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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아 본 이야기

멋모르고 투자했던 코스닥 초창기 황제주 이야기와 코스닥 버블 경험기

 지난 첫 번째 글에서 IMF의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얼떨결에 회사 주식을 연말 보너스 대신 받았던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로부터 시작된 약 2년간의 드라마틱했던 주식투자 경험을 풀어볼까 합니다.

 최근 20.30세대들이 어차피 착실히 모아서는 부를 일굴 수 없으니 주식이나 코인으로 크게 벌려는 경우가 있는데 저도 그 나이 때 비슷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투자 경험이 궁금하다면 한번 읽어보시고 의견 부탁드립니다.




 골드뱅크를 아세요?


 1998년 언젠가였을 거예요. 

 우리나라에 막 인터넷이란 게 보편화되던 초기에 우연히 골드뱅크라는 사이트를 알게 됐어요.


그쪽도 홍박사님을 아세요? 골드뱅크도 아세요?


 홈페이지에 있는 광고 배너를 클릭하면 한 번에 50~100원 정도를 준다는 곳이었죠.

 기업으로부터 광고비를 받고 그중 일부를 홈페이지 회원에게 돌려주는 일종의 광고 포털 사이트였습니다.

 당시로선 네이버나 다음도 없었고 야후코리아나 라이코스 정도가 포털 사이트의 원조로 서비스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던 때입니다.

 마치 요즘 토스앱에 접속해서 10원씩 모으는 것처럼 소소하게 매일 접속해서 이리저리 클릭하면 포인트가 쌓이고 나중에 현금으로 찾을 수 있다고 했지요.


 첫 주식공모에 참여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지사항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회원들 대상으로 액면가 5,000원에 주식공모를 한다는 겁니다. 당시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코스닥에 상장할 거라면서요.

 지난 글에 썼듯이 1997년 말 IMF로 인해 연말 보너스 대신 회사(대림산업, 현 DL이앤씨) 주식을 받아서 당시 대림그룹 계열사였던 서울증권에 주식계좌가 있었습니다.(이후 서울증권은 매각되어 현재는 유진투자증권이 됐습니다.)

 그때 통장에 100만원 정도가 있었던 것 같아요. 100주(50만원)만 청약신청을 하고 예수금을 넣었죠.

여기까지는 큰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다시 한번 공지가 뜨는 겁니다. 이번엔 1차 청약했던 사람들 대상으로 일정비율의 추가공모를 한다고 하네요. 이번엔 공모가가 액면가보다 조금 더 높았고 지금 기억으론 28만원 정도 더 청약이 가능했던 것 같네요.

 50만원은 별 고민이 없었는데 28만원을 추가로 투자하는 건 고민이 됐어요. 홈페이지에서 신청 버튼을 누를까 말까 누를까 말까 하다가 결국 눌렀습니다.


 코스닥 상장과 함께 황제주 투자자가 되다


 대충 120주 정도가 들어오고 얼마 뒤(검색해 보니 98년 10월이었네요) 드디어 코스닥에 상장이 됐습니다.

 당시 일산 사법연수원 현장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주식거래를 해온 선배들이 골드뱅크를 샀다고 하니 어디 그런 잡주를 샀냐는 표정으로 비웃으시더군요. 사실 반박을 못했어요. 

 역시 검색해 보니 상장 당시 주가가 800원이었다네요. 이후 1/10 액면분할이 있었으니 아마 시초가가 8,000원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슬슬 오르기 시작하더니 상한가를 치더군요. 당시 코스닥은 상하한가가 12%였습니다. 

 그로부터 7일 연속인가 상한가를 달리니 그제야 선배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시간이 한참 지나 기억이 나지 않아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니 1999년에 16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다는군요.


1999년 3월 26일 매일경제 지면 광고.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나요? 인터넷 대표기업이라니


 순서가 정확하지 않은데 중간에 유상증자가 한번 있어서 주식 일부를 팔아 그 돈으로 증자에 참여했고, 앞서 이야기한 대로 액면분할을 통해 5,000원이 500원이 되면서 보유주식수가 10배로 늘어났습니다. 

