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보내며

누군가와 이별을 한다는 것은

by 핵추남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6월에 갑작스레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며 응급실에 실려가 세균감염과 패혈증으로 고비를 맞이할 뻔하다

넘기시고 2달이 지난 후였다.

그 사이 요양병원으로 옮겼고 의사는 길어야 1년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귀천하셨다.


IMG_1935.JPG?type=w580 그렇게 큰 분이 저 작은 관에 들어가더라




광복절 하루 전날, 코로나로 2년 전 오기로 했던 빌리아일리시가 공연하기 하루 전,


웃돈을 주고 산 표로 공연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한껏 부풀고 있어야 할 때,


왜인지 모르게 공연 날 예보되어 있는 비가 거슬리고 공연이 끝나고 집에 오는 게 걱정되고 다음날 출근이 염려되고, 뭔지 모르게 기분이 어수선한 날.


아침 운동을 하고 소파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울리는 전화에 뜬 작은고모 이름.


순간 '아... 할머니 일이구나'라고 직감했다.



202208152143520410_1.jpg?type=w580 2년을 기다려 암표까지 구했는데



불안한 직감은 늘 틀리지 않는다고.


내가 제일 가까워 부랴부랴 요양병원으로 갔지만 이미 임종 후. 가족 중 어느 누구도 할머니의 임종 때 옆에 있지 못했다.


더 이상 숨을 쉬고 계시지 않는 할머니의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그동안 보던 모습 중 가장 편안해 보였다.


마치 아기가 자는 모습처럼.


한 사람이 돌아가셨다는 가장 슬픈 순간 정작 고인의 모습은 왜 이리 편해 보이던지.



정부의 가이드가 딱히 없는 것 같지만 병원들은 염려가 되어서 응급실 때부터 요양병원에 계실 때까지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오늘을 넘기지 못할 거 같다며 의사가 들여보내준 게 숨이 붙어 있는 할머니를 본 마지막이다)


그렇게 작은 침대에 누워 계시다 아무도 옆에 없는 때,

일요일 아침잠을 주무시다 조용히 가셨다고 한다.


지난 두 달간 할머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요양병원.


단어와 달리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곳.

아프고 병들어 죽음을 기다리기만 할 뿐,


드라마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 의 대사를 빌리자면

지구의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소비만 하는 존재들이 모여있는 곳.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너무도 안타깝다.


그 안에 있는 분들은 사회에서 치워야 할 무언가로 여겨지는 것 같다. 눈앞에 보이면 안될 존재들. .


나는 정말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인생의 막을 내리고 싶지 않다.


언제부터 죽음이란 격리되고 눈앞에 보이면 안 될 것이 되었는지.


물론 지금 당장 가정에서 사회에서 그분들을 보살필 수 있는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막상 직접 겪고 나니 말뿐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앞으로는 이런 것을 어떻게 개선해 볼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죽음이란 탄생 못지않게 존엄한 것이니까.







할머니에게 미안한 기억이 있던가.


어릴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부모와 떨어져 키워져서 초등학교 때까지 조부모가 부모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


초3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울로 전학을 오니 대부분의 친구들은 집에 엄마가 있더라.


나의 부모는 맞벌이었으니 집에는 할머니뿐. 어느 날 학교 행사에서 내가 잠바를 놓고 왔던가. 그걸 가져다준다고 온 할머니. 너희 엄마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뭐가 창피했는지 그냥 아줌마라고 답한 나.


집에 돌아가고 나니 그것이 무척 슬펐는지 작아진 할머니의 뒷모습.

그리고 나에게 여쭤본다. ' 할머니가 그렇게 창피했니?'


아니라고 그런 게 절대 아니라고 하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던 미안함.


유일한 미안한 기억이다.


살아 계실 때 그때 그 일 정말 미안했다고 한 번 더 이야기할걸 그랬다.







막상 당일 그리고 장례를 치를 땐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사실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다'라는 세상에서 유일한 진리를 실현했으니,

할머니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자연스러운 것이 슬플리가 없지 않나?


