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앞에 〔박경리 토지 완독 챌린지〕 17일차

by 사랑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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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앉은 우관은 상좌 명신이 끓여다 놓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잠시 바깥 기척에 귀를 기울이더니 눈을 감는다. 눈을 감아도 최치수의 얼굴은 사방에서 모여들어 여전히 우관의 망막을 어지럽힌다.

실눈을 뜨고 웃던 얼굴이, 수백 수천의 얼굴이 암자 가득히 들어차 우관을 향해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이다. 흡사 지옥도를 보는 느낌이다. 우관은 감았던 눈을 떴다. 문살이 뚜렷한 장지가 한결 밝게 눈부시다. 가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마을보다 한 걸음 앞서 산사의 가을은 도라지꽃에서부터 시작된다.


<박경리 토지. 2편 15장 무명번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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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짓, 죄악의 씨라면 어떠냐? 내 계집을 채간 간부(奸夫)만으로 죄목은 충분하거늘, 그놈의 핏줄을 밝혀 어쩌겠다는 게지? 핏줄, 핏줄? 핏줄이라고? 무슨 핏줄! 누구의 핏줄!’

절 방에 드러누워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최치수는 신음하다 뇌까리곤 했다.

‘덮어두자. 덮어두는 게야…… 음, 음? 그래 덮어두어야 한다고? 무엇을? 어떤 사실을?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도대체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


<박경리 토지. 2편 15장 무명번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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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러니까 어머니가 몸져눕게 되고 의원이 오게 된 그날 이전에 벌써 이상했었다. 백일기도를 드리고 절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왜 자기를 피했으며 만나려 하지 않았던가. 글공부를 하다가 등잔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을 때 바우와 문의원은 쑥군쑥군 얘기를 나누었으며 바우는 왜 울었을까. 가마를 타고 돌아온 어머니의 백랍 같았던 모습, 험악했던 눈초리, 하늘을 우러러보는 얼굴에 소름이 돋아나고 울음이 터질 것 같았던 몸짓, 담벼락에 붙어 서서 숨어 보았었다.

그러한 날들의 기억은 주술(呪術)처럼 비밀스러운 것이었으며 그러니만큼 색채는 강렬하였다. 집념 깊게 그 기억들을 조각보처럼 모아보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형태도 이루질 못하였다. 집념이 강해질수록 있음직한 사건은 바닥 모를 한정 없는 심연 속으로 형태를 감추어서 수수께끼는 영구히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박경리 토지. 2편 무명번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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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이 서희어미와 달아난 후 치수는 사람을 시켜 쫓으려면 쫓을 수도 있었다. 왜 쫓지 않았는지, 치수는 그러한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소리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증오, 보복, 그 어느 것도 아니면서 사실을 규명하고자 하였고 규명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또 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치수는 절 방에서 온종일 비몽사몽의 상태로 보내다가 아침하여 절간이 죽음에 달한 것처럼 인적이 끊기면은 박쥐같이 절문 밖으로 빠져나가 절 밑의 마을을 헤매었다.


<박경리 토지. 2편 16장 목기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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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과 16장은

번뇌를 정면으로 마주한 두 사람을

서로 대비하며 보여준다.


우관 스님과 최치수.

우관의 내면에는

아직 계절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최치수는

어찌해야 하는가.


기억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조각나 있고,

설명되지 않으며,

이어질 수 있음에도

스스로 연결하기를 거부한다.


기억이 강렬할수록

진실은 더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최치수는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벌하고 있다.


쫓을 수 있었으나 쫓지 않았고,

그 선택은 증오도 보복도 아니다.


그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만

알게 되었을 때의 자신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정체된 인간으로서,

그가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이다.


최치수의 정체는

특별한 비겁함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을 원하면서도

그 이후의 책임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모습이다.


불편한 건,

그 얼굴이 나와 겹쳐 보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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