은 모든 것을 깊이 있게 경험하고자 하는 취향을 만들어 냈는데, 그러한 취미는 자동차의 스타일뿐만 아니라 언어 교육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556p]


왜 텔레비전 아이들은 앞을 내다볼 수 없는가
- 사람들이 텔레비전 영상을 통하여 깊은 경험에 몰입하게 된다는 사실은 시각적 공간과 모자이크 공간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이 두 형식을 구별하는 능력은 서구 세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흔히 하는 말처럼, 장님의 나라에서 외눈박이는 왕이 아니다. 외눈박이는 환각에 빠진 미치광이로 간주된다. 고도로 시각적인 문화 속에서 공간적인 형식들이 지닌 비시각적 속성을 알리는 것은, 장님에게 시각을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558p]


- 문자 문화에서 유래되 연속성, 획일성, 연결성에 대하 시각적인 강조는, 우리를 파편화된 반복 행위를 통한 연속성과 선형성을 실행하는 거대한 기술적 수단과 맞닥뜨리게 만들었다. 고대 세계에서는 이러한 수단을 벽이나 도로에 사용하는 벽돌에서 발견했다. 반복적, 획일적인 벽돌은 도시와 제국의 도로나 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는데, 이것은 문자를 통해 이루어진 시각의 확장이다. 벽돌로 쌓은 벽은 모자이크적 형태가 아니다. 그리고 모자이크적 형태 또한 시각적 구조가 아니다. 모자이크적인 것은 춤처럼 눈에 보이긴 하지만, 시각적으로 구조화될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시각적인 힘의 확장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자이크적인 것은 획일적이지도, 연속적이지도, 반복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촉각적 텔레비전 영상과 비슷하게, 비연속적, 비대칭적, 비선형적이다. 촉각에서는 모든 사물이 갑작스럽고, 뒤집어져 있고, 근워적이고, 따로 떨어져 있고, 불가사의하다. [559p]


- 현대 예술의 비시각적인 모자이크적 구조는, 현대 물리학과 전기적인 정보 패턴들처럼, 직접 개입하지 않고 떨어져서 보는 듯한 자세를 허용하지 않는다. 촉각이 그러한 것처럼, 텔레비전의 영상의 모자이크적 형태 역시 존재 전체의 심층적 참여와 개입을 요구한다. 이에 비하여 문자 문화는, 심리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시간과 공간의 획일적인 조직화에 이르기까지 시각의 힘을 확장함으로써, 보는 사람에게 관찰 대상으로부터의 분리와 비관여의 힘을 부여하였다. [559~560p]


32 무기: 아이콘의 전쟁
- 사실, 전쟁은 서로 대등하지 않은 테크놀러지들 사이에 평형상태를 가져다주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모든 새로운 무기의 발명은 사회에 대한 재난이며, 군국주의가 바로 문명을 파괴하는 가장 흔한 원인이라는 토인비의 어리둥절한 관찰도 설명해 준다. [574p]


- 한편으로는, 새로운 무기 또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위협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같은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받을 때에는 균일화된, 평등주의적 패턴의 격렬한 경쟁이 시작된다. 이것을 막기 위해 과거에는 사회 계급과 카스트라는 전략이 종종 이용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카스트와 계급은 사회적 변화의 속도를 줄이는 기법들인데, 이것은 부족적 사회의 정체를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두 개의 시대, 즉 탈부족화 시대와 재부족화의 시대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있는 것 같다. [574p]


33 자동화: 생활 배우기
- 자동화가 이루어지면, 직능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역할이 다시 나타난다. 교육에서, 그리고 데이터를 정리, 배열하는 것에서 지난 몇 세기 동안 전문화가 강조되어 왔지만, 전기에 의해 즉시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된 현대에는 전문화가 다시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동화는 정보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의 세계에서 직능을 없애 버릴 뿐만 아니라, 학습의 세계에서 교과목을 없애 버린다. 그러나 그것이 학습의 세계를 없애지는 않는다. 미래의 노동은 자동화 시대에서 "살아가는 것 배우기"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기 테크놀로지 일반에서 흔히 나타나는 패턴이다. 이것은 문화와 테크놀로지, 예술과 상업, 일과 여가라는 낡은 이분법을 없애 버린다. [577p]