게다가 언제 돌아가실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부모님과 친척들, 오는 가을 동생의 결혼을 앞두고 혹시 상이 겹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하다못해 잠시 휴가를 가고 싶은데 가도 되나라는 생각,

(빌리의 공연도 마찬가지였다. 공연 때 돌아가시면 어쩌나란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 씨가 될줄은. .)


그리고 현실적으로 부담되는 지출들.


이렇게 생각하면 가족들에게 2달간의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고적절한 시기에 떠나준 것은 오히려 할머니의 배려가 아닌가 생각했다.


심지어 당시 폭우 예보가 있었는데 평소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사자후 때문인가?


장지에 모시는 때에 그 많던 비구름이 사라지더라.


IMG_1934.JPG?type=w580 미치도록 날씨가 좋던 발인하는 날



입관 때도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사촌동생은 냉정하다고 했는데,


글쎄 . . . .


난 오히려 영화 '헤어질 결심'에 나오는 대사가 다가왔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고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퍼지는 사람도 있다'


목놓아 통곡하지 않는다고 슬프지 않은 것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사실 눈물이 흐르지 않았던 다른 이유는 이렇다.



문자 그대로 '한 지붕 밑에' 같이 살았던 사람들은 울음이 적었다.


30년 넘게 직장을 다니면서도 시집살이하다 내가 결혼하며 독립했지만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주 반찬을 만들어 나르던 엄마,


장남으로서 (장남의 장남. 그러니 나는 장남의 장남의 장남) 4남매가 있었음에도 경제적으로 물리적으로 모신 아빠.


30년 가까이 같이 살다가 10년 전 결혼하며 따로 사는 나.


내가 결혼하고 엄마가 독립하는 바람에 할머니를 모시고 살게 된 동생.

(마지막 쓰러지신 날까지 같이 있었다. 좋아하는 소고기를 구워드리지 못하고 닭강정을 데워줬다고 미안해한다)


정작 살을 맞대고 같이 살았던 사람들은 애증의 관계여서 였을까 눈물을 많이 흘리지 않고 있는데, 어쩌다 한 번 만나는, 명절 같은 날 잠시 보고 돌아가는, 용돈을 정기적으로 드리지도 않던 사람들이 소리 내며 통곡하는 모습에 당황스러움이 커서 나오던 눈물도 들어간 것같다.



위에 나는 장남의 장남의 장남인 장손인데 ,밑에 터울이 가장 가까운 것이 내 동생으로 4년이다.

외가에서도 어머니가 8남매의 장녀였고 거기도 바로 밑 사촌동생이 4살 차이.


그러니 집안 어른들에게 온갖 관심과 이쁨을 받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 애정. 내가 달라고 한 것은 아니다.

자발적으로 주었다면 그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하는 건 우습지 않나?

마치 내가 부채가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장손의 의무를 이야기하는 어른들.


청소년기까지는 어른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사촌들같이 아이도 아니어서 조금 외로운 낀 신세로 주변인이 되더니 커서는 손자가 아닌 아들에 준하는 의무감을 요구한다.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산다는 것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그 장남의 아내도 그러하다�)



집안의 큰 어른이 돌아가시고 나면 다른 친척 어른들의 민낯이 보이게 된다.

강이 가물고 나면 바닥에 모르던 것들이 보이듯,한 집안에서 어른이 사라지고 나면

그간 큰 어른에 깔려있던 갈등과 반목, 견해 차이, 해묵은 오해 등등이 올라온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불편하지만 어차피 치러야 할 의례이기에 도리어 속이 편했다.

민낯을 보고 나면 기대도 사라지니까 바랄 것도 없으니.



아무튼 그렇게 할머니는 곁을 떠나셨다.


만나면 격하게 얼굴을 때리며 애정표현하던 촉감을,

이른 아침 갑자기 전화해서 글루코사민이 떨어졌으니 보내라는 음성을,


이제는 느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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