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TD 29
2년 전 둘째 아들과의 대화 중에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빠가 은퇴하는 2025년에 유럽 크루즈 여행을 예약하고 가이드가 되어주면 비용을 모두 부담해 줄 테니 관심 있니?” 자기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일을 하는 아들은 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이렇게 해서 지난 8월 말, 9박 10일간의 크루즈 여행(이태리, 프랑스, 스페인)이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탔던 배의 길이는 약 320m였다. 그런데 막상 배 위에서는 이런 길이를 실감하기 쉽지 않았다. 갑판 위에 서서 배를 앞뒤로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200m가 넘어 보이지 않았다. 바다 한 복판에서 배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없어서 그랬을까? 승객 정원은 약 2800명, 승무원 수는 1,200명 정도라고 한다. 미국회사가 운영하는 여객선이라 그런지 승객들 대부분이 미국 사람들이었고 동양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한국사람들은 우리 가족(아내, 둘째 아들, 나) 뿐이었던 것 같다.
이런 어마어마한 크루즈 여객선은 어느 나라가 만들까? 크루즈 여객선 시장의 90% 정도는 이태리, 프랑스, 독일이 차지한다. 조선 강국인 한국은 아직 크루즈선을 한 척도 만들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유럽이 이미 오래전에 시장을 선점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진동·소음제어, 추진·전력시스템, 생활 인프라, 엔터테인먼트 및 제어·자동화 시스템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하는 기술 난이도가 장벽으로 작용한다.
배의 중앙에는 수영장이 있다. 그 주변의 긴 의자 위에서 사람들은 누워 썬탠을 하거나 술과 음료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그런가 하면 배안의 gym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수영장 주변의자에 누워 있는 이들 중엔 비만인 사람들이 많았고 gym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은 노인들도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진 사람들이 더 한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더 했기 때문에 갖게 된 것’ 인지도 모른다.
크루즈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단연 ‘편리함’이다. 짐을 싸고 푸는 번거로움이 없고, 자는 동안 배가 다음 도시로 데려다준다. 아침이면 새로운 항구에 도착해 하루가 열린다. 원하는 사람들은 배에서 내려 관광을 하고 저녁식사 이전에 다시 배로 돌아온다. 그동안 승무원들은 객실청소, 식사 준비 등을 한다. 도시가 바뀌어도 방은 그대로이고, 식탁도 변하지 않으며 같은 웨이터를 만난다. 저녁에는 극장, 카지노 등이 운영되고 라운지에서는 3, 4명의 소형밴드가 음악과 노래를 들려주기도 한다. 우리 가족은 갑판 위에서 산책을 하면서 바다 위 석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편리함의 이면에는 여행의 참맛이 옅어진다는 아쉬움이 있다. 새로운 도시에서 그곳만의 음식을 맛보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에 좀 더 가깝게 스며들기가 어렵다. 거의 매일 새로운 곳을 방문하지만 저녁이 되기 전에 배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낮에도 바다에서 이동만 하는 sea day가 이틀 정도 있어서 그동안에는 배에서 지내야 한다. 그래서인지 승객들 중 젊은 세대는 적었고 50대 이상이 대부분이었다.
크루즈 여객선의 승무원 중 선장, 항해사 등은 유럽(주로 이태리) 사람들이었고 식당, 객실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등의 아시아인들이었다. 그중에서 단연 필리핀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도 영어를 할 수 있고 인건비를 적게 부담해도 되기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승무원들은 선박이 등록된 국가의 법에 따라 임금이 지불된다고 한다. 따라서 유럽, 미국 회사들은 임금 수준이 낮은 파나마, 바하마 등에 유람선을 등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탔던 배도 바하마 국기를 달고 있었음을 나중에 사진을 통해 확인했다.
우리 테이블을 담당했던 필리핀 웨이터는 여행이 끝난 후 승무원 평가에 관한 e-mail을 받으면 10점을 달라고 식사 때마다 여러 번 이야기했다.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의 말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10일째인 마지막 날에는 아침 6시 30분부터 3시간 동안 모든 승객들이 배에서 내려야 한다. 그러고 나면 승무원들은 그다음 승객들을 낮 12시 30분부터 맞기 위해 준비한다. 음식을 비롯한 여러 물품들을 새로 싣고 객실 청소를 한다. 그리고 열흘 정도의 또 다른 항해가 이어진다. 하루도 쉬지 못한 채!
내가 누렸던 편리함은 누군가의 수고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중 많은 이들은 동남아에서 온 젊은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지만, 그 미소 뒤에는 타국에서의 길고 고된 노동과 그리움이 숨겨져 있었다. 하루 열두 시간 넘게 일하고, 일주일에 7일 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밤새 항해하던 거대한 배가 멈추지 않듯, 누군가의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편리함 속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수고가 있다. 그리고 그 수고를 알아보는 마음, 그것이 여행이 내게 남긴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