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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주고 살 만한 신호위반 딱지

어린이보호구역

“선생님께서는 방금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불법 좌회전을 하셨습니다.”


퇴근길에 아파트 앞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고 순서를 기다리던 중 화살표가 사라지고 초록불로 바뀌었다. 무심코 좌회전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차를 서서히 움직였다. 그 때 어디선가 경찰차가 나타나 내 앞을 막았다. 경찰관이 나에게 다가와 거수경례를 한다. 2초 전만 해도 28년 10개월 간 무사고 운전을 해오던 나에게 신호위반 딱지가 날아오려는 순간이다.


어린이 보호구역 신호위반이며 벌점 30점, 벌금 12만원 이란다. 일반구역 2배의 벌점과 벌금이다. 벌점이 40점 이상이면 점수 만큼의 기간 동안 면허 정지가 된다. 썬글라스를 벗고 창밖으로 경찰관을 올려봤다. 그는 예의바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핏기 없는 경직된 얼굴은 나를 봐 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차 있었다.


순간 95년경 한남동에서 처했던 비슷한 상황이 떠올랐다. 나는 자연스럽게 지갑을 꺼내어 총재산이었던 만원짜리 하나와 천원짜리 몇 장을 건넸다. 경찰관은 오랜 친구처럼 웃었다.


"지갑에 있는 돈을 다 줘도 되나요? 앞으로 조심하세요!“


그땐 그랬다.


정신을 차리고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는 경찰관을 올려 보았다. 선처를 구해 볼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동안 읽었던 협상, 설득에 관한 책들의 내용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얼떨결에 서명을 하고 딱지를 받았다.


며칠 후 방배경찰서를 찾았다. 서래초등학교 부근 어린이 보호구역을 정확히 알고 싶다고 하고 담당부서를 안내 받았다. 8층 교통안전계 직원은 경계의 눈빛으로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 방배동 주민이라고 했다. 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지도를 보여주면서 어린이 보호구역이 시작되고 마쳐지는 곳에 표시가 있다고 했다. 내가 좌회전 하려던 위치는 어린이 보호구역인지 지도를 보고도 알기 어려웠다. 


경찰서를 나오면서 20년전 쯤 교통위반 벌금을 내려고 경찰서를 찾았던 일이 기억났다. 두 명의 경찰관이 문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그들은 짧은 머리에 점퍼차림인 나를 보고 급하게 담배를 끄고 ‘충성’ 이라고 외치면서 경례를 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파트 앞 도로를 천천히 살폈다. 경찰서에서 들었던 어린이 보호구역 시작점과 끝점의 표시를 찾을 수 없었다. 예전의 나라면 "옳지 잘 걸렸어!” 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지금은 담담하다. 세월이 지나 내가 남의 잘못을 지적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여러번 경험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 유학시절 교통위반 티켓을 받은 것이 억울하여 법정(court)을 찾았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벽에 큰 글씨로 적혀 있었다.


“지금 들고 있는 티켓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지금까지 받았어야 할 수 많은 티켓을 생각하시오"


인터넷에서 벌점에 관해 조회하던 중 교통안전공단에서 4시간 교육을 받으면 20점을 경감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갈까 말까를 열 번쯤 망서리다 양재동 교육장을 찾았다. 교통위반 벌점이 40점이면 40일 면허정지 이다.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신호위반으로 받은 벌점이 30점이고 경감교육을 받으면 20점을 감해 준다니 갈 이유가 충분했다. 시작시간 보다 30분이나 이른 9시 30분에 도착했는데 접수 창구에는 백화점 세일 첫 날처럼 사람들이 모여 있있다. 


바이러스 감염을 막기위해 써야하는 마스크가 벌점 고득점자들의 얼굴을 서로 알아 볼 수 없게 도와주었다. 강의실 의자는 거리두기를 위해 한 자리씩 건너 배치되었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강사는 1분의 오차 없이 4시간 수업을 시작하고 마쳤다. 농담이나 여담 한 마디 없었지만 지루하지 않은 강의였다. 그가 정말 사람인지 마스크를 벗겨서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강사가 질문을 한다.


"운전중 핸드폰을 사용하면 벌점이 얼만지 아시는 분?”


나와 아내가 운전 중 핸드폰을 사용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잠시 후 뒤에서 힘찬 목소리가 들린다.


“15점이요!!”


고개를 돌려보았다. 4시 방향, 3m 쯤 떨어진 곳에 생머리 여자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보였다. 그녀는 무릎과 허벅지가 훤히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다리를 꼰채 집중하고 있었다.


강사는 영상을 자주 보여주어 수강자들이 집중할 수 있게 하였다. 사고 영상들은 충격이었다. 공항에서 짐을 내리고 있는 사람을 시속 130km로 와서 들이받는 장면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민방위 훈련처럼 수강생들이 강사의 말에 집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내가 머쓱해졌다. 수강자들은 질문도 열심히 하고 쉬는 시간에는 칠판에 차선과 자동차를 그려가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새로 알게된 내용들도 여럿이다. 고의로 차량 앞에서 브레이크를 한 번만 밟더라도 보복운전으로 벌점 100점, 속도위반 시속 40km 초과는 벌점 30점, '착한 마일리지' 신청하고 1년간 무사고면 마이너스 10점 등이다.


4교시에 시청했던 20분짜리 동영상 두 편은 감동이었다. 한 영상에서는 베테랑 택시기사가 주인공이다. 신호위반과 편법으로 동료들 보다 많은 수입을 올리는 능력자다. 어느 날 자신의 앞길을 막은 초보 운전자에게 보복 운전을 하였다. 보복운전에 당황한 초보 운전자는 집중력이 떨어져 사고를 낸다. 베테랑 운전자는 못 본채 지나친다. 잠시 후 아내로 부터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발레리나가 꿈인 중학생 딸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누워있었다. 자신의 보복운전으로 딸이 사고를 당한 것이다.


교육을 받고 2주 후 일요일 오전, 수지 어머님댁 근처 초등학교 앞을 운전하며 지나고 있었다.


“여보, 어린이 보호구역이야!”, 몸에 좋지만 쓴소리가 들렸다.


“네~~~, 자~~알 알고 있습니다!”


속도계를 0.5초간 훔쳐 보았다. 바늘은 40을 지나 제한속도 30을 향해 천천히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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