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수돗물에 대한 기억
네덜란드에 처음 와 암스테르담에 110년 정도 된 집에서 1년 정도 살 때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집을 스히폴 공항 근처 호프 도르프로 이동하며, 왠지 몸이 가려운 것 같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런지는 몰라도 전보다 머리가 더 빠지는 것 같기도 하다.
긁적긁적,
어느 순간 내 손이 무의식 적으로 밥이라도 달라는 듯 내 팔을 긁어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생각했지만, 집사람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그렇단다.
물이 잘못된 걸까?
우린 네이버에서 필터를 찾기 시작했다.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이 곳 사람들에게 필터가 있을 리 만무하고, 옆 나라 독일을 방문할 때 주변 매장들을 돌아다녀 보니 역시나 없었다. 심지어 독일 퀠른에서 묵은 호텔에는 수돗물에 흰 가루가 헤엄치듯 떠다니고 있었는데 그걸 그냥 마신다고? 노 땡스.
영국에서 공부할 때 들은 바로는 수돗물에 있는 석회가 몸 안에 축적되어 나이가 드신 분들의 발목을 보면 굴곡이 없이 퉁퉁 부어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한동안 다른 사람들 발목만 쳐다보며 걷기도 했다. 내 발목은 무사한 걸까? 하며 무의식 적으로 만지기도 하고 말이다.
한국은 역시나 다양한 제품들이 많았다. 아니 너무 많아 결정 장애에 걸린 듯한 나 자신을 탓하게 만들 정도였다. 며칠의 심고 끝에 우리 두 부부가 결정한 브랜드는 듀벨. 이쪽 업계에선 꽤나 큰 기업 같았고, 홈페이지에 제품에 대한 자신감과 전문성이 돋보였다.
한국에서 물건을 받을 때 시험차 몇 개 주문을 했다. 3개월에 한 번씩 교체하면 된다고 하니 한국으로 휴가 가기 전까지 몇 달만 써보자. 며칠 후에 도착 한 제품은 설치가 너무 쉬었다. 기존의 샤워 줄을 빼서, 수도꼭지와 샤워기 본체 사이에 연결만 하면 됐다. 우리가 필터와 수돗물과의 첫 만남을 승인하는 순간, 제품에서 "턱턱 턱턱"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물이 뿜어져 나왔다.
세상에나! 물이 미끈미끈하다!
마치 필터가 물 안에 모든 불순물을 걸러내듯, 기분 탓인지 신성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감탄하며, 3개월을 사용한 사진을 보시라! 색이 붉게 변하고 심지어 철가루와 조각들도 걸러져 있었다. 이렇게 우리 집의 심각한 물 상태를 인지하고, 싱크대 용으로도 하나 더 달았다. 게다가 싱크대 물은 브리타로 다시 한번 걸러 먹는다.
몇 개월을 보낸 후 한국에 휴가 간 김에 왕창 사 왔다. 실은 유럽에서 필터 사업을 하면 어떨까 해서 정말 많이 사 왔다. 집사람은 아직도 그 필터들을 보며 언제 팔리냐고 나한테 묻곤 하지만 아직 답은 없다. 3개월을 주기로 몇 번을 교체했지만, 처음보다는 조금 나아질 뿐 붉고 누런 불순물은 여전히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교체가 반복되고 필터와 우리 사이의 허니문이 끝나고 권태기가 시작될 때 즈음 새로운 필터가 우리 눈에 들어왔다. 이 친구는 교체 주기가 꽤나 길다. 필터도 큼직하고 샤워기는 얇은 구멍들로 구성되어 있어 물발도 세단다! 다만, 가격이 이전 것에 비하면 정말 비쌌다. 이렇게 비싸니 제 값을 하겠지 라고 우리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받으며, 우리 집 샤워 담당으로 자리 잡았고, 벌써 1년 넘게 우리 집에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