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이 놈을 길렀으면 천수관음을 조상(造像)할 수 있었을 게야.”
“예, 그렇습니다, 스님.”
사실 혜관은 길상을 최참판댁에 보내기로 했을 때 우관스님의 처사를 대단히 마땅찮게 생각했던 것이다. 무슨 생각에서 천수관음을 조상하고자 하는지 내심은 알 수 없으나 혜관은 우관스님 이상으로 길상의 재주를 믿었고 그놈이라면, 하는 마음이 절실했던 것이다. 금어인 자신이 하려면 굳이 조상(造像)을 못할 것도 없겠으나 천수관음상인 만큼 심히 난감한 일이다. 우관스님도 그것을 알고 길상을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박경리 토지. 4편 11장 대면>
그들이 길상을 생각하는 마음은
“좋은 아이니까 아깝다” 정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재주를 쓸 자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조바심에 가깝다.
천수관음은 신앙만이 아니라
조상이라는 일이다.
기도만으로는 부족하고,
손이 들어간다.
그 손을 길상이 가졌다고 그들은 본다.
혜관의 말이 그걸 드러낸다.
“금어인 자신이 하려면
굳이 못할 것도 없겠으나
천수관음상인 만큼 심히 난감한 일이다.”
여기서 길상은
그 난감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손으로 읽힌다.
우관은 바로 이어서 말한다.
“앞으로 이 나라 백성들
살기가 매우 어려워질 게야.”
천수관음을 세우고 싶은 마음은
이 예감에서 나온다.
다가올 시대에 사람들이 매달릴 자리를,
미리 형태로 남겨두려는 마음.
그들이 길상을 생각하는 건
재주에 대한 아까움이면서도,
감상적인 아까움이라기보다
구원의 형식을 만들기 위한
실무적 갈망에 가깝다.
그 밑바닥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
길상은 그들에게
불안한 시대에 무엇인가를
세울 수 있는 손이기 때문에
생각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길상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말이 줄어든다.
그는 뭔가를 크게 주장하지 않는데도,
계속 일을 해내는 쪽에 서 있다.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손을 놓지 않는 사람이라서 마음이 간다.
누군가를 살리는 건
그런 손이라는 걸 기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