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미림 Jun 01. 2021

네덜란드 꽃가루가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5월의 마지막 어느 날


올해 네덜란드는 이상하게 5월까지 날이 추웠다. 이번 5월은 한국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니 여기만 이상한 게 아닌 듯싶다. 튤립이 한창인 4월을 지나 5월 마지막 주부터 날이 풀리기 시작했고, 드디어 '꽃피는 봄이 오면~~' 이란 노래를 흥얼거릴 만큼 따뜻한 계절이 시작됐다. 여기저기서 잔디를 깎기 시작했고, 집과 회사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내 몸을 감싸는 풀냄새가 난 좋았다.


내 코는 이런 봄이 반갑지 않아 마치 경계하듯 알람을 울리며 꽃가루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가루들이 마스크 사이를 어찌나 잘 파고드는지 코를 손으로 막아도 소용이 없다. 눈두덩이 주변이 간질거리고, 콧물이 나고, 어쩔 때는 재채기를 수십 번 반복하기도 한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영국에 살 때도 싱가포르에 살 때도 한국에 살 때에도 마치 연례행사처럼 반복된 이 돌발성 재채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매일 산책 하는 곳이지만 6월이면 사방으로 꽃가루가 흩날린다.


영국 유학 가기 직전에 병원에서 코수술을 제안받았는데, 한국인의 대부분은 코가 조금씩 삐뚤어져 있다며, 그 코를 바로 세워야 숨쉬기가 편하고 비염도 사라진다고 의사 선생님이 수술을 적극 추천하셨지만, 영국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하질 못했다. 시기도 그랬지만 수술 후에 코에 피가 가득 차고 덩어리채 쏟아 낼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충고가 더 무섭기도 했다. 일 년을 미루더라도 그때 수술을 했으면 낳아졌을까? 


후~~~~ 불며 노는 친환경 장난감


아마도 봄마다 내 코를 화나게 만드는 주범은 민들레 꽃씨인 것 같은데, 요즘은 우리 딸이 후~~ 불며 노는 장난감이기도 하기에 크게 비난하고 싶진 않다. 얼마 전 옆집 앞 작은 정원에 어찌나 많은 꽃씨 뭉치들이 마치 동그란 솜사탕처럼 우뚝 서 있던지 보기만 해도 코가 간질간질거렸다. 


민들레 꽃씨 하면 대학 조교 생활을 할 때 받은 신선한 충격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당시 우리 학교는 일본 무사시노 미술 대학과 국제 교류 전시회를 했었다. ‘디자인이 만드는 자연’이라는 동일한 주제로 한국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이 각자 아이디어를 내어 설치 작품을 만들어 서울에 위치한 일본 문화원에서 일주일간 전시를 하는 일정이었는데, 일본 학생들이 한국에 오기 전 작품들을 미리 항공편으로 보냈다. 


일본 학생 한 명과 한국 학생 한 명이 조를 이뤘고, 난 일본인 조교와 같은 조가 되었다. 그가 보낸 작품은 너무 간단했다. 작은 종이 박스 안에 민들레 꽃씨가 여러 개 담긴 투명 플라스틱 상자와 샤프심처럼 얇고 긴 철심이 흙으로 만든 구조물에 꽂혀 있었고, 철심 끝에는 민들레 꽃씨가 하나 붙어 있었다. 난 어찌도 이리 무 성의 할까 생각하며 주위 학생들과 작품을 보며 비아냥 거렸다. 


설치 당일, 종이 쪽지에 적힌 대로 설치를 하고 흙으로 만든 구조물 아래 붙은 종이를 떼어내자마자, 난 깜짝 놀랐다. 철심 끝에 달린 민들레 꽃씨가 마치 손으로 우산을 돌리는 마냥 서서히 돌아가는 게 아닌가. 철심이 꽂힌 검정 박스는 시계에서 떼어낸 부품 같았다. 1초 간격으로 똑딱거리는 초심이 아닌 소리 없이 시간이 흐르는 무소음 시간 장치였다. 민들레 꽃씨는 철심 끝에서 떨어질 락 말락 붙은 채 움직이고 있었다.


어찌 이리 간단하게 자연을 표현할 수 있을까? 간결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고, 나 자신을 너무 초라하게 만들었다. 난 왜 이런 생각을 하질 못했을까라는 창피함과 그런 친구를 만났다는 기쁨의 감정이 교차했다. 


매년 봄이 되고 민들레 꽃씨를 보면 그때의 화끈 거림이 생각나곤 한다.


철심 끝에 붙어 있는 하얀 민들레 꽃씨가 보이시나요?


매거진의 이전글 네덜란드에서 겨울나기 (feat. 가스비 줄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