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빌 워: 분열의 시대> 감상 후기
작년 말(2024년)부터 벼르고 벼르던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 를 봤습니다. 원제는 그냥 Civil War(내전)입니다.
하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후 개봉해서 정말 시의적절(?)한 영화기도 해서 꼭 보고 싶었습니다. 미국도 트럼프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라는 평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해가 바뀌고 나니 3대 극장체인에서 한 개관만 그것도 저녁시간대 딱 한편 걸려있는 정도로 스크린이 줄었습니다. 어렵게 예매한 만큼 집중해서 봤는데 여운이 길게 남는 정말 좋은 영화였습니다.
(큰 줄거리와 몇몇 장면에 한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는 내전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 3선의 미국 대통령이 TV 대국민 담화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 3선이 금지되어 있지만 영화 속 대통령은 3선입니다. 서부연합군이 정부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고 있고 워싱턴 D.C를 향해 진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영화는 내전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3선이 원인 중 하나 같습니다.
뉴욕에 있는 4명의 기자가 바로 이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해 워싱턴 D.C로 떠나는 여정이 이 영화의 큰 줄기입니다. 전쟁의 원인과 전황은 기자들의 대화와 여정 중에 만난 사람들, 저항군(?) 등을 통해 추측만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국민들을 상대로 폭격을 감행했고 FBI를 해체했다고 나옵니다.
내전의 진영은 정부군이 있고 가장 강력한 반란군인 캘리포니아와 텍사스가 연합한 서부연합군, 그 외에 플로리다, 서부 모택동주의자들, 중부연합 등으로 나눠진 듯합니다. 일부 작은 도시는 자경단을 꾸리고 중립을 지키고 있기도 합니다.
베테랑 사진기자 리(커스틴 던스트), 역시 베테랑 취재기자 조엘(와그너 모라), 몸이 불편한 고령의 종군기자 새미(스티븐 매킨리 헨더슨), 그리고 종군 사진기자가 되고 싶은 아주 젊은 여성 제시(케일리 스페이니)가 같은 차를 타고 내전 때문에 끊긴 길을 돌아 먼 길을 떠나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기자들은 내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군인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그러던 도중 뒤늦게 합류한 아시아계 기자들과 함께 정체가 불분명한 군인에게 죽을 위기에 놓입니다. 그 군인들은 수많은 시신을 덤프트럭으로 실어와 매장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일행 중 가장 친화력이 좋은 조엘이 나서서 우리 모두 미국인이라고 이러지 말자고 하자 그 군인은 묻습니다. "어느 쪽 미국인?"
전쟁터에서도 기자는 죽이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지만 영화 속 내전상황에서 그런 것도 기대하기 힘듭니다. 모두 같은 나라의 시민이라고 믿고 살아왔지만 사회가 분열되자 그 믿음이 환상이었을 수 있다는 상징적 장면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하게 셔터를 누르는 리는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이 찍은 전쟁의 참상이 떠올라 괴로워합니다. 리는 그래서인지 어린 제시가 종군 사진기자가 되려는 것과 워싱턴 D.C 동행을 반대합니다. 처음 주유소를 지키는 자경단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찍지도 못하고 멘붕에 빠지는 어린 제시를 퉁명스럽지만 제대로 교육합니다. 츤데레의 전형입니다.
더 베테랑 기자인 새미는 제시에게 리의 젊은 시절이 보인다고 말하며 리를 달랩니다. 비록 고령에 몸이 불편하지만 여정에서 일행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합니다. 급박한 판단을 해야 할 때 경험을 살려 조언하고 후배 기자들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결단력도 보여줍니다.
취재기자인 조엘은 유들유들해서 다른 기자들과도 친하고 리더십도 있으면서 어린 제시를 잘 이끌어줍니다. 전투를 찍을 때는 병사들 뒤에서 사진을 찍는 제시의 방탄조끼를 뒤에서 손으로 잡고 밀고 당기며 좋은 앵글과 안전을 계속 챙겨줍니다.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사진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는 사진기자와 달리 대통령과 인터뷰를 하려는 조엘은 마지막 결말에서 드디어 아주 짧지만 임팩트 있는 인터뷰에 성공합니다.
