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장 파먹기 02

추억과 감정을 손에 쥔 채

by 김주렁

마침내, 지금 이곳에서

인생사 모든 일들이 시의적절(時宜適切)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우리네 삶은 얄궂게도 감정과 물질, 소망과 수단을 한 합에 쉽사리 일궈내지 못한다. 하지만, 좋아했던 감정만큼은 마모될지언정 소멸하지 않고 질기게도 살아남는다. 중학생 무렵에 좋아했던 음반을 30대에 손에 쥐었을 때 그 감정은 다시금 착화되어 마음 한편을 데운다. 과거를, 추억을 구매하게 된다. 그렇게 CD장엔 차곡차곡 감정이 쌓여나간다.


추억을 추억하며

이루펀트(Eluphant) - Eluphant Bakery (1집)

어렸을 적 필자의 MP3 재생목록엔 주로 R&B나 Ballad가 똬리를 틀고 있었지만, 키비(Kebee)와 이루펀트(Eluphant), 에픽하이(Epik High)의 노래만큼은 언제나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약간은 음울하면서 감정을 비집고 들어오는 가사들이 좋았다. 키비와 마이노스(Minos)가 의기투합하여 만들어낸 이루펀트의 노래들은 은은하면서도 강하게 마음을 눌렀다. 그중에서도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졸업식'이라는 노래를 참 좋아했었고, 물론 지금도 좋아한다. 졸업식날 자신의 학창 시절을 톺으며 '이제 시작이자 마지막이야 너와 나만 남아 기억나지 않는 날도 오겠지 다만 잊지는 마'라고 말하는 학생의 회고는 과거에 대한 추억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을 한눈에 바라보며 필연적인 두려움을 보듬는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나약한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에 대한 직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징검다리이자 단초가 되어 현재와 미래를 밝혀준다. 이루펀트의 노래는 마음의 흔들림과 두려움을 연료 삼아 미래를 비추어주는 은은한 호롱불이다.


부드럽게 마음을 저미는 목소리

언니네 이발관 - 가장 보통의 존재 (5집)

한 번 들으면 쉽사리 지나치지 못하겠는 노래들이 있다. 언니네 이발관의 노래에서는 매번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다. 그중에서도 여운이 짙은 노래는 앨범의 첫 번째 수록곡인 '가장 보통의 존재'이다. 최상급 표현(가장)을 통해 자신이 가장 보통의, 약간 과장하자면 하잘것없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노래의 화자는 '이런 이런 큰일이다 너를 마음에 둔 게'라고 말하며 감정의 바닥으로 내리 꽂힌다. 서정적이면서도 내면을 파고드는 '이석원'의 목소리는 마음속에 깊게 박힌다. '너는 악마가 되어가고 있는가', '아름다운 것'을 포함한 다른 수록곡들도 한 번씩은 들어보기를 권한다.


이 아련함과 감정은 누구의 것이었던가

에피톤 프로젝트(Epitone Project) - 긴 여행의 시작 (3집)

피아노를 포함한 연주곡들은 꾸준히 좋아했었다. '꽃별-Dancing in Blossom', '이루마-River Flows In You', '이병우-에필로그', 'DJ 오카와리-Flower Dance',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등장하는 '쇼팽-흑건'이라던가 말이다. 위와 같은 필자의 선호 중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들이다. 처음 접했던 노래는 '봄날, 벚꽃 그리고 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따뜻한 소리에 담긴 헛헛한 분위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슬픔을 머릿속에 멋대로 그려놓는다. 이 특유의 중첩된 감정과 분위기는 일상적인 표현에서 약간은 벗어난 표현의 제목들과 어우러져 현실에서 이격 된 듯하면서도 멀어지지 못한 미묘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청자의 감정을 뒤섞는다. 그런 매력이 있다.

덧. 앨범의 수록곡 중 인상 깊었던 제목들을 아래에 남긴다.
- 좋았던 순간은 늘 잔인하다
-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 편린일지라도, 내 잃어버린 기억


생각을 멋들어지게 전하는 이들

에픽하이(Epik High) - Peaces, Part One (5집)

MP3로 음악을 듣던 무렵, 정말 많이 들었던 음반이다. 힙합을 그렇게까지 즐기는 편이 아니었음에도 에픽하이의 음악은 언제나 좋았다. 타인을 폄하하며 자신의 격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들이 좋기도 했고, 타블로의 치밀한 라임이 좋기도 했으며, 'Fan', 'Fly', 'Love Love Love'같이 음악 자체가 취향에 잘 맞아서 오래 들었던 곡들도 있다. MP3의 앨범아트로 수백 번, 수천 번은 보았을 5집 앨범의 실물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는 기분이 묘했다. 말 그대로 추억과 과거가 현현하여 손 위에 나타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앨범 수록곡 중에서는 'One'과 '연필깎이(Feat. Kebee)', 그리고 '우산(Feat. 윤하)'을 참 많이 들었었다. 연필깎이는 에픽하이와 키비를 둘 다 좋아하기에 특히 기억에 오래 남기도 했었다.



마무리하며

시류는 스트리밍과 유튜브로 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창작자의 의도에 따라 앨범 수록곡을 순서대로 들어보는 경험이 귀중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좋아했던,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이 있다면 한 번쯤은 손에 쥐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전하며 두 번째 CD장 파먹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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