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노만 브라이슨 외 | 옮긴이 / 김융희, 양은희
기호학과 시각예술
지은이 / 노만 브라이슨 외
옮긴이 / 김융희, 양은희
펴낸곳 / 도서출판 시각과 언어(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256-5)
첫판 인쇄 / 1995년 3월 10일
첫판 펴냄 / 1995년 3월 20일
옮긴이의 글
- 소위 "미술사의 보편성" 문제가 대두된 것은 현대 생활에서 시각적 경험의 질과 양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중매체를 통해 매일같이 쏙아지는 이미지 군단들은 생활하는 순간순간마다 우리 주의를 날아다니고 미술관, 화랑에서 여는 미술전시 역시 양적으로 팽창하여 새로운 이미지들에 대한 노출의 정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서 자연히 미술에 맥락을 부여하는 미술사의 역할이 이미지 제작자인 미술가 뿐만 아니라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가 증가한 감상자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viii p]
- 게다가 과거의 미술이라는 장르를 이루는 제분야들을 넘어서서 사진의 역사가 정리되고 영화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됨으로써 이미지 해석의 위상에 대한 시각이 확립되었고-물론 그동안 해석의 문제는 꾸준히, 그리고 조금씩 언급되기는 했지만-, 이에 미술작품에 대한 논의는 자연히 이들 분야와 연계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ix p]
- 기호학은 미술작품을 하나의 기호로 보며, 따라서 이미지는 해석 대상으로 변한다. 이미지를 해석하려는, 즉 읽어내려는 시도는 바르부르그 학파의 상징과 모티브를 해독하는 비교적 단순한 작업과는 달리 해석자의 위치에 따라 맥락이 형성되는 수용자 중심의 관점을 제공한다. 기호학의 이미지 읽기는 반직관적이다.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특정 순간에 갑자기 탄성을 지르면서 작품을 지각하는 지각론Perceptualism적 읽기와는 매우 다르다. 이미지는 고립된 지각 영역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호로서의 이미지 해석이 가능한 것은 사회 구성원들 간에 축적된 약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사회적 인식 약호 속에 기호의 운용 능력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작품해석이란 미술가가 혼자서 비밀스럽게 만든 기호를 수용자가 은밀하게 혼자 힘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가를 둘러싸고 있는 지적, 심리적, 사회적 약호뿐만 아니라 수용자의 정신을 이루고 있는 여러 약호들이 상호작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ix~x p]
- 미술사에서도 동일한 적용이 가능하다. 미술사의 공식적 기록은 분명히 일부 사람들에 의해 일부 작품만을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기록자의 한정된 지식과 관점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미술사는 특정 집단의 이익의 희생물이 되기도 한다. [x p]
- 문헌 발굴과 연구가 미술사의 주요 방법론 중에 하나라면 어느 한 집단에 치우쳐 기록된 문헌들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비판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기호학 이론은 수용자의 응시gaze를 결정하는 요소를 설명할 때 페미니즘, 또는 사회적 성 연구, 그리고 사회 비판적 접근의 효율성을 인정한다.
기호학은 미술작품을 하나의 대상으로 완전하게 결정된 것이 아닌, 수용자의 해석이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유기체적 존재로 본다. 따라서 작품을 읽는 맥락은 복수적일 수밖에 없다. 작품이 태어난 환경, 즉 문화 전반에 걸친 활동들과 과학적, 정치적, 종교적, 군사적 실천들, 그리고 법적, 계급적, 성적, 경제적 구조들 모두 이 맥락에 포함된다. [x~xi p]
- 이 과정의 첫 단계는 가시적, 물리적 대상, 즉 모래사장 위의 어떤 형태이다. 두번째 단계는 이 형태를 기호로 인식하는 수용자, 또는 기호 사용자이다. 그리고 세번째 단계는 기호 사용자가 그 형태가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파악하는, 즉 기호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기호가 유용한 것은 그것이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남자가 내린 첫번째 해석은 '이 섬 어딘가에 사람이 살고 있구나'라는 것이다. 두번째 해석은 '이제 난 더 이상 고독하게 살지 않을 거야'이다. 첫번째 기호(발자국)와 첫번째 해석(인근에 사람이 있다)이 결합되어 또 하나의 기호(근처에 있는 어떤 사람의 발자국)가 되어 두번째 해석(더 이상 고독하게 살지 않을 거야)이 가능하게 된다. [xi p]
기호학과 미술사 /미크 발, 노만 브라이슨
- 기호학, 즉 기호와 기호 사용 이론의 기본 성격은 반현실적이다. 인간 문화는 기호-각각의 기호는 그 자체와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을 상징한다-와 그 기호들의 의미를 고안하기에 바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호 이론의 핵심은 기호 제작과 해석이라는 이 영원한 과정 속에 포함된 요소들을 정의하고 우리로 하여금 문화적 활동의 여러 영역 속에 퍼져있는 그 과정을 파악하도록 도와주는 개념적 도구를 개발하는 것이다. [17p]
- 여기서 문제는 '컨텍스트context'라는 용어 자체에 있다. 정확히 말해서 이 말은 '텍스트text'라는 어근을 가진 반면 그 접두어는 이것을 '텍스트'와 구별시키기 때문에, '컨텍스트'는 모든 텍스트에 영향을 미치는 해석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에서 여유있게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이다. -중략- 다시 말해 컨텍스트는 텍스트 자체이며 따라서 해석을 요하는 기호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실증적 지식으로 간주하는 것은 해석의 선택에서 나온 산물이다. 미술사가는 항상 자신이 산출하는 구성물 속에 존재한다. [18~19p]
- 자신들의 선호 여부에 상관없이 미술사가들이 고찰해야 하는 것은 오래 전에 사라진 한 시대의 깔끔하게 다듬어진 산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효과와 영향으로서의 작품이다.[19p]
I 컨텍스트
- 지금 현재로서는 '구조주의' 시대에 있어서 기호학은 종종 기호의 의미가 어떤 고정된 체계 내에서 구도가 잡힌 일군의 내적 대립과 차연으로 인해 결정된다는 가정 위에서 적용하였다고 말해두는 것이 좋겠다. 예를 들자면 특정 언어의 단어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해석자는 실제 발화(파롤parole)를 벗어나서 언어 전체를 동시에 통괄하는 범지구적 규칙들(랑그langue)에 관심을 돌렸었다. 그 결정적인 움직임은 공시적 체계를 불러내어 고립시키고 그 통시적 측면을 한편으로 밀쳐두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추구되었던 것은 구조였다. 이러한 기호 체계의 이론적 부동성에 반대해서 시작된 비평은 기호체계의 근본적 요인이 구조주의적 접근, 즉 이 체계의 지속적인 기호 과정과 역동주의의 측면들로부터 배제되어 왔다고 지적했따. 기호 과정을 고정된 부동의 체계들의 산물로 이론화하는 것으로부터 시간 속에 전개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변화한 것은 구조주의 기호학이 후기 구조주의에 양보한 몇 가지 사항 중의 하나이다. 특히 데리다는 어떤 특수한 기호의 의미가 공시적인 체계의 내적 작용에 의해 고정된 기호 의미에 정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의미는 어떤 기호나 기표에서 다음의 것으로 이동하는 중에, 기호 과정을 향한 출발점, 기호 과정이 단절되어 기호의 의미가 완전히 '달성되는' 결정의 순간도 찾아볼 수 없는 지속적인 이동에 일어난다. [24p]
- 특정 미술 작품을 그 고유의 것으로 만든 컨텍스트의 결정 요소를 설명하는 도중에 미술사가가 그 컨텍스트를 함께 구성하는 몇 가지ㅏ 요인들을 제시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이 숫자는 더 늘어날 수 있으며 그 컨텍스트가 확대된다는 것은 납득할 만한 사실이다. 확실히 독자의 인내, 미술사 해석자의 공동테가 추종하는 관습들, 출판 비용의 제한, 종이 비용 등의 요소들에 의해 결정되는 삭감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들은 컨텍스트적 측면들의 계산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외적인 위치에서 작용할 것이다. 추가되는 새로운 요소는 컨텍스트의 설명을 지지하고 그것을 보다 완성된 거승로 다듬어 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보충 결과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 목록의 무한성, 즉 그 폐쇄 불가능성일 뿐이다. '컨텍스트'는 항상 연장될 수 있다. 그것은 '컨텍스트'가 제한을 가하고 통제해야 하는 텍스트나 미술 작품의 기호 과정에 작용하는 동일한 유동성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25p]
- 기호학자들은 텍스트/컨텍스트 구분의 복잡성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면서 '텍스트'와 '컨텍스트' 용어 사이의 부호 또는(/)에 대해 일종의 보호 신청을 내놓았다. 분리를 의미하는 이 부호는 사실 그 두 가지를 분리할 수 있으며 그것들이 독립적인 용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미술사 담론 내에는 많은 종류의 상황이 있어서 자세히 고찰하게 되면 그러한 독립이 쉽게 가정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신하기 어렵게 될 지도 모른다. 종종 당연시 여겨지는 '컨텍스트'와 '텍스트'(또는 '미술 작품')간의 관계를 정리하자면 역사는 유물보다 선행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컨텍스트는 (원인이 결과를 낳듯이) 텍스트를 생성하고 산출하며 생산한다. 그러나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의)연결은 사실 그 종점에서 추론되어 니체가 '연대기적 역적'이라고 명했던 종류의 대체 용법으로 이어진다. "어떤 이가 고통pain을 느낀다고 가정하자. 이것 때문에 그는 원인을 찾게 되고 아마도 그는 pin을 찾으면서 pin-.pain이라는 인과적 연결을 생성하기 위해 지속적 또는 현상적인 순서, pain.-pin의 순서를 연결시키기도 하고 역전시키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원인으로서의 pin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일어난 다음에 자리잡는다. 미술사 분석에서 그러한 대체 용법이나 '연대기적 역전'에 비교할 만한 경우가 발견될까?
