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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얼굴은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연상호 감독의 새 영화 <얼굴> 감상기

지금까지와는 다르면서 같은 연상호의 영화


연상호 감독의 신작 영화 <얼굴>을 봤습니다. 종교나 초자연적 현상을 소재로 많이 사용하던 연상호 감독이 이번엔 어릴 적 죽은 어머니의 얼굴에 대한 '기억'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연상호 감독의 작품들은 종교, 권력, 돈, 좀비 등을 통해 인간성의 밑바닥을 까발리고 그 가운데 권력과 기성질서에 반항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비시켜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많이 다르면서도 연상호 감독 특유의 주제의식이 살아있습니다. 종교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루지 않지만 인간성의 추악함을 더 잔인하게 보여줍니다. 이전 작품에선 인물들이 선과 악으로 어느 정도 구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선 이 경계가 모호합니다. 주인공(박정민)의 어머니를 제외하면 모두가 악하거나 평범한 듯하면서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인물들입니다.


연상호 감독이 비판받는 점 중 하나는 과도한 신파였습니다. 영화 후반에 이래도 안 울래? 하고 강요하는 듯한 씬이 꼭 들어가 있었죠. 하지만 이 영화에선 신파가 없습니다. 오히려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다 보고 나면 나 역시 영화 속 속물들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202508141633573738_0.jpg 왜 사람들은 영희를 못생겼다고만 기억할까요?


모두가 '못생겼다'고만 기억하는 얼굴


영화는 시각장애인 전각장인 임영규(권해효)를 다큐멘터리 PD 김수진(한지현)이 인터뷰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선천적으로 시각장애인지만 도장을 아름답게 파서 유명해진 그는 아들 동환(박정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 도중 경찰에서 어릴 적 집을 나갔다던 어머니 정영희의 유골을 찾았다는 연락이 옵니다. 땅에 묻혀있었고 40여 년 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사인도 불분명한데 살인의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물론 공소시효가 지나 별다른 수사는 하지 않았습니다.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가운데 처음 본 사람들이 문상을 왔습니다. 자기들이 이모, 외삼촌, 사촌이라고 합니다. 동환은 이모들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어릴 적 집을 나간 이후 소식이 끊겨서 기억하는 것이라곤 얼굴이 너무 못 생겼다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집을 나간 이유도 아버지가 바람났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크게 혼나고 패물을 가지고 나갔다고 합니다. 어딘가 이상한 가족들의 이야기였는데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바로 아버지의 유산을 나눌 생각이 없다는 통보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너무나 무례하고 속물스러운 이 가족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던 사람은 문상객으로 왔던 김 PD였습니다. 그녀는 다큐멘터리의 방향을 틀기로 합니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추적하는 것이 훨씬 자극적이고 시청률이 나올 것 같다는 판단에서죠. 김 PD가 전화하는 것을 우연히 엿들었던 동환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 역시 어머니에 대한 궁금함이 있었기에 김 PD의 설득에 70년대 어머니가 일했던 피복공장 노동자들과의 인터뷰에 같이 가게 됩니다.

이들 역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얼굴이 못생겼다, 똥걸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정도만 이야기하며 히죽댔습니다. 장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못생겼다고만 하면서 생김새에 대해 제대로 묘사도 못합니다. 착해서 원한 살 일은 없었다는 정도만 이야기할 뿐 존재감도 없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작은 단서를 찾는데 영희가 시다로 일했던 재봉사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라 합니다. 이 재봉사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방향을 전환합니다. 그녀는 영희의 죽음에 자기 책임도 있다며 미안해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우리는 모두 속물이다


lEdFCcYoFx16ZZLa9KNJ8GnIKfw.jpg 연상호 감독은 자작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했습니다.


영화는 O번째 인터뷰라는 식으로 챕터를 나눠서 진행됩니다. 중반까지는 김 PD가 인터뷰를 하면서 영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를 추적합니다.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 중반 이후엔 박정민이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것도 일종의 인터뷰라고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드러나는 불편한 진실은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이기적인 속물들이지만 확인할 뿐입니다.

김 PD는 겉으로는 동환이 궁금해하는 어머니의 행적을 알면 좋지 않냐면서 가방에 숨긴. 카메라로 몰래 촬영을 합니다. 김 PD는 이 사실을 동환이 모르는 줄 알지만 동환은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합니다. 동환은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너무나 힘들어하고 때론 그들을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친절로 가장하고 인터뷰를 하는 김 PD 역시 경멸스럽긴 매한가지입니다. 심지어 존경하던 아버지의 진실을 알았을 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표정이 되죠. 하지만 마지막엔 충격적인 반전이 있습니다.

