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방만 내려놓고 소파에 주저앉던 때가 있었다. TV를 켜긴 했지만, 본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손에는 리모컨이 들려 있었고, 나는 뭘 보는지도 모른 채 채널만 까딱까딱 넘겼다. 씻어야 하는데 휴대폰만 한참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다 밤 11시쯤 되면 갑자기 정신이 들어 “아, 정리하고 자야겠다.” 하며 더 피곤해진 몸을 겨우 일으켰다.
예전에는 그런 시간이 휴식인 줄 알았다. 하루를 버텼으니 멍하게 앉아 있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피곤해서 그런 거고, 힘들어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거라고 넘겼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정말 쉬었다면 그 뒤에 몸과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져야 하는데, 내 밤은 자주 더 늘어지고 더 무거워졌다.
그제야 알았다. 어떤 멍 때림은 쉼이 아니라 미뤄짐에 가깝다는 것을.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바로 움직이지 못하고, 씻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미루고, 정리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손을 못 대는 상태. 겉으로는 가만히 있지만 마음속에는 미완의 일들이 계속 쌓이고 있었다. 몸은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하나도 쉬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
저녁의 순서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제는 TV를 켜지 않는다. 리모컨을 손에 잡지 않고, 소파로 바로 향하지도 않는다. 집에 들어오면 우선 집안을 정리하고 씻는다. 그다음 자리에 앉아 글을 하나 더 쓰거나, 아이와 대화를 나누거나, 아이와 나란히 책상에 앉아 각자 할 일을 한다. 그러다 9시가 되면 하던 일도 내려놓고 침대로 들어가 책을 펼친다. 이것이 지금의 내 저녁 루틴이다.
대단한 변화는 아니다. 하지만 하루의 체감은 완전히 달라졌다. 할 일을 남겨둔 채 버티는 밤과, 할 일을 마무리한 뒤 맞이하는 저녁은 같은 시간이 아니었다. 전자는 나를 더 무겁게 만들었고, 후자는 비로소 쉬게 했다. 쉬는 시간의 길이보다, 쉬기 전에 무엇을 끝내두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삶을 바꾸려면 큰 결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 돌아보면 사람을 바꾸는 건 거창한 다짐보다 작은 순서였다. 집에 오자마자 어디에 앉는지, 무엇부터 하는지, 언제 멈추는지. 그 반복이 쌓여 하루의 결을 만들고, 삶의 분위기까지 바꾼다.
밤은 하루의 끝이지만, 다음 날의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멍한 저녁을 무조건 쉼이라고 부르지 않으려고 한다. 그 시간이 정말 나를 회복시키는지, 아니면 지친 채 미루고 있는 상태인지 한 번 더 들여다본다.
회복은 아무것도 안 하는 데서 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오히려 내 삶을 조금 정돈해두는 데서, 내일의 나를 위해 작은 순서를 바꾸는 데서 시작되었다. 지금의 나는 그걸 저녁마다 다시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