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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영화인 척하는 SF 영화인데...

영화 <대홍수> 감상 후기

지난 주말 <아바타 3: 불과 재>를 보고 싶었지만 시간도 어정쩡해서 다음을 기약하며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대홍수>를 기대하며 봤습니다. 다 본 느낌은 한마디로 아까운 두 시간을 보상받고 싶은 영화였습니다.

저는 브런치에도 몇 번 밝혔지만 SF 팬입니다. 소설, 영화, 애니메이션 모두 좋아하고 남들이 혹평하는 영화도. 그럭저럭 재미를 찾아보는 사람입니다. (대표적인 작품 '승리호')

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 끝까지 보기 너무 힘든 영화였습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재난영화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최소한의 스토리만 정리해 보겠습니다. 스포일러일 수 있지만 읽고 보셔도 이해가 쉽지 않으실 겁니다.


잠들어 있는 인공지능 연구원 구안나(김다미)를 아들 신자인(권은성)이 수영하자며 깨웁니다. 그런데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고 어느덧 3층인 집에까지 물이 들어차고 있습니다. 빨리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와서 짐을 싸는데 회사의 인력보안팀 손희조(박해수)라며 전화가 와서 구조하러 왔으니까 아들을 데리고 빨리 옥상으로 올라오랍니다. 손희조에 따르면 소행성이 남극대륙에 충돌해서 대홍수가 일어나서 현생 인류는 오늘 종말을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막을 방법이 없어서 알리지 않고 인류를 재창조하기 위해 준비해 왔으니 이제 프로토콜대로 진행하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물은 계속 차오르고 사람들에 막혀서 계단을 올라가기는 힘든데 아들은 계속 칭얼대고 중간에 다른 사람들 따라 사라지기도 합니다. 아이가 갑자기 똥이 마렵다, 아프다 하면서 중간에 다른 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이 와중에 빈집털이를 만나기도 하는 등 옥상에 올라가기 너무 힘듭니다. 물에 빠져서 죽을 뻔도 두어 번 하지만 손희조의 도움으로 겨우 겨우 옥상에 올라갑니다. 여기까지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장면과 짜증스러운 장면이 많았지만 주인공이 고생하는 재난영화니까 하고 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는 갑자기 SF 타임루프물 비슷한 방향으로 전환됩니다.

구안나는 평범한 인공지능 개발자가 아니라 번식이 가능한 인조인간에게 인간의 감정을 가지게 하는 '이모션. 엔진'이라는 것을 개발하는 지구상 단 두 명 중 한 명이었습니다. 6살 아들로 설정된 신자인을 몇 년째 키우며 아들이 경험을 통해 이모션 엔진이 완성하는 것이 임무였고, 아들은 결국 데이터를 추출당하고 버려지는 존재였던 것이죠.

아들과 헤어지지 않으려 하던 구안나는 강제로 로켓에 태워져서 우주로 날아갑니다. 우주 정거장 같은 곳에서 이제 엄마의 모성애를 또 프로그램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이 상황에서 소행성이 날아와 다른 우주정거장이 파괴되고 그 파편이 구안나의 우주정거장으로 날아와 부상을 당합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스스로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대홍수 상황에서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과정을 통해 엄마의 이모션 엔진을 완성하겠다고 합니다. 대홍수 시작으로 돌아가 계속 잃어버린 아들을 찾다 실패하면 다시 되돌아가기를 무수히 반복하다가 결국 끝판을 깨고 완성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재난영화인 척해놓고 사실 영화는 SF 타임루프, 시뮬레이션물이었습니다. 이왕 타임루프물이었다면 대홍수 상황은 좀 더 짧게 만들고 시뮬레이션의 반복을 통해 과제를 해결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더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왜 굳이 중반까지 주인공만 고생시키고 다른 출연자들은 전부 담답하거나 의미 없이 만들어 놓고 갑자기 방향을 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이었습니다.


491848_634628_248.jpg 왼쪽부터 손희조 역의 박해수, 김병우 감독, 신자인 역의 권은성, 구안나 역의 김다미


테넷보다 더 이해가 어려웠던 영화


이 글을 쓰기 전 사실 영화의 스토리와 결말을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유튜브 영화평을 몇 개 봐야 했을 정도지만 여전히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본 SF 영화 중 가장 이해가 어려웠던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테텟>이었습니다. 그 영화는 계속 순행하는 시간대와 역행하는 시간대가 교차되기 때문에 너무 복잡했지만 그래도 설정 자체는 이해가 가능했습니다. 또 다른 타임 루프물인 <엣지 오브 투모로우>도 그리 어렵지 않게 주인공이 계속 과거를 반복하며 조금씩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집중했기에 어렵지 않았죠.