그 대답은 '그렇다'일 가능성이 많다. [26p]
-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선택된 예 중에서 회화는 어떤 의미에서 미술사가가 묘사하려는 형식을 예상했다는 사실, 즉 미술사의 작업은 "그것이 조명하려는 대상의 구조에 의해 예견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미술 작품이 위치한 '컨텍스트'는 사실상 수사학적 작용, 즉 역전과 대체 용법에 의해 작품 자체에서 생성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이 컨텍스트에 의해 생성된 것이지 그 컨텍스트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더구나 보다 심화된 수사적 기교에서 미술 작품은 이제 그 작품을 위해 생성되는 컨텍스트가 올바른 것이라는 증거로서 작용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검증 효과verifiacation effect'(그 컨텍스트의 설명은 사실이어야 하며 회화는 그것을 증명한다)를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경우 시각 텍스트의 요소들은 텍스트에서 컨텍스트로 이동하고 다시 돌아오지만 그러한 순환의 인식은 텍스트-부호-컨텍스트의 기본적 구분때문에 방해받는다. 이 부호의 작용은 기호학의 경우에 텍스트와 컨텍스트 간의 엄청난 단절의 창출로 이루어지며 분리되었던 양쪽을 공평하게 결합하는 결과가 뒤따른다. [27p]
- 제시된 요인들은 그 수가 많을 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모두 종류의 영역에 속하 ㄹ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미술 작품에 도달하며 단일하지만 다양한 인과적 선이나 연쇄의 종결로서 파악된다. 대답을 요하는 질문은 "어떤 요소들이 현재의 미술 작품을 만들었는가"였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일부 집중된 서술이 나올 것이라는 점은 적절하며 불가피하다. -중략-
기호학이 여기서 질문하려는 것은 집합의 개념, 형태이다. 확실히 그 모델은 질문의 대상이 단일하며 그 자체로 완결되며 자기 목적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적합하다. 모든 실마리는 탐정 활동처럼 한 가지 결과를 향해 몰려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된 문제는 미술 작품이 기호의 작품이라면 그 구조는 사실상 단일하지 않고 반복적이라는 점이다. 단일한 사건들은 공간과 시간의 한 지점에서만 발생한다-즉 시골집 파티에 온 손님이 서재에서 살해되었다든지, 대헌장은 1215년에 제정되었다든가, 그 그림은 작가의 서명이 들어 있으며 액자 안으로 들어 있다는 등. 그러나 기호는 정의상 반복적이다. 기호는 컨텍스트의 복수성으로 들어가며, 미술 작품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다른 관객에 의해 구성된다. 기호의 생산은 언표enunciation(개인이 언어를 구사하는 행위, 혹은 발음의 흔적이나 표지. 방브니스트에 따르면 자연언어가 담화를 변하게 되는 과정)enunciated 사이에 근본적인 단절을 내포하고 있다. 안표의 주체인 사람과 언의 사이뿐만 아니라 결코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언표의 환경과 언의 사이에서도 그러하다. 미술 작품은 일단 세상에 나온 다음에는 수용의 모든 변화에 복종해야 한다. [28~29p]
- 따라서 법적 의미에서 문제의 작품의 외양을 결정하는 것으로서의 '컨텍스트' 개념은 기호학이 제시하는 '컨텍스트'의 개념과 다르다-한편으로 후자가 가리키는 개념은 기표의 정지할 수 없는 유동성이며 또 한편으로는 관람의 고정된 구체적 컨텍스트 내의 미술 작품의 구성을 가리킨다. '컨텍스트'가 과거에 선명하게 구분되는 시기 내에 있다면 '컨텍스트'를 현재의 컨텍스트성contextuality, 즉 현재의 미술사 담론의 작용이라고 간과해버릴 수도 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기호학이 특히 의문을 품고 있다. -중략- 의미란 항상 역사적, 물질적 세계의 특수한 장소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결정의 요인들이 필연적으로 전체성의 논리를 빠져나가더라도 '결정'은 인식되고 주장한다. 이와 유사하게 현재의 컨텍스트가 '컨텍스트'의 분석 속에 포함된다고 주장하는 기호학은 역사성의 개념을 거부하지 않는다. [30p]
II. 전송자
- 미술 작품의 작가는 반드시 우리가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이며 독자나 필자와 같이 그 자리에 실제로 고유 명사를 가진사람으로서 확고하고 거부할 수 없게 세상에 존재하는 살과 피를 가진 살아 있는(또는 한때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푸코가 지적하듯이 한 개인과 그의 또는 그녀의 고유 명사 간의 관계는 고유 명사와 작가성authorship 기능 사이에서 얻는 관계와 매우 다르다. 개인의 이름은 (영국에서 블로그가 말하듯이) 기술된 것이 아니라 지칭된 것이다. 그것은 그 본인에게 어떤 특정한 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의적이다. 그러나 작가의 이름(화가, 조각가, 사진작가 등)은 지칭과 기술 사이에서 유동적이다. 우리가 호머를 언급할 때 우리는 특정 개인을 지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리아드 또는 오딧세이의 파나소스 축제에서 광인들이 연극을 펼치는 텍스트의 저자로서 언급하며, 또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서사시, 예언시, 영웅시, 구술 유형, 운율 등등 그 목록은 무한정이다) 적용할 수 있는 '호머적인' 속성들, 즉 속성의 전 범위를 염두에 둔다. 'J. 블로그'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작가'는 작품, 가공물과 거기에서 펼쳐지는 복잡한 작용들 속에 존재한다. '컨텍스트'처럼 '작가성'도 우리가 단순히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공들여 생산하는 어떤 것으로 틀을 잡느 ㄴ정교한 작업이다. [31~32p]
- 블로그는 법정변론 원리의 세계에서 블로그의 존재를 가리키는 모든 물리적 흔적들의 근원이며 그 모든 흔적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다 포함된다. 법정변로은 모든 가능한 증거들, 심지어 가장 확신을 얻기 어려운 것조차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성'은 배타적인 개념이다. 한편에서 그것은 예술 작품의 한계를 정하는 작용을 하고 또 한편에서는 기록의 한계를 정하는 작용을 한다. 만일 작가가 물리적 행위자 블로그라면 우리는 블로그의 것이라고 인정되는 작품 중에서 블로그가 세상에 남겨둔 모든 낙서, 모든 기록된 그림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블로그의 기록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그 안에 그가 그의 생애에서 접했던 모든 환경의 흔적들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개념으로서 '작가성'은 결국 '컨텍스트'에 포함된 동일한 후퇴와 깊이두기를 포함하게 된다. 그리고 '작가성'은 실제로 작동하면서 비수용이라는 주제에 관한 여러 변형을 통해 이러한 후퇴하는 조망(기억)을 다룬다. [33p]
- 우리 시대에는 그래픽 아트가 작가성(잡지의 많은 그래픽들이 서명을 담고 있다)과 익명성(다수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이의 신비스런 동요 공간을 점유한다. 사진 역시 비슷하게 구분되어 가끔 작가성의 기대를 가지며(예를 들어 작가성이 필수적으로 작용하는 미술관에 사진이 등장할 떄) 때로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일간 신문에 나오는 사진들). 이런 경계를 통괄하는 힘 중에는 경제 모형에서 비롯되는 것들도 있는데 그 이유는 현대적 의미의 '작가성'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소유 제도와 나란히 병행하여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개념은 저작권법의 역사와 밀접히 연과되어 법적 금전적 기능을 한다. [33p]
- 올바른 서사 또는 '구성하기emplotment'의 규칙에 의해, 미술 작품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세계에서 일어난 작가의 무수한 방랑의 그러한 측면들만이 관계있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작가의 흔적의 일부만이 권위있는 작품의 요소로서 취급될 것이다. 이 배타적인 움직임은 상호 협조적이며, '올바른' 서사는 보다 심화된 규약을 세울 것이다. [34p]
- 따라서 작가성은 컨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런 설명 배경에 불과하다. 조나단 컬러의 말을 풀어서 다시 말하자면 작가성은 소여된 것이 아니라 생산된 것이다. 작가성으로 간주되는 것은 해석 전략에 의해 결정된다. [34p]
- '작가' 개념은 비록 주어져 있는 것으로 가정되지만 바로 그 광범위한 작용의 산물과 목적인 일련의 관련된 속성들을 결합한다. 첫번째는 작품의 단일성이다. 두번째는 인생의 단일성이다. 세번째는 무수한 사건과 계속되는 환경, 그리고 한 개인이 점유하는 역할의 복수성과 주체의 위치에서 비롯되는 작가성의 담론이 일관성있는 단일한 주체를 구성한다. 네번째는 인생-과-작품life-and-work의 서사적 쟝르에서 주체의 인생을 작품에 부가함으로써 야기되는 이중으로 강화된 단일성이다. 왜냐하면 그 쟝르에서는 주체가 경험하거나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 그의 또는 그녀의 주체를 의미화하는 중에 발견될 것이기 때문이다. [35p]
- 미숧사에서ㅡ 그리고 특히 모노그래프monograph (주로 한 미술가를 집중적으로 초기부터 말기까지 작품과 일생을 연결하며 연구한 책)형식을 통해 인간-과-그의 작품을 서사하는 쟝르는 아마도 인문 과학 저술과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을 행사해 왔을 것이다. 이것이 관행이었을 정도로 저자-기능은 일련의 모든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들을 자연화하면서(그것들 중에는 천재, 남성적인 것으로서의 천재, 단일한 것으로서의 주체, 단일한 것으로서의 남성성, 표현적인 것으로서의 미술작품,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서의 진정한 작품이 있다) 그 학문 내의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작가/주체 비평의 위력을 아무리 많이 인정하더라도 이제는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작용하는 전략적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36p]
- 인문주의 담론들이 완전한 창조적 주체를 언급할 때 모더니즘 담론은 그 주체를 제거함으로서 즉 그 완전성을 공동화함으로써 미술사를 근대화시켰다.[36p]
- 지배적 인물은 더 이상 대유법-부분이 전체를 상징하는-의 그것이 아니라 환유법의 그것으로서 인접한 사건들을 서사적 연결체로 묶는다. '작가'는 기원이 아니라 사슬의 한 연결고리일 뿐이다. 그것은 폐기될 수 없는 연결 고리이며 그 서사는 논문-중개자-작가-작품을 잇는 연쇄 사슬을 움직이게 할 수행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수행자는 '자질이 없는' 인간 일 수 있다. 유일하게 요구되는 자질은 인과 관계의 연쇄에 그럴듯하게 참여하는 것이다. [37~38p]
- 서사적이 되려면 환유법은 시작과 종결이라는 두 가지 계기를 필요로 한다. 시작은 서술자인 미술사가의 특권이며 또한 본질적 기능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담론을 시작하는 것, 주체를 정하는 것, 환유적 연쇄를 시작하는 것이다. 종결은 '작가'의 본질적 기능이자 특권이다. [38p]
- [작가의 죽음]의 출현을 지켜 본 시기인 1970년대는 '제 1세대' 페미니즘 미술사가들이 규범 속에 여성 미술가들을 위한 자리를 요구하기 시작하던 시기와 동일하다. 여성 작가를 위한 작가성이 요구되자마자 경기의 규칙이 바뀌어져 '작가성'은 고졸적 개념으로 남게 되고 그 요구는 남성 비평가들에 의해 '퇴행적'인 것으로 해석되었다. 동일하지 않은 분야에서 '진보'는 항상 동등한 요소들로 측정되지 않는다. [작가의 죽음]을 지지하는 남성옹호자들에게 있어서 예컨대 셰리 레빈의 차용은 주체의 비판으로 간주될지도 모르며, 거기서 '주체'는 성을 전혀 내포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페미니스틀에게는 레빈의 작가성 거부가 "그의 작품의 '아버지'로서의 창작가의 역할, 즉 법으로 작가에게 부여된 부권을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으리라. [39p]
- 따라서 '작가'의 문제는 '컨텍스트'의 문제와 매우 다르다. 기호학은 미술작품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유행시키는 언어조차도 기호의 작품이라고 가정한다. [40p]
III. 수용자
