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지고 있다 〔박경리 토지 완독 챌린지〕 28일차

by 사랑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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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은 왜 좋은지 그 이유를 모른다. 길상은 목소리가 굵게 터져 나오는 이 시기가 자신에게 있어 봄이라는 것을 모른다. 눈은 더욱 크고 서늘해졌으며 긴 목이 좀 통거워졌고 양어깨가 벌어졌으며 다리에는 힘줄도 생긴 이런 변화가 인생에서의 봄이라는 것을 모른다. 봄에 눈을 떴기 때문에 이 화창한 봄 날씨가 좋았던 것이다. 이 소년에게 또 하나의 이유는 최참판댁의 서희가 상복을 벗은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옥색 저고리에 남치마를 입었던 서희, 제법 늠실하게 큰 봉순이도 서희를 따라 무색옷을 입고 입이 벌어졌던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너무 오랫동안 암담하고 비애에 가득 찬 집 속에 마음을 가두어놓고 있었다. 그것은 기나긴 겨울이었다고 해도 좋았을 것이다.


<박경리 토지. 3편 13장 개나리를 꺾어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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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없는 사람들은 서울 제물포 사이에 나는 듯한 철마가 달리고 종로 네거리에는 전등불이 휘황하며 한강에는 철교를 놓았다 하여 신기해들 하는 모양인데 그런 것은 우리네가 만들고 우리네 임의로 한다면야 반가운 일이죠. 우리들도 남들만큼 나라 사정이 달라져야 할 테니 말이오. 헌데 그 내막을 알고 보면 가슴을 칠 일이고 수제 쓸개를 뽑아서 갖다 바친 꼴이지 뭣겠소? 위정자들은 장차 이 나라를 어느 곳으로 몰고 갈런지 생각이나 해보고 처신을 하는지 심히 의심스럽소이다. 들자니 서울 제물포 간의 철도만 하더라도 그 권리를 얻기 위하여 미…”


<박경리 토지. 3편 14장 사양의 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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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13장에서

길상의 변화는 계절의 봄과 겹쳐 있다.

목이 굵어지고, 어깨가 벌어지고,

눈빛이 달라진 이 소년은

자신에게 찾아온 생의 봄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저 하늘이 좋고, 바람이 좋고,

서희가 상복을 벗었다는 사실이 좋다.


오랫동안 비애에 눌려 있던

집안의 공기가 걷히고

아이들의 마음이 겨울에서 풀려나는 순간,

봄은 설명되지 않고 몸으로 먼저 찾아온다.


길상이 모르는 사이,

생은 조용히 방향을 바꾸고 있다.



반면 14장에서

말하는 ‘철마’와 ‘전등’, ‘철교’는

겉으로 보기엔 또 하나의 봄처럼 보인다.


세상이 바뀌고, 문명이 들어오고,

신기한 것들이 나타난다.

김훈장은 그 변화의 속내를 알고 있기에

기뻐하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 손으로 만든 봄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고 내어준 결과이기에 그렇다.


이 장면의 봄은

겉으로는 밝지만 속으로는 서늘하다.



한쪽에서는 소년의 몸에서 봄이 피어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라의 계절이 바뀌는 듯 보이지만

그 변화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간다.


토지는 같은 ‘봄’을

한 사람의 성장과

한 시대의 불안 위에 겹쳐 놓는다.


이 소설에서 봄은

단순히 따뜻한 계절이 아니다.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지만

그 의미를 아직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시간처럼 불안하다.


나는 알고 있지만,

소설 속 그들은 아직 모르는 사실.

조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이 거대한 시대의 몰락 속에서

그들은 어떤 삶을 끝까지 살아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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