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똥이 붙어 있었다. 파리똥은 기어가는 벌레 같았다. 봉순이는 눈을 좁혔다 벌렸다 하며 파리똥이 벌레가 아닌가, 골똘하게 쳐다본다. 까만 점은 수물수물 기어다닌다. 시력을 모아 볼수록 눈이 맵고 눈물이 나는데 벌레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읍내에 갈 적에 나룻배를 탔을 적에, 나룻배란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강물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가 대숲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초가지붕들이, 산들이 구름이 바삐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와 비슷한 착각에서 봉순이는 눈을 좁혔다 벌렸다 하며 눈이 매운 것도 참으며 이미 벌레로 생각해버린 천장의 파리똥을 열심히 쳐다본다.
<박경리 토지. 2편 21장 운봉의 명인들>
저고리 안을 붙어나가는데 봉순네의 손은 날듯 빨랐다. 바늘에 가득 찬 주름을 실 쪽으로 밀어내며 부챗살을 펴듯 쭉 펴는 매듭을 짓고 실을 물어 끊는다.
<박경리 토지, 2편 21장 운봉의 명인들>
강바람은 매웠다. 추위가 일찍 오는 모양이었다. 바람이 모래를 싣고 온다. 용이는 소매 끝으로 눈을 비비며 걷는다. 못질 한 월선이 주막을 본 뒤 여러 달 만에 가보는 읍내 장길이다.
강둑에서 아이들이 연을 올리고 있었다. 바람이 구름을 다 날려버린 맑고 푸른 하늘에 하얀 소연(素鳶)이 둥둥 떠서 올라간다. 바람을 잘 잡아올리는 연은 높이, 하늘 높이 얼레의 줄을 풀면서 올라간다. 시금파리 가루에 송진을 먹여서 철사같이 질긴 연줄이 풀려나가는 소리, 바람 소리, 물살이 이는 소리, 아이들의 눈은 흰 연을 따라 떠날 줄 모른다.
<박경리 토지. 2편 22장 백의인(白衣人)들의 인식>
토지를 읽을수록
문장 하나하나의 세밀함에 감탄한다.
이 소설은 사건보다 감각을 먼저 건드린다.
읽는다기보다, 자꾸 겹쳐진다.
21장에서
봉순이가 천장의 파리똥을
유심히 바라보는 장면이 그렇다.
파리똥은 분명 움직이지 않는다.
봉순이는 ‘이미 벌레로 생각해버린’
순간부터 그것을 움직이는 존재로
확정해 버린다.
시력을 모을수록 눈은 맵고 눈물은 나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끝까지 들여다본다.
이 장면은 의식이 현실을
어떻게 바꿔버리는지를 보여준다.
정신이 한 방향으로 고착될 때 생기는
착각에 가깝다.
이 부분을 읽으며
아주 어릴 적,
시골에서 자라던 기억이 떠올랐다.
파리똥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저게 움직이는 것 같아…’
하고 느꼈던 그 감각.
박경리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몸의 감각으로 그대로 되살려낸다.
이 장면은 너무 익숙해서 소름이 돋는다.
같은 장에서
봉순네의 바느질 장면 또한 그렇다.
몇 줄에 불과한데도 손이 먼저 반응한다.
“부챗살을 펴듯 쭉 펴는 매듭”
이라는 표현은 손의 움직임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속도, 손끝의 감각,
실을 물어 끊는 타이밍.
이건 관찰이 아니라
몸에 남아 있는 기억이다.
눈을 감아도 그 장면을 그릴 수 있었다.
이 장면은
봉순네의 성격이나 신분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녀가 살아온 시간을
말이 아니라 손놀림으로 보여준다.
더 정확하고, 더 오래 남는다.
22장에서
용이가 장터로 나서는 장면도 인상 깊다.
여기서 작가는
용이의 마음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상태’를 보여준다.
강바람은 매섭고,
하늘은 맑고,
연은 높이 올라가며,
소리는 선명한데 정작 용이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슬픔도 희망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지나가고 있는 상태’다.
아이들이 연을 올리며
시선을 하늘로 보내는 동안
용이는 끝내 땅 위에 남아 있다.
그 대비만으로도
그가 어디쯤에 서 있는 사람인지는
충분히 드러난다.
파리똥은
의식이 현실을 바꾸는 순간이고,
바느질은
몸에 남은 삶의 기억이며,
용이는
아직 감정도 결단도 아닌
중간 지대에 서 있는 인물이다.
‘내가 살았던 감각을
누가 이렇게 정확히 적어놓았지’
토지를 읽으며 드는 드는 감정은
감탄이라기보다 경외에 가깝다.
이 책은 읽는 소설이 아니다.
감각이 겹쳐지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