- 기호학은 주로 수용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바르트가 표현하듯이 기호학 탐구는 "한 작품에 어떤 의미가 결정적으로 귀속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의미를 제공하거나 발견하지 않고 의미들이 생성되는 논리를 기술할 것이다." 기호학의 시각 예술 분석은 처음부터 미술 작품의 해석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지만 미술 작품이 어떻게 관객에게 인지되는가, 즉 관객 자신이 보는 것을 감지하는 과정을 탐구할 준비는 되어 있다. [41p]
- 약호에 접근하는 방법은 고르지 않다. 약호는 습득되는 것이며 한 집단 내에서도 다양하게 배포되며(변화하며), 어떤 집단이 시각 약호를 생성하는 능력을 통해 명료하게 그 자체를 정의하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즉 수용 조건에 주의를 돌림으로써 관람 약호를 독특하게 작용시키는 특정 집단이 노출될 때조차도 수용 분석은 여전히 그 약호들을 향한 접근 방식의 정도를 구분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실상 이상적 사례(문화적 기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 전문성, 자연스러움)를 균등하지 않은 과정으로 대체하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집단'이라는 용어가 인식되지 않는, 감지되지 않는 대유법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 집단의 약호에 접근하는 정도가 상이하며 다양한 수준의 능력과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전문성의 조건은 그들 모두에게 일반화되어 나타난다. [43p]
- 우리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보유 관객이 발굴될 수 없을 때 조차도 그곳에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기록상 부재하는 것들을 생존하는 것만큼 주목할 것. 실제 기록된 관객으로부터 보유 관객의 담론들이 그 고유의 특성을 산출하는 쪽으로 분석의 용어를 방향 전환할 것. 여성의 부제를 예로 들어 보자. 왕립 아카데미를 다룬 만화와 살롱전의 판화에서 여성은 가시적이며 능동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여성은 집단으로서 미적 조약과 공시적 취미의 기재에 접근을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관람 기록 흔적이 거의 없다. 더구나 '수용'을 조약, 팜플랫, 회고록을 쓴 소수의 남성 관객이 남긴 기록 흔적과 동일시하는 것은 기록 보관소가 이미 취한 배제 사실들을 재확인하는 역할밖에 못하는 대유법이다. 사실 그것은 그 배제 사실들을 보다 더 자연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기록들 내의 비판적 약호 분석은 그런 반복성을 피할 수도 있다. 그 분석은 기록 계획을 보다 포괄적인 수용의 역사로 연장하도록 요구하며 그 수용의 역사는 다른 관람의 약호들의 숨은 흔적들을 이상적으로 드러내고 그것들을 우리가 현재 주목하는 것에 부가한다. 규범이 그 자체의 베타성을 보유하므로 기록 보관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기록 보관서가 등한시했던 것들이 인정받도록 명백한 흔적과 공식 수용 기록에서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 [44~45p]
- 기호 분석은 수용의 컨텍스트들, 즉 기록 보관소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다양한 유형들을 산출했던 바라보기의 형식들에 작용하는 다원성과 예측 불가능성에 주의를 돌린다. 그 형식들을 둘러싸고 잇는 것은 다른 요구 사항들을 표명했던 일련의 다른 감추어진 과정들로서 이 과정들은 그 흔적이 억누르는 압력과 구별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은 그 후에 약호가 생기면서 서서히 도출된 현장 실천들을 대표하는 바라보기의 약호를 포함한다. 그 과정들은 또한 여태껏 거의 형성되지 않았던 약호들도 포함하는데 그것들은 그 일관성이 아직 자리잡지 못하고 그 에너지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급작스런 바라보기 방법들이다. 이들 약호들은 여전히 임시적이며 확고하지 않다. 그것들은 아직도 서로를 찾아서 역사 기록에 등장할지도 모를 형태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구속해야 하는 형태들이다. [45p]
- 기록 보관소가 단순히 침묵하는 집단을 향해 확장한다면 대유법의 폐쇄를 빠져나가기에 충분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들 집단 각각의 정체가 밝혀지고 수용될 때 '대표적인 예representative example'의 논리가 도전받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확고하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규범이 여성 미술가나 유색 인종 미술가의 작품을 포함시키려고 스스로 확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규범성canonicity의 한계 내에 머무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에 인식되지 못했던 시각적 실천 약호들의 발견도 그 형용사구가 의도적으로 문제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대유법의 논리 내에 머무른다. [46p]
- 그러나 수용은 기호학적 유희를 만들어내는 은닉되고 산만한 실천들의 '다신교'쪽으로 문을 여는 기호들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최초로 등장하는 공간과 시기(왕립 아카데미, 살롱)에도 미술 작품은 군중의 시선들만큼 변덕스럽고 혼란스러운 기호적 변형의 그물망으로 들어간다. [47p]
IV. 찰스 샌더스 퍼어스
- 이 정의가 내포하고 있는 해석 과정에서 분명한 것은 해석자가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다. 어떤 관객도 첫번째 연상에서 정지하지 않을 것이다. 심상은 생겨나자마자 새로운 기호가 되며 새로운 해석항에 복종하는데 우리는 이때 무한한 기호 과정의 중간에 위치한다. 이 과정의 어느 측면도 다른 것들과 분리되지 않으며 이것이 바로 이 이론이 소쉬르의 기표/기의 같은 이분법적 기호 이론들과 양립할 수 없는 이유이다. [50p]
- 화용론pragmatics은 한 작품의 정서적 효과가 검증되는 영역이다. 의미론 semantics은 작품의 의미에 대한 모든 가정, 즉 도상해석학 iconography을 포함한다. 통사론 syntactics은 약호에 대한 이미지의 요소들, 또는 의미-생산 방법들 간의 관계를 연구한다.
비록 이런 기본 이론에서 유래한 퍼어스의 정교한 기호 유형론이 미술 비평가들에게 일반적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었지만 가장 유명한 이들 도상, 지표, 상징은 더 연구할 가치가 있다. 이런 유형론이 종종 오해를 사기 때문에 퍼어스 자신의 정의를 직접 인용해 보면
도상은, 그 지시 대상이 실존하지 않음에도 마치 기하학적 선을 보여주는 연필 선과 같이 그것을 의미있게 만드는 성격을 소유한 기호이다. 지표는 그 대상이 제거되면 기호가 되는 성격을 단번에 상실하지만 해석항이 없다고 그 성격을 상실하는 기호는 아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사격의 기호가 되는 총알 구멍이 난 판들이다. 사격이 없었다면 구멍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총격의 결과라고 추측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구멍은 거기에 존재한다. 상징은 해석항이 없으면 기호를 만드는 성격을 상실하는 기호이다. 그것은 오로지 그러한 의미 작용을 한다고 이해되는 덕분에 그것이 하는 것을 의미화하는 언술의 발화이다.
무엇보다도 도상과 전 시각 영역을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퍼어스가 평료하게 설명하듯이 도상적이라는 것은 그 대상과 관련을 맺는 기호의 성격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들을 환기시킬 수 있는 기호로서 간주될 때 가장 역할을 발휘하는 셈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기호 자체와 유사한 대상을 상상하도록 제안하기 떄문이다. 도상성은 먼저 기호와 대상 사이의 가설적 유사성에 기반을 둔 읽기의 한 양상이다. [51p]
- 시각성 일반 또는 리얼리즘 대신에 이미지가 유사성을 근간으로 해서 어떤 것을 언급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도상적 행위이며, 반사의 느낌은 그 결과물이다. 영화에서 낭만적 사랑 장면에 동반되는 바이올린의 낭만적 소리는 비의 형상으로 구성된 아폴리네르의 비에 관한 시의 선명한 표현만큼 도상적이다. [52p]
- 지표 개념은 기본적으로 로잘린 크라우스에 의해 시각 예술에 적용된다. 퍼어스의 지표 설명은 도상에 대한 그것의 대칭적 대비를 강조한다. 즉 도상이 대상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반면에 지표는 정확히 그 존재를 배경으로 삼아 작용한다. 그의 예가 시사하는 것은 지표적 기호와 대상(또는 의미)간의 실제적 존재론적 접근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는 '실재'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 지표적 기호와 그 의미는 이미지 자체 내의 그러한 접촉 관계를 즐길 수 있다. [52p]
- 지표적 기호들의 범주는 표현성의 환영을 제공한다. 그것들은 그 이미지 제작자를 지칭하는 모든 기호들로 인지된 미술가의 '손', 즉 표현주의 회화에서 표현적이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작가의 서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그 지표는 매우 여러가지 경우에 기능하며,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것이 반드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작가의 서명은 비록 그것이 가짜 서명이더라도 제작자의 지표이다. [53p]
- 결국 퍼어스의 이론에서 상징적 기호는 '상징'이라는 단어의 수없이 많은 모호한 구어적 의미들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인용된 구절 속의 정의가 분명히 설명하듯이 그것은 다른 두 개의 용어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그것에 생명을 불어 넣는 해석 행위에 의존하는데 그 이유는 그 해석없이는 그것이 기호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는 것은 상징 해석이 일어나는 배경인데, 상징해석이란 기호와 대상 또는 의미 간의 상호 관계의 관습적 규칙이 되는 것이다. 독자가 형성한 해석항은 그가 그 기호가 작용하는 문화 내에서 보통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54p]
- 그 이미지가 '사실적realistic'이라고 우리가 생각할 때 조차도 사실 특정 종류의 회화적 기호들이 다른 것들보다 선명하게 '실재'를 상징한다고 주장하는 관습에 젖어 있다. 이미지가 실제 세계에 어떤 대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도상성,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미지의 요소들 간의 연속성과 그 요소들과 우리 자신들 간의 연속성으 ㄹ인식하게 해주는 지표성의 도움으로, 상징성은 그 자의성에 의해 가장 기만적인 약호가 된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무엇이 관습적인가를 궁금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심지어 그것을 파악하지도 못한다. [54p]
V. 페르디낭 드 소쉬르
- 즉 주어진 ‘동결된’ 순간에 전체로서의 언어의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규칙 전체를 고립시키면 언어 기호들 간의 내적 관계를 조사할 수 있는데, 소쉬르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이 그 기호들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다. 즉 어떤 단어의 의미는 다른 단어들과 ‘구별할 수 있는diacritical' 차이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빨강‘은 ’초록‘, 파랑’, ‘노랑’등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의미를 획득한다. [55p]
