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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병준 May 23. 2021

신이 작은 티스푼으로 도시를 휘저을 때_페스트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고 나서

  비가 오는 날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품에는 이 책이 있었다. 1호선 금정역에서 내려 비와 함께 장례식장으로 달려가는 길. 나는 사는 일이 참 얄궂다는 생각을 했다. 산 자는 숨을 헐떡이며 죽은 자를 향해 달린다. 넘치는 숨을 가슴에 담는 일은 구역질이 나고 고통스럽지만 오직 살아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갖 산 것과 죽은 것들이 뒤섞여 있다.


  페스트는 1947년 출간된 알베르 카뮈의 장편소설이다. 책은 그동안 읽은 카뮈의 작품과는 결이 다르다. '이방인', '칼리굴라', '전락' 같은 작품들이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페스트'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을 비춘다. 알제리 북서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 오랑. 신이 작은 티스푼으로 도시를 휘젓자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엔 역병이 창궐한다. 우리가 거리를 둔 채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죽음은 코 앞까지 다가왔다. 때론 쥐의 모습으로, 때론 연기의 모습으로, 때론 종기의 형태를 한 채 말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향기를 느꼈다. 리외, 그랑, 타루, 랑베르, 코타르까지. 각자의 등장인물들은 정교한 기계처럼 움직인다. 마치 잘 짜인 연극을 보는 것 같다. 그들은 '페스트'라는 무대 위에서 공통된 질문을 받는다.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신 없이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 책 너머의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책은 묻는 듯했다.


  이 중 어느 등장인물이 카뮈의 생각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들이 저마다의 답을 찾고 행동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무엇도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력하다는 것을 안다. 인간을 움직이는 건 그들 스스로가 던지는 질문이자 명령이다. 물음이 없는 자는 동력을 잃고 정지한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 말한다.


Campagne d’assainissement et d’aménagement de l’environnement de la zone industrielle ~ | flickr.com

  

  아직 페스트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카뮈의 '결혼, 여름'을 먼저 읽기를 추천한다. 에세이 속 오랑의 모습이 페스트에서 보다 선명히 그려진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오랑은 카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그가 오랑에서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회백색의 도시는 자연을 만나 천변만화한다. 죽어가는 오늘의 태양이 흘리는 노을빛, 오래전 숨을 거둔 누군가가 세워놓은 여러 구조물의 잿빛, 거품을 이는 파도의 희고 흰 빛, 죽음의 그늘과 생의 빛이 나누는 선명한 명암의 색까지. 카뮈가 오랑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또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죽음이 만연한 도시에 자연만은 끊임없이 색을 덧칠하고 있었다.


  그래서 타루와 리외가 함께 해수욕을 즐기는 장면은 의미가 있다. '결혼, 여름'에서 수영을 자연과 인간의 결혼으로 묘사한 작가였기에, 두 남자가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어머니, 바다의 품 안에서 하나의 친구가 되는 장면은 단순한 일탈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과거를 고백하고, 공통의 목적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둘은 솔직해진다. 서로에게 솔직한 이들만이 친구가 되는 것이다. 질병이 만연한 도시에서 벗어나 친구와 함께 잠시나마 자연에 몸을 맡기는 장면은 책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장면이었다.


  인류는 페스트를 앓고 있다. 세계는 치료할 수 없는 재앙이 만연해있다. 수 천 , 수 만 가지 이유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우리가 신이 만든 역병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책은 다시금 내게 묻는다. 역병이 창궐한 도시에서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나는 달리고 싶다. 이 얄궂은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숨이 헐떡댈 만큼 달리는 일뿐이다. 산 자, 죽은 자 가리지 않고 손을 뻗기 위해 나는 달린다. 나는 이 광경이 참으로 얄궂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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