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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어머니

한 할머니가 손자 둘을 데리고 육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무단 횡단을 한다.


"할머니! 레드! 레드" 


다섯 살 형이 동생과 함께 할머니 손에 이끌려 가며 빨간불을 보고 소리 지른다. 이것은 장모님과 우리 아이들과의 이야기이다.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지금도 장모님으로부터 자주 듣는다. 아이들은 내가 유학 중 미국에서 태어났고 큰 아들 네 살 때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 동안 첫 째 아이는 영어, 한국어를 섞어서 의사표시를 했다.


장모님은 해남 윤씨 종갓집의 맏딸로 태어나셨다. 나는 결혼할 때까지 해남 윤씨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국사 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는 윤선도를 처갓집에서는 고산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해남 윤씨 종손인 장모님의 동생은 지금도 고산 할아버지의 고택인 녹우당에서 살고 계신다. 지금은 정부의 도움으로 녹우당 근처 유물관에서 유물을 보관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유물을 녹우당에서 가족들이 보관했다. 집안 곳곳에 둘둘 말아 보관 중이던 글이나 그림을 손님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고 간혹 유물을 몰래 가져가는 손님들도 있었다고 한다.


해남 어머님은 여고 시절 공부 잘하고 꿈 많은 학생이었지만 여자가 공부는 해서 뭐 하느냐는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을 포기하셨다. 그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여성들의 교육과 사회 참여를  강조했던 정치가였다. 장모님은 누구를 만나도 쉽게 친해지는 성격을 지니셨다. 91세이신 지금도 웬만한 정치인들의 이름을 다 아신다. 언젠가 내가 ‘어머님 정치하셨으면 잘 하셨겠어요!' 라고 했더니 '내가 뭘 안다고 그런 걸 한당가?' 라고 하시면서 웃으신다.


의사, 판사, 검사 등과의 결혼 중매가 많았지만 해남 어머님은 그중 두 번만 응하셨다고 한다. 첫 번째는 수련의(레지던트), 두 번째는 일본에서 유학을 마친 엔지니어였다. 어머님은 수련의가 마음에 드셨지만 그가 미국으로 갈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병석에 있는 동생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 그와의 결혼을 포기하셨다. 그 후 어머님은 엔지니어와 결혼하셨지만 수련의와의 짧은 만남은 지금도 사위인 나에게 매년 말씀하실 정도로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직도 그분에게서 받은 편지를 보관하고 계시며 그 내용을 술술 외우신다.


어머님은 평생 건강검진을 받아보지 않으셨다. 검진을 받으시라고 하면


"그런 걸 뭣 하러 받는당가? 내 몸은 내가 젤루 잘 아니께!!“


라고 하시며 웃으신다. 내가 운전을 할 때면 어머님은 옛날 노래를 자주 흥얼거리신다. ‘목포의 눈물’, ‘무너진 사랑 탑’, ‘노란 샤쓰의 사나이’ 등의 가사를 잊지 않고 계시는 것이 신기하다.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드신다. 어느새 허리가 조금 굽으셨지만 96세인 장인어른과 남의 도움 없이 큰 불편 없이 잘 지내신다.  


해남 어머니와 우리 아이들과의 추억은 아이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시작된다.


나의 두 아들은 내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태어났고 어머님은 아내의 산후조리를 위해 3개월 동안 미국에 와 계셨다. 아내가 큰 아들을 낳고 며칠 안 되던 때 밥을 먹다가 깍두기를 한 개 집어 들었다. 그 깍두기가 아내 입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공중에서 다른 젓가락이 그 깍두기를 정확하게 낚아챘다. 딱딱한 음식이 산모에 좋지 않다는 생각에 장모님이 그 깍두기를 공중납치 하신 것이다. 곁에서 그 광경을 본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님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몸을 날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분이셨다. 평소에 연습하셨을 리 없는 젓가락 신공에서 그것을 확인했다.


얼마 전 우리 부부가 며느리와 해남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어머니는 두 달 후 출산을 앞둔 며느리에게 보자기로 싼 보따리를 내놓으신다.


'어머니, 이게 뭔가요?'

'잉, 내가 애기 옷을 좀 사놓았네!' 흐뭇한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네? 애기 옷을요? 언제 이런 걸 사셨나요?‘ 내가 놀라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며느리가 함께 그 보따리를 풀어 보았다. 사 두신지 오래되었는지 누렇게 변색된 옷들도 있었다. 오시코시(Osh Kosh) 브랜드도 보였다. 30여 년 전 두 아들이 어렸을 때 미국에서 유행하던 브랜드다. 며느리가 친정으로 돌아간 뒤 아내가 말한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뭘?'

'이거 우리 애들이 입던 것들이야'

'에이... 설마!!'

'정말이야! 내가 애들 입히던 것들이고 아까 보면서 생각났어'


해남 어머님이 알뜰하신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 이신 줄은 몰랐다. 아내는 초등학교 시절에 장모님이 만들어 주신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친구들이 아내의 옷이 좀 이상해 보인다고 했지만 아내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고 한다. 


아내는 다음날 내가 퇴근하는 길에 표백제를 사 오라고 했다. 얼룩진 옷들을 표백제에 담근 후 세탁을 하니 새 옷이 되었다. 아이들 옷이 30년 동안 장속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다가 새로 태어났다. 어머님 장속에는 아직도 많은 것들이 있다고 하셨다.
 
 그 장속에는 어떤 추억들이 잠자고 있을까? 설마 우리 아이들의 장난감? 나는 아이들에게 30년 만에 쓱 내밀만한 추억 보따리가 있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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