- 이러한 간략한 개괄은 리이치의 복잡한 해석에 정당한 대접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소쉬르의 과정이 어떻게 구조주의 내에서 틀을 잡았는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아마도 세 개의 본질적 이동이 있는 것 같다. 첫째, 패널에 포함된 형상들을 선명하게 에워싼 경계 그림이다(리이치는 대형 남성 누드들, 여성 예언자들, 다수의 예언자들, 이새의 나무와 원형 양각작품들을 배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신체들을 의미 단위들로 분리시키는 단계가 있다(여기서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기본 대립이 생겨나며 그것들의 결합이 만들어 낸 ‘사기꾼’의 영역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분리된 단위들은 변형과 압축의 논리를 통해 통사론적으로 연결된다(이브는 은유적으로 마리아, 에스더, 유디스와 연결되며 노아는 그리스도와 아담과 연결된다). 이러한 모든 것은 소쉬르의 고유 방법에서 그 대응물을 찾을 수 있다. 즉 (파롤을 한쪽으로 밀쳐두고) 랑그 주위의 경계그림과 랑그를 여러 단위들(형태소, 음소 등)로 세분하는 것, 그리고 대립적 통사론의 측면에서 그 단위들을 배열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동의 각 단계는 문제를 내포하며 소쉬르 전통 속에 있는 후기구조주의 기호학에서(그러나 소쉬로부터 아주 머릴 떨어져 있지 않은)는 매우 상이한 단계들로 제시된다. [57p]
- 소쉬르가 기호를 고정된 정적인 속성으로 정의내릴 때, 즉 각 기표는 그것의 안정된 기의에 고착되어 있다고 하는 반면 데리다는 기호의 역동성을 주장한다. 즉 기호는 (소쉬르에게 있어서처럼) 기표와 단일하고 단조로운 그것의 기의의 결합이 아니라 한 기표에서 다른 기표로 옮겨가는 이동이라는 것이다. 이동으로서의 시각적 기호의미화는 경계, 문턱, 틀 등의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 그것은 ‘만능 열쇠passe-partout'이다. [58p]
- 포위가 불가능하면 분할도 불가능하다. 전자가 실패하면 후자도 실패한다. 공간의 한계 내에서만 내부 대립이 이루어지고 ‘기하학화geometrized'되며, ’의미 단위‘는 그러한 대립 관계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대립의 관계(이것은 리이치의 분석에서 그가 분리하는 의미 작용의 모든 단위들 뒤에 존재하며, 여기에는 매개적인 ’성스런‘ 영역대의 단위들도 포함되어 있다)도 미학의 경계 분해를 견디어낼 수 없다. 경계를 접하는 틀 개념이 의문시되고 역동적 기호 과정의 가능성이 수용되자마자 대립 관계는 비대립적 차이의 관계에 양보해야 한다. 이미지는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의미의 흐름에 의해 관통되면서 그 이미지가 전체로서의 사회 형성 내의 기호와 약호의 전체 순환의 일부가 될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59~60p]
- “사실 언어는 특정한 회화에 표시법을 제공할 준비가 별로 되어 잇지 않다. 그것은 일반화시키는 도구로서 … 미묘하게 구별되어 질서가 잡힌 형태와 색의 배열을 담고 있는 평면을 설명하기 위해 그것이 제공하는 개념의 목록은 오히려 조야하고 거리가 멀다.” 우리 언어의 어휘는 회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색채들의 일부만 소화할 수 있다. 형태를 위한 어휘도 그다지 나은 편이 아니다. ‘기표’라는 말이 언어의 경우를 모델로 하고 있다면 시각적인 것을 구체적 영역으로 만드는 모든 것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을까?[60p]
- '의미 단위‘를 예로 들어 보자. 언어에 최소 단위의 자료가 풍부한 것은 분명하다. 우리 모두 문자, 다넝, 문장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우리는 어려빚 않게 언어의 기본적 ’원자들‘을 골라낼 수 있다. 그러나 이미지에 들어서면 무엇이 그 성질의 단위로서 중요한지 전혀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어느 단계에서는 아마도 대충 언어의 음성학에 상응하는 기호 작용에 기여하는 바는 있으나 그것을 생산하지는 않는 표식들―개별적 붓터치, 또는 선, 점―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아직 비의미적인 표식들이 의미의 산물로서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단계에 있는 표식들을 ’단위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중략- 이미지의 최소 단위들이 발견되지 않으면 소쉬르에서 시작된 시각적 기호학은 불가능한 노력이 되고 만다. 사실 우리는 ’기포‘가 어디에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 [61p]
- 기호 과정을 과정으로 그리고 이동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기호를 사물이 아니라 사건으로서 파악하는 것이며 이 문제는 한 기호를 다른 기호로부터 경계지우고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 상황 속에 세계 내의 사건으로서 기호의 가능한 출현을 추적하는 것이다. [62p]
- 『예술의 언어』에서 굿맨은 실물과 같은 재현이 ‘사실적’인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실제의 것을 모방하기 때문이라는 상식적 관점에 대해 쓰면서, 그 실물 유사성 효과는 일종의 외연denotation의 산물이며 회화적 재현의 경우에는 회화가 사용하는 특수한 형식의 표시법 결과라고 주장한다(회화의 표시법은 ‘밀도있고’ ‘풍족한’ 체계적 도표의 개념과 대립되는 것이다. 바르트와 굿맨의 경우에 리얼리즘은 전적으로 관습화된 것이며 이미지의 그럴듯함vraisemblance은 자연 세계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기준을 거론하지 않고서도 설명될 수 있는 속성으로서 기술된다. [63p]
VI. 기호학 이론으로서의 정신분석
- 정신분석은 무의식과 그 표현 간의 관계를 읽어내는 하나의 방식이며 그렇게 해서 기호학 이론이 된다. 이 이론을 시각 에술 연구에 사용하는 것은 에술이 무의식의 흔적을 포함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64p]
- 따라서 정신분석의 요점은 심리의 진단이나 해석 자체에 대한 기여가 아니라 시각 에술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뒤러의 예에서 보듯이 작품의 ‘직접적’ 의미 ―원근법 설명―는 사라지지 않지만 보다 심도있게 변하며 문화적으로 틀을 잡게 되고 과학적 발전과 성관계의 연결을 보여준다. [68p]
-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 개념』에서 라캉은 정신분석에서 자신의 계획의 주요한 논제를 시각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는데, 인간의 주관성은 상징 체계의 제도 또는 광범위한 의미의 기호 활동에 의해 심도있고 구조적으로 형성된다고 한다. 라캉은 상징체계가 일으키는 문화적 과정을 요약해서 상징적(또는 상징적 질서)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데 이는 기표들의 사회적 순환에 의해 존재하는 전 영역을 지정하도록 만들어진 용어이다. 라캉의 다른 텍스트에서는 주관성을 결정할 때 언어적 구조의 역할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상징적 질서를 언어와 동일한 것으로 본다. 우리는 인간이 기호과정의 문화적 분야로 들어가는 것이 언술이 획득되는 순간에 발생하며 라캉이 주관성의 구조를 결정한다고 설명하는 ‘기표’가 단순히 ‘단어’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 개념』에서 라캉은 기표가 언어적인 만큼 시각적일 수 있으며 언어의 영역 내에서 그 기표가 말하는 주체를 산출하듯이 시각의 영역에서도 ‘보는 주체’, 즉 그의 보기 양태를 시각에 작용하는 기표의 산물로 삼는 주체를 산출한다고 가정한다. [72p]
- 라캉의 논의의 분명한 한 가지 목표는, 주체는 그 시각 분야를 통솔하는 위치인 시각의 중심에 선다는 데카르트의 개념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주체가 언술을 통솔한다는 언어의 이론화에 상응하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말하기를 배우는 것은 사전에 설치된 구어적 담론의 기존 체계에 화자의 언어가 따라야 하는 통로 또는 망을 삽입하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주체가 일단 ‘보는’ 것을 배우면 그는 자신의 개인적 시각 경험을 자기 주위 세계를 설명한 사회적으로 동의된 기술에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이런 시각의 사회적 구성에서 이탈되는 것은 환상, 오인 또는 ‘시각 장애’ 등으로 다양하게 명명되며 처리될 수 있다. [73p]
- 그러나 라캉의 요지는 가상적인 것이 환영, 응시 또는 상징적 질서 일반을 구성하는 ‘실재적’ 객관적 구조와 대립되는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라캉은 인간 주체가 실재에 직접적으로 접근하지 못한다는 그의 가정에서 후기-칸트주의의 사고에 진 빚을 드러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컨대 물리 과학에 의해 요구되는 객관적 세계와 이루어지는 모든 거래는 한편에서 상징적 질서(의미작용을 산출하는)의 작업에 의해, 또 한편에서는 가상의 것(정체성을 산출하는)의 작업에 의해 중재된다. 라캉의 이론에서 실재적인 것이란 논리상 텅빈 범주이다. 이 말은 가상적인 것 속에서 생성된 자아감이 오류라는 말은 아니다. 라캉의 강조점은 오히려 그것의 불안정성과 가상적인 것의 변천에 놓여 있으며 그 이유는 그것이 그 작용이 진행될 중심 개념을 저절로 산출하지도, 심지어 요구하지도 않는 상징적 질서와 직면해서 중심화된 자아의 의미를 생성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74p]
- 그리고 크라우스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에 관한 관심이 어떤 경우에는 즉흥성과 무작위의 추구로서가 아니라, 시각의 주관성이 지닌 사전에 만들어진 기계적 성질을 반대 방향에서 극화한 것으로 생각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78p]
- 사실 기호학 이론에는 구별, 개별적 주체와 사회적 압력 간의 관계, 그리고 권력 관계에 기반을 둔 세 가지 주요 문제가 있다. 그것들은 이데올로기 문제, 주관성 문제, 그리고 주관성과 해석 간의 관계 문제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퍼어스의 기호 이론의 주요 개념, 해석항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은 여기 지금 일어나는 주체의 행위와 이데올로기가 가상적 우선권들을 형성하는 사회적 영역에서 모두 의미의 생산을 결정한다. 미술의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어떻게 이데올로기적 재현에 의해 산출될 수 있는가를 이해하려면 문화 내에서의 주관성의 형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78p]
- 드 로레티스는 퍼어스에게 의존하고 또 한편으로는 라캉에게 의존하면서 주관성이란 의미의 효과, 즉 “문화적으로 공유된 약호들을 통해 생산된 의미 가치”라고 설명하며 경험은 그것이 발생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명백하게 재현된 것을 바라보거나 그것들을 제작하는 것은 그 경험의 일부이다. 퍼어스적 관점에서 보면 기호의 생산과 수용은 기본적으로 유사한 결과를 가져오는 유사한 활동이다. 수용자(해석자, 독자 또는 관객)와 생산자 모두 해석항을 형성한다. 이것들은 자의적이지도 개별적이지도 또한 특수하지도 않다. 해석항들은 그 사람의 습관에 근거를 둔 기호들로부터 비롯되는 새로운 의미들이다. 그리고 정확히 습관은 사회적 생활에서 형성된다. “기호적 생산으로서의 개인의 습관은 의미의 사회적 생산의 결과이자 조건이다.” 따라서 경험은 해석의 타당한 근거일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가능한 근거이다. [79p]
VII. 서사론
- 바르트에게 있어서 행위적proairetic약호(인물들의 행위와 동작들을 하나의 연결체로 구성하는 약호)는 “독자로 하여금 줄거리 연결 속에 세부적인 것들을 배치하도록 도와주는 일련의 행위 모델들이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거나’, ‘납치하거나’, 또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등의 전형적인 모델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읽어가면서 접하는 세부 사항들을 임시적으로 배치하고 조직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도상해석학적 약호를 서사한 것 같다. 해석학적 약호(수수께끼와 그 해결을 결합하는 기능을 가진 단위들의 총체)는 수수께끼를 가정하며 우리로 하여금 그 해결책에 기여할 수 있는 세부 사항들을 찾도록 독려한다. 이 약호가 시각 예술과 관련이 적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리는 이미지의 주체가 이해하기 어려울 때 바로 그 관객을 위해서 작동 중인 해석학적 약호가 있다고 주장한다. 의소적semic약호(테마를 이루는 장들을 형성할 수 있는 내포적 기호들)는 관객이 계급, 성, 인종, 연령의 측면에서 이미지 내의 형상들을 이해하기 위해 도입하는 문화적 상투어구들, 즉 ‘배경 정보’를 삽입한다. 상징적약호 덕분에 관객은 ‘사랑’, ‘증오’, ‘고독’ 또는 ‘연극성’, ‘허영’ 또는 ‘자기 참조성’ 등의 요소들을 읽는 데 상징적 해석을 도입한다. 마지막으로 참조적 약호는 문화적 지식을 도입하는데, 예를 들어 초상화 모델의 신원, 미술 운동의 프로그램, 재현된 인물들의 사회적 지위 등이 그것이다. 종합하자면 이들(그리고 다른) 약호들은 ‘서사’, 즉 모든 세부 사항이 하나의 장소를 수용하는 이미지에 대해 만족스러운 해석을 산출한다. 이 서사는 선명하게 이미지를 다루는 독자에 의해 형성된다. 그것은 낯선 이미지를 낯익은 정신 구조로 처리함으로써 이야기를 생성한다. [80~81p]