 지금이라면 이런 과정들이 다 주가하락 요인이지만 당시 코스닥 광풍은 유상증자든 액면분할이든 금세 원래 가격으로 치고 올라가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계산해 보니 최초 78만원의 투자금이 5,000만원 정도 되어 있더라고요. 자료를 뒤져보니 최고 37,000원까지 올라갔더군요. 당시 이른바'황제주'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게 바로 골드뱅크였습니다.

 아내는 이제 그만 팔자고 했지만 저는 앞으로 한참 더 치고 올라간다는 주식 게시판의 분위기 보고 절대 팔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당시 주식 게시판은 몇 년 전 비트코인 보고 '가즈아!!!' 하던 딱 그 분위기였죠.

 스스로 '나는 주식천재였어. IMF 이후 불안한 회사원 생활을 꼭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던 상태였죠.


물론! 난 주식 천재니까


내려간다. 꽉 잡아~~~~


 너무나 당연하게도 저는 주식천재가 아니었습니다.

 상한가 행진이 끝나자마자 바로 하한가 퍼레이드가 펼쳐졌어요. 이러다 다시 올라가겠지 하는데 어느덧 10일 넘게 하한가 행진이 하는 겁니다. 하한가에 매도주문을 해도 팔리지가 않는 상황이었죠.

 진짜 올라갈 때 하늘을 뚫을 것 같더니 내려갈 때는 진짜 지하를 뚫더군요. 롤러코스터보다 자이로드롭 같았죠.

 지금도 아내는 가끔 자기 말 듣고 팔았어야지 하는 핀잔을 주곤 합니다 ㅠㅠ


 어쨌든 이후 골드뱅크는 서울대-미국 MBA 출신의 젊은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고 새로운 도약을 하려 했으나 창업자 김진호 대표와 새 전문경영인 사이에 경영권 분쟁을 하게 됩니다.

 주주총회에서 김진호 대표 측 직원들이 현장까지 찾아와 위임장에 도장을 받아가기도 했죠.


이런 주식 사보셨어요?




 여기서 잠깐. 혹시 종이로 된 주식을 본 적 있으세요?

지금은 전자증권 제도로 인해 실물주권이 사라졌지만 당시엔 공모주의 경우 여의도 증권예탁원에 주식이 맡겨있었죠. 여의도 서울증권 빌딩에 있던 본사에 일이 있을 때 증권예탁원에 들러 실물 주식을 받아 누가 훔쳐갈세라 폼에 꼭 안고 증권사 창구에 가서 예치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보니 이젠 사라진 풍경 중 하나가 소매치기네요. 카페에 스마트폰, 노트북, 가방을 놔두고 자리를 비워도 안 훔쳐가는 대한민국이라지만 당시엔 소매치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걸어서 하늘까지' 같은 드라마가 인기일 정도로 소매치기가 흔했죠.


색깔은 각각 다르지만 요렇게 생겼습니다.




 골드뱅크의 몰락과 짧은 주식거래기


 이런 경영 분쟁이 있는데 회사가 잘 될 리가 없죠.

 창업자는 쫓겨나고 새 경영자가 경영권을 장악했지만 금감원으로부터 주가조작 수사를 받는 등 망가져 갔습니다. 한참 지나서야 당시 벤처기업들에 미국 MBA 출신의 전문경영인들이 들어와서 기술개발은 하지 않고 머니게임만 하다가 테헤란로 벤처밸리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벤처기업이 스타트업으로 불리는 요즘은 어떨까요?


https://imnews.imbc.com/replay/1999/nwdesk/article/1787513_30729.html


 저도 어느 때인가 남은 주식을 모두 처분하고 500만원인가를 남겼던 것 같습니다.

 5천만원에서 1/10로 쪼그라들었지만 여전히 나는 주식천재니까 라는 생각이 남아있었고 때마침 불어닥친 벤처붐으로 우후죽순 생겼던 IT업체들 위주로 사고팔고를 반복했습니다.

