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차
“도둑은 도둑, 강도는 강도요. 누구든 저지른 놈이 상대 아니겠소. 아무리 소국이라고는 하나 사직이 엄존하기를 전쟁은 비록 못할지언정 한 나라의 국모를 시역한 원수들, 불공대천의 원수들, 음 그, 그래 서울에서 높은 벼슬자리를 올라타고 있는 양반들은 쓸개도 썩어 문드러졌단 말씀이오? 뒷배를 보아주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원수 놈들과 함께 총대를 의병에게 들이대야 옳겠소? 이보다 더 분한 노릇이 어디 있단 말씀이오.”
<박경리 토지. 2편 13장 꿈>
길섶에 밟은 풀잎에 이슬이 남아 있어서 짚세기가 젖는다. 날씨는 변덕을 부릴지, 조금씩 흩어져 있는 구름이 다소 빠르게 가고 있는 것 같았으나 하늘은 휑하니 높았고 푸른빛은 차가웠다. 들판은 잔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목동이 소를 몰고 들판을 질러가는데 송아지가 어미 소 뒤를 줄레줄레 따라간다.
십 리 길을 거의 지나는 동안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이 중에서 앞장선 수동의 얼굴에는 간혹 긴장의 빛이 돌다간 생각에 잠기곤 했다.
<박경리 토지. 2편 14장 추적>
주막 앞에 이르러 잠시 쉬어가기 위해 최치수가 나귀에서 내렸을 때 수동이는 재빨리 상전의 얼굴을 살핀다. 항상 날카롭게 다물려져 있던 입술이 헤벌어져 있었다. 나귀를 몰고 앞서가면서 최치수의 날카로운 표정만을 상상해온 수동이로서는 의외였다. 나귀에게 물을 먹이면서 다시 치수 쪽을 보았을 때 그는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혀 아무 생각이 없는 듯싶었으며 병신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강포수는 주막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박경리 토지. 2편 14장 추적>
13장에서
문의원과 김훈장의 대화 장면 중 일부다.
적이 누구인가를 묻는 이 장면에서
작가의 분노는 외적을 향하지 않는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안에서 침묵하거나,
안에서 타협하는 얼굴들이다.
『토지』는 계속해서 묻는다.
나라를 무너뜨리는 건 침략인가,
아니면 침략을 견디며 썩어가는 내부인가.
14장에서
최치수가 구천을 향한 추적을 시작한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같은 긴장을 공유한다.
자연은 질서 정연한데
사람의 세계는 불안하고 목적이 흐리다.
늘 냉혹하던 최치수가
멍하니 강을 바라보는 모습은
권력 또한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모두가 자기 생각에 갇혀 있고
아무도 이 상황을 붙들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장면은 역사라기보다
사건이 터지기 직전의 정적처럼 읽힌다.
이야기는 조용하지만
불길한 방향으로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