- 사실 고전적인 미술 비평과 미술사는 문학 연구처럼 동일한 틀 내에서 작품의 모든 세부 사항을 설명하는 해석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적합하지 않은 세부 사항은 낯선 작가의 작업이나 작가 자신이 아닌 작업실 보조원들의 작업이라고 무시되거나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거나 ‘실수’라는 이름으로 밀려났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그 작품의 이종 어휘적 관점으로 돌리기 보다는 서명이 되어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과정이 된다. 바흐친은 이미지가 한 미술가에 의해 산출된 경우에도 그 미술가가 태어난 문화의 이종-담론적인 성질이 가장자리로 밀려갈 경우에만 반드시 변화의 요인을 가져온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다비드의<사비니 여인>과 같이 남성 사이의 싸움에서 여성들의 중재를 노골적으로 재현한 이미지는 동종의 사회적homosocial 관심의 지표들을 삽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81~82p]
- 노인들 때문에 놀라는 수잔나 이야기(성경 이야기의 일부로 수잔나는 덕이 많은 이스라엘의 여성으로 요하임의 부인이다. 그녀가 목욕을 하던 중 이웃 노인들의 유혹적 공격을 받는데 이는 그녀의 남편에 대한 충실성을 보여주는 교훈적인 이야기이나 르네상스 이후 미술가들은 그녀의 목욕 장면을 누드화용으로 전용한다.)를 상상해 보자. 이 주제를 다룬 전통 회화에서는, 예를 들어 루벤스의 경우(뮌헨 알테 피나코데크 소장) 벌거벗은 여성은 관객의 시각과 즐거움을 위해 노출되어 있다. 노인들은 재현된 초점자들로서 관객이 그 여성의 신체를 해석할 수 있는 위치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정체 확인 지점을 제공한다. 그 여성은 고개를 돌리고 있거나 양순하게 관객을 보고 있으며 제공된 관음적 위치를 반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외설적 서사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메리 게라르에 따르면 아르테미지아 겐틸레쉬키의<수잔나와 두 노인>은 관음적 상황의 불편함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을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 [83p]
- 이런 서사 관점이 시사하는 것은 서사적 회화를 바라보는 행위가 역동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관객은 다양한 위치에서 시선을 던지기 위해 화면을 이동한다. 이런 위치들은 단순한 대안들이 아니며 다원적 관점이 그러하듯이 상호 연결되고 중첩되어 있다. [86p]
- 이런 예 역시 담론적 질서 내에서 이루어지는 서사의 원자화―포함과 복수화를 결합하는 것―가 ‘순진한’ 상대주의 속으로 떨어지지 않고 단조로운 읽기에서 벗어나 이데올로기 설명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중략- 회화의 서사는 이러한 초점들 간의 긴장에 의해 이루어진다. -중략- 가장 중요한 서사적 기호학은 언어적 서사를 암시하는 시각적 서사 분석과 구별되는 통찰력을 시각적 서사에 제공한다. [87p]
- 마네의<올랭피아>가 동시대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면 그 여성 역시 드러내기에 완전하게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관객을 위한 비인격적 서사에서 그 신체가 객관화되는 ‘삼인칭’이 되는데 만족하기 보다는 관객을 능동적으로 쳐다보는데, 그럼으로써 그녀의 객관화는 무효가 되고 관객은 더 이상 그 여성을 소유할 수 있는 ‘나’가 아니라 그 여성이 주장하는 ‘당신’의 위치가 되어 그의 바라보기 행위에 책임을 지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나’이든지 말을 거는 대상인 ‘당신’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이런 말건넴, ‘호출’이 이데올로기 내의 주체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88p]
VIII. 역사와 의미의 위상
- 상호텍스트성이라는 용어는 소련의 언어학자 미하일 바흐친이 도입한 것이다. 그것은 언어적―그리고 덧붙인다면 시각적―기호들의 이미 만들어진 성질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 기호들은 작가 또는 이미지 제작자가 문화가 생산한 이전의 텍스트들로부터 찾아내는 것이다. 미술사가들에게 이 개념은 도상해석적인 선례와 중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광범위하게 볼 때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측면에서 보자면 그렇지 않다. 도상해석학은 과거의 형식, 패턴, 형상들의 재사용을 점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비판적인 세 가지 특징이 상호텍스트성을 도상해석학과 구별한다. 첫째로 도상해석학적 분석은 역사적 선례를 단지 후대의 미술가에게 어떤 형식들이 사용될 수 있는가를 그대로 구술해주는 자료로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후대의 미술가는 어떤 미술가의 작품에서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그의 탁월한 선구자들에 대한 충성과 빛을 공식적으로 드러낸다. [89p]
- 상호텍스트성과 도상해석학의 병치에서 생기는 두 번째 어려움은 의미의 장소이다. 도상해석학은 종종 차용된 모티프의 의미에 관해 언급을 회피한다. 모티프를 차용하는 것은 선험적으로 의미를 차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상호텍스트성 개념은, 차용된 기호는 그것이 기호이기 때문에 의미와 같이 차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대 미술가가 그 의미를 꼭 사용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그것을 다루어야 하거나 거부, 역전, 아이러니화, 또는 단순히 인식하지 못한 채 새로운 텍스트 속에 삽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89~90p]
- 이것은 두 번째 문제, 즉 다의성과 연결된다. 독자와 관객이 이미지에 그들 고유의 문화적 부수물을 도입하기 때문에 고정된, 선결된 또는 단일화된 의미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의미를 고정시키려는 시도는 사실 이 관점에 가장 설득력있는 증거를 제공한다. 의미에 대한 논쟁들이 일어나는 분야는 권력이 걸려있는 사회적 영역이다. 이런 매커니즘의 좋은 예가 알레고리, 즉 신화적 이야기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지칭하는 모든 재현들의 해석이 그것이다. 한편으로 알레고리는 기호의 근본적인 다의적 성질을 드러낸다. 만일 이야기가 완전히 외적인 다른 것을 의미한다면 그에 대한 제약은 없다. [90~91p]
- 따라서 기호는 사물이 아니라 이미 언급되었듯이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체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기호-사건은 구체적 환경에서, 그리고 문화적으로 타당하며 관습적이지만 수정가능한 일정 수의 규칙들에 따라―기호학은 이것들을 약호라고 부른다―발생한다. 그러한 규칙들과 그것들의 결합을 선택하는 것은 구체적인 해석 행위로 이어진다. 그러한 행위는 사회적 틀이 잡혀 있으며, 사회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기호학적 관점은 바로 기호의 근본적인 다의성과 산종의 연속적인 가능성을 근거로 이런 틀 잡기를 다루어야 한다. [91~92p]
기호학적 요소로서의 예술
얀 무카로프스키
- 모든 주관적 의식상태는 의식 전체 속에서 그것을 비효과적, 비의사소통적으로 만드는 개별적이며 순간적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반면, 예술 작품은 작가와 그 집단성 사이를 중재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감각계에서 예술 작품을 보여주며 아무런 제한없이 모든 것을 지각하도록 도와주는 그 사물을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하나의 ‘사물-작품thing-work'이라는 그 단순한 지위로 축소될 수 없으며 그 이유는 ’사물-작품‘이 시간과 공간에서 이동하게 되면 그 양상과 내부 구조를 완전히 변화시키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14p]
- 어떤 명확한 실재와도 관계되지 않은 기호가 있다 하더라도 그 기호가 목표로 삼는 어떤 것은 항상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히 기호란 그 발신자와 그 수용자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어떤 것’이 자율적 기호의 경우에는 명확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그러면 예술 작품이 목표로 삼는 이 결정되지 않는 실재의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소위 사회 현상의 전체 맥락이다. [115p]
- ‘예술’ 현상의 객관적 연구는 예술가에 의해 창조된 감각적 상징, 집단 의식속에 자리잡은 의미(즉 미적 대상), 그리고 기호화된 사물과의 관계, 즉 사회 현상의 전체 맥락을 지시하는 관계로 구성된 기호로서의 예술 작품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것들 중 두 번째 요소에는 작품 고유의 구조가 포함된다. [116p]
- 그러나 이것이 예술 기호론의 모든 문제를 망라한 것은 아니다. 예술 작품은 자율적 기호로서의 기능을 제쳐두고서의 의사소통적 기호의 기능이라는 또 다른 기능을 갖는다. [116p]
- 사실 가장 ‘형식적인’ 것까지 포함해서 예술 작품의 모든 요소는 그 고유의 의사소통적 가치를 보유하는데 이것은 ‘주제’와는 독립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회화의 색과 선은 심지어 어떤 종류의 주제가 없는 경우라도(칸딘스키의 ‘절대’ 회화나 일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참조할 것) ‘무어인가’를 의미한다. -중략- 엄밀히 말해서 전체의 예술적 구조는 또 다시 의미, 즉 예술 작품의 의사소통적 의미로 작용한다. 작품의 주제는 단순히 이러한 의미작용을 가리키는 결정화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 의미작용이 모호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117p]
- 예술과 의사소통이라는 관점에서 기호화된 것들 간의 관계를 문제삼게 되면 훨씬 더 미묘한 난제들이 떠오른다. 이 관계는 자율적 기호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 모든 예술을 사회적 현상의 전체 맥락 속에 연결시키는 것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의사소통적 기호로서의 예술은 선명한 실체, 예를 들어 결정된 사건, 특수한 인간 또는 장소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의사소통적 기호와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본질적 차이점이 있다면 예술 작품과 기호화된 것 간의 의사소통적 연결 관계에는 존재론적 가치가 전혀 없으며 심지어 그러한 가치가 주장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예술 작품의 주제에 관한 한, 그 작품을 예술적 산물로 간주할 정도로 기록의 진실성 문제를 선결요건으로 삼기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기호화된 것과 연관된 변형들이 예술 작품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들은 작품구조 속의 요소들로서 작용한다. [117p]
- 작품은 또한 분명한 실체에 연결된 그 이중 관계의 평행론과 상호 균형에 기반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 관계 중의 하나는 실존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른 하나는 순전히 의사소통적이다. 예를 들면 이와 같은 경우는 회화나 조각으로 이루어진 초상에서 볼 수 있는데 초상이란 재현된 인물의 의사전달인 동시에 실존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예술 작품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118p]
- 마지막으로 나의 주요 생각을 논제 형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 기호의 문제는 구조와 가치의 문제들과 함께 도덕과학의 본질적 문제들 중의 하나이며 이 모든 문제들은 어느 정도 뚜렷하게 기호의 성격을 보유하고 있는 자료와 함께 작용한다. 따라서 언어 의미론의 발견은 이런 학문들의 자료에 적용되어야 하며―특히 기호론적 성격이 가장 분명한 학문들―, 그 자료들은 문제삼고 있는 자료의 구체적 특성들에 따라 구별되어야 한다.