하지만 이 영화는 시뮬레이션의 반복 설정을 후반에 몰아넣었는데 설명도 불친절하고 이게 시뮬레이션인지 그냥 과거의 회상인지 파악이 어렵게 정신없이 보여줍니다. 하도 정신이 없는데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니 어느 순간 영화에 집중을 못하고 있더군요.

혹평을 받은 김병우 감독의 전작인 <전지적 독자 시점>을 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데뷔작 <더 테러 라이브>를 워낙 인상 깊게 봐서 기대를 했지만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촬영은 진작 끝났지만 공개 시기를 계속 미루다 이번에 공개했다고 하는데 후반작업과 편집을 위해서였겠죠? 그렇다면 이야기를 좀 더 다듬었어야 합니다. 이러다 이 영화가 김병우 감독의 마지막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AKR20251222110600005_02_i_P4.jpg 구안나는 아들을 찾는 최종 미션을 향해 계속 시뮬레이션을 합니다.


이해가 안 가는 설정들


SF 영화는 세계관의 설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무리 황당해 보이는 설정이라도 관객에게 스토리를 통해 세계관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이 영화의 문제는 세계관의 자체보다 이해를 방해하는 설정들이 너무 많았다는 점입니다.

아들 자인이는 영화 처음부터 엄마에게 계속 수영하자, 잠수하자고 합니다. 대홍수 상황이라는 시뮬레이션을 위해 설정되어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영화 내내 자인이는 잠수를 잘하는 설정이 없습니다. 잠수의 의미가 뭘까요? 물속에서 살아남는 건 사실 자인이가 아니라 안나입니다.


역시 잠수와 관련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과거 구안나와 남편, 아들이 탄 자동차가 물에 빠졌고 남편만 빠져나오지 못해 죽었습니다. 몇 번이나 이 장면이 나오는 걸 보면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것 같은데 막상 아들 자인이는 전혀 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지 계속 수영하자, 잠수하자 합니다. 그래놓고 정작 홍수가 나자 빨리 대피해야 하는데 엄마를 계속 힘들게만 합니다. 도대체 감독은 왜 이런 설정을 했을까요?


348071_353957_4844.jpg 영화 내내 충분히 걸을 수 있는 아들을 업고 다니는 김다미가 불쌍했습니다.


소행성 충돌로 현생 인류가 멸종할 것을 알고 미리 새 인류 창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하는데 그걸 굳이 홍수가 닥쳐서 주인공이 죽을 위기가 돼서야 실행에 옮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우주정거장도 먼저 올라가 있던데 미리 태워서 올라가면 안 됐을까요? 아들의 데이터 완성이 안 돼서? 그렇다기에는 재난 상황에서 아들이 무슨 특별한 경험을 해서 뭔가를 완성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모션 엔진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엄마와 아들이 서로 애착관계를 형성하면서 아들의 머릿속에 인간의 감정을 완성한 뒤 추출한다는 설정인데요. 그걸 꼭 그렇게 실제 살면서 만들어야 할까요? 정작 모성애는 NVIDIA CUDA 같은 가상현실 시뮬레이션으로 완성했으면서요.

또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나머지 한 명은 아들 데리고 도망갔기에) 개발자가 완성한 이모션 엔진으로 여러 인조인간(?)에 넣으면 모두 똑같은 감정을 가지게 될 텐데 그게 맞는 걸까요?


그리고 근본적으로 우주에 남은 몇 명 외에 나머지는 3D 프린터 같이 만든 인조인간에 감정까지 넣어서 지구로 다시 보내는 것이 무슨 숭고한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현생 인류들은 모두 죽으면서요. 우선순위는 그 사람들이라도 살 길을 찾는 것 아닌가요? 그 외에도 자잘한 설정 오류들이 많지만 넘어가겠습니다.


이 영화가 한국 SF 영화의 마지막이 아니길


저는 정말 잘 만든 SF 영화가 한구에서 만들어지길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극장이든 넷플릭스든 제작됐던 한국 SF 영화 중 마음에 드는 작품이 거의 없어서 무척 안타깝습니다. SF 영화로 분류해도 되나 싶은 영화까지 넓히면 <지구를 지켜라>가 거의 유일한 걸작일 겁니다. <지구를 지켜라>는 영화 내내 키치한 B급 영화로 보이게 하는 많은 요소들이 결국 마지막에 관객의 후두부를 강타하며 이것이 내가 보여주려는 세계관이야 하고 외치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대홍수>는 감독 스스로 갈팡질팡하며 쓰나미에 휩쓸려서 어디론가 가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실망스러운 영화로 인해 SF 영화 투자를 꺼리게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을 빌며 감상후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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