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순네도 초롱을 돌리며 오던 길을 되잡는다. 귀녀에게 하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물밥 한 그릇 못 얻어먹고 떠돌아다닐 혼백 생각을 하니, 그 말에 감동되어 그런 말을 했을지 모른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봉순네였을까. 그러나 감동 때문만이 아니었다. 귀녀가 무섭기도 했다. 초롱불을 받고 서 있던 귀녀의 크고 움푹 패인 까무까무한 눈동자가 무서웠다. 그 눈동자 속에 그칠 줄 모르는 집념이 문적문적한 뱀의 살갗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밤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박경리 토지. 17장 바람인가?>
‘누구 마음대로?’
평산의 꿈속에 미륵님이 나타나서 빈정거리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평산의 오산도 딱하기 한량없으나 미륵님께서도 적이 심술이 있으신 모양이다. 오색 무지개를 잡아보려고 기어이 언덕을 기어올라가는데 이 불운한 무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서운 호랑이요 함정이라는 것을 한마디 귀띔도 없이 오히려 요만큼 더, 요만큼 좀 더, 손짓을 하는 것이나 아닌지. 차생의 일은 불문에 부치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지옥의 신음은 볼 만한 구경거리인지도 모르겠다.
<박경리 토지. 17장 바람인가?>
구천이를 발견한 후 이틀 동안 치수의 모습은 아주 발랄했으며 즐기차고 정력적으로 보였다. 겨우 초당과 사랑 사이를 오가며 말밭도 별로 없이 폐쇄되고 나태하고 병약하여 파랗게 썩어서 고여 있는 연못 같았던 생활을 해온 최치수가 옷이 젖도록 땀을 흘렸으며 팽팽하게 긴장된 피부, 상기된 분홍빛 혈색, 눈은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고 슬기로워 아름답기조차 했던 그 모습에는 초조함이 없었다. 권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냉소를 띠지도 않았다.
<박경리 토지. 18장 초록은 동색>
17장에서
귀녀의 집념은 아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느낌으로만, 예감으로만 존재한다.
봉순네가 느끼는 공포 역시 명확하지 않다.
왜 무서운지 설명하지 못한 채,
“밤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라는 말로 물러선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오히려 더 소름 돋는다.
공포를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내 몸 안에 그대로 남는다.
나도 그 눈동자를 이해하지 못한 채,
불편하다.
평산의 장면에서는
불편함이 다른 결로 이어진다.
‘누구 마음대로?’라는 말이
농담처럼 던져지지만,
읽는 내내 웃을 수 없었다.
미륵은 구원하지도, 경고하지도 않는다.
조금만 더 가 보라고 손짓할 뿐이다.
그 무심함 앞에서
인간은 스스로 파멸을 완성한다.
신의 악의가 아닌 신의 침묵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구나.
18장에서
최치수는 놀라울 정도로 살아 있다.
그의 얼굴은 밝고, 몸은 팽팽하며,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다.
바로 그 생기가 무섭다.
집념이 사람을 파괴하는 대신,
잠시나마 사람을 살려낸 순간이기에.
정의로워진 것도 아니고,
깨달은 것도 아닌데
그는 분명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는다.
이 장면에서
아름다움과 혐오를 동시에 느꼈다.
이번 장을 이어 읽으며
『토지』가 묻는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다.
집념이 세계를 통과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념은 타인에게는 공포가 되고,
신에게는 방관당하며,
당사자에게는 생의 활력이 된다.
이 소설이 무섭다.
판단을 내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사람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 순간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한 채,
그저 견딜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