B. 예술 작품은 기호의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그 창작자의 의식의 개별적 상태나 그 작품을 인지하는 주체의 개별적 상태와 동일시 될 수 없으며 필자가 ‘작품-사물’이라고 불렀던 것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 그것은 ‘미적 대상’으로 존재하며 그 위치는 집단 전체의 의식 속에 있다.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작품-사물’은 이 비자료적 대상과 연관된 단순한 외적 상징일 뿐이다. ‘작품-사물’에 의해 자극받은 개별적 의식 상태는 공통적으로 보유한 것의 측면에서만 그 미적 대상을 재현한다.
C. 모든 예술 작품은 자율적 기호로서, 1)감각적 상징으로서 작용하는 ‘작품-사물’, 2)집합적 의식 속에 내재되어 ‘의미’로 작용하는 ‘미적 대상’ 3)기호화된 것과의 관계, 즉 분명한 존재를 목표로 하지 않고―왜냐하면 그것은 자율적 기호의 문제이므로―주어진 환경 속의 사회적 현상(과학, 철학, 종교, 정치, 경제 등)의 전체 맥락을 목표로 하는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D. ‘주제(즉 테마나 내용)’의 예술은 이차적인 기호론적 기능 즉 의사소통 기능을 갖는다. 여기서 감각적 상징은 당연히 다른 경우와 동일하게 남아있다. 즉 여기서 또 다시 의미는 동일한 방식으로 전체로서의 미적 대상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 상징은 이 대상의 구성 요소들 중에서 다른 요소들의 산만한 의사소통 능력을 결정화하는 지점으로 작용하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이것이 작품의 주제이다. 기호화된 사물과의 관계는 모든 의사소통 기호의 경우처럼 분명한 존재(사건, 사람, 사물 등)를 가리킨다. 이런 성질 덕택에 예술 작품은 순수한 의사소통적 기호와 유사하게 보인다. 그러나 예술 작품과 기호화된 사물 간의 관계에는 전혀 실존적 가치가 없으며, 바로 이것이 순수한 의사소통적 기호들과 다른 주요 차이점이다. 기록의 진정성의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예술적 생산으로서 판단하지 않는 한 예술 작품의 주제면에서 선결 요건으로서 형성될 수 없다. 이것은 기호화된 것에 관련된(즉 ‘현실/허구’의 규모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변형들이 예술 작품에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들은 그 구조내의 요인들로 작용한다.
E. 의사소통적인 기능과 자율적인 기호론의 기능은 모두 주제 예술 속에 공존하며, 이들은 이런 예술들의 전개과정 속에서 서로 결합되어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인 반테제들 중의 하나를 형성한다. 이런 예술들의 이중성은 이 전개 과정 전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현실과의 관계가 진동하는 가운데 표현된다. [120p]
지오토의 즐거움
쥘리아 크리스테바
- 이름 없이 존재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름 이상인 것, 즉 회화에서 말을 분리해내는 방법을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그 방법이란 무엇일까? 이름 붙이는 바로 그 행위의 공간? 어쨌든 그것은 ‘최초로 이름이 붙여지는’ 공간이나 어린애들이 맨 처음 이름지워지는 공간이 아니며 또 주체가 분리된 리얼리티로서 지각하는 것들을 기호들로 배열하는 공간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회화는 이미 거기에 있다. 어떤 특별한 ‘기호’가 이미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분리된 지시대상referent 없이도 ‘무엇인가’를 하나의 회화로 구성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회화가 그 자체의 리얼리티이다. [149p]
- 비평가들은 지오토의 회화적 ‘언어’와 일반적인 화가들의 회화적 ‘언어’에 있어서 색의 중요성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색’이 회화의 형식적 체계나, 하나의 실천practice으로 간주되는 회화 어느 쪽에도 ― 따라서 화가와의 관계에 ― 자리잡기가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기호학적 접근들이 회화를 일종의 언어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언어학에 의해 밝혀지는 언어 요소들 속에 색채의 등가물이 있다고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음소phonemes에 속할 것인가, 형태소morphemes에 속할 것인가, 구phrase에, 어휘소exemes에? 기호학적 접근들이 성과가 있었다 하더라도 언어/회화의 유비는 색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더 이상 지탱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연구는 모두 또 하나의 가설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그 가설은 더 이상 구조적이 아니라 프로이드적인 용어로 말해 원리적economic이다.
우리가 대상의 의식적 표상conscious presentation이라 통칭하는 것은 이제 단어의 표상과 사물의 표상을 나누어질 수 있다…무의식 체계는 대상들의 사물 집중thing-cathexes, 최초의 진정한 대상-집중을 포함하고 있다. 한편 전의식 체계는 사물 표상이 대응하는 단어-표상과 결부되어 과집중될hypercathected 때 일어난다. 보다 높은 단계의 심리를 구성하며, 일차적인 과정이 전의식 체계를 지배하는 이차적인 과정에 의해 계속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과집중들hypercathexes이라고 생각된다.
[155~156p]
- ‘사고’란 의식적인 과정(2차적인 과정을 포함해)과, 종합적이며 논리적인 여러 가지 다양한 작용을 나타낸다. 의식적인 과정은 억압repression의 부과에서 비롯되므로 ‘사물-표상’과 그것에 대응하는 본능적인 압력을 견제한다. ‘단어 표상’이라는 용어는 더 큰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상징적인 차원에 집중하는 복잡한 단계의 욕구를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그 차원에서 이러한 본능적 욕구는 억압 덕분에 나중에 의사소통 체계 속에서 그것을 재현하는(삭제하는) 기호로 대체된다. ‘단어-표상’ 속에서 욕구의 압력은 1)외부 대상을 향한다, 2)하나의 체계 속에 기호이다, 3)그러한 기호의 심적 토대를 분절화하는 생물학적 기관(음성 기관, 신체 일반)에서 방출된다. 사실 프로이드는 ‘단어 표상들 역시 그들 편에서는 사물 표상과 마찬가지로 감각-지각에서 비롯된다’고 쓰고 있다. [157p]
- 그러나 색채의 이러한 출현(뿐만 아니라 어떤 다른 ‘예술적 고안’의 출현)이 아무리 주고나적이며 본능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움직이고 있는 역사적으로 산출된 형식 체계에 의해 필연적으로, 따라서 객관적으로 야기되고 결정된다.
