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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추억(?)

태영건설 워크아웃 신청으로 본 나의 외환위기 경험기

 저의 첫 브런치 포스팅의 주제가 IMF의 추억이 될지는 몰랐습니다.

 그 시절 아픈 기억을 추억이라 하는 게 맞지 않다는 걸 압니다.

 영화제목 패러디라 생각해 주시고 그 시절 제가 겪었던 일이 또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혹시 투자에 관심 있는 젊은 분들은 참고하시라고 썰 풀어봅니다. 어느덧 20여 년이 훌쩍 지난 일이라 구체적인 숫자는 좀 헛갈릴 수 있으니 이해해 주세요.


 최근 도급순위 16위 건설사인 태영건설의 워크아웃 신청 소식이 매일같이 주요 뉴스로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건설회사를 다니던 시절 직접 겪었던 IMF 구제금융(앞으로 IMF라 하겠습니다) 당시 상황이 많이 오버랩되어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다듬어서 올립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포스터와 "한국에 경제 위기는 없다"라던 당시 신문 기사


 나도 잘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처음 경험하다


 1997년 11월 저는 대림산업(현 DL이앤씨) 건축설계부에 근무하던 입사 3년차 사원 시절이었습니다.

 한보철강 부도 이후 어어 하다 IMF 구제금융이 결정됩니다. 이후 벌어진 일들이야 다들 아시다시피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가정이 해체되기까지 했지요.

 정부 발표 당시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는데 회사에서 직원들 대상으로 이제 우리도 어려우니 일단 연말 보너스(당시엔 3개월에 한 번씩 보너스가 나왔었지요) 대신 회사 주식으로 주겠다 하면서 아 심각한 거구나 했습니다. 

이때 보너스 대신 받은 주식으로 얼떨결에 첫 주식투자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당시 제가 겪은 짧지만 롤러코스터 같던 주식투자 경험은 현재 저의 투자에 큰 영향을 줬는데 나중에 한번 기회가 되면 정리해 보겠습니다.


 제가 있던 대림산업 건축설계부는 산하 팀이 4개인가 5개 있는 큰 조직이었는데 98년 1월 1일 자로 부서가 해체되게 됩니다. 직원들은 개별면담을 통해서 현장을 나갈 것인지 퇴사하고 자회사인 설계사무소(아키피아)로 갈 것인지 결정을 하라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직이 쉽지 않고 큰 문제없으면 최소 20년은 한 직장에 꾸준히 다닐 거라고 믿던 시절이었는데 입사 3년차에 나도 잘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처음 경험해 봤습니다.

 설계업무를 계속 하고 싶었지만 설계사무소로 가면 퇴사를 해야 했고, 당시 설계사무소는 페이가 폭락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현장을 나가겠다고 했고 12월 31일에 사무실 모든 짐을 다 싸놓고 퇴근 후 1월 2일 자로 도곡아크로타운(현 도곡아크로빌) PM(Project Manager)팀에 설계 담당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IMF 외환위기 10년을 돌아보다'라는 부산일보 기사에 실렸던 사진

 

 당시만 해도 참 20세기스럽게도 여성들은 우선 정리해고 대상이 되었고 다음이 미혼직원들이 정리해고의 칼바람을 맞았습니다. 다른 부서에선 사내커플이면 아내가 퇴직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정 인원을 줄여야 하다 보니 결혼을 했어도 아이가 없으면 또 대상이었습니다. 저는 97년 5월에 결혼해서 당시 뱃속에 아이가 있어서 턱걸이로 살아남았나 봅니다.

 제 파란만장했던 1998년의 시작이었습니다.


 현장 파견과 발령대기를 오가는 중 아이가 태어나다


 첫 현장생활이었지만 PM팀 특성상 사무실 근무 위주였고 어찌어찌 적응하고 있다 하던 6월에 다시 회사가 어려우니 본사 부서와 현장마다 1명씩 또 줄여야 한다는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뱃속에 아이가 있어 턱걸이로 살아남았던 저는 본사로 들어가 대기하게 됩니다.(대림산업에선 당시 '건축기술부부' 발령이라는 용어를 썼죠)

 다행히 며칠 안 돼서 보령화력발전소 현장 준공도면 작성을 위해 파견을 가라 해서 3달 정도 파견을 가게 됐습니다. 본사에서 눈치 보느니 파견이 나았지만 파견 특성상 현장수당도 없었고 무엇보다 아이가 8월에 태어날 예정이라 주말이면 열심히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곤 하는 뜨내기 생활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예정일은 2주나 넘겨 8월 말 아이가 태어났고 얼마 안돼 현장이 준공되어 또다시 본사에서 대기에 들어갔습니다.


 저같이 발령대기 상태인 사람들 여럿이 회의실에 모여 있는 분위기는 정말 기묘했습니다.

 회의실이니 컴퓨터도 없고 그냥 회의책상만 있습니다.

 일단 서로 아무 말이 없고 눈 마주치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마냥 노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야 하니 건축서적이나 기술서적 같은 걸 뒤적이는데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요. 

 하루는 아주 간단한 자료 정리 후 복사 업무가 저에게 떨어졌는데 회의실을 나가는 제 뒤통수에 꽂히는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죠

 문제는 일을 빨리 마치면 다시 한없이 회의실 대기를 해야 하고 늦게 마치면 더 이상 일을 줄 것 같지 않은 이상한 밸런스 게임이었다는 겁니다.