- 전기는 생산에서든 학습에서든 과정을 가장 중요시할 뿐만 아니라, 에너지가 작용하는 과정이라는 장으로부터 에너지원을 따로 떼어 놓는다. [577p]


- 어떤 교과목이든 깊이 연구하면 다른 교과목과 연계되기 마련이다. 정수론, 기호 논리학 그리고 문화사라는 관점에서 가르친다면, 초등학교 3학년의 산수나 중학교 3학년의 수학이 그저 문제 연습일 수는 없다. 파편화되고 상호 관련을 갖추지 못한 지금의 교육 패턴이 계속 유지된다면, 우리 학교의 교과 과정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이버네이션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을 양산할 것임에 틀림없다. [578p]


- 우리의 중추신경체계와 공통되는 점을 아주 많이 가진 전 지구적 규모의 네트워크를 확립하는 것이 바로 전기 시대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우리의 중추신경체계는 전기적 네트워크일 뿐만 아니라, 경험이 하나로 통일되는 장을 구성해 낸다. 생물학자가 지적했듯이, 뇌는 모든 종류의 인상들과 경험들이 서로 교환되고 번역되는 상호 작용의 장인데, 이 작용이 우리를 전체로서의 세계에 반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전기 테크놀로지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산업과 사회내의 넓은 영역에 걸친 극도로 다양한 작용은 급속히 통일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579p]


- 자동화는 조작의 파편화와 분리라는 기계적 원리가 확장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기의 순간적 성격이 기계의 세계에 침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자동화에 관여된 사람들은 자동화가 행동의 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사고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수많은 조작들을 즉각적으로 동시에 행하기 때문에, 조작들이 선을 따라 연속적으로 행해지게끔 배치되는 오래된 기계적 패턴은 사라지게 되었다. 댄스파티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남자들의 줄이 없어진 것처럼 조립 라인도 없어졌다. [580p]


- 자동화는 진짜 "매스 프로덕션"을 가져온다. 규모가 크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전체를 포괄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는 "매스 미디어"의 특징이기도 하다. 매스 미디어 역시 그 수용자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매스 미디어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거기에 동시에 관여되기 때문에 매스 미디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화 아래에서의 상품 산업은, 순간적인 정보의 상태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느냐에 따라 오락 산업과 서로 동일한 구조적 특성을 공유하게 된다. 자동화는 생산뿐 아니라 소비와 마케팅의 모든 국면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소비자는 자동화 회로 내에서 생산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모자이크적 시눔ㄴ의 독자가 자기 자신만의 뉴스를 만들거나, 독자 자신이 자기의 뉴스인 것과 똑같은 것이다. [581p]


- 기계적 시스템에서는 이런 경우가 없었다. 손과 망치, 물과 물레, 말과 마차, 증기와 피스톤, 어느 것이든 간에 동력과 작용한 항상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전기는 기묘한 융통성을 가져왔다. 그것은 빛이 전체 장을 비추지만,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지시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바로 그 빛 덕분에 다양한 일이 가능해졌는데, 전기의 힘도 마찬가지다. 빛은 정보 그리고 지식과 동일한 비전문화된 에너지 또는 동력이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전기와 자동화 사이의 관계인데, 왜냐하면 에너지와 정보 둘 다 아주 많은 방식으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582p]


- 유기적 상호작용이라는 말은, 유기체의 어느 부분이든 와해되면 전체가 치명적인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뜻한다. [586p]