우리의 감각들은 직접적인 환경이 아니라 문명의 한 순간에서 비롯되는 발전의 시대를 가지고 잇다. 우리는 주어진 어떤 시기의 문명의 감수성과 함께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어떤 한 시기에 대해서 배울 수 잇는 모든 것 이상의 것이라 여겨진다. 예술은, 개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들 이전 문명의 축적된 힘으로부터 발전된다. 우리는 아무것이나 할 수는 없다. 재능있는 예술가는 그가 좋아하는 대로 할 수가 없다. 그가 자신의 재능만을 사용했다면 그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내느 것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여된 것이다. [159p]
- 따라서 주제는 바로 색채를 통해서 그것이 의식적인 주체로 받아들이는 코드(재현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상징적인, 등등의) 속에 소외에서 벗어난다. 이와 유사하게 서구 회화는 바로 색채를 통해서 표상 그 자체(세잔느, 마티스, 로드코, 몬드리안에게서처럼)뿐만 아니라 서사적이고 원근법적인 규범(지오토에게서처럼)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티스는 이것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라는 넓은 의미에서 조형예술의 혁명은 채색 회화라는 기초적인 ‘고안’을 통해서 일어난다. [161p]
- 그러므로 색채는 심리적-그림psycho-graphic이 균형을 잡고 있는 변증법적 공간으로서 이해 주체가 상징화하지 못한 본능적 ‘잔여물들’을 새겨놓고 초과 의미화의 논리oversignifying logic를 번안한다. 색채 논리가 어떻게 해서 ‘빈 의미’로, 움직이는 그리드(그것이 주관적이므로)로 여겨져 왔는지 뿐만 아니라 의미론의 외각에서 역동적인 법칙, 리듬, 간격, 제스처로 여겨져 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조금도 비어있지 않은 이러한 ‘형식적’ 색채 그리드에 ‘독특하거나 궁극적인 기의’만이 빠져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그것이 주체의 의미significance 구성 원리와 결부된 ‘의미론적 가능성들’로 들어차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색채는 형식의 검은 흔적, 금지되거나 단지 왜곡된 형태가 아니다. 그렇다고 실체가 배제된, 개념적, 본능적으로 단절된 의미의 투명한 빛, 눈부신 빛의 흰색도 아니다. 색채는 빛을 억누르지 않고 그 분화되지 않은 단일성을 특수한 다수성으로 와해시켜 그것을 분절시킨다. 그것은 다양한 강도로 표면의 충돌을 불러일으킨다. 색의 분포 속에 검은색과 흰색이 있다면 그것들 역시 색들이다. 다시말해 본능적/공시적/표상적 압축제이다. [161~162p]
- 사실 요하네스 푸르키니예Johanees Purkinije의 법칙에 따르면 어두침침한 빛 속에서는 짧은 파장이 긴 파장 보다 우세하다고 한다. 그래서 해뜨기 전에 처음으로 나타는 색이 푸른색이다. 우리는 이러한 조건 하에서 망막 주변의 간상체를 통해서 푸른색을 지각하는 한편 원추체를 포함해 핵심적인 요소가 대상의 의미지를 고정시켜 그 형태를 확인한다. 앙드레 브로카André Broca의 역설에 따르면 푸른색에 대한 지각에는 대상 확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푸른색은 엄밀히 말해 대상의 고정된 형태나 그 형태를 넘어 현상적 정체성이 사라지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가설은 또한 원추체가 실제로 인간 존재에서 가장 늦게 발달되는 부분(생후 16개월)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중심화된 시각―자기 자신의 이미지(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거울의 단계에서 지각되는 ‘자아’)를 포함하여 대상을 식별하는―이 색채 지각 이후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시각은 맨 처음에는 짧은 파장, 다시말해 푸른색과 함께 나타난다. 따라서 모든 색채가 그렇지만, 특히 푸른색은 대상 식별과 현상적인 고정 둘 다를 훈련하는 비중심적이거나 탈중심적인 효과를 갖고 있다 그래서 색들은 주체를 그 변증법이 이루어지는 예전의 순간으로, 다시말해 고정된 거울의 ‘나’specular ‘I'가 이루어지기 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인 의존상태에서 벗어남으로써 이러한 ’나‘가 되는 과정 중에 이루어진다. 한편 색채 경험은 이미 구성된 이해(말하는) 주체의 공간 속에서 거울 주체의 반복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 아직 그를 마주하고 있는 조합 이미지로 분화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의 외양이나 거울에 있는 자기자신의 타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서로 모순되게 구성된 주체에 대한 회고로 해석될 수 있다. [165~166p]
눈속임 회화
장 보드리야르
- 눈속임 회화는 회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고도로 의례화된ritualized 형식이다. 의례적인 것으로서의 어떤 특징들, 이를테면 수직적 바탕, (정물과는 전적으로 다른) 수평과 모든 종류의 수평서으이 부재, 비스듬하게 비추는 어떤 비현실적인 빛(그 빛 외에는 다른 어떤 빛도 없다), 깊이의 부재, 특정 유형의 사물(그것들의 엄밀한 목록을 작성할 수도 있으리라), 특정한 유형의 재료, 그리고 그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사실주의적’ 환영hallucination 등은 완전히 [눈속임 회화의]특징이 되어버렸다. [183p]
- 다시 말해 거기에는 어떤 우화도, 이야기도 없다. ‘세트’도 극장도 없고, 플롯도 성격도 없다. 눈속임 회화는 모든 큰 주제들을 잊어버리고 이런저런 사물의 대수롭지 않은 형상화에 의해 그 주제들을 왜곡한다. 바로 이러한 사물들이 그 시대의 거대한 작품들 속에서, 그렇지만 그 틈새들 속에서 이채를 띠고 있다(그럼에도 오늘날의 감상은 거기에서 그 사물들을 애써 찾아내, 그것들을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세부들의 대열로 끌어올려 그림의 중심주제를 희생시키고 있다). [184p]
- 그것들이 단지 사물들에 불과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한없이 오래된 이 잡지들, 오래된 종이들, 오래된 책들, 오래된 못들, 오래된 판자들―이러한 것들이 왜 배설물일까? 그 이유는, 모든 행위와 모든 서사의 기록에서 유령처럼 사라진, 고립되고 버려진 사물들만이 엃어버린 리얼리티에 대한 떠나지 않는 기억과, 주제에 앞선 삶과 같은 어떤 것을, 그리고 그것이 의식화되는 것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들은 수동적인 사물이 아니다. 이러한 알레고리적이거나 종교적으로 연출된 거대한 시대에 그것들의 하찮음은 공격적이다―오직 아무런 내포가 없는 사물들, 장식이 제거된 사물들만이 이런 파열된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 [185p]
- 눈속임 회화에는 어떤 자연도 없다. 전원이나 하늘, 소실점이나 자연광도 없다. 거기에는 어떤 얼굴도, 심리학도, 역사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인공물이다. [185p]
- 우리는 이러한 사물들이 리얼리티와 현실 세계, 그리고 일상적인 시간이 비롯되는 블랙홀에 가깝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리얼리티는 주체가 자신의 이미지를 붙잡아서 실제로 소멸시키려는 거친 욕구를 되풀이하는 ‘촉각적 현기증’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이렇게 앞으로 퍼져나가는 효과, 사물들은 담은 거울이 자신과 닮은 주체와 만나는 이러한 전진 효과―이 모든 것이 환각적인 사물의 형태로 주로 눈속임 회화의 포착 효과를 창조하는 중첩 the Double 현상이다. 리얼리티는 우리가 거기서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잃어버릴 때에만, 그래서 오직 우리 자신의 죽음의 환각처럼 다시 솟아오를 때에만 포착되기 때문이다. 눈속임 회화의 사물들에는 어린애가 발견하는 거울 이미지의 의미와 똑같은 환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자기 자신의 몸이 지각적 질서 이전에 존재하는 듯이 느끼는 직접적인 환각과 같은 어떤 것 말이다. [186~187p]
- 눈속임 회화는 세계의 원근법적 리얼리티에 대해, 르네상스에서 의기양양하게 솟아오르는 전적으로 새로운 서구 리얼리티에 투영된 낯설은 드러남이다. 눈속임 회화는 그것의 아이러니한 모조물simulacrum인 것이다. [187~188p]
- 눈속임 회화에서 문제는 실재와의 혼동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3차원을 흉내냄으로써, 실재의 효과를 흉내내고 능가하는 가운데 그와 같은 3차원이 리얼리티에 의심을 던짐으로써, 그리고 리얼리티의 원리에 근본적인 의심을 던짐으로써 게임과 전략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모조물을 생산하는 것이다. [188p]
- 어떤 눈속임 회화에 기적이 있다 해도, 그것은 결코 ‘리얼리즘적인’ 솜씨―너무나 진짜 같아서 새들이 쪼아먹으려 할 정도인 제우시스의 포도와 같은―에 있지는 않다. 부조리하다. 기적은 결코 리얼리티의 과잉 속에서 일어날 수 없으며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로 리얼리티의 돌연한 실패 속에서, 그리고 리얼리티의 부재 속에 모습을 감춘 존재의 현기증 속에서 일어난다. 사물들의 갑작스런 초현실적 친숙함이 이러한 현실 장면의 상실감을 대체한다. 실제 공간의 위계적 구성이 그것이 시각에게 양도한 권리와 함께 사라질 때, 이러한 원근법적 시뮬레이션―그것은 모조물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이 사라질 때, ―더 괜찮은 표현을 찾는다면― 우리가 촉감touch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 ‘마치 우리가 그것들을 만질 수 있고 잡을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사물들의 촉각적인 극현존hyperpresence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바보스러워지지 말도록 하자. 이러한 촉각적인 현존의 환영은 우리의 실제 촉감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재현 장면과 재현 공간의 소멸에서 비롯되는 ‘사로잡힘’이라는 의미의 은유일 뿐이다. 더욱이 눈속임 회화의 기적인 이러한 충격은 ‘리얼리티’란 위계적으로 연출된mise-en-scéne 세계, 깊이의 법칙에 따라 획득된 객관성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소위 주변의 모든 현실 세계 속에 반영된다. 그 리얼리티는 그 시대의 모든 회화, 조각, 건축이 엄수하는 원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리이며 시뮬레이션일 뿐이어서 눈속임 회화의 실험적인 하이퍼시뮬레이션hypersimulation에 의해 종결된다. [189p]
- 회화와 조각은 르네상스 시대, 특히 바로크 시대의 벽화와 천장화 속에서 서로 혼동된 것 같다. [189~190p]
- 그것은 눈을 즐겁게 하는 동시에 눈을 속이고 있다. [190p]
- 눈속임 회화는 무게와 견고함, 저항력과 유희하며, 마술사가 물리학자를 조롱하듯이 건축가를 조롱한다. [190p]
- 그것은 이제 더 이상 회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실재 그 자체 보다 더 심오한 시뮬레이션이라는 형이상학적 범주―리얼리티와 마주친, 그리고 리얼리티에 대한―가 되었다.