영화는 햇병아리 기자와 베테랑 기자가 시간이 흐르며 점점 달라지며 교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시는 처음엔 두려움에 제대로 사진을 찍지도 못하고 사선을 넘나들면서 정신적으로 너무 충격을 받지만 그런 경험 속에 서서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카메라를 들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반면 리는 냉철하고 좋은 판단력으로 제시의 멘토가 되어주지만 마지막 시가전 때는 공포에 사로잡혀 제대로 촬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 리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촬영을 이어가다가 결국 마지막에 카메라 셔터보다 제시를 지키는 선택을 합니다. 그런 제시를 셔터에 담는 제시.
처음엔 리와 조엘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면 결국 햇병아리 기자 제시의 성장기였습니다. 베테랑들도 처음엔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힘들었지만 결국 경험과 선배들의 도움으로 현재의 모습이 됐겠죠.
커스틴 던스트는 저에게 스파이더맨의 여자친구,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매력적인 여자로, 브링잇 온의 발랄한 고등학생 치어리더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영화에선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냉소적이면서도 의연하게 신참을 이끄는 중년의 사진기자 역할을 정말 잘 해냈습니다.
와그너 모라도 넷플릭스 나르코스의 에스코바르 역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붙임성 좋은 리더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다른 두 배우의 밀리지 않는 연기도 볼만합니다.
대통령과 인터뷰를 하러 가는 중간중간 기자들은 전투의 현장에 들어갑니다. 반란군들이 시가전을 벌일 때 바로 뒤를 따르며 전장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때마다 찍은 사진이 스크린을 가득 채웁니다. 베테랑인 리는 컬러 디지털카메라로, 신참 제시는 흑백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교차로 보여줍니다.
총알 자국이 선명한 건물을 배경으로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과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시체, 탱크와 헬기가 동원되는 시가전의 한복판이 두 사람이 사진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운 채 잠깐 정지합니다. 그 순간 영상보다 사진이 더 강한 호소력을 가진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특히 제시의 카메라는 단렌즈인지 아니면 줌이 얼마 안 되는지 전투의 참상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찍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멀리서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보다 더 생생한 느낌이었습니다. 흑백 특유의 거칠어 보이는 필름 질감이 전쟁의 참상을 담는데 더 생생하다고 느껴지면서도 피의 붉은색이 보이지 않아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제시는 후반부로 가면서 전설적인 사진기자인 로버트 카파의 말을 점점 따라갑니다.
반면 리는 2개의 카메라로 가까이서도 찍고 멀리서 당겨도 찍기에 더 다양한 앵글로 찍은 사진과 선명한 붉은 피가 낭자하여 내전의 참상이 현실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영화는 제시가 마지막으로 찍은 결정적 사진 한 장 위로 엔딩 크레딧이 흘러가며 끝납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by 로버트 카파
감독이 정치적인 논란을 피하려고 민주당이 우위인 캘리포니아와 공화당 텃밭인 텍사스가 서부 연합을 형성하는 설정을 만든 것이 아니냐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내전의 원인도 명확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미국이 정치적으로 갈라져 있기에 민감한 정치적 논쟁을 피하고 싶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정치적으로 나라가 갈라져 있기로는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더 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분명 이 영화의 무대는 미국이고 가상상황이지만 자꾸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보고 나와서 곱씹을수록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입하면 겹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미국에서도 트럼프와 반 트럼프로 점점 나뉘어 대립이 거세지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도 극우파의 부상 등 정치적 이념 대결로 그동안 믿고 있던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평화의 시대가 끝났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던 우리나라 역시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을 유린해서 내란 우두머리 죄목으로 결국 체포까지 됐지만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백악관에서 정부군이 승리하고 있다고 대국민담화를 하며 끝까지 버티고 있는 영화 속 미국 대통령이 누군가와 겹쳐 보였습니다. 특히 겉으로 당당한 척 언론을 통해 반란군을 비난하고 정부군이 이기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겁에 질려있던 미국 태동령의 마지막 모습은 정말 누군가와 너무 비슷했습니다.
이제 극장에서 보기는 쉽지 않지만 OTT에 올라온다면 꼭 다시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집중해서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아니, 집중하지 않고 보기가 힘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