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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을 수 없는 것들
- 영덕 삼척 출사

#POTD 27

새벽 6시, 창밖으로 들려오는 빗소리와 함께 아내가 일어나는 기척이 들렸다. "오늘 비가 많이 온다던데, 만남의 광장까지 데려다줄게!" 아내의 배려 깊은 목소리가 이른 아침을 따뜻하게 깨웠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는 순간, 가슴 한편에서 출사에 대한 설렘이 느껴졌다.


만남의 광장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식당에서 잠시 기다리던 중, 김** 회원이 김밥 11개가 든 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어제 상갓집에 갔다가 집에 늦게 들어갔는데, 다행히 아침에 김밥을 픽업해 올 수 있었네요." 이미 두 번이나 총무를 맡았던 그가 이번에도 자진해서 나섰다.


7시가 되어 미니버스에 탑승한 11명이 김밥을 나누어 먹었다. 이번 여행도 백** 기사와 함께한다. 현재 전문 운전사로 일하고 있는 그는 전직 골프 레슨프로였으며, 언제나 멋진 골프 아웃핏과 약간은 썰렁한 멘트로 우리를 즐겁게 해 준다. 7시 30분, 드디어 출발!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오늘 만날 바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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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쯤 영덕 강구항에 도착했다. 동해안의 푸른 바다가 보인다. 아특사(아주 특별한 사진교실)에 합류하기 전에는 바닷가에 오면 하늘, 바다, 바닷가의 사람들을 한 번에 사진에 담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제는 피사체에 더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본다. 아무것도 없는 바다, 바위에 부딪혀서 부서지는 파도, 바닷가 건물의 낡은 벽에서 볼 수 있는 세월의 흔적 등에 끌린다. 한 시간 동안 셔터를 누르며 서울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점심은 '라면집'에서 해결했다. 식당 이름이 ‘라면집’이라니! 라면 하나로 승부 하자는 의도였을까?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이름, 바다만 보이는 창밖 경치, 여러 해물을 잘 어우러지게 담아낸 맛 때문인지 이 식당은 영덕의 대표 맛집이 되었다. 내가 주문한 해물라면에는, 전복, 가리비, 홍합, 꽃게 등이 그릇 넘치도록 들어 있었다. 국물 한 모금에 깊고 진한 바다의 정수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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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일정은 영덕 해맞이 공원에서 시작되었다. 바닷가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파도를 장노출로 담아 보려고 노력했다. 바다 위로 솟아있는 바위들을 때리는 파도를 장노출로 담으면 바위는 산, 파도는 구름이나 안개처럼 보인다. 파도가 해변으로 몰려와 하얀 거품을 만들어 내는 것에도 마음이 끌렸다. 셔터 속도를 다양하게 조절해 가며 그 모습을 담아 보았다. 거품의 질감 거칠어졌다가 부드러워지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숙소인 삼척 쏠비치로 이동한 후 근처 횟집에서 만찬을 즐겼다. 아특사 회원들의 평균 나이는 50대 후반이다. 그럼에도 출사 여행에서 저녁 식사 후 바로 휴식과 취침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밤늦게까지 한 방에서 회원들이 모여 와인을 마셨다. 그 자리에서 가을에 있을 별 사진 전시를 준비하시는 선생님으로부터 별을 남다르게 촬영하는 비법을 배웠다. 몇몇 회원들은 신기한 듯 입을 반쯤 벌리고 무아지경에 빠졌다.


다음 날 새벽 5시 30분, 카메라를 들고 산책에 나섰다. 바닷가에 짙게 서린 해무가 살아있는 듯 움직인다! 밤새 내렸던 비가 그치고 해무가 찾아온 것이다. 해무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 어떻게 카메라에 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슴 깊이 느껴지는 감동을 따라 셔터를 눌렀다.


회원들과 같이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도 해무는 물러가지 않았다. 해변에서 촬영을 이어갔다. 해무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아특사 회원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해무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바위들,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찍은 사진들에서 작품이 나오길 기대했다.


체크아웃 후 해상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장호역으로 향했다. 일행 중 한 회원은 무서워서 케이블카를 타지 않겠다고 했지만, 회원들의 강권에 못 이겨 케이블카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예상외로 잘 적응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던 것이 함께라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삼척에도 여전히 해무가 남아 있어서 색다른 사진을 만들 수 있었다. 하차 후 전망대에 오른 회원들은 각자 해무에 감싸인 삼척을 담느라 분주했다. 우리를 지도하는 선생님으로부터 해무만 찍는 것보다 뭔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함께 있어야 사진이 살아난다는 팁을 받았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그 말을 듣기 전에는 내가 해무만 따라다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점심 식사 후 이번 출사의 마지막 촬영지인 묵호등대 벽화마을에 들렀다.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있는 장소이고 카메라 두 대를 목에 걸고 오랫동안 다녀서 그런지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래도 뭔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나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벤치에 앉아서 아내에게 안부 전화를 하며 잠시 사진에서 벗어났다.


상경하던 도중 횡성 휴게소에서 백** 기사가 웃으며 ‘횡성한우 먹고 갈까요?’라고 한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여겨졌지만 ‘그러죠 뭐!’라고 반응하는 회원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그렇게 우리는 한우 맛집인 둔내 ‘통나무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이틀간의 출사를 정리했다. 아특사 회원들은 사진보다 맛집에 더 진심인 듯하다.


출사 여행의 목적은 단순히 카메라에 사진을 담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가 아닌 내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도 매우 귀중하다. 만남의 광장까지 데려다준 아내의 따뜻한 배려, 신비로운 해무, 헌신적인 총무, 와인을 마시며 들었던 별 촬영 노하우, 한 회원의 케이블카 도전, 그리고 함께 나누었던 맛있는 음식들까지. 이 모든 것들은 내 기억 속에 사진보다 더 선명하고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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