- 마키아벨리 이래로 정치가들은 아마도 어딘가에서 항상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조된 공간에 대한 지배가 권력의 원천이며, 정치란 영토나 기능, 혹은 실제 공간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행위들이 현실화된 효과를 이루고 있을 뿐인, 모조된 모델의 지배라는 사실 말이다―그 지배는 어떤 직접적인 결정에 따라서가 아니라 일조으이 형이상학적 도치, 일종의 내적 위반, 원시적인 제의에서처럼 비밀로 이루어지는 규칙의 도치, 말하자면 리얼리티 속에 구멍, 리얼리티의 중심부에 숨겨진 모조물과, 리얼리티가 완전히 활동하기 위해 의존하는 모조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교황 자신이나 종교재판장, 예수교 회장과 신학자들만이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비밀이었으며, 그들의 힘이었다. [192~193p]
- 이와 유사하게 에더른-헬리어J. Edern-Hallier에 따르면, “은행의 비밀은 무엇보다도 타인들이다.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저희들끼리 그 비밀을 전달한다. 이 숫자의 신학자들은 저희들끼리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며, 저희들끼리만 몰래 웃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사실을 여러분에게 폭로하려 한다. 돈은 실존하지 않는다.” [193p]
라스 메니나스
미쉘 푸코
- 마치 그 화가는 자기가 재현된 그림에 보이는 동시에 자신이 재현하고 있는 그림을 볼 수는 없는 것처럼, 그는 이 두 개의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시성의 문턱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233p]
- 겉보기에 이러한 궤적은 단순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순수한 상호서으이 문제, 말하자면 우리가 그림 속의 화가를 보고 있는데 그림 속에 화가도 우리를 보고 있다는 단순한 문제로 간주될 수도 있다. 또 눈으로 서로를 응시하는 단순한 대면이라든가, 서로 교차됨으로써 중첩되는 직접적인 시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호 가시성이라는 이 가느다란 선은 불확실한 것과 교환과 책략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조직망 전체를 포괄한다. 화가는 우리가 우연히 그의 주제와 동일한 장소를 차지할 때에만 자신의 눈을 우리에게로 돌린다. 관람자인 우리는 하나의 부가적인 요인이다. 우리가 화가의 시선과 마주쳤다 해도 그 시선은 우리를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으며 우리에 앞서 거기에 항상 존재했던 것, 즉 모델 그 자체가 우리를 대신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 그림 밖에서 그를 마주하고 있는 허공을 향한 화가의 시선은 관람자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수의 모델들을 수용하고 있다. 이렇게 명확하지만 중립적인 장소에서 관찰자와 피관찰자는 끊임없는 교환에 참여하고 있다. 어떤 시선도 안정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캔버스를 수직으로 관통하고 있는 시선의 중립적인 궤선 속에서 주체와 객체, 즉 관람자와 모델은 서로의 역할을 끊임없이 뒤바꾼다. [234p]
- 캔버스가 한쪽 구석에 정립한 그 분명치 않은 고정성은 관람자와 모델 사이 중앙에 정립된 변형작용의 유희를 영원히 불안정한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단지 그 뒤편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234p]
- 화가의 눈은 관람자를 자기의 시선의 영역 내에 위치시키자마자 그를 장악하며, 그에게 그림 안으로 진입할 것을 강요하며, 그에게 특권적이면서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장소를 제공하는 한편 그로부터 그의 눈부시게 가시적인 표시tribute를 끄집어내어서 그것을 그림 안에 있는 접근할 수 없는 캔버스 표면에 투사한다. 그는 자신의 비가시성이 화가에게 가시적이 되었으며, 자기 자신에게는 영원히 비가시적인 이미지로 바뀌었음을 발견한다. 충격은 주변의 함정에 의해 배가되고 더욱 더 피할 수 없게 된다. [235p]
- 네덜란드 회화에서는 거울이 복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즉 거울은 수정되고 축소되고 일그러진 비실재적인 공간 속에서 그림의 원래 내용들을 반복했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그림에서 먼저 보았던 것들과 동일한 것들을 거울 속에서 보았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다른 법칙에 따라 분해되고 재구성된 것들이었다. 여기서 거울은 이미 말해진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거울의 위치는 거의 중심에 있다. 즉 그림의 꼭대기와 밑바닥의 정 중앙을 지나가고 있는 선을 가정할 때 그 선과 거울의 윗 부분은 거의 일치하며, 또 멀리 있는 벽의 중앙(혹은 최소한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의 중앙) 오른쪽에 걸려 있다. 그러므로 거울은 그림 자체와 동일한 원근법의 선들에 의해 지배됨이 틀림없으며, 우리는 거울 속에 똑같은 화가와 똑같은 캔버스가 똑같은 공간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고 예측할 수 있다. 거울은 완전한 복제인 것이다. [237~238p]
- 거울은 그림 속에 재현된 공간과 재현으로서의 그림의 본성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가시성의 치환metathesis을 제공해주며, 그림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이중적으로 비가시적인 것을 캔버스의 중심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비록 그와 반대이기는 하지만, 늙은 파체코가 그의 제자 세빌레가 자기 화실에서 작업하고 있을 때 그에게 준 충고를 이상하게도 문자 그대로 응용해 보면 이러하다. “이미지는 틀에서 튀어나와야 한다.” [239p]
- 이 고유명사들은 긴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며 애매한 호칭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름들을 통해 화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림 속에서 화가 옆에 나란히 붙어 있는 인물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언어와 회화의 관계는 무한한 관계이다. 이 말은 말이 불완전하다든가 아니면 말이 가시적인 것에 직면할 때 전혀 적절하지 못함이 드러난다든가 하는 뜻이 아니다. 어느 쪽도 다른 쪽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우리가 보는 바를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우리가 보는 바는 결코 우리가 말하는 것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지나 은유나 비유를 사용해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를 보이려 하는 시도도 쓸모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빛을 발하는 장소는 우리의 눈에 의해 전개되는 자소가 아니라 문법의 연속적 배열에 의해 규정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 고유명사는 단지 하나의 책략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공간으로부터 보는 공간으로 은밀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지시해주는, 다시말해 이 두 공간이 같은 가치를 가진 듯이 서로 겹쳐질 수 있도록 지시해주는 하나의 손가락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우리가 언어와 시각의 관계를 열어놓기를 바란다면, 또 그 두 공간을 가능한 한 근접시키기 위해 그 둘의 양립불가능성을 피해야 할 장애물이라기 보다는 언술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으로 간주하려 한다면, 그 고유명사들을 제거하고 그 무한한 임무를 준수해야 한다. 그 그림이 조금씩 자신의 빛을 방출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 회색의, 익명의 언어, 즉 너무 광대하기 때문에 항상 지나치게 꼼꼼하고 반복적인 언어의 매개를 통해서이다. [240p]
- 물론 이 주제를 증명하고 이를 더욱 강조하려는 듯이 벨라스케즈는 전통적인 시각 기재를 사용했다. 그는 주요 인물 옆에 무릎을 꿇고 중앙을 바라보고 있는 부차적인 인물을 배치했다. [243p]
- 아마도 벨라스케즈의 이 그림 속에는 고전주의저 재현에 대한 재현과 그 재현이 우리 앞에 열어놓은 공간에 대한 정의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상 그 재현은 여기서 자체의 모든 요소들을 그것의 이미지들과 함께, 즉 재현이 제공한 시선들과 재현이 가식적으로 만든 얼굴들과 재현을 존재하게 만드는 동작들로 그 자체를 재현한다. 그러나 재현이 우리 앞에서 모이는 동시에 퍼지고 있는 이 확산 가운데는 모든 방향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지시된 하나의 본질적인 허공이 존재한다. 즉 재현이 근거하는 것의―재현과 유사한 인물의, 또 그의 눈에서는 재현이 단지 하나의 유사물에 지나지 않는 인물의―필연적인 소멸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 주제―동일한―가 생략되어 왔다. 결국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재현만이 자신을 순수한 형식으로 제시할 수 있다. [248p]
예술의 지혜
롤랑 바르트
- 무엇보다도, 연필자국, 오일, 종이, 캔버스가 … 진행된다. 회화 도구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톰블리는 재료를 어떤 목적을 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영광 속에서 발현된 절대적인 소재로 강요한다. [252p]
- 비록 어떤 의미가 그림에서 솟아오른다고 할지라도, 연필과 색채는 ‘사물’로 남고, 그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있는 ‘거기 있음’에 대한 고집을 꺾을 수 없는 완고한 실체로 남아 있다. [252p]
- 이것은 일반적으로 물질(목탄, 잉크, 오일)을 펼쳐놓은 것이 아니라 흔적을 남겨놓게 하는 비밀을 지닌 예술이다. [252p]
- 어쨌든 톰블리의 독창적인 예술을 만들어주는 것은 습관의 조합, 배열, 분포이다. 단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하지만 문장은 작가에게 속한다. 톰블리의 ‘문장’은 모방될 수 없는 것이다. [253p]
- ‘이탈리아인들’이라고 쓰는 것은 모든 이탈리아인들을 보는 것이다. 이름이란 『천일야화』의 어떤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거기 나오는 램프와 같다. 거기에는 요정들이 갇혀 있다. 램프를 열어보거나 깨뜨리면 요정이 나와 일어서면서 연기처럼 변화하여 전체를 뒤덮을 것이다. [254~255p]
- 내가 무엇인가를 내던질 때, 나는 내가 하는 행위에 대해서 알고 있으나, 그것이 만들어낼 결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255p]
- 예술에 있어서 언어의 문제는 진정으로 해결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언어는 항상 스스로를 반추하는 일로 돌아간다. 따라서 하나의 회화 앞에서 그것이 재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한다는 것은 절대 어색한 일이 아니다. 의미는 사람에게 성가시게 달라붙는다. 의미가 없는 것이나 의미 외적인 것을 창조하고자 할 때 조차도, 우리는 결국 의미없는 의미와 의미 외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된다. 회화의 보편성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이같은 문제인 만큼 끊임없이 의미의 문제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더욱 더 당연한 일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의 차이 때문에) 하나의 회화를 ‘이해 못한다’는 인상을 갖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의미를 원하지만 그 그림이(또는 그들 생각에)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툼블리는 그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257p]
- 회화에 있어서의 유추는 표제에 있어서의 유추에 의해 배가된다. [258p]
- 그 어떤 것도 이탈리아인들, 사하라를 ‘재현하고 있지’ 않으며 이 지시대상들과 유사한 어떤 형상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들 속에 사하라, 이탈리아인들에 대한 자연스런 생각과 모순되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고 막연하게 느낀다. 달리 말해서 관객은 또 다른 논리를 예감한다(그의 보는 방식이 변하기 시작한다). [258~259p]
- 비록 많은 요소드리 톰블리를 상징주의로부터 (그것의 예술, 역사, 국적 등으로부터) 분리시키지만 그 둘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문화의 어떤 형식이 그것이다. [260p]
- 톰블리의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한 예술세계는 대 지중해의 찬란한 빛과 어떠한 유사성도 갖고 있지 않는 재료들 (긁힌 자국들, 얼룩, 더러움, 약간의 색, 조금도 아카데믹하지 않은 형식)에서 출발하여 지중해적인 효과를 부과하는 데 있다. [261p]
-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선의 깨달음이, 비이성적이며 우리의 종교적인 체험과 결부된 진지함에 도전하는 부조화스런 놀라운 방법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높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주어진 무의미한 대답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의식의 장엄함에 거슬리는 놀라운 동작으로(법어 도중에 신발을 벗어들어 그것을 머리에 이고 법당을 나가는 선승도 있다) 이루어질 수도 있다. 본질적으로는 존경심을 결여한 이같은 엉뚱함은 우리의 심적 습관에 주재하는 명료한 의식에게 가면을 빌려주는 교의적인 신중함을 동요시키는 계기를 갖는다. 비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분명히) 톰블리의 몇몇 그림은 이런 식의 무례함, 충동, 미세한 깨달음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놀라움들을 모두 캔버스에 글쓰기가 개입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톰블 리가 문자기호를 사용할 때마다 그림의 자연스러움의 충격과 동요가 있다. [263p]
-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어린아이의 것같지는 않다. 어린아이는 공들여서 그리느라 혀를 내밀고 모서리를 둥글게 해가면서 종이에 꽉꽊 눌러 그리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코드에 도달하기 위해서 끈기있게 노력하지만, 툼불리는 거기서 벗어나려 애쓴다. [263p]
- 이같은 글쓰기의 ‘서투름’ (그렇지만 흉내낼 수는 없다. 한 번 흉내내려고 해보라)은 확실히 툼블리에게 있어서는 조형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263p]
- 고전적인 회화에서는 ‘발생하고 있는 것’이 그림의 ‘주제’인데, 이 주제는 흔히 일화적(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조르고 있는 주디스)이다. 그러나 툼블리에게 있어서 ‘주제’는 개념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고전적인 텍스트이다―그것은 기묘한 개념이며, 욕망의 대상, 사랑의 대상, 어쩌면 향수의 대상이기 때문에 참되다. [265p]
- 감상자는 미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편에서 스스로 그림을 생산(‘재생산’)하기 위하여, 또 그 궁핍함과 서투름 때문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쉬운 것이라는 (아주 잘못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그 기법을 시험해보기 위해 그림과 재결합되기를 원한다. [265p]
- 이것은 말라르메가 이것을 시의 원리로 만들었음을 기억한다면 전혀 역설적이지 않은 주장이다. “나는 말한다. 한 송이 꽃이라고. 그리고 모든 꽃다발 속에 부재하는 향기, 관념 그 자체가 음악처럼 솟아오른다.” [266p]
- 흥분되고 독점적이며 독단적인 회화들이 있다. 그것들은 생산물을 강요하고 그것을 전체주의적인 물신숭배로 바꾼다. 툼블리의 예술은―바로 거기에 그의 윤리, 그의 위대한 역사적 독특함이 있는데―그 어떤 것도 포착하지 않는다. [26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