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은 모두 귀녀를 얻을 수 없는 데서 시작된 것이었으나 그러나 강포수는 산에서부터 최치수가 귀녀를 내어놓지 않을 것을 짐작했었고 그 때문에 평생 처음 짐승에게 선불을 맞혀 명포수인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으며 사람도 상했던 것이었는데 지금 얼마간의 노자를 들고 언덕을 내려오는 자기가 꼴이 문전걸식하는 거지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기를 원치 않았던 본래의 피는 견디기 어려운 노여움으로 치솟는 것을 깨닫는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살갗보다 그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후일, 강포수는 이날을 평생 잊지 못하게 된다.
<박경리 토지. 3편 5장 난리가 났다는 소문>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귀녀의 이빨 사이에서 무서운 소리가 새어나왔다. 악마의 얼굴이요 악마의 미소요 악마의 희열, 보복의 화신.
‘내가 강포수하고 살아? 내가 강포수하고 살아? 화전을 일구며 살 수 있겠느냐?’
이제는 야망 때문이 아니었다. 보복 때문이다. 서희가 얼굴에 침을 뱉었을 적에 귀녀는 보복의 칼을 갈았다. 이제는 그 칼을 내리침에 주저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미 죽이기로 작정하였고 죽일 것을 주저했던 귀녀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귀녀는 만석꾼 살림보다, 아니 백만 석의 살림보다 여자로서 물리침을 당한 원한이 더 강하였다. 최치수를 사랑했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지금 귀녀는 백만 석의 살림을 차지하는 야망보다 노비로서 짓밟힘을 당한 원한이 더 치열하였다.
‘그놈은 나를 손톱 사이에 낀 때만큼도 생각지 않았더라!’
<박경리 토지. 3편 5잘 살해>
방문이 열리고 닫혀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랜 시간이 흘렀다.
“우우욱……”
낮은 목소리, 발버둥치는 소리, 낮은 숨이 찬 신음, 발버둥치는 소리, 끔틀거리는 소리, 소리…… 소리가 멎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헉헉 흐느끼는 것 같고 쥐어짜는 것 같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한층 크게 들려온다. 이를 악물면서 새어나는 거친 숨소리, 방문이 열리고 허둥지둥 뛰어나오는 모습. 모습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박경리 토지. 3편 6장 살해>
3편 5장과 6장.
이 장면들에서 『토지』는
비극을 극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사람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를
차갑도록 정확하게 보여준다.
강포수의 울분은
귀녀를 얻지 못한 데서 시작되지만
끝내 그것은 욕망의 좌절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순간으로 이동한다.
짐승에게 선불을 맞았다는 수치,
명포수라는 이름에 씻을 수 없는 오점,
얼마간의 노자를 들고 내려오는 자신이
문전걸식하는 거지와 다르지 않다는 자각.
그때 불어오는 강바람은
살갗이 아니라 마음을 베어낸다.
귀녀의 선택은 더 잔인하다.
그녀의 결심은 야망에서
보복으로 옮겨간다.
만석도, 백만 석도 아닌
여자로서 물리침을 당한 원한.
보복은 주저 없이 칼이 된다.
“그놈은 나를 손톱 사이에 낀 때만큼도
생각지 않았더라”
라는 문장은 귀녀를 악마로 만들기보다
이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여자를 짓밟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 살해의 장면.
여기엔 설명도, 판단도 없다.
오직 소리뿐이다.
발버둥, 숨, 신음, 끊기는 순간.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른 뒤
시꺼먼 무엇이 웃고 서 있다.
무섭다.
폭력이 일어난 뒤에도
세계가 아무렇지 않게 계속된다.
한 페이지에서
영화 한 편을 본 듯 했다.
어찌 이렇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토지』는 누구를 단죄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고,
어떤 순간에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는지를 끝까지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