결국 영화 속 등장인물 모두가 속물이고 이기적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당신은 다른가?라고 묻는 듯합니다.


죄책감은 기억을 왜곡할 수 있는 걸까?


영화의 마지막 반전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입니다.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왜인지는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하던 모든 것이 뒤집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덧 나도 등장인물처럼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영희를 모두가 못생겼다고만 하면서 정작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합니다. 영희에 대해 못생겼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습니다. 영희가 보조하던 재봉사입니다. 심지어 시각장애인인 아버지조차 예쁜 줄 알았던 아내가 사실은 못생겼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재봉사만 못생겼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재봉사만 영희의 죽음에 자기 책임도 있다며 울먹이며 충격적인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왜 재봉사를 제외하고 모두가 오직 못생겼다는 기억만 이야기할까요? 그들은 공통적으로 착한 영희가 공장에서 구박받는 것을 그저 방관하고 놀리기만 했던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불의를 외면했지만 유일하게 불의에 저항했던 영희가 핍박받을 때 외면했던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그들의 죄책감이 기억을 왜곡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 그들이 죄책감을 더 키울 수 있으니 무의식적으로 구체적인 기억을 삭제하고 못생겼다는 이미지만 남겨놓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이던 70년대 말 '똘이장군'이라는 만화영화에서 김일성이 뒤통수에 커다란 혹이 달린 멧돼지로 묘사하는 등 '추함 = 악'이라는 고정관념이 지배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방통을 못생겨서 싫어하고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고 주유를 묘사하면서 꼭 잘생겼다는 표현을 넣었듯이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지 모릅니다.


감상 포인트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박정민은 임영규의 아들인 동환과 젊은 시절의 영규 1인 2역을 합니다. 시각장애인으로 차별받으면서도 아름다운 도장을 깎으며 강인하게 살아가는 모습과 권해효의 말투까지 흉내 내서 연기합니다. 그런데 왜 연상호 감독은 굳이 박정민에게 1인 2역을 시켰을까요?

김 PD는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부자가 정말 닮았다고 합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전혀 다른 듯했던 아버지와 아들이 결국 너무나 닮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감독이 노린 점이 이런 점 아닐까요? 이런 지점을 박정민은 정말 잘 연기합니다.


그리고 주목할 배우는 영희 역의 신현빈입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공장에서도 무시받으며 시각장애인 남편과 결혼해 아들을 낳아 겨우 행복해졌나 했지만 불의에 저항하다 죽임을 당한 뒤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진 여성을 탁월하게 연기했습니다. 그런데 신현빈의 얼굴을 영화 내내 볼 수가 없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거나 뒷모습만 보이거나 어두운 곳에서 연기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단 한번 사진이 공개되는데 사진 속 인물도 신현빈이 아니기에 진짜 얼굴 없는 배우입니다.

인지도가 있는 배우가 영화 내내 얼굴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고 출연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결정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신현빈은 뒷모습만으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로 영희를 탁월하게 연기합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축 처진 어깨와 어눌한 말투로 모두에게 무시받지만, 착하고 불의에 유일하게 맞서는 인물을 연기한 신현빈 배우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권해효도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주역이지만 내면은 신체의 장애보다 훨씬 더 자격지심과 이기심으로 비뚤어진 인물이었음을 막판에 드러냅니다.

조연들 역시 보고 있기 불편할 정도로 속물적이고 무례하면서 이기적인 연기를 참 잘했습니다.


그리고 70년대 열악한 공장의 환경을 잘 묘사한 연상호 감독과 미술감독도 칭찬하고 싶습니다. 머리로 알고 있던 70년대 열악한 노동자의 현실과 추악한 자본가를 자연스럽게 알게 합니다.

저런 환경이라면 모두가 그저 살아가기 바빠서 불의에 침묵하고 착한 영희와 시작장애인 영규를 놀리며 무시하는데 동참하며 살아갈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47248_207388_430.jpg 영희는 연기 중에 한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지막 사진 한장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나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나 자신도 사실은 속물이고 이기적이면서 가식적으로 살아가고 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평상시 사회 정의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행동은 소극적이었던 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월급도 잘 주고 항상 잘해주는 듯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돈과 권력으로 악행을 저지르던 사장까지는 아니어도 그 사장 덕에 먹고살면서 피해 입은 동료에게 도움은커녕 못생겼다는 기억만 남기고 자신의 죄책감마저 잊으려 한 이모들과 공장 노동자들과 내가 얼마나 다를까 생각하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들만큼 큰 악행을 가까이 보지 않았던 것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일지 모릅니다.


몰입도 잘되고 감정이입도 잘 되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결코 보기 쉽지 않은 영화지만 한번 보시고 각자 생각을 한번 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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