 사실 그게 코스닥 버블 붕괴의 시작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죠. 그렇게 남은 예수금은 50만원 정도 남기고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사라져 갔습니다.


 골드뱅크는 사명을 '코리아텐더'로 바꾸고 e-커머스로 업종을 바꿨습니다. 온라인 쇼핑몰인데 회원들 간에 경매거래를 할 수 있게 한다나 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후 나산 플라망스 프로농구단을 인수해서 광주에서 여수로 연고지를 이전한 뒤 몇 차례 변화를 겪고 결국 KTF(현재의 KT 소닉붐 농구단)에 매각합니다.

 그와 함께 저의 관심도 식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2009년에야 상장폐지가 됐더군요. 의외로 오래갔어요.




 소 뒷걸음질로 쥐 한번 잡아본 교훈


 글이 또 길어졌는데요.

 우리 속담에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다'가 있죠. 제가 딱 그랬습니다.

 제주도 현장 근무 때 승마장 구경 갔다가 쥐가 달려오니 말이 놀라 뛰다가 그 쥐를 밟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소나 말이었는데 재능과 실력으로 주식을 보는 눈이 있다고 믿었던 거죠. 

 크게 보면 재산상으로 손해는 안 봤지만 주식거래 기간 중 삶이 피폐해졌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고 대구현장은 군 공사현장이라 인터넷 접속도 안 됐어요.

 주식이 올랐을까 내렸을까, 아 저걸 사야 하는데 지금 살 수가 없네 하면서 매 순간순간 불안, 초조했습니다.

 다른 직원들도 저보다 심한 경우가 있어서 삐삐 같은 단말기로 1분 단위로 계속 주가를 확인하고 결국 모아놓은 저축과 어머니가 장가보내려고 모아놓은 돈까지 다 주식에 넣어 사라진 경우도 봤습니다.


 그 이후 개별 종목 거래라고는 2000년대 초 우리 사주 조합 통해서 받고 묵혀뒀다 본전 좀 넘게 판 게 다입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엔 펀드 열풍에 저축보다 펀드투자를 했지만 거의 수익을 못 냈죠.

 결국 최근 10년 정도는 비교적 안정적인 채권형 개인연금 펀드나 ELS, DLS 같은 파생상품 거래만 하고 있고 파생상품들은 대부분 만기 전 조기상환을 달성하는 등 손해를 본 적은 없습니다.

 최근에 홍콩 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ELS가 대규모 손실을 볼 거라는 뉴스가 크게 보도됐었죠. 과거 저도 홍콩 H지수가 기초자산으로 구성된 ELS를 거래한 적이 있었고 저는 무난히 수익을 냈어요. 다행히 증권사 직원을 잘 만나 중국경제가 어려우니 홍콩 H지수는 추천하지 않는다고 한 덕이죠.

 ELS 같은 상품들은 보통 3년 만기에 6개월마다 조기상환 시점에 지수나, 가격이 특정조건에만 들어가면 되니 평상시는 거의 잊고 살아도 됩니다. 안정적인 지수나 종목만 고르면 시중금리 이상의 수익을 안정적으로 불려 갈 수 있는 상품이죠. 물론 이번 홍콩 H지수 같이 반토막이 난다면야...


 학교에서 경제교육을 안 한다고 하지만 교육을 받는다고 모두 수익을 낼 수는 없을 겁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공업 대신 상업을 배웠고 대학 때 교양으로 일부 경제 관련 과목을 수강하긴 했어도 실전은 전혀 달랐죠.

 20,30대 때는 더더욱 패기만만하고 한 번의 성공이 앞으로의 성공 공식이라고 생각하기 쉬웠던 것 같아요.

 저는 우연히 롤러코스터 같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빨리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투자를 위해 좀 더 거시적으로 경제를 보는 눈도 생긴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금융, 경제지식도 쌓이면서 유연하게 대처하게 됐고요.


 이제 투자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면 성공을 과신하지도 말고 실패에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때론 과감하게, 때론 신중하게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 보면 자신만의 원칙이 생길 거예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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