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모양으로 빛을 잃은 함안댁의 작은 눈이 천장을 한 번 보고 방문을 한 번 보고 방바닥을 쓸며 일거리로 옮겨지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을 시작했다. 골똘히, 골똘히. 그는 일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직 이 세상에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박경리 토지. 3편 1장 작은 춘사>
제수가 산더미 같으면 뭘 하겠소. 정한수 한 그릇에 망인에 대한 정의의 눈물을 흘리는 것만 같지 않지요. 하긴 어느 세월이든 본시의 것을 오래 지키는 쪽은 서민인가 하오. 지금 친일하여 삭발하고 양복을 따라 외관을 바꾼 사람들은 모두 양반들 아니겠소? 제 나라 백성 다스리는 데도 남의 힘, 제 겨레를 치는 데도 남의 힘, 그럴 때의 체통은 불괄지산가 본데, 허 참, 이야기가 빗나갔소이다.”
<박경리 토지. 3편 2장 늙은 보수파와 개화파>
귀녀와 김평산의 눈이 마주친다. 그들은 서로의 눈에서 다 같이 살의(殺意)를 본다. 귀녀는 눈을 내리깔며 실뱀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거는 그렇고 어디 손 한번 잡아볼까?”
히죽거리며 평산은 미끈하고 기름기가 돌아서 끈적거리는 것 같은 귀녀의 손목을 잡는다.
“왜 이러요!”
<박경리 토지. 3편 2장 늙은 보수파와 개화파>
토지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이
얼마나 냉정하고 정확한지
다시 느끼게 된다.
3편 1장에서
자식의 문제 앞에서
함안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을 시작한다.
눈이 천장을 훑고, 방문을 보고,
바닥을 쓸고 그 시선이 일로 옮겨지며
감정은 삭제된다.
“오직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이라는 문장은
성실함이 아니라 체념에 가깝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느낌이 없다.
2장에서
문의원과 김훈장의 대화는 더 노골적이다.
제사의 형식, 정의의 눈물,
나라를 말하는 언어들.
그 말을 하는 이들 곁에서
정작 오래 지켜온 쪽은
언제나 서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역사는 거창한 말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침묵과 노동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작가는 과장 없이 들춰낸다.
그리고 2장에서
귀녀와 평산의 장면.
소름이었다.
여기엔 말보다 눈이 먼저 있다.
서로의 눈에서 동시에 읽히는 살의.
그 뒤를 잇는 농담 같은 손짓은
폭력이 감정은 없고
관계의 규칙으로 작동함을 보여준다.
이 장면이 불편한 이유는
그들이 특별한 악이라기보다는
익숙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토지는 계속 누군가를 고발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굳어버린 자세를
조용히, 끝까지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읽을수록 이 소설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처럼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