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에는 엉은머리가 부스스한 김서방댁이 지껄이고 있는 모양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풋질을 마친 한지를 맞잡아 들고 뒷마루에 기대어 세워놓은 문짝 앞에 가더니 문을 바른다. 그러기를 몇 차례, 다 발라버린 문짝을 번쩍 치켜든 김서방댁이 별당 출입문 근처 담장에다 문짝을 옮겨놓은 뒤 사발에 떠서 들고 나온 물을 입에 머금더니 문짝에다 푸우! 하고 뿜는다. 이때 문짝을 들어내어 반듯하게 네모로 드러난 문틀 공간에서 서희 모습이 나타났다. 병수 눈빛이 환해진다. 두 주먹을 꼭 진다. 연분홍 치마, 유록빛 바탕에 자줏빛 무를 끼운 회장저고리를 입었다.
서희는 문기둥에 한 손을 짚고 병수 쪽을 향해 서 있다. 서희 모습 뒤켠에 백동장식이 반짝이는 장롱의 일부분이 보인다.
<박경리 토지. 4편 3장 농발 없는 장롱>
토지를 펼칠 때마다
작가의 표현력에 입이 벌어진다.
동작 하나로 공간이 열리고
인물이 나타나는 방식이 참으로 선명하다.
눈이 붙는 순서를 정확히 설계되어 있다.
한지를 바르고
물을 입에 머금고
“푸우” 하고 뿜는 순간
네모난 문틀이 반듯하게 드러나고
그 네모 안에서 “서희 모습”이 나타나
거의 무대 장치처럼 작동한다.
눈이 자동으로 따라간다.
서희의 묘사도 길지 않다.
흰하게 트인 이마,
가름한 얼굴,
까뭇까뭇한 눈.
필요한 윤곽만 놓고 멈춘다.
남는 여백이
오히려 얼굴을 또렷하게 만든다.
뒤켠에 “백동장식이 반짝이는 장롱”
이 보이는 것도 비슷하다.
인물 뒤에 붙은 사물 하나로,
그 집의 온도와 생활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제는 상상하기 보다는
그 장면을 직접 보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마음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보이게 만든다.
그렇게 보인 다음에야,
우리가 느낄 몫이 남는다.
살아있는 등장인물,
쫀쫀한 사건과 이야기 전개,
눈 앞에 펼쳐지듯 말해주는 표현들.
토지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