- 전문화하는 것이 이미 하나만의 전문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자동화 또는 전기가 갖는 논리의 일부분이다. 자동화된 기계는 전문화의 방식에 따라 작동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한 방향으로 한정되어 있지는 않다. 사람의 손과 손가락이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동화된 기계는 전기 이전의 기계적 테크놀로지 단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적응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든 간에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덜 전문적이게 된다. 공룡보다 인간은 더 복잡하지만, 덜 전문적인 것이다. 옛날의 기계적 조직은 더 커지고 더 전문화될수록 더 효율적이게끔 고안되었다. 그러나 전기에 의한 자동화 기계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자동차 흡입관을 제조하는 새로운 자동 기계는 사무용 책상 두세 배 정도의 크기로 되어 있다. 컴퓨터 제어판은 성서낭독대 크기로 되어 있다.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나사를 만드는 공구나, 고정 장치, 작업대는 없고, 여러 가지 용도에 쓰이는 그리퍼, 벤더, 어드밴서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이 기계를 가지고 보통 길이의 파이트뿐 아니라 80가지의 흡입관을, 같은 종류의 흡입관80개를 만드는 속도로 쉽고 값싸게 연속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전기에 의한 자동화가 가진 특성은, 여러 가지 용도에 익숙하게 쓰일 수 있는 사람손의 적응 능력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프로그래밍은 이제 프로그램을 끝없이 변화시킬 수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된 자동 "기계"는, 한쪽 방향으로 움직이는 기계적인 구식 원리와 구별되는, 전기에 의한 피드백, 즉 대화의 패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590~591p]


- 역설적이긴 하지만, 자동화는 인문학적 교양 교육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자동제어체계의 전기 시대는 앞선 기계 시대의 기계적이고 전문가적인 노예 상태에서 사람들을 갑자기 해방시킨다. 기계와 자동차가 말을 해방시켜서 오락의 세계 속으로 던져 넣은 것처럼, 자동화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 해방에 대한 대가로, 내부의 자원을 이용해 스스로 고용을 창출해 내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위협을 갑자기 받게 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는 필연적인 운명처럼 보인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기계 시대의 단편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에 의존해 왔는가를 알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수천 년 전, 식량 채집을 하던 유목민적이었던 인간은 고정적이고 비교적 정착적인 일을 하게 되었다. 전문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글쓰기와 인쇄의 발달은 그 과정상의 주요한 단계들이었다. 때로는 "문이 무보다 강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문자 문화인들은 행동의 역할에서 지식의 역할을 분리시킴으로써 매우 전문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기와 자동화의 등장으로 인해, 파편화된 과정이라는 기술이 갑자기 인간적인 대화와 인류의 통합을 전반적으로 고려해 달라는 요구와 융합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인간은 지식을 채집하는 유목민이 된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전례가 없었을 정도로 유목적이며, 전례가 없었을 정도로 풍부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파편화된 전문화로부터 전례가 없었을 정도로 자유로워졌으며, 그리고 또한 사회의 전체과정에 전례가 없었을 정도로 관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기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중추신경체계를 전 세계로 확장하고, 모든 인간 경험을 순간적으로 상호 관련시키기 때문이다. [592~593p]


- 이처럼, 자동화에 숨어 있는 사회적 그리고 교육적 패턴은 자기 고용과 예술적 자율성이라는 패턴이다. 자동화가 전 세계적 규모의 획일화를 가져온다고 놀라 당황하는 것은, 이제는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기계적 규격화와 전문화를 미래에 투사한 것이다. (-각주 이 마지막 결론은 매클루언을 둘러싼 여러 논란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를 기술유토피아주의의 대명사로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처음부터 읽어 온 사람은 알겠지만, 이 부분만을 들어 전기, 전자 미디어를 그가 예찬했다거나 낙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클루언이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미디어들의 총체적인 장 혹은 상호 연결과 상호 작용이 기본이 되는 미디어의 생태계에 대한 그의 강조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이 문단은 문자 문화적인 시각의 연장으로서 기계적 규격화와 전문화에 강방적으로 포섭된 사람들의 눈에는 아마도 전기 미디어에 대한 예찬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5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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