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친구:
음식이 너무 늦게 나오잖아.
직원 불러서 독촉할까?
사랑주니:
그러지 말자.
알바생일텐데, 조금만 더 기다리자.
친구:
알바생이면 어때. 너무 기다리게 하잖아.
사랑주니:
알바생이 딱, 우리 아들 나이로 보이더라.
우리 아들이 저기 서 있다고 생각하니까,
뭐라고 말이 잘 안 나와.
얼마 전,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봤습니다.
단종은 열일곱에
유배지에서 죽었다고 하더군요.
아들보다도 어린 나이.
고등학생 딸과 비슷한 나이였지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눈물이 났어요.
‘저 나이에
저걸 혼자 겪는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그 생각이 붙어서,
영화 내내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중간중간 웃긴 장면이 나왔고
관객도 웃었어요.
그럴 때도 저는 다른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유쾌한 장면은 딸의 웃음처럼,
무너지는 장면은 아들의 울음처럼
겹쳐졌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숨을 고르는 일이 잦아졌고요.
옆에 앉은 딸이 티슈를 계속 건네주고,
손도 잡아주더군요.
"엄마는 그렇게 슬펐어?"
“오빠 같아서.
오빠 혼자 그 모든 걸 감당하는 것 같았어.
무서울 텐데,
그걸 혼자 버티는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아들은 지난겨울 군에서 전역했어요.
아이가 군에 있을 때는
길에서 보이는 군인들이
이상하게 전부 아기 같았습니다.
‘군인 아저씨’라고 부르기엔 어렸고,
‘군인 아기’라고 부르기엔 단단해 보였고요.
전부 아들 친구처럼 보였습니다.
요즘은 알바생이든 군인이든,
아들과 비슷한 또래를 보면
마음이 먼저 움직입니다.
내 아이도 어딘가에서 저런 얼굴로
하루를 버티고 있겠구나 싶어서요.
그래서인지,
내가 사람들에게 조금 더 조심하면
누군가도 우리 아들에게
조금 더 조심해 줄 것 같은 마음이 생깁니다.
예전엔 컴플레인이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어요.
그걸 당당하게 꺼내던 사람이었는데요.
지금은 “말을 해야 하는 순간”에도,
먼저 톤을 고르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독촉 대신 질문을 합니다.
“죄송한데,
저희 음식은 얼마나 더 걸릴까요?”
확인은 해야 하니까요.
늦는 건 늦는 거고요.
다만
그 말을 꺼낼 때는 한 번 더 생각합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도
오늘 여기서 자기 몫을 하고 있다는걸요.
내 권리만 세우기보다,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도 보려고 합니다.
누군가 우리 아들에게도
그렇게 물어봐 줬으면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