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싫어한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인생의 매 순간 이런저런 음악들과 함께했었다. 그런데 막상 좋아하는 노래나 장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쉬이 대답하기가 어렵다. 좋아하는 감정은 매 순간 뚜렷하지만 그 방향성이 한결같이 중구난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편식 없는 취향에 감사하며 음악 듣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음악은 스트리밍으로 듣더라도 실물 CD를 종종 구매했다. 중고서점이나 서점에서 CD와 마주치며 구매하기도 하고, 정말 사야겠다 싶은 음반은 인터넷 중고 매장에서 구매하기도 했다. 좋아했던 감정을 담은 물리적 매개체로서 CD는 지금도 책장의 한 켠에 세 들어 공고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요즘은 CD를 태생적 의도에 맞게 활용해 보고자 열몇 장 남짓한 음반을 FLAC 파일로 변환하여 PC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각 음반에 이끌렸던 순간들을 짧게라도 남겨놓으면 좋겠다 싶어 아래에 기록을 남긴다.
오래된 애정
넬-Walk Through Me, Healing Process
초등학교 무렵부터 꾸준히 좋아하는 음반이다. 특유의 간절하고 여운이 남는 분위기가 이 무렵 음반에 잘 묻어난다. 물론 요즘에 나온 넬의 노래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두 앨범에 투자한 감정이 꽤나 무겁다.
소리를 쌓아 올리는 매력
브라운 아이즈-Two Things Needed For The Same Purpose And 5 Objets
'가지마 가지마', '이 순간 이대로'를 포함한 13곡이 수록된 브라운 아이즈의 3집 앨범으로, 앨범아트가 꽤나 매력적이다. 노래 실력이야 말해 뭐 하겠나 싶을 정도로 훌륭하고, 멤버들 사이의 화음과 악기 소리가 여러 층으로 쌓인 데에서 오는 매력이 있다. '가지마 가지마'나 '너 때문에'같은 애절한 노래도 좋고, 'Summer Passion'같은 다양한 소리가 어우러지는 노래는 지금 듣더라도 흥미롭다.
영화로부터 시작된 호감
Buena Vista Social Club
극장에서 동명의 영화를 보고 나서 흥미가 생겼던 음반이다. 쿠바의 음악가들은 탄탄한 기본기 위에 자유로운 분위기를 쌓아 올린다. 재즈에 거부감이 없다면 이 음반도 한 번쯤은 들어봐도 좋겠다. (이들의 후일담이 실린 다큐멘터리 영화도 잔잔하게 관람하기 좋다.)
비행기에서 들었던 한 곡
Eddie Higgins Trio-Christnas Songs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 좌석 모니터에서 음악을 고르다 우연히 Eddie Higgins Trio의 'What a difference a day made'를 들었었다. 편안하면서 자유분방한, 볕 좋은 날 이국의 카페에 앉아있는 듯한 감정이 드는 곡이었는데 이 무렵부터 재즈를 좋아하게 됐었다. 특정 장르의 재즈에 꽂혔다기보다는 분위기와 악기 소리들이 전반적으로 취향에 맞았고, 그 후로 재즈바도 종종 가고 다른 재즈 음반들도 중고 매장에서 종종 구매했었다. 재즈에 대한 마중물이 되어준 것이 Eddie Higgins Trio였다.
라이브 음원의 매력
Ella Fitzgerald-The complete Ella in Berlin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엘라 피츠제럴드의 'Mack the Knife' 라이브 음원을 들었었는데 꽤나 울림이 컸었다. 매 순간 새로운 음악이 탄생하는 매력이 있었고, 은은하게 깔린 관객들의 환호까지 노래와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것이 퍽 좋았다. 동시대에 태어나 무대를 직접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라이브 음반이라도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0대의 끝자락과 20대의 초입에서
버스커버스커-2집
울랄라세션과 버스커버스커가 나오던 슈퍼스타K를 정말 열심히 봤었다. 두 그룹 모두 좋아했지만, 보다 더 좋아했던 것은 버스커버스커였다. 봄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벚꽃엔딩' 외에도 '향수'나 '전활 거네' 등 여러 곡들이 오랫동안 노래방 애창곡이었다. 이 앨범도 중고 매장에서 구매했었는데, 1집도 기회가 되면 구매해 보아야겠다.
가장 최근 마주한 오랜 애창곡
김사랑-U Turn(3집)
김사랑의 '위로'는 오랜 애창곡이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언제 듣더라도 좋은 곡이고, 반복하여 등장하는 '날 위로해'라는 가사도 참 따뜻한 말이다. 이 앨범은 정말 문득, 내가 좋아했던 것을 손에 쥐고 싶다는 생각이 들며 구매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매우 만족한다. 이번 기회에 앨범의 다른 수록곡들도 들어보게 되었다.
마무리하며
좋아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큰 행복이다. CD는 물질적으로는 음악을 보관하기 위한 저장소이지만, 그 안에는 음악을 듣던 자신의 감정과 기억이 서려있기도 하다. 하나쯤은 좋아해 마지않는 것을 손에 쥐어봐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