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작가 Oct 26. 2024

3화 대학의 주인

타로 (Tarot)

  아린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준아의 얼굴만 보였다.


  “저기.. 혼자 집에 가기 무서워서 그러는데.. 나 좀 데려다 줄래요?”


  잠깐의 정적이 일- 이- 초 흐르다 태오가 일어나서 말했다.

  “아, 아까부터 준아가 계속 얘기하던 아가씨가 이 분이시구나. 반갑습니다. 김태오입니다.  


   안 그래도 제 친구가 숙녀 분을 데려다주지 못했다고 걱정하는 눈치 더 라구요. 잘 오셨네요!”

  

  준아는 그녀를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렇더라도 찾아와 준 것에 놀랍고 반가운 마음이 들어 뭐라도 얘기해야겠다 싶어 일어났던 것이다.   

  “아, 저기.. 아까 무섭게 된 상황에 대해서.. 저도 일조했으니 역 입구까지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아린은 준아가 자신의 편을 드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자기 딴에는 엄청난 용기를 내서 이 테이블 앞에까지 걸어왔던 것이다. '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테이블 사람들에게도 가볍게 목례만 하고 상황이 창피했던지 종종걸음으로 입구 쪽을 향해 도망갔다.    

 준아는 아린을 에스코트하여 주점 밖을 나섰다. 곧바로 중앙도서관이 보였다. 흰색의 아치형 칠 층 건물로 높은 언덕 위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황색 가로등은 중앙도서관의 흰 벽면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캠퍼스를 걷는 길은 나이 많은 짙은 나무 냄새와 선선한 밤공기와 마주하는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린은 함께 걷고 있는 이 남자가 원래 알 던 사이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다행스럽게도 이 둘이 함께 걷는 거에는 누구도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삼삼오오 주점에서 술과 축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린은 아까 점괘를 듣느라 정신이 없어서 준아를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키가 크고 적당히 마른 체형에 체육 특기생 느낌을 주는 야구 점퍼 차림이었다.  

  무엇보다 인상이 선하게 생긴 것이 아린이 마음의 경계를 풀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혹시 인문대 옥상에 가 본 적 있어요?”

  조용하게 걷기만 하던 준아가 입을 열자 아린은 당황했다. 아까 점을 보던 상황 때문인지 아린에게는 준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깜짝 놀랄만한 예언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놀라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은 타로 카드가 제 손에 없으니까요. 인문대는 저기 끄트머리가 살짝 보이는 건물인데요. 옥상 전망이 캠퍼스에서 탑이거든요. 별도 볼 수 있고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올라가 볼래요?”

  “네? 지금요?”

  “네! 이 시끄럽고 복잡한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한적하고 여유 있을만한 곳이 딱 저기거든요.”


  아린은 망설이듯이 발걸음을 멈췄다. 준아는 그녀가 불편해하는 눈치를 느끼고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 그럼, 다음에 가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한 번 제안해 본 거고요. 내키지 않으시면 다른 조용한 곳을 한번 찾아볼게요.”


  “저기, 아까 별이.. 잘 보인다고 했죠? 정말 잘 보여요? 낯선 곳은 잘 못 가는 편이라.. 우선 가보고 불편하면 얘기할게요.”  


  준아는 그녀의 발걸음의 크기를 맞춰가며 별 말없이 인문대를 향해 갔다. 인문대 건물 정면에는 큰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준아는 그것을 가리키며 아린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우리 대학의 주인은 누구인가!”


  “예?”


  “저 플래카드요. 대학의 주인은 당연히 승호님 아닌가. 최고의 갑이자 집주인이신 우리 대학 총장님.”


  “아..”


  “아, 혹시 우리 학교가 아니신가 보네요. 괜한 얘기를 했네요. 재미없는 농담이었네요.”


  '당연히 우리 학교 학생인 줄 알았는데' 건물에 들어 선 준아는 거의 혼잣말로 말했다. "학교의 주인은 당연히 학생이죠-"라고 얘기하며 계단을 먼저 올랐다.   


  아린은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수줍어하면서 자기를 리드하는 이 남자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상대가 좋았다. 이 남자는 점술가이기도 하니 앞에서 거짓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 핑계로 이 순간만큼은 솔직해지고 싶었다.


  옥상에 도착하자 아린은 준아의 뒤통수를 향해 고백했다.  

  “제 이름은 윤아린이에요. 올해 한영대에 입학한 경영대 신입생이고요. 아까는 고마웠어요.”


  “아, 우리 학교가 맞았군요! 고맙긴요. 아까는 좀 걱정이 되더라고요. 일부러 좀 세게 지른 것도 있었어요. 스토커라는 제 말을 안 믿을 까 봐요. 통성명이 늦었네요. 저는 강준아입니다. IT대학 03학번이고요.”

  준아는 같은 학교라는 사실에 신이 난 것처럼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청순한 외모였으나 내면에는 다부진 성격이 숨어 있는 듯했다. 특히 전화번호를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고 제 발로 주점까지 찾아와 준 적극성이 독특하게 느껴졌다. 


  아린은 고백을 멈추지 않았다.

  “네, 저 보다 선배시네요. 저.. 친해지려면 솔직하게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요. 사실.. 저는.. 아까 그 친구 외에 학교에 친구가 없어요.”


  “에? 신입생이면 동기들도 많을 텐데요. 다른 친구를 안 사귀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그게.. 저.. 그게...”


  아린은 오늘 평소와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언제나 친구의 말을 따랐는데 처음으로 도희에게 거절을 했고 낯선 남자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모르는 사람 투성인 곳에 들어가 자기를 데려다 달라고 얘기한 용기는 어디서 나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심경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이왕 이렇게 망가진 거 다 오픈해 버릴까' 했다가 또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집이 좀 엄해서요..”


  “아.. 혹시 통금 시간 있으세요? 제 동기들도 아무래도 신입생 때 아버지가 통금에 엄격한 분들이 있더라고요.”


   “...”

  아린이 머뭇거리는 반응을 보이자, 준아는 습관처럼 그녀의 눈을 쳐다 보고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 정말 괜찮으니 다음에 편하게 얘기하고 싶을 때 해도 돼요. 그럼 지금부터 한영대의 자랑 인문대 옥상을 소개드리겠습니다.”


  다급하게 옥상 가장자리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준아, 아린은 지금의 기회를 놓치기 싫은 듯 소리치고야 말았다.

  “저희 아빠가.. 윤승호 총장예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