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말이지, 애기씨 자라시는 기이 여삼추만 같습니다. 애기씨만 자라서 살림채를 잡으시면 소인은 죽어도 눈을 감겠십니다.”
수동이는 눈물을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그러지 않는다 하더라도, 연하고 아직은 미숙한 머릿속에 거듭거듭 못을 박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숙하고 영민하며 기승하고 오만한 서희가 그동안 어려운 일들을 겪어내면서 굳힌 것은 경계심과 주어진 모든 것을 지켜나가리라는 결심뿐이었다. 앞으로 자신의 신상에 변화가 있으리라는 예측도 과민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터이어서 마음의 무장은 밤낮으로 불경처럼 외워대는 세 사람의 기대 이상으로 강인한 것이었다.
‘어디 두고 보아라. 내 나이 어리다고, 내 처지가 적막강산이라고, 지금은 나를 얕잡아보지만 어디 두고 보아라.’
그런 양심은 이미 아이가 가지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역시 조준구다. 아침이면 봉순이를 거느리고 서희는 윤씨부인 상청에 나가 상식을 올리고 곡을 하는데 조준구는 그 곡소리가 질색이었다. 온갖 저주와 최씨가문을 마지막까지 지키어나갈 것을 맹세하는 것 같은, 저주와 다짐을 하기 위해 해가 지고 다음 날이 새어 상청에 나가기를 기다린 듯, 처절한 울음이었다.
<박경리 토지. 4편 12장 소동>
4편 12장에서는
“애기씨 자라시는 기이 여삼추만 같습니다.”
수동이의 말에는 시간이 들어 있다.
오래 버티는 쪽의 시간이다.
애기씨만 자라 살림채를 잡으면
자신은 죽어도 눈을 감겠다고 한다.
보호는 의무에 가깝고,
의무는 결국 소망처럼 말해진다.
누군가의 성장이
곧 생존의 출구가 되는 집안에서,
어른은 아이에게 미래를 맡긴다.
서희는 울지 않는다.
혹은 울더라도
그 울음은 아이의 것이 아니다.
“조숙하고 영민하며 기승하고 오만한”
이라는 묘사는 경계에 가깝다.
겪어내며 굳힌 것은 경계심이고,
주어진 모든 것을 지켜내겠다는 결심이다.
‘어디 두고 보아라.’
서희의 속말은 다짐이지만,
동시에 이미 상처의 언어다.
나이와 처지가 약점으로 읽히는 세계에서,
아이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말한다.
이 양심은
“이미 아이가 가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순진함이 아닌
생존감각으로 만들어진 윤리다.
그래서 조준구는
서희의 곡소리를 “질색”한다.
그 울음이
저주와 맹세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다음 날이 새어
상청에 나가기를 기다린 듯한 울음.
시간은 여기서 애도를 돕지 않는다.
시간을 통과할수록 마음이 굳어질 뿐이다.
『토지』는 아이가 자라는 일을
성장담으로 쓰지 않는다.
이 집에서 성장은
더 단단한 경계가 되어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