 쌍용그룹 화의(워크아웃)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보다


 쌀쌀해지면서 다행히도 현장 발령을 받습니다

 이번엔 쌍용그룹 산하였던 남광토건이 주간사로 있는 서울과학관 현장(지금의 서울특별시교육청 과학전시관) 신축현장에 설계담당으로 정식 발령이 났습니다. 모두 남광토건 직원(한 명은 쌍용건설 소속 관리직원이었습니다)에 비주간사 직원은 제가 유일했지만 남광토건 직원들도 잘 대해주고 현장도 낙성대에 있어서 당시 집이던 수서에서 출근도 쉬워 이제야 좀 안정적인 생활을 하나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출근해 보니 현장이 멈춰 있네요.

 발주처인 서울시 교육청이 공사비 지급을 못해서 터파기 후 버림 콘크리트만 타설된 채로 멈춰있던 겁니다.

 그래도 관공사인데 설마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도면을 파악하고 있었죠.


당시 쌍용그룹 과장급 이상은 쌍용자동차의 무쏘를 한 대씩 반의무적으로 구매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쌍용그룹 자체가 위험해서 직원들은 기본급 외에는 현장수당, 상여금 등 아무것도 받지 못해서 사실상 급여가 반토막 나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현장 직원 말로는 무쏘가 출시되면서 그룹사 과장 이상에게 한 대씩 떠맡기다시피 판매했다고 했습니다. 급여가 반토막 났지만 무쏘 할부금은 갚아야 해서 참 힘들어했습니다.

 그래도 남광토건 직원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직원회의를 소집하더니 쌍용건설에서 온 나온 직원이 쌍용그룹이 ‘화의’를 신청했다고 하더군요. 

 오늘 태영건설이 신청한 워크아웃의 전신이었던 제도입니다.

 직원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인데 그날부터 채권단의 화의 수용여부가 결정될 때까지 쌍용그룹 내 모든 자금이 동결돼서 반토막이나마 받던 급여도 못 받게 됐다는 겁니다.

 상여가 좀 깎였을 뿐 급여와 현장수당도 나오던 저는 또 한 번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부담스럽게 지내야 했습니다.

 대학생 때 스카우트 활동을 하면서 설악산 잼버리장에서 만났던 당시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였던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은 카리스마 넘치는 멋진 중년 사업가의 이미지였습니다. 그래서 한때나마 쌍용에 입사하고 싶다 한 적도 있고 실제로 쌍용건설에도 합격했지만 대림산업을 선택했었는데 이런 상황을 현장에서 지켜보는 심정은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발령대기 중 일산 사법연수원 현장으로 가다


 결국 11월이었던가 현장을 닫게 되고 저는 다시 본사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대기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설계부에서 팀장으로 계셨던 선배가 있던 일산 사법연수원현장에서 12월에 출근하라 해서 다시 집이던 수서에서 일산을 지하철 3호선으로 오가는 현장생활이 시작됐습니다.

 문제는 정식발령이 아닌 발령대기 상태로 근무를 해야 해서 사법연수원에서 3달을 근무했지만 경력증명서에는 대기발령으로 나왔다는 점입니다. 정식 발령이 안 나니 이사도 못 가고, 당시 차가 없던 저는 3호선만 1시간 20분을 타고 출퇴근을 했습니다. 건설현장은 겨울이어도 7시 30분에 시작하기 때문에 첫차를 놓치는 지각이 하게 되죠.

 게다가 당시 현장소장과 직원들의 관계가 최악이었던 현장이라 더더욱 씁쓸한 기간이었습니다.


일산 호수공원 앞에 있는 사법연수원 전경. 신축현장 초기 3개월간 근무했지만 경력증명서에는 없는 곳입니다.


 파란만장했던 1998년이 지나가다


 3월 초가 돼서야 대구현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가족과 함께 이사도 가고 불안정했던 시절이 끝나게 됩니다. 

 태영건설의 워크아웃 신청 뉴스를 보며 나름 파란만장했던 1998년이 떠올랐습니다.

 1년간 발령과 대기를 수없이 오가며 어떤 상황이든 무조건 살아남자는 마음으로 보냈던 한 해였습니다.

 당시 같이 근무했던 남광토건 직원들은 어찌 됐을지 궁금합니다. 잘 살고 있어야 하는데…

 창원NC파크 현장에서 때론 협력하고 때론 싸웠던 태영건설 직원들도 무사히 잘 넘어가길 기원합니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제 경험으로 볼 때 처음엔 그냥 개별사건인 것만 같았던 일들이 눈덩이가 비탈길을 구르듯이 순식간에 거대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듭니다.

 한보철강이 부도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한국사회를 바꿔놓는 대사건이 될 줄 몰랐습니다.

 2000년대 초 카드대란,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때도 구조조정을 겪었지만 어찌어찌 살아남았습니다. 그때야 한창 팔팔한 30대였지만 이제 또 그런 일들이 닥치면 살아남기 쉽지 않은 나이가 됐네요………




 p.s. 창원NC파크 신축현장에서 태영건설 설계팀장과 협의를 많이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일산 사법연수원 현장에서 대구현장으로 발령받으며 제 대신 설계담당으로 왔던 직원이 비주간사였던 태영건설 직원이었고 그분이 창원NC파크 현장 설계팀장이었습니다.

 참 이런 인연이… 부디 잘 헤쳐나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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