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D 26
5월에는 사진 수업의 출사 여행에 개인 일정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다. 어딘가에 가서 혼자라도 사진을 찍고 싶던 중 문래동이 떠올랐다. 거리도 멀지 않고 내가 속해 있는 풍경반과 완전히 다른 '철공소'에 강한 끌림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철을 타고 문래역에서 내려 스마트폰 지도에 표시된 문래창작촌이란 곳을 찾아가 보았다. 철공소들은 보였지만 예술촌이라고 느껴질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문래창작촌이라고 표시된 지역을 두 바퀴쯤 돌고 나니 철공소들 사이에 간간이 예술인들의 공간임을 짐작케 하는 작은 간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문래예술극장, 상생프로젝트, stainschool, 주말극장, 술술극장, 기타치는아지트! 이런 공간들이 들어서면서 문래동이 활기를 되찾았지만, 월세가 올라서 지금은 철공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결국 서울시는 문래동 철공 단지를 수도권 그린벨트로 이전하는 것을 추진 중이다. 도심 인근의 낙후 지역에 외부인들이 들어와서 활성화되고 임대료 상승 등으로 원주민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문래동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문래동에는 1,279개의 철공소가 있다. 1980~90년대에는 2,500여 곳이 넘는 철공소가 있었으나 임대료 상승, 산업구조 변화 등으로 현재는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빈 공간이 늘어났고 저렴한 작업 공간을 찾던 예술가들이 문래동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 문래동의 월세는 10만~30만 원 수준이었다고 한다. 2007년에는 ‘물레아트페스티벌’이 시작되기도 했다. 문래동은 사진가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철공소와 예술이라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공존하는 곳이라서 그런가 보다.
나는 예술공간보다는 사라져 가는 철공소들에 마음이 끌렸다. 철을 다루는 작업들은 분명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40여 년의 세월을 품고 있는 옛 정취의 철공소들은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문득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라져 가는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이 떠올랐다. 천천히 철공소 골목을 걷다 보니 용접하는 모습, 작은 기중기로 철판 더미를 옮기는 모습 등이 기름 냄새를 배경으로 보인다. 기계기름 냄새를 맡으면 어릴 적 뛰놀던 중림동 동네 골목의 작은 공장이 생각난다. 그 공장 덕분에 지금도 기계기름 냄새는 나의 어릴 적 향수를 자극한다.
골목을 걸으며 카메라를 들 때마다 일하는 분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신경이 쓰였다. 카메라를 마구 들이대는 사람들 때문인지 ‘작업자들의 초상권을 보호해 주세요’라는 푯말도 보였다. 셔터를 조심스럽게 누를 때마다 쇳소리와 기계음이 배경음처럼 어우러진다. 오래된 간판과 녹슨 철문, 기름때가 낀 작업복까지 그 모두가 나에게는 경건한 대상으로 느껴진다. 한 철공소에서 일하는 사장님께 말을 걸자, 30년 넘게 이곳을 지켜왔다고 한다. 예전에는 직원들과 밤을 새워 일할 정도로 바빴는데, 요즘은 일거리가 없어서 혼자 일해도 시간이 남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50대 이상으로 보였다.
철공소들의 문이 굳게 닫힌 모습이 궁금해져서 며칠 후 일요일에 문래동을 다시 찾았다. 텅 빈 골목은 평일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볼 수 없었고 병풍식으로 닫힌 철문들에 스프레이로 그려진 그라피티(graffiti)가 인상적이었다. 고요함을 넘어 느껴지는 스산함 때문에 이전 방문처럼 천천히 돌아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철재를 용접해서 만든 솟대가 보였다. 철공소 거리를 잘 지켜달라는 염원을 담아서 정성스럽게 솟대를 만들었을 장인의 마음이 느껴졌다.
철공소 거리를 벗어나 길 건너 카페들이 모여 있는 곳을 걸었다. 카페들 안은 5월의 주말 오후를 즐기려는 젊은이들로 붐볐고 테이블 위에는 맥주도 제법 눈에 띄었다. 이런 활기찬 모습을 보면서 철공소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사진에 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사라져 가는 것들을 나만의 시선으로 보관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따뜻한 햇살을 목덜미에 느끼며 전철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