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브스턴스> 감상후기
영화 서브스턴스(Substance)를 봤습니다.
한국 개봉 포스터의 문구마따나 '개 미친 영화'로 인정합니다.
감독은 젊음을 되찾아 전성기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보여주며 관객을 상상력의 극단까지 몰아붙입니다.
2024년의 미친 영화라고 생각하며 본 '가엾은 것들'의 엠마 스톤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을 거라고 예상하고 결국 맞췄습니다. 아무래도 2025년 아카데미상은 데미 무어가 받을 것 같네요. 엠마 스톤처럼 이미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고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실제 데미 무어는 한때 최고의 인기 배우였지만 이후 전신 성형수술까지 하며 젊어지려고 애쓰기만 하는 한물 간 배우 취급을 받고 가십성 기사에 오르내렸죠. 어떤 면에선 자신의 이야기를 연기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달걀노른자에 정체불명의 주사를 놓자 잠시 후 노른자가 분열하여 쌍란이 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다음 장면에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엘리자베스 스파크의 이름을 새긴 별판을 설치하는 장면을 바로 위에서 부감으로 보여줍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진도 찍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고(노숙자도 지나가고) 나중엔 들고 가던 음식을 쏟은 사람이 대충 문지르고 떠납니다. 주인공이 어떤 상황인지를 깔끔하게 보여주는 이 장면은 영화 마지막에 수미쌍관으로 다시 나옵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스파크는 한때 오스카상을 2개나 수상한 유명 배우로 50대인 지금은 TV 모닝쇼에서 에어로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일날 방송사 사장이 젊고 예쁜 여자를 찾으라고 지시하는 말을 우연히 엿듣습니다. 충격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갑니다.
의사는 다행히 몸에 별 이상이 없다며 퇴원해도 된다고 했는데 남자간호사가 자기 인생을 바꿨다며 'SUBSTANCE'라고 쓰여있는 USB를 줍니다.
다음날 확인한 USB에선 이상한 영상이 나옵니다. '서브스턴스'라는 것이 있는데 나를 둘로 나눠 7일씩 바꿔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몸이 둘이어도 나는 하나이고 균형을 유지하라면서 7일이란 기간을 지키는 것에 예외는 없다는 말도 합니다.
처음엔 안 믿었지만 자기가 잘리고 새로운 진행자를 찾는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나서 결국 연락을 합니다. 다음날 집으로 수자가 쓰여있는 카드키가 배송되고, 전화로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니 사물함에 박스가 하나 있습니다. 박스 안에는 활성화, 안정화라고 쓰여있는 주사기 세트, 스위치라고 쓰여있는 긴 주사용 튜브, 그리고 음식이라고 쓰여있는 일주일치 튜브가 들어있습니다.
욕실에서 활성화 주사를 한번 맞고 어지러워 쓰러졌는데 이윽고 등뼈 부위가 갈라지면서 누군가가 나옵니다! 몸속에서 나온 누군가가 거울을 보니 미모의 젊은 여성이 서있는 게 아닙니까. 하지만 이내 코피를 흘리며 어지러워지는데 안정화 키트 속의 주사기를 꺼내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몸의 척추에서 골수를 뽑아내 젊은 나에게 주사하자 코피가 멎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치 유동식을 쓰러져 있는 예전 나에게 주사로 연결하고 집을 나섭니다.
내 등 아파서 낳은(?) 젊은 나는 수(Sue)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피트니스 쇼에 지원합니다. 사장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아픈 어머니를 돌봐주기 위해 쉬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지만 합격합니다. 이제 일주일간 수라는 새로운 스타로 살아가고 다음 일주일은 수가 정신을 잃고 다시 예전 50대의 나로 돌아가는 생활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새로운 젊은 나가 일주일 후 예전 몸으로 돌아가는 것을 주저하기 시작하며 이야기는 급격하게 후반으로 치달아갑니다.
나이가 들어서 사회의 주역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몸도 예전 같지 않아 지면서 젊음을 그리워하고 부러워하게 됩니다. 특히 외모가 직업적 경쟁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배우라면 그 갈망은 더 크겠죠.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기에 젊음은 오직 추억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 주인공은 '서브스턴스'라는 열쇠를 손에 쥡니다. 서브스턴스로 열어젖힌 금단의 영역은 다시 50대의 퇴물 여배우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합니다. 누구에게도 공개하면 안 되는 이 비밀을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허용해야 할지 아니면 해서는 안될 추악한 욕망인지 고민하는 주인공을 보여줍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주사를 맞고 젊어지는 여성판 지킬과 하이드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각자 독립된 인격으로 교대로 살아갑니다. 주인공은 자아분열에서 한참 더 나아가 개체분열을 합니다.
젊어진 나는 스타가 되고 인기 있는 삶을 살아가지만 다시 돌아간 늙은 나는 일주일간 숨어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분열된 내가 정확히 7일간 교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 상태에서 한순간이라도 늦게 돌아가면 깨어난 늙은 내 신체에 문제가 생깁니다.
한때 최고였던 여배우는 긍지와 추억, 지금도 여전히 최고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거대한 사진액자를 집안에 걸어두고 삽니다. 하지만 분열된 젊은 나는 다시 늙은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본래의 나로 돌아가보니 나의 자리를 차지한 새파랗게 젊은 여자의 광고판이 보입니다. 질투 때문인지 일주일 내내 집안에서 먹어대기만 합니다.
다시 젊은 내가 깨어나 보니 집안은 일주일간 마구 먹어댄 음식물 쓰레기로 난장판입니다. 이제부터 젊은 나는 늙은 나를 혐오하고 집안에 비밀공간을 만들어 가둡니다. 그리고 젊은 나는 계속 일주일이라는 기한을 넘깁니다.
하지만 일주일을 넘기면 코피가 터지고 제대로 서있지도 못합니다. 응급처치로 늙은 나의 골수를 다시 빼서 자신에게 주사합니다. 문제는 늙은 내가 깨어나면 신체의 일부가 급노화를 한다는 겁니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자기애와 자기혐오의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깨어있을 때 서로를 너무나 혐오하다 50대보다 훨씬 늙어버린 나는 중단을 결심하지만 마지막 순간 주저합니다. 아무리 싸가지 없이 이기적이기만 젊은 여자가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늙은 나를 학대하더라도 모두의 사랑을 받는 젊은 나에 대한 욕망은 포기가 어렵습니다.
늙은 나는 젊은 나를 선망하면서도 질투하고, 젊은 나는 자기 관리도 하지 않고 추해 보이는 늙은 나를 혐오합니다. 하지만 그 둘은 결국 하나입니다. 이 미친 약물을 중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에서 주인공은 멈칫합니다. 질투와 선망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영화에서 눈여겨볼 부분 중 하나는 남성 캐릭터들입니다.
당장 방송사 사장은 영화 내내 혐오스럽게 표현됩니다. 젊고 예쁜 여자에 대놓고 환장하고 식당에서 새우조차 더럽게 까먹죠. 나중에 투자자들을 데려와 보여주는데 그 투자자들은 모두 늙은 남자들인데 눈빛엔 욕망이 가득합니다.
추해 보이는 건 늙은 남자들 뿐이 아닙니다. 마지막 새해맞이 쇼를 보러 모여있는 관객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오직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보려는 욕망으로 가득해 보입니다.
영화는 오직 여성의 젊고 아름다움만을 소비하려는 대중들에게 처절하면서도 역겨운 복수를 합니다. 그 마지막 장면들은 비위가 약한 분들은 계속 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의 복수로 마무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복수를 하려고 한 것도 아니기에 결국 그 스스로도 비극적인 끝맺음을 합니다. 그 끝조차 깨끗이 지워지는 마지막 장면은 허무하면서도 한편으론 차라리 그렇게 깨끗이 사라지게 되어 다행이라는 양가감정을 느끼면서 여운이 길게 남았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여성을 상품화하는 남성들을 공격하기 위한 페미니즘 영화가 아닙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여성에게 젊음과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추구하고 선망하는 대상이지만 한때의 추억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든 나도 결국 같은 사람이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등을 찢고 젊은 여자가 나오는 장면부터 영화 후반의 그로테스크함은 화려한 스타의 삶과 강렬히 대비됩니다. 클로즈업은 배우들의 눈빛과 표정을 부각합니다.
색상도 강렬한 색감으로 대비를 많이 줘서 시각적으로 화려합니다. 마지막 길게 이어지는 피칠갑 장면 역시 보기 쉽지는 않지만 선명한 핏빛 이미지가 강렬합니다.
자주 나오는 세트인 복도, 화장실, 샤워실 등의 좁은 공간을 광각카메라로 촬영해 넓게 보이게 해서 인물이 외롭게 보이게 하면서 또 집중하게 합니다.
액자, 창문 등의 화면 속 프레임들을 잘 활용해서 주인공의 상황 변화를 미묘하게 포착해서 보여줍니다.
여기에 강렬한 색상의 세트 디자인과 템포 빠른 컷 편집은 영화를 더 감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서브스턴스의 설명 영상이나 뭔가 일이 일어날 때 우웅 우웅 하는 음악과 음향은 관객을 긴장하게 하면서 극장에서 볼 맛이 나게 합니다.
서두에서 데미 무어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탈 거라고 감히 예언했습니다. 그 정도로 데미 무어는 온몸을 던져서 연기를 했습니다.
우선 젊은 나로 전환하기 위해 전라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관리를 잘했지만 젊은 나에 비해 확연히 늙은 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하지만 섹시함이 아닌 처절하고 동정이 가는 장면들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자면 길에서 우연히 만난 동창의 데이트 신청에 나가려 할 때입니다. 처음엔 최대한 잘 차려입고 화장을 하고 나가려다 문 손잡이에 비쳐 일그러져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다시 욕실로 돌아옵니다. 가슴이 패인 옷을 가리고 화장을 고치고 하다가 어떻게 해도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에 좌절해 얼굴을 마구 문질러 화장이 번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정말 연기일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연기였습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 강렬한 '개 미친' 영화가 맞습니다. 특히나 데미 무어의 미친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티켓값